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총대 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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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향도》
장 편 소 설
박 윤
( 제 30 회 )
제 5 장
2
폭우가 대줄기로 쏟아져내리고있었지만 땅크안은 열에 뜬 한증탕처럼 달아올랐다. 숨이 컥컥 막힌다.
붕괴물과 굽인돌이를 노리고 파헤친 산사태들을 짓뭉개며 무한궤도들은 순간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기름가스와 화염에 얼룩지고 달아올라 온통 얼굴이 거밋거밋해진 병사들에게서는 흰 눈자위만이 번뜩인다. 그들은 마지막힘을 다 모아 전진속도를 보장하고있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목적지인 공격출발계선이다.
강력한 비수와도 같은 섬멸적인 배후타격과 함께 군부대의 승리의 진격로가 열리게 되는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벅찬 일이였다.
한철준상좌는 지휘땅크를 냅다 쳐몰며 지금 엉뚱하게도 멀리 백금산에 가있는 김혜정을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폭풍》이 있기 전에 그처럼 기다리던 그 녀자의 짧은 편지를 받은것이다.-
평범하고 정서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큼직큼직한 글씨였지만 그것은 그가 인생에 처음으로 범상치 않은 인연의 녀성에게서 받은 편지였다.
(헛참, 우리 동무들의 성의는 다 조쇄직장 직관사업에 돌렸다지?
그건 그거구. 박신철의 어머니를 만났댔다지. 야단인걸. 이번에 내려온걸 보니 정상이 말이 아니야. 뭐, 사랑이 끝장난것 같다고? 괜히 아는 주정인가? 그런걸 놓고 애인들간의 사랑싸움이라고 하지. 칼로 물베기라니… 공방전이 없는 사랑이란 고인물이거든.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시내물이거든. 흐름을 가로막는듯 한 돌이 없다면 시내물은 노래를 잃어. 주절주절… 사랑은 그래서 점점 더 격렬해지고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지. 신철이, 동문 그러고보면 아직 아이야. 다 큰 아이거든. 도대체 녀성의 심장을 들여다볼줄 모른단 말이야. 아예 점심밥을 싸가지고와서 이 형님한테 배우라구.…
난 동무를 쳐다보는 그 녀자의 눈빛을 보았어. 그건 하루이틀에 형성되거나 한순간에 쉽게 꺼지는 그런 눈빛이 아니야.…)
앞길에 장애가 생겼는지 선두대렬이 잠시 머뭇거렸다.
한철준은 김창모의 땅크에로 다가갔다.
사기가 오른 김창모가 허물없이 한철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참모장동지, 한가지 물어보랍니까?》
《좋지.》
《아까부터 혼자 히물히물 웃으시는데…》
한철준은 속이 띠끔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동문 앞으로 정찰로 돌아야겠소. 누이동생이 있나?》
《예, 창순이라구 청진에서 인민학교애들의 예술체조를 배워주는 체육교원을 합니다.》
《좋아, 그럼 동무처럼 삐죽이 말랐겠구만. 내가 맡지. 동물 처남으로 삼겠소.》
《체, 누굴 속이려 듭니까? 참모장동지의 군복저고리주머니에 든 애인의 편지!》
《벌써 다 알아냈소?》
《저만이 아니라 온 대대가 다 압니다. 우리 대대장이 아니였습니까.…》
김창모는 히죽이 웃으며 흰 이를 드러내보였다. 볕과 바람에 탄 적동색얼굴에서 눈과 이새만이 빛난다.
《에끼, 고얀 친구들. 뒤에서 상관의 흉들만 보댔구만. 허허 참.》
한철준이 어깨가 들썩하게 너스레를 떠는데 선두땅크에서 련락군관이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한철준은 급히 땅크에서 내려 비발속으로 달려갔다.
좁은 외통길에 겨우 착륙한 직승기곁에 군부대 부사령관 강무전과 부대정치위원 리만순이 심중한 낯빛으로 서있었다. 무한궤도들의 발동이 멎자 주위에는 비소리만이 소란할뿐이다.
한철준은 강무전에게로 다가가 정황을 간단히 보고했다. 강무전은 굵은 목대를 뻣뻣이 세운채 그의 말을 듣는듯마는듯 하더니 군부대사령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첫 순간 한철준은 아연해진듯 눈을 크게 떴으나 가까스로 자제하며 실무적으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강무전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정황을 간단히 설명하자 한철준은 리해가 잘 가지 않는듯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강무전은 엄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참모장동무, 왜 멍청히 서있소? 빨리 새 대응전술대로 작전조직을 해야지.》
한철준은 얼굴로 흘러내리는 비물을 손으로 뻑 훔쳤다. 기름검댕이 같은것이 코와 볼언저리에 묻어났으나 곧 내리는 비물에 씻겨버린다.
《부사령관동지, 제 의견을 말씀드릴수 있습니까?…》
강무전은 뜻밖인듯 내키지 않는 어조로 푸접없이 내쏘았다.
