장편소설 총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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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향도》
장 편 소 설
박 윤
( 제 26 회 )
제 4 장
6
짙은 안개 자욱한 최전연의 험준한 산발들을 끼고 넘으며 끝없이 이어지고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걷힐새 없다. 장마도 이제는 끝날 낌새를 보이는듯 싶더니 구름장들이 다시 꾸역꾸역 모여들어 축축한 습기에 시달린 대지에 불손하게 그늘을 던진다. 깊은 골짜기와 검은 산악들에서 피여오른 안개가 무겁게 낮추 흐르는 구름장까지 치달아 오르려고 모지름을 쓰다가는 제풀에 지쳤는지 방향을 바꾸어 훤히 트인 길녘으로 다가든다.
이따금 바람이 휙 지나갈 때마다 어느결에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를 비방울들이 간단없이 차창을 후려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좌석등받이에 몸을 기대신채 차창으로 서서히 다가드는 대지를 명상에 잠겨 바라보시였다.
짙은 안개속으로 길은 끝없이 펼쳐지고있었다. 야전승용차는 별로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있다. 안개때문에 앞이 트이지 않는것이다. 차가 달리는데 따라 금시 뿌연 안개의 미궁속으로 빠져드는듯 싶다가도 다시 길은 비스듬히 열린다.
비방울이 굵어지자 바람질이 시작된다.
비가 내리면서 안개는 어디론가 잦아들어버리고 시야가 약간 밝아지는것 같다. 그 비바람소리가 귀가를 울려주며 무엇인가 거창하고 웅장한 음향의 여운을 못견디게 부르는것이였다. 문득 김정일동지께서는 어제 저녁 로영진이네 부대군인들과 함께 보셨던 조선인민군공훈합창단의 공연을 상기하시였다. 부대 군인회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젊은 부대장은 새로 중축한 자기네 회관이 몇개 부대가 주둔하고있는 그 지역에서는 그중 대틀이라고 자부심이 여간 아니였으나 세계적인 공훈합창단이 자기의 능력과 위력을 시위하기에는 지내 협소하고 건축학적으로도 음향타산을 정확히 하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있었다. 그래도 성실하고 정열적인 공훈합창단 배우들은 그 비좁은 무대우에 빼곡이 서서 혁명군가를 소리높이 불러댔다. 그것은 방사포의 일제사격소리와도 같은 우렁차고 장엄한 메아리였다. 무엇인가 산악을 드세게 울리는것 같은 거창한 음향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며 장내를 들었다놓았다. 마치 거대한 대양을 향하여 수천수만마리의 새무리들이 날아오르듯 음악이 뒤설레이더니 부드럽고 조화로운 성음들이 한데 어울려 대하처럼 서서히 흐르기 시작한다.
그 대하는 점차 물결을 일으키고 거창한 급류를 이루다가 폭풍쳐 설레인다. 집채같은 노도가 일떠서고 사나운 격랑을 일으키며 천길폭포같은것이 떨어져내린다.
그 장중한 음악의 흐름속에 준엄했던 우리 혁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빛나는 래일을 뜨겁게 감수하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사람의 가슴을 허비며 파고드는 그 무한대한 예술세계의 신비를 여는것 같은 우리 식의 독특한 명곡 그자체때문인가. 우리 혁명과 시대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파고든 주옥같은 시어때문인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일찍부터 음악을 첫 사랑으로 귀중히 간직하시고 음악을 감상하고 창작하고 그 세계에 깊이 파묻히셨지만 아직도 음악철학의 심오한 경지, 그 무한대한 견인력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시였다. 인간의 감정과 사상, 지향과 요구를 생활의 자연적이고 평범한 흐름속에서가 아니라 놀랍도록 압축되고 비약된 정서적명암속에서 열정과 격조의 률조를 타고 터뜨리는 음악예술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전대미문의 리상을 지닌 혁명가들에 맞는 사상미학적인 정서수단이 아니겠는가.
했기에 그이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혁명은 노래로 시작되고 승리해 온 랑만적인 투쟁의 길이라고도 간주하신것이다. 저 백두광야에서 《사향가》와 《혁명가》를 부르며 광복의 봄을 안아온 이 나라 인민들이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새 조선을 일떠세웠고 《결전의 길로》를 따라 승리의 고지마다 군기를 휘날렸다.
