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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의 년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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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753회 작성일 20-10-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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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성욱은 렬차방송을 통해 박정희가 남조선《중앙정보부》 비밀료정에서 사살되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근 10여년만에 어릴적추억이 깃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퍼그나 오랜 세월 고향을 잊은채 살아온 성욱이였다. 고향땅을 마지막으로 밟아본 때가 언젠지도 어슴푸레하였다.

암록색 가파로운 산발들과 그아래 길게 홈태기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돌개울은 예나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왔다. 강건너 밋밋한 등성이에는 키낮은 널바자를 둘러친 아담한 집들이 오붓이 몰켜있었다. 어데선가 통나무를 켜는 전기톱소리가 들리고 떼를 뭇는지 함마질소리도 울려왔다.

림성욱은 여기서 나서자랐다. 총명한 덕에 일가친척의 떠받들림을 받으며 소학교를 마쳤다. 화전민의 자식이 그이상 뭘 더 바랄수 있었으랴.

하지만 소년의 꿈은 아득한 창공으로 높이 날아오르기만 했다. 다행히도 가문에는 그를 공부시키겠다고 기승이 나서 돌아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둘째 삼촌이였다. 한창 젊은 나이에 석수골의 좁은 골짜기안에 붙박혀 살기가 싫어서 부모들과 친척들 몰래 어데론가 훌쩍 달아난 사람이였다. 그는 편지 한장없이 집안사람들을 속태우다가 3년만에 신수가 멀쑥해져서 석수골에 다시 나타났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차림새를 보니 돈푼이나 있을것 같았다. 아닌게아니라 그한테는 돈이 있었다. 회령일판에서 갑부로 소문난 목재상의 딸한테 붙어서 어지간히 돈을 떼냈다는것이였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놓으면서 이젠 돈줄이 생겼으니 성욱이 하나는 자기가 맡아서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였다. 그 말에 온 가족의 마음이 끌리기는 했으나 대를 이어 깨끗이 살아온 집안에 벌목부들의 등살을 벗겨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목재상의 딸이 어울리지 않아 어쩐지 께름직했다. 그런 돈있고 세력있는 집안의 딸이 무얼 바라고 가난뱅이집안에 들어오겠는가. 집안사람들의 말에 삼촌자신도 애당초 성사될 가망이 없는 인연이라고 했다. 마침내 일가친척들은 뒤가 컴컴한 그따위 쓸개빠진 련애질은 왜 하느냐고 난봉군 몰아대듯 욕을 퍼부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친척들의 말을 듣기만 하던 둘째삼촌이 하루는 늦은 저녁에 림성욱을 석수천기슭으로 슬그머니 끌어냈다.

《성욱아, 누가 뭐라고 하든 넌 상관하지 말아라. 넌 머리가 좋으니 꼭 공부를 해야 한다.》

삼촌이 굳이 우겨 그해 림성욱은 회령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성욱의 꿈은 삼촌의 덕분에 첫 시작이 실현된셈이였다. 삼촌은 조카의 학비를 떨구지 않고 대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는 회령목재상의 일을 봐주고 받아쥔 돈과 남자의 인품에 끌린 주인집 딸이 은밀히 찔러주는 돈까지 모조리 조카의 학비에 들이밀었다. 언제 한번 남들처럼 술집이나 놀음판에 빠져 돈을 써버리는 일도 없었다. 그랬으나 림성욱은 상업학교과정을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밀려났다.

하루는 삼촌이 기가 푹 죽어 기숙사로 찾아와서 하는 말인즉 일자리를 잃었다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일은 여간 맹랑하게 된것이 아니였다. 목재상이 자기가 정해준 부자집아들한테 정을 붙이려 하지 않는 딸을 돌려세우다 못하여 삼촌의 일자리를 잡아뗀것이였다.

그통에 돈을 얻을수 없어 결국 퇴학을 당한 림성욱이가 석수골로 돌아와보니 한날 먼저 회령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삼촌은 떼를 몰고있었다. 그 삼촌이 광복된 해에 이웃골안에서 제일 인물고운 채벌공의 딸을 데려오던 날은 정말 볼만 했다.

림성욱은 민청사업을 하느라 날개가 돋힌 때지만 그속에서도 제가 삼촌의 잔치준비를 주관해나섰다. 그가 벌목부들의 전례대로 신부를 떼에 태워오자고 우기여 혼례식은 한층 이채를 띠였다. 신식이니 뭐니 하며 구슬을 깨뜨릴가봐 우려하던 집안늙은이들이 앞장서서 찬성했다.

잔치날 온 석수동의 아낙네들과 조무래기들이 새하얗게 물동가에 나와서 신부를 기다렸다. 청청하게 개인 하늘에 불덩이같은 해가 높이 떴는데 새색시가 떼를 타고 올 강물우에서는 젖빛물안개가 푸릿하게 감돌고있었다.