《말해보오.》
한철준은 어깨를 떨구었다.
《부사령관동지, 이젠 제2방안으로 넘어가기엔 때가 늦은것 같습니다.》
《?…》
《병사들이 지쳤습니다. 이제 저 험한 신발고지를 넘자면 시간도 모자라거니와 중도에서 다 쓰러지고말것입니다.》
장대한 사나이는 이 순간 몸이 졸아든듯 지어 맥없고 체소해보이기까지 했다.
강무전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동무생각은 지적된 시간내에 다리목으로 접근하는것이 불가능하다는거요?》
《정황은… 이렇습니다.》
《?!…》
《?!…》
그 순간 그들이 마주 서있는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비옷모자를 벗어젖힌 리만순정치위원이 비물에 번들거리는 지휘땅크의 무한궤도우에 올라선것이 눈에 띄였다.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그를 올려다보며 웅성거리고있었다. 강무전과 한철준은 서로 마주보고나서 그쪽으로 몇걸음 다가갔다.
비바람이 지나가면서 리만순이 걸친 비옷을 기폭처럼 날리였다.
리만순의 석쉼하면서도 느린 음성이 비발속에 울려나왔다.
《동무들, 지휘관들과 병사동무들! 우리는 지금까지 최고사령부의 작전구상에 따라 맡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항일의 오중흡7련대원들처럼 <적>을 꼬리에 달고 군부대의 작전을 원만히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말입니다. 이게 <오중흡7련대>칭호를 쟁취한 부대 대원답지 않습니까? 동무들! 지금 하고있는 전투훈련은 현재 우리 조국이 엄혹한 시련과 난관을 뚫고 과감히 헤쳐나가는 영웅적인 강행군과 이어져있습니다. 동무들! 동무들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전투임무를 잘 수행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장군님의 훈련명령을 관철하기 위한 중대한 새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헤쳐온 길보다 더 험준한 준령을 넘어 결전진입계선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동무들! <오중흡7련대>동무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계시오. 우리가 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수 있겠는가? 난 동무들에게 물어보오!》
《정치위원동지, 임무를 주십시오. 뚫고나갑시다! 합시다!》
앞에 서있던 한 병사가 격정에 넘쳐 소리질렀다.
여기저기서 열광에 찬 목소리들이 윽윽 대고 함성이 터져올랐다.
최명진이 땅크무한궤도리대우에 올라 주먹을 부르쥐고 웨쳤다.
《위대한 김정일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병사들은 어깨와 어깨를 겯고 성벽처럼 뭉쳐 심장에 불을 지른듯 열정과 감격에 겨워 화답하였다.
그러자 그 모든 함성들이 마감에는 하나로 합쳐져 강렬한 포성처럼 천지를 메아리친다.
《결사옹위! 김정일!》
《결사옹위! 김정일!》
…
한철준상좌는 강무전의 곁에 우뚝 굳어져서 술렁이는 바다처럼 활력이 넘치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고있었다. 무엇인가 심장 한구석이 아파나고 귀뿌리가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러고보면 자기는 저 병사들보다 얼마나 낮은 곳에 서있는가? 처음으로 덩지 큰 집단을 맡아안고 벌써부터 난관과 명예를 생각했던 그 어리석음과 근시안, 협애성이 이 순간 낱낱이 조명되면서 자신에 대한 쓰거운 환멸감이 솟아올랐다.
리만순이 무한궤도에서 내려서자 옹색해있던 강무전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잘했소!》
《제가 너무 과장하지 않았습니까?》
리만순이 미소를 짓고 옛 부대장을 바라보았다.
강무전이 머리를 세괃게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야! 과장이 아니요. 우리가 청맹과니가 돼서 보지 못했을뿐이요. 이 모든것, 동무들의 지금까지의 행군도 앞으로의 임무수행도 다 최고사령관동지의 훈련명령을 받드는 영예로운 길이라는것만은 명백하오.》
좁은 길이여서 반대방향으로 철갑의 대오를 돌려세우는것이 문제였다.
한철준이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머리를 짤 때 리만순정치위원이 최명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구두쟁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 하지만 내 진짜 <제갈량>을 데려왔소. 이 공병분대장이야길 들어보오.》
지휘관들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주밋거리는 최명진을 마지 못해 올려다보았다.
《어서 말해보오. 명진분대장동무.》
한철준이 심드렁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땅크대렬을 돌려세우느라 하지 말고 이렇게 가자는겁니다.》
《뭐? 그건 무슨 소리야?》
최명진이 손으로 땅에다 벅벅 그어가며 간단히 설명했다.
한철준은 그만 활짝 웃어버리고말았다. 듣고보니 너무도 간단하고 싱겁기 그지없다. 하긴 새것의 발견이란 항상 평범하고 지나치게 단순한것이다.
철갑의 대오는 방향을 바꾸어 일정하게 되돌이하다가 익측의 깊은 협곡으로 들어섰다. 협곡이 끝나는 곳이 바로 신발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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