류례없이 간고한 90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선의 혁명가들은 《전사의 념원》과 《동지애의 노래》를 심장에 간직하고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였다.
《내 나라 제일로 좋아》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의 선률속에 우리 식 사회주의를 생명처럼 귀중히 간직하였다.
흉악한 도이췰란드파쑈강도배를 짓부셔버린 《험난한 청춘의 노래》, 《정의의 싸움》은 또 어떤가. 우리의 재능있는 공훈합창단 배우들은 그 유명한 노래들도 손색없이 잘 불렀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의 노래가 가지고있는 그 의미와 폭을 훨씬 뛰여넘어 혁명가들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승화시키고 심장에 불을 지피는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개척한셈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사실 일이 힘들고 겹쳐드는 피로가 더 견디기 어려울만큼 커갈 때마다 어느 고요한 휴식장소나 아늑한 침대가 아니라 혁명의 열풍이 몰아치는것 같은 우리 공훈합창단의 혁명군가를 들으시였다. 그러면 피로가 천리만리로 달아나고 금시 생명수를 마신듯 정신이 맑아지고 열정에 충만되시였으며 래일을 락관하며 붉은기진군을 굴함없이 계속할 신념과 의지를 북돋아안게 되시는것이였다.
그것은 고무의 송가였고 격려의 군가였고 승리의 진군가였다.
공훈합창단의 열화같은 웨침은 소박한 군인회관의 창문들을 열리게 했고 병사들을 열광에 차게 했다.
저 이름난 합창단을 건설하느라고 그이께서는 어지간히 품을 많이 들이시였다. 한때는 협주단에서 별로 개성이 없고 있으나마나한 배우들이 잠시 머물러있는 곳이 바로 합창단이였다. 그이의 정력적인 지도와 관심속에 지금 공훈합창단은 관록있고 혁명성과 정치성이 투철한 실력가형의 배우들로 자라나고 꾸려져 세계적인 명성있는 예술집단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들의 정열과 혁명군가를 위해 바치는 품과 진정이 얼마나 아름차고 눈물겨운가 하는것은 한 공연이 끝날 때 배우들의 몸무게까지 준다는것을 상기하면 가늠이 간다.
군인회관에서의 공연이 끝난 후 군부대지휘성원들과 함께 문을 나서던 김정일동지께서는 놀라시며 그 자리에 멈춰서시였다. 군인회관밖은 수천명의 군인들로 꽉 에워싸여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좁은 회관에는 들어서지 못하고 밖에 빼곡이 몰켜서서 공훈합창단의 군가를 듣고있었던것이다. 만세의 함성이 터지고 방금 공연의 마감을 장식했던 힘찬 군가의 노래소리가 병사들속에서 다시 폭풍처럼 터져올랐다.
붉은기 날리는 혁명의 수뇌부
천만이 총폭탄되여 결사옹위하리라
…
김정일동지께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으셨던 어제일을 생각하시면 지금도 가슴이 류다른 흥분으로 뜨거우시였다.
병사들은 우리의 노래, 우리의 혁명군가를 좋아한다. 열광적으로 사랑한다. 혁명군가는 그들을 투쟁과 랑만에로 부르고있다. 혁명적이고 아름다운 락관이 있는 우리 생활은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노래와 함께 있는자는 영생하는 승리자인것이다.
야전승용차 뒤자리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움직임에 그이께서는 명상에서 깨여나시였다.
《벌써 군부대지휘부입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시계를 들여다보려고 하시였다.
《아닙니다, 최고사령관동지.》
약간 당황해하는 유진성대장의 목소리에 그이께서는 미소를 지으시였다.
《무슨 일입니까?》
《전번 국방위원회에 제기한 보고서에도 언급했지만 인민군대 무장장비의 현대화문제와 관련하여 이번 길에 가르치심을 받으려고 합니다. 최고사령부 작전지휘성원들이 지금 현지에서 대기하고있습니다.》
《허, 그러니 그 현대적인 무기시험사격때문에 그러누만. 유진성대장, 왜 한번 세계를 들었다놓자는거요? 그러지 않아도 지금 미제가 미싸일방위체계요 스텔스기술이요 뭐요 하면서 군력강화에 분주탕을 피우고있는데…》
김정일동지께서는 안광을 빛내이시였다.