한낮이 되자 물안개를 헤가르며 울긋불긋 들꽃으로 장식한 떼목이 나타났다. 그 화려한 떼우에서 떼몰이군들의 노래소리가 울리였다. 아직은 새 노래가 없어서 옛적에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한테는 새 노래였다. 가락마다 슬픔은 가셔지고 기쁨이 실리였다. 비취색강물속에서 길다란 키가 이리저리 뒤번져질 때마다 희뜩희뜩 물바래가 날아오르며 해빛에 번쩍이였다. 물가에 모여선 구경군들이 환성을 올리며 춤판을 벌렸다.

림성욱은 그날 신랑신부가 신방에 들어가고 손님들도 돌아간 후 얼근히 취해가지고 강물이 밀려와 철썩철썩 부딪치는 토장에 나가앉았다. 몇몇 남정들이 신부가 타고온 떼에 올라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춤추고 노래하며 취흥을 즐기고있었다. 막걸리에 얼근해진 사나이들의 노래가락이 서늘한 강바람을 타고 건드러지게 울려퍼졌다.


          어허 꿈에 보낸 내 고향산천
          생시처럼 떼에 실려 흘러가네
          에헹 에헹 에헤영

 

림성욱은 이듬해 삼촌의 권고로 정든 고향을 떠나 평양에 올라가서 대학을 다니다가 류학추천을 받았다. 조국을 뒤에 두고 외국으로 떠나던 날의 그 애짭잘한 심정이 고향에 온 이 시각에 새삼스레 돌이켜졌다.

국제렬차의 차창밖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낯설은 이국의 초원을 바라보며 그때 그는 머나먼 산간오지의 화전민의 아들이 어떤 인생행로를 걸쳐 국제렬차에까지 올랐는가를 생각하였다.

삼촌은 광복전에 조카를 공부시키려고 그렇게 자기를 다 바쳤건만 그의 조카는 중등교육마저 끝낼수 없었다. 재능이란 결국 대지가 품어주지 않고 해빛이 덥혀주지 않으면 싹틀수 없는 씨앗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는 이국의 벌판을 달리는 국제렬차의 차창가에서 비로소 수령님의 품이 태양의 품이며 대지의 품이라는것을 절감할수 있었다.

그때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언제가도 잊을것 같지 않던 고향도 어느덧 망각의 안개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삼촌도 이젠 이 세상사람이 아니였으니 성욱이 류학을 간 사이 전선에서 장렬하게 희생된것이였다. 그는 조카가 성공하는걸 보지 못했다. 수류탄을 안고 적땅크밑으로 기여들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조카를 생각했을것이다. 이 조카를!)

삼촌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성욱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고향은 어머니의 모습, 삼촌의 모습처럼 안겨오며 그의 눈에 그윽한 회억의 그늘을 던지였다. 오랜 세월 잊었던 고향마을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있는 그앞으로 누군가 황황히 달려왔다. 광복이 된 그해 석수동에 떼를 타고 시집온 그 어여쁜 처녀가 옳은가 싶게 늙어버린 숙모가 림성욱의 손을 덥석 그러잡았다. 눈물이 그의 손에 떨어졌다.

《자네가 왔군. 어머니의 삼년상에도 오지 못하더니… 자네 처가 왔다가서 바쁜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한게로구만.》

《삼촌어머님, 그런게… 아닙니다.》

림성욱은 목이 메여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기에 바쁜 사람이 이렇게 왔나.》

《그런게 아니라 … 삼촌어머님, 들어보십시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바쁜속에서도 절 이렇게 고향에 보내주시였습니다. 이렇게 삼촌어머니랑 만나보라구…》

《원, 세상에 이런일두… 나라를 돌보실래기… 무척… 무척 바쁘실텐데… 자네 나들이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칠순이 넘은 늙은이는 림성욱의 가슴팍을 두손으로 어루만지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림성욱은 지난밤 혜산으로 가는 급행렬차의 침대칸에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몇해만에 고향으로 찾아오는 흥분탓이기도 했지만 선반우에 얹어놓은 지함에 눈길이 가면서 자꾸만 눈물이 고여오르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 미천한 설계가의 생활까지 구석구석 살피시며 얼마나 다심한 걱정을 해주시는가.

림성욱은 작은 어머니집에 잠간 들렸다가 따뜻한 해볕이 스며드는 숲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의 묘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잔을 부었다. 그 길로 토장에 나가서 오래간만에 석수천의 철썩이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 옛날 처서군들의 노래를 입속으로 조용히 불러보기도 했다.

저녁에 온 동네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삼촌네 집으로 모여왔다. 림성욱은 그들과 마주앉아 즐거운 회포를 나누며 저녁을 나눈 다음 강변에 나가서 달빛이 하얗게 깔린 모래불을 거닐었다. 삼촌어머니가 동네늙은이들과 함께 밤참을 차려들고 강변으로 나왔다. 술잔이 오고갔다.

