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전환 제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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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눈, 눈이 내리고있다.
바람 한점 없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눈이 내리고있다. 무게가