유진성의 입가에 모처럼 마련된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듯 한 일종의 고집스러움이 실렸다.
《최고사령관동지, 최근 국제적인 군사정세와 정찰부문의 통보를 종합해놓고 보면 우리 군력의 위력을 한번 시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을만 한 소식통에 의하면 미국방성은 남조선과 본토, 〈나토〉에서 군사연습을 강화하고 전략적연구집단들을 동원해서 우리를 상대로 한 새로운 작전계획작성을 다그치는것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죤슨기지에서 우리를 공격목표로 하는 핵무기공격모의훈련을 실시하고있습니다.
모의훈련에 참가한 미제4전투비행단소속〈Fㅡ15E〉전투폭격기들은 내부를 콩크리트로 채운 모조핵폭탄을 사용하였다 합니다. 놈들은 우리의 전략시설들을 신속하게 파괴하고 패트리오트미싸일로 우리의 공격을 차단한다는 전제밑에 이 모의훈련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군사외교부문 일군들이 얼마전에 말레이시아의 꾸알라 룸뿌르에서 미군유골공동조사때문에 국방성 포로 및 실종자담당 국장측과 회담했는데 이 작전계획을 암시하면서 우리에게 일종의 압력을 가하려다 된타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유일초대국〉으로 자처하며 일극화세계를 꿈꾸는 미제의 코대를 꺾어놓는데도 그렇고 이 문제는 더는 미룰수 없다고 봅니다.》
《진성동무, 좀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적인 무기시험사격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봤소?
우리가 몇해전에 진행한 중거리미싸일발사시험후 세계가 어떻게 들끓었는가. 일본반동들은 지금 그것을 구실로 전력을 새 미싸일개발과 미제의 〈전역미싸일방위체계〉동조에 열을 올리고있지 않소. 예견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사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있소.》
김정일동지께서는 사색에 잠기시여 비뿌리는 차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시였다.
비발은 차츰 설펴지고있었다. 구름장이 얇아졌는지 주위가 한결 훤해지고 산악들의 륜곽이 점차 선명해진다. 바람질도 잦아들고 차창을 울리는 소음도 고르로와졌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볍게 긴 숨을 내그으시였다.
《우리는 이미전부터 우리의 국방공업이 세계적수준을 넘어섰다는것을 숨기지 않았고 서방도 때늦게나마 그것을 깨달았소. 권위있는 국제전문가들은 이것을 괴이하게도 인종학적으로 설명하려고까지 시도하고있다면서? 조선민족이 유태족과 함께 세계적으로 두뇌가 제일 비상하고 창조적이라는거지.
듣기싫은 여론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무기시험사격문제는 우리 당의 주체적인 전쟁관점에서 심중하게 다루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최고사령관동지, 조성된 정세로 보아 오늘 그 문제와 관련하여 저희들은 꼭 가르치심을 받고싶습니다.》
이런때 보면 유진성의 검질김도 보통이 아니다.
목표한바를 무조건 뚫고나가는 이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완강한 장령을 그이께서 모르시는바가 아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유진성의 어깨를 잡으시였다.
《인민군대의 강화를 위해 고심하는 동무의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좋소. 우리 식의 〈현대무기〉를 찾아가기요. 우리 식의 〈현대무기〉말이요! 그 문제에 대해선 반대없소!》
김정일동지의 의미심장하고 명쾌하신 말씀에 비로소 유진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굴이 환해지였다.
유진성, 얼마나 진중하고 또 개성이 강한 사람인가. 사람이 고지식한것 같으면서도 랑만적이고 기지도 풍부하다.
다만 그 고집만은 두손을 들만큼 무섭게 검질긴것이 탈이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속으로 웃으시였다. 언젠가 리평해사령관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문뜩 떠올랐기때문이였다.