림성욱은 늙은이들이 말아주는 엽초도 받아들었다. 삼촌이 즐겨피우던 고향의 엽초였다. 구수한 담배연기가 가슴에 차는 순간 조카의 학비때문에 뛰여다니던 삼촌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였다. 림성욱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잊기 시작했던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다시 찾은 기쁨에 밤가는줄 몰랐다.

10여년동안에 고향의 모습은 너무도 많이 달라졌었다. 밤마다 석수천의 출렁이는 물소리와 떼우에서 모락모락 구슬픈 연기가 피여오르던 어제날의 궁벽한 림산마을이 아니였다.

림성욱은 고향사람들이 구태의연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으며 멀리도 전진해왔음을 깨달았다. 궁벽한 산골동네에 추녀도 높이 집들이 일떠서고 2층짜리 중학교의 유리창은 달빛을 반사하면서 번쩍거렸다. 그 옛날 동기와가 썩어가는 오두막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고향의 모습은 찾아볼길이 없었다. 알락달락하게 색칠한 놀이터가 붙은 탁아소와 유치원, 수백명을 수용할수 있는 문화회관, 평양에 옮겨놓아도 별로 손색이 없을 버섯공장, 목재가공공장… 림성욱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몰랐다. 밤이 되여 삼촌댁 웃방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그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언제 한번 고향마을에서처럼 행복한 자신을 느껴본적이 있었던가싶었다. 그러자 오랜 세월 떨어져살았던 고향마을의 풍경이 신비한 색채를 띠고 다시금 눈앞에 아름답게 펼쳐졌다. 해가 설핏해지기 시작할 저녁무렵 마을로 돌아온 벌목공들의 후더운 인사말과 배부른 집짐승들을 풀판에서 몰고오며 방싯 미소를 던지던 젊은 녀인들의 싱싱한 모습이 정답게 떠올랐다. 집집에서 떠들썩이 들려오는 아낙네들과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 챙챙한 목소리… 고향사람들의 그 활기띤 생활속으로 휘말려들어간 림성욱은 자기 마음도 끝없이 깨끗하고 청신해지는것을 기쁘게 느꼈다. 그는 이튿날 동네수닭들이 새날을 알리며 울어대기 바쁘게 물동가로 나가서 첫 새벽에 떠나는 떼에 올랐다. 젊은 시절에 가끔 삼촌과 함께 떼를 몰군했던 솜씨를 보이고싶었던것이다. 륙십객의 로설계가가 팔소매와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와이샤쯔바람으로 노를 힘껏 거머잡자 떼몰이군들은 너무도 희한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자기들한테 아직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없었다며 법석 떠들었다. 한켠에서는 조반삼아 어죽을 서둘러 끓이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고산지대의 험준한 산발을 끼고 흐르지만 비교적 강폭이 넓고 물살도 완만하여 별로 어렵지 않게 떼를 몰아갈수 있었다.

그런데도 림성욱의 귀밑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고 반나마 헤쳐진 앞가슴이 세차게 높뛰였다. 석수동에서 20리가량 실히 내려갔을 때 떼목군들은 그를 돌려보내려고 떼를 기슭에 붙이였다. 뒤이어 성의껏 쑨 어죽추렴을 벌리고 다시금 떼가 떠났다.

물안개 뽀얗게 피여오르는 강가에선 림성욱이 와이샤쯔를 벗어 힘껏 흔들며 떼몰이군들을 뜨겁게 배웅해주었다. 그 인상적인 아침 림성욱은 림산사업소 화물자동차를 얻어타고 석수동으로 돌아왔다. 그가 마을어구에 당도하자 삼촌어머니가 마중나와 기다리고있었다. 늙은이는 강바람에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과 흠뻑 젖어버린 바지가랭이를 바라보며 큰일이나 난것처럼 소란을 피웠다.

《이 사람아, 때식도 잊고 이게 뭔가? 자네 하루새에 떼몰이군 행색이 다 됐구만. 어서 가세.》

림성욱은 늙은이가 손을 잡아끄는대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허허 웃었다. 떼몰이군이 됐다는 삼촌어머니의 그 한마디 말이 얼마나 유정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이날 아침 삼촌어머니는 닭곰을 비롯하여 갖가지 산채로 푸짐하게 상을 차렸었다. 그러나 떼몰이군들과 헤여지며 초벌요기를 한 뒤라 림성욱은 몇술 뜨는둥마는둥하고 인차 집을 나섰다.

그는 마을뒤의 산골짜기에 있는 방목지를 찾아갔다. 그 옛날 포수령감의 막사가 있던 곳에서 연분홍문양치마를 깡뚱하게 입은 예쁘장한 처녀가 양떼를 몰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긴 회초리를 휘둘러대다가 그를 반겨맞아주었다. 석수천의 작은 지류가 흘러내리는 골바닥에서는 처녀가 길들인듯 한 여러마리의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었다.

