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7. 전쟁전 백골단의 발악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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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김영승 선생이 그가 살던 동네에서 이승만 정권하에 백골단에 의하여 빨찌산이 된 젊은이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당한 수난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7.
전쟁전 백골단의 발악은 극에 달했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때는 1949년 10월 초순이다. 우리 동내는 유명한 불갑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1948년 10월19일 애국병사 봉기 후 불갑산에도 30여명의 빨찌산 무장부대들이 투쟁하고 있었다.
밤이면 가끔 마을에 내려와 밥을 해달라고 한다. 밥을 해주면 무사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우리 마을에 청년 두 사람도 입산해 투쟁하고 있었다.
이름은 김영하와 서치술이었다.
당시 김영하는 19세의 청소년이었다. 그의 집은 우리 집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부모님도. 형님도, 동생도 합하여 5명이 생존해 있었다. 부모님을 촌에서 당촌댁으로 불렀다.
당시 우리 묘량국민학교에 군이 주둔해 매일 같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하루 점심 한 때는 각 마을 별로 몇 십상씩 준비하라고 지시가 내려오면 자기는 못먹어도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장만해 바쳐야한다.
만일 못한다고 하면 빨갱이로 몰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러한 공포와 억압속에서 살아오는 과정에 1949년 여름에 불갑산 용천사 근처에서 한사람의 청년이 생포되어 묘량국민교에 있으면서 매일 토벌작전에 앞세워 끌고 다닌 것도 목격했다
그 포로된 청년은 중학생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 생이면 18-19세 나이었다. 1949년 늦은 가을까지 데리고 다녔다.
그때는 빨찌산 부대들에게 밥을 해 주었다하면 이튿날 기동대들이 나와 동내 젊은 사람들은 몽둥이 매타작을 가하여 지서 유치장에 일주쯤 가두었다가 풀어주고 했다.
그이유는 무장부대가 내려오면 제때에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하두 탄압이 심하니까 꾀를 냈다. 무장부대들을 밤손님이라고도 했다. 밤손님들은 앞으로는 “우리가 내려와 밥해먹고 떠난 후에 한사람씩 릴레이로 달려가 신고하되 첫째 주자는 지금 막내려와 밥을 지어 달라 해서 밥을 짓고 있다하고,
두 번째 주자는 지금 밥을 먹고 있다고 신고하고,
세 번째 주자는 지금 떠났다고 신고하라“고 해서 그대로 신고하니 잘한다는 말까지 듣고 몽둥이찜질을 당하지 안했다.
당시는 밤손님이 나타났다 해도 신고만 받지 밤에 출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보대 하나에 민간인 한사람씩을 붙여 보초를 서게 하여 밤손님이 지나가면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9년 10월 초순에 이웃집 김영하라는 친구가 불갑산에서 적들과 조우되어 우리마을 까지 후퇴해 들어왔다. 적들은 꼬리를 물고 우리마을 뒤산을 포위하고 날이 부연히 새자 느닷없이 총소리가 나더니 마을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해서 부엌으로 들어가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날이 훤이 새자 백골이 그려진 철모를 쓰고 군인들과 백골단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웃집 홍경호 부잣집마당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채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홍가 큰 마당에 모였었다. 그리해 놓고 뭇놈들이 매개 가가호호를 수색전을 펼쳐 불행하게도 우리집 헛간재속에서 군복과 칼빈단도와 수류탄이 나왔다고 했다.
필자도 나와 보니 영하동무가 중구적삼을 입고 소깔구덕이와 낫을 들고 집마루 평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래기도 했다. 당시 인상은 우선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고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보고도 말이나 눈길도 못하고 있는데 백골단들은 모인 마을 주민들에게 자기 가족단위로 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김영하는 홍경호 집 식구들 맨 뒤쪽에 앉았다.
백골단은 일일이 본인에게 가족 맞냐고 묻고 나이 어린이들이 있으면 그에게 가족이 맞냐고 물어 맞다고 하면 다음집으로 넘아가는 데 드디어 홍경호집 식구들에게 와서 영하에게 물으니 이집 머슴이라고 답변하자 그집 딸인 홍정숙(당시12세)에게 머슴이 맞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낚아채더니 뭇놈들이 안죽을 만치 두들겨 팬 다음에 꼭꼭 묶어 싣고 가는 참상이 벌어젔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집 가택수색에서 나온 군복과 단도 수류탄을 고의로 감추어 두었다고 우리 큰 형님이 뭇놈들에게 안죽을 만치 두들겨 패면서 솔직히 부르라고 고문하는 과정에 한 군인이 옆에서 그만 패라고 말하니 멈췄다.
동네 청년들은 마을 앞 논 들판에 끌어다가 두들겨 패더니 모두 구루마에 실어서 지서까지 끌고가 유치장에 있다가 일주만에 석방시켜 나왔던 것이다.
결국 영하는 손목을 묶어서 불갑산 토벌에 아지트를 대라고 끌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수정을 채우지 않고 다니는 틈을 타서 밤길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후 적들은 거의 매일 부모 형제들에게 찾아내라고 발가벗겨놓고 고문하며 족치었다. 가족은 영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던 것이다. 도저히 아들하나 때문에 가족전체가 살 수 없어 1950년 초에 자수를 시켰다.
그리하여 광주감옥에 미결로 있다가 1950년 7월23일 인민군의 광주 진격에 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합법 때 전남도 정치보위부에서 사업하면서 고향마을을 한번 찾아와 반갑게 상면하기도 했다.
그후 9.28 후퇴를 맞은 후 북상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그후 마을 가족들은 고향에서 모두 학살당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전쟁날 때 백골단의 발악상은 극에 달하고 소위 유엔군이 진주해 들어온 후 고향은 살아남은 자 몇 사람 없다.
이와 같이 미군점령하의 꼭두각시 리승만 정권하의 전쟁전의 발악상을 회고해 본다
2020.12/11.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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