리평해가 포병대대장으로 복무하고있을 때 유진성은 대대참모장을 하다가 부대작전참모로 소환되였다 한다. 두사람 다 배치된지 얼마 안되는데다 부대가 주민지대와 멀리 떨어져있다나니 나이 서른이 되도록 아직 마련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두 독신군관은 한 침실에서 딩굴면서 우정도 두터이 했고 공상도 함께 나누었다. 어느날 유진성은 사무실에 앉아있다가 상급부대로부터 호된 추궁을 받았다. 성미가 꼿꼿하기로 소문난 군부대참모장이 무전결속시간을 두번이나 어겼다고 성이 독같이 나서 부대의 규률과 정신상태가 문란하다느니, 녀성군인들을 너무 어루만진다느니, 경상적싸움준비가 안됐다느니 하고 왼새끼를 꼬며 질책을 하였다. 앉은 자리에서 되게 땀을 뺀 유진성은 울분이 치밀어올라 통신중대를 찾았으나 그의 분을 더욱 돋구려는듯 전화가 고장이였다. 통신참모가 강습중이여서 어디 해볼데가 없었다. 유진성은 우둘우둘하며 지휘부 건너편의 통신중대쪽으로 헐금씨금 달려갔다.
유진성이 통신중대에 들어서자 두 녀성군관이 긴 걸상에 나란히 앉아 무슨 이야기를 다정히 소곤거리다가 와뜰 놀라 일어섰다. 얼굴이 복실복실하고 오목눈이 재미있게 반짝이는 중위는 몇번 마주친 부대군의소 군의였지만 살갗이 맑고 눈동자가 큰 녀군관은 어쩐지 낯이 설어보였다.
《동무는 누구요?》
유진성은 눈을 내리까는 녀성군관을 일별하며 거칠게 물었다.
《제가 무선소대장 한은경입니다.》
《그렇다?… 동무넨 뭐요? 여기가 무슨 수양버들 늘어진 유보도인줄 아는가? 내 언제부터 전투근무를 안일하게 서는 동무네 무선소대를 되게 다불리자고 벼르댔는데 장본인이 동무였구만. 아주 틀려먹었소! 이건 군대병영에 향수내만 풍기면서… 단단히 문제를 세워야겠소. 도대체 군인이 옳은가 말이요. 비전투적이요! 왜 통신결속시간을 어기는가?…》
유진성은 열이 나서 험한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오목눈이 감히 엇서지는 못하고 슬며시 한은경의 눈치를 살폈다.
한은경소위는 낯빛이 더욱 하얗게 질려가지고 눈을 다소곳이 내리깐채 묵묵히 작전참모의 된욕을 감수하였다.
오목눈이 선 자세로 한은경의 팔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건 뭐요? 상급앞에서 무슨 태도요? 덜돼먹게스리. 불만이 있다는건가?》
유진성의 눈살이 아예 꼿꼿해지고 말았다.
《소좌동지,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다시는 없을것입니다.》
한은경이 눈길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하도 낮고 조용하여 유진성은 한순간 어리둥절해버렸다.
이튿날아침 유진성은 전화를 걸어온 리평해대대장으로부터 뜻밖의 사연을 얻어들었다. 한은경소위가 총참모부 통신결속소에서 복무하다가 바로 어제 아침 전연부대인 이곳 부대 무선소대장으로 자원하여 배치받아 왔다는것이였다.
유진성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아연실색하였다. 결국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인격이 되였다.
그날부터 유진성과 한은경은 한 부대안에서 군무하였으나 얼굴을 맞대는 일이 없었다. 한은경이쪽에서 의도적으로 더 몸을 사렸다. 얼마후 정보가 빠른 텁석부리 리평해가 가져오는 소식들은 유진성으로 하여금 처음의 미안한 자책감을 새로운 격분으로 바꾸는데 충분하였다.
오목눈을 통해 수집한데 의하면 한은경은 세상에서 제일 인정미 없어보이고 맞서기조차 싫은 남자가 바로 유진성작전참모라고 단정했다는것이다.