처녀는 림성욱이 중앙기관의 책임일군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였으나 그가 이곳 태생이라는것을 안 다음부터는 스스럼이 없어져 목장의 유래이며 집짐승의 마리수, 소들의 성미에 대해서까지 들려주었다. 지어는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이며 메토끼와 오소리굴이 있는 곳, 송이버섯밭들이 숨어있는 숲속의 비밀까지 동화의 세계처럼 재미나게 이야기해주었다.

처녀의 재깔거리는 말에서는 제가 나서자란 고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향기처럼 풍겼다. 림성욱은 처녀와 헤여질 때 뜨겁게 손을 잡아주고 맞은켠 숲속으로 향해갔다.

어릴적에 즐겨다니군 했던 너설바위밑의 옹달샘이 문득 떠오른것이였다.

이른 새벽이면 사슴들이 물먹으러 내려온다고 하여 《사슴샘》으로 불리운 그 작은 샘터… 지금도 메워져버리지 않고 그냥 샘물이 솟아나고있는지… 이제는 세월이 너무도 많이 흘러갔으니 묻혀버렸을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한번 가보고싶었다. 림성욱은 옹달샘이 있던 큰 바위근방에서 사슴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환성을 질렀다. 그것은 가까운 곳에 예전의 샘터가 그냥 남아있음을 말해주는듯싶었던것이다. 림성욱은 옷자락에 휘감기는 잡관목가지들을 밀어젖히면서 주위를 두릿두릿 살펴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시커멓게 이끼덮인 바위밑에서 샘터가 나졌다. 아직은 고향밖에 다른것을 몰랐던 철부지시절의 샘물을 50여년만에 다시 본 그는 달려가 샘터앞에 꿇어앉았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금모래를 일며 퐁퐁 솟아났다. 고향의 정가로운 샘물은 그를 반기듯 숨쉬며 해빛에 반짝였다. 림성욱은 샘물에 입맞추듯 엎드려 한모금 꿀꺽 삼켰다. 이발이 쩡 시려났다.

《어, 시원하군!》

림성욱은 그만 정신이 버쩍 드는것을 느끼며 얼굴을 쳐들었다.

그의 량볼과 턱에서는 차디찬 물방울이 뚤렁뚤렁 떨어졌다. 잔잔하던 샘물이 흔들리였다. 크고작은 동그라미들이 일렁거리였다. 순간 림성욱은 샘물속에 비친 자기,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를 넋없이 들여다보았다. 어릴적의 더벅머리소년과는 너무나도 많이 달라진 그였다. 아니 지금의 자기 모습에서도 이전 같지 않은 새로운 변화가 기쁘게 감촉되였다. 늘쌍 설계사업소의 번잡한 생활에 파묻히여 면도도 못하고 지낼 때가 드문했던 그의 얼굴이 샘물에 씻긴듯 멀쑥하고 생기가 있어 보이였다. 인간이 평생에 한번밖에 가져볼수 없는 청춘시절의 정력과 활기가 되살아나는듯 했다.

림성욱은 또 한번 샘물을 걸탐스레 마셨다. 그리고는 너설바위우에 올라가 앉아서 엽초를 한대 두툼히 말았다. 금시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리는것만 같았다. 고향의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추기고 엽초를 태우는 맛도 천하에 없는 별맛이였다. 저 멀리 아찔하게 치솟은 석수동의 산정우에는 수리개 한마리가 떠서 유유히 감돌고있었다.

림성욱은 한동안 세상만사를 잊고 그 무엇에 홀린듯이 그냥 앉아있었다.

숲속은 고요하였다. 이따금 석수천의 벼랑아래에서 여울물소리가 정답게 들려오고 나무잎들이 속삭이듯 수선거리며 수림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 자연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게 조화되여있는가! 저 맑은 하늘, 불타는 구름, 숲속의 옹달샘, 서로 비슷한데가 없이 제가끔 천태만상을 펼친 이 대자연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진 조화의 극치라고 할수 있었다. 건축예술가로서 한평생 조화의 세계에 넋을 바쳐온 림성욱의 가슴은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는 이틀전만 하여도 평양에 현대적인 거리와 기념비적건축물들을 일떠세워야 할 무거운 과제를 두고 떠나며 자기가 고향에 와서 이삼일 실컷 휴식이나 하다가 돌아가게 될줄로만 알았다. 한데 여기서 인생말년의 가장 큰 행운, 가장 귀중한것을 찾은듯 한 흥분과 열정에 휩싸여 고향을 떠나게 된것이였다.

림성욱은 이튿날 새로운 마음을 안고 활기에 넘쳐 평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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