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24. 진상장터 진격 투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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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24
진상장터 진격 투쟁에서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때는 조국전쟁이 1953년 7.27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선이 휴간기에 들어선 후 일선 정기군들을 후방 빨찌산 토벌에 동원 될 무렵인 8월 말경이다.
당시 전남 광양군 진상면 면소재지 장터는 대울타리로 삥 둘러쳐서 도로에서 들어오는 문과 반대편에서 지서로 나가는 문밖에 없었다. 그안에 상인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50년 9.28 후퇴 후 한번도 장터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대울타리 섬과 같았다. 진상지서는 백운산 빨찌산 토벌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시 토벌대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백운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남부대는 드디어 진상장터를 목표해 작전을 수립했다. 우선 진상지서에 있는 경찰대를 견지해야 했다. 지서 포대에서 아주 가까운 직탄거리에 있기 때문에 발각시에는 아군 피해도 입을 수 있었다. 높이 쌓아놓은 포대 위에서 내려보는 직탄거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려가 뚫을 대울타리 밖은 물 논들이었다. 우리 일중대성원 중 5명은 지서 포대 진지를 담당했다. 먼저 대울타리 정문을 통과하는 데 장애물은 없었다. 그러나 민간인들에게 발각되었다.
지서포대에서는 불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 소조는 포대를 향해 발사하면서 진격하는데 당시 내가 들었던 m원총이 불발이 되었다. 맨 선두에서 치고 나가다 총이 불발이 되니 참으로 남감했다. 포대와의 거리는 50-60m었다. 할 수없이 뒤로 처졌다. 깜깜한 밤에 순간적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밤이라 중대장을 부를 수도 없었다.
사실 m원총은 사용하지 못할 때는 지팡이로도 쓸 수도 없다 그래서 본 5명 소조와 떨어저서 본대의 책임자인 부대 부정치의원 보위를 맡았다.
부정치의원은 박대화 동지었다. 박동지는 전남 백아산 총사령부 의무과장을 활동하다 1951년 제1차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 때 환자아지트가 발각되어 이를 사수하다 한 팔을 잃었다. 이공로로 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도당위원장은 박동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큰 산인 광양백운산으로 이동시켜 전남부대 부정치의원의 직함을 갖고 무장부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적들의 빗발치는 총탄속에 내 m원은 후방과 동무에게 주고 박동지의 칼빈투를 내가 메고 보위하게 되었다. 박동지는 왼팔이 없어 오른 팔밖에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이기 때문에 당연히 위험한 시기에 보위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서포대 약 50m거리에서 상점 문턱에 올라 서있고 나는 그밑에 서 있는데 그 옆에 있는 동무가 라이타불을 반짝 했는데 그 불빛을 보고 기관총을 난사해 앞 창문 유리창을 깨고 남은 한팔인 우측팔을 맞아 절골이 되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래 부랴부랴 박동지 구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포대를 견지하던 소조도 철수하여 앞뒤 통로로는 적이 점령해 나갈 수 없었다. 대울타리 안에 갇힌 우리부대는 필사의 노력을 다하여 칠흑 같은 밤에 대울타리까지 접근하는데 어떤 집의 부엌도, 사립문 울타리도, 돌담도 뛰어 넘으며 대울타리에 접근했다.
당시 대울타리는 큰 대나무로 총총히 엮어서 쳐놓았기 때문에 뚫는데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물논이 있는데 대우타리를 낫과 톱을 구해서 겨우 한 사람 나갈 정도의 구멍을 내고 무사히 후퇴에 성공했다.
결국 진상장터 진격의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으나 중상당한 부정치의원을 무사히 구출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빨찌산 투쟁에는 성공할 때도 있지만 피해만 남기는 투쟁도 있는 것이다.
총화에서 나는 자아비판을 했다. 진격작전에 불발이 되어 함께하지 못했을 때 중대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떨어진데 대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부정치의원 보위를 제대로 잘못하여 중상을 당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잘 싸워도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는 솔직하게 자아비판을 하는 것이 조직적 사상적 단결에 원동력이 된다. *****..
참고@@ 박동지는 의사로서 본명이 박충근이고 9.25합법 때 전남 도인민위 보건 부장을 했다‘
입산해서 위에서 말한 도 총사령부 의무과장을 했으며 이번 진상 진입투쟁에서 마지막 팔을 잃어 양팔을 못쓰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손발이 되어주어야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당에서는 의무과에서 환자 치료에 모범을 창출한 이수정여성 동무가 있었다.
도당에서는 두팔을 잃고 백운산 서골 환자 아지트에서 박동지를 치료하는데 부부가아니면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이수정 동무는 부부인연을 맺고 치료하다가 1953년 12월 적들의 수색작전에 노출되어 생포를 당하였다.
아무리 적들이라 하더라도 국제 적십자 정신에 입각하여 간호사나 의사들은 풀어주거나 형을 감면 하거나 해서 얼마 안 살고 출옥시키기도 했는데 박동지는 산에서 영웅칭호 받은 것이 탄로나 무기형을 받고 공주 불구자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마산 형무소로 이감가서 살다가 출옥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함께했던 이숙정 여성동무는 형을 받지 않고 풀려나 몇 년간 기다리다 결혼해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 있을 뿐 오늘의 생사여부는 알 길이 없다.
2020. 12/31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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