남자다운 자존심은 다른 측면으로 대응전술을 찾아냈다. 유진성이 작전직일을 서는 날이면 례외없이 무선소대에 부차적이고 구질구질한 작업과제가 제기되던가 갑자기 영문모르게 들볶이우거나 긴장해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한은경은 교양있고 성실한 녀성군관으로 부대의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나 유진성소좌앞에서만은 늘 앞목을 쳐들고 쌀쌀하게 지나치군 했다. 그들은 이태후 한은경이 제대명령을 받을 때까지 단 한마디 말도 직접 나눈 일이 없는 류다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제대되여 평양시당으로 배치받은 한은경은 부대를 떠나기에 앞서 전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마지막순간 군관들속에서 슬쩍 눈으로 유진성을 찾아보았다. 영원히 부대와 헤여진다고 생각하니 그 덜퉁스러운 군관과도 깨끗이 화해하고싶은 녀성다운 부드러움이 움튼것이다. 그대로 떠난다면 마음 한구석이 께름직할것 같은 우려와 조바심이 커가는것이였다. 하지만 군관들속에 그 《인정미없는》사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오목눈과 가정을 이루고 부대상급참모로 승급된 리평해가 출장길에 한은경과 함께 평양까지 가게 되였다. 렬차는 서부지대의 준평원을 쉬임없이 달렸다. 한은경은 구태여 유진성의 가까운 친구인 리평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성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것이다. 차창밖으로 흰눈 덮인 겨울들판이 유유히 지나갔다. 해빛이 그 눈무지우를 비쳐 더욱 눈이 부셨다. 어쩐지 영문모르게 애잡짤한 서글픔이 가슴을 허빈다. 한은경은 자기의 서글픈 마음이 비로소 우악스러운 그 사내때문에 생겨난것이라는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그 녀자는 자기의 가슴을 마지막까지 허비고야마는 그 모진 남자를 원망하며 쓸쓸한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리평해는 그저 히물히물 웃기만 한다.
(남자가 어쩌면 그리도 속이 좁담! 한 녀자의 가슴에 뿌리깊은 상처를 남기고도 그렇게 마음 편할가.
왜 떠나는 마당에 나타나 잘 가라고 손이라도 내밀지 못한담. 진성동무, 난 가혹한 동무를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거예요. 아니 영원히 상기조차 안되게 깨끗이 잊고 말겠어요!…)
평양역에 내리자 수염터가 하루새에 꺼칠해진 텁석부리가 군복저고리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는 몹시 미안해하는 눈치로 그것을 내밀었다.
《은경동무, 이거 내가 너무 억울한 역을 맡아놔서 신경이 사누만. 떠날 때 유진성동무가 이걸 동무에게 전달하라고 하더군. 동무에게 주는 마지막명령서라오. 꼭 집행해야 할 군사임무라나!》
속이 쓰거웠으나 한은경은 그래도 말없이 받아들었다. 송별인사는 나누지 못했어도 자기에게 마지막임무를 주는것으로 체면을 유지하려는 그가 쓰겁고도 고마왔다. 리평해와 헤여진 한은경은 시당합숙에 배낭을 벗어놓자 우선 궁금하여 그 《명령서》부터 개봉하였다. 《명령서》를 펼친 한은경은 폭탄이라도 손에 쥔듯 깜짝 놀라 그것을 방바닥에 떨구었다.
가슴이 활랑거리는 속에 그 《명령서》를 마저 읽었다.
《무선소대장동무!
평양에 도착하는 즉시 필요한 모든 수속을 해가지고 급히 귀대하시오. 나는 오래 생각하던 끝에 동무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였소.
인정머리없는 작전참모로부터.》
한은경은 화들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채 방바닥에 놓여있는 그 《명령서》, 그 사랑의 고백, 그 청원의 편지를 넋을 잃고 보고 또 보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류다른 사랑의 편지였다!
괘씸한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남자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알았으면 이런 철면피한 《명령》을 내리는걸가. 나에게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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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남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유진성작전참모가 아니겠는가. 이거야말로 존엄있는 한 녀성에 대한 파렴치하고 지독한 모독이 아닌가. 한은경은 그 종이장을 집어 꼬깃꼬깃 구겨서 다시 방바닥에 내던졌다.
세시간이 지나서 그 녀자는 그 종이장을 주어들고 곱게 펴서 가슴속에 품었다. 그리고 밤새 울다가 한주일후에는 제대배낭과 트렁크 하나를 들고 부대로 돌아왔다. 그들 부부의 새집은 텁석부리와 오목눈이 쏟아지게 깨를 찧는 옆집에 나란히 자리잡고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 녀자는 남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돼서 원쑤같이 여기던 녀자를 안해로 맞을 생각을 다 했어요?》
유진성은 술질을 하다가 안해를 바라보며 너그럽게 웃었다.
《내가 당신에게 본의아니게 지은 실책을 한생을 두고 갚아주자는것이였지.》
그 말에 안해는 볼에 귀여운 보조개를 파며 좋아했다.
이번에는 유진성이 무엇인가 미심쩍은듯 안해를 여겨보았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말한마디없이 쓴외보듯 하던 남자에게서 그런 편지를 받고 훌쩍 찾아왔소?》
《호호호, 피차일반이지요. 저야말로 당신이라는 수수께끼같은 인간을 한평생을 두고 관찰하자고 왔지요.》…
…참, 저 유진성이와 그의 안해 한은경은 얼마나 진실하고 랑만적인 사람들인가.
김정일동지께서는 자신께서 파악이 있는 한은경이가 그 류다른 사랑의 고백이 들어있는 편지를 오늘까지도 고이 간직하고있으리라는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다.
사랑에 충직한 인간은 생활에서도 언제나 진실한 법이다.
비는 멎었으나 아직도 비구름이 음산하다. 하늘도 지겨웠는지 한숨 쉬려고 결심한 모양이다. 길옆의 도랑창으로 뻘건 탕수가 소란스레 흘러내린다.
야전승용차가 불시에 멎어버렸다. 앞길에 무슨 정황이 생긴 모양이다. 유진성이 훌쩍 뛰여내려 앞에 보이는 굽인돌이길너머로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비에 푹 젖은 리평해와 최남호 등과 군부대일군들을 데리고 급히 나타났다.
《최고사령관동지, 며칠째 억수로 쏟아붓는 비에 큰물이 져 북산강의 다리가 내려앉았습니다. 훈련현지를 돌아보던 군부대지휘관들이 지금 병사들과 함께 다리를 복구하고있습니다.》
유진성의 말이 끝나자 리평해사령관이 숨을 헐썩이며 앞으로 나섰다.
《최고사령관동지, 길을 좀 에돌아야 하겠습니다. 옆도로를 따라 한참 가면 군소재지를 통과하는 예비다리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 병사들이 달라붙었다는데 여기서 기다리기요. 병사들이 최고사령관을 위해 큰물과 맞서 싸우는데 우리가 어딜 돌아간단 말이요. 마침 이곳 지형도 볼겸 좀 쉽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차에서 내리시여 최남호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였다.
《왜 비옷을 입지 않았소. 군복이 다 젖었구만.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쩔려구.》
《최고사령관동지, 이 최남호부국장이 먼저 사품치는 강물에 뛰여들어 메질하는 병사들에게 비옷을 씌워주는바람에 저도 함께 물참봉이 됐습니다.》
리평해가 비위살좋게 끼여들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시였다.
《허허허, 사령관동무가 한수 떨어져서야 되나.
왜 지금부터 붙어다니며 이번 인민무력부적인 기동타격훈련때의 대응전술을 탐지하자는게 아니요? 그 기도는 잘못됐소. 최남호동무를 군부대에 내려보낸건 이번 훈련때 강평원이 아니라 올해 훈련의 절정인 이번 작전을 도우라고 한거요.》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사실 이번 훈련은 아닌게아니라 봄철종합훈련과는 달리 긴장시키는게 많습니다. 벌써부터 군부대작전계획을 탐지하려는 불순한 시도들이 엿보입니다.》
《됐소. 사령관동무가 작전이야기를 꺼내는걸 보니 군수뇌부가 모인 이 자리에서 뭘 좀 알아내려는것 같은데 어림도 없소. 저 유진성대장동무의 눈길을 보오. 이번엔 내가 직접 강평원의 립장에서 판정하겠소.》
김정일동지의 청청하신 말씀에 리평해는 얼굴이 불그레해져가지고 턱을 문질렀다.
분명 아침에 면도했을터인데 어느새 뾰족뾰족한 센털들이 보그그 기세있게 자리를 잡았다. 이 사람이 먹는게 다 수염으로 가지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셨다. 그이께서는 미소를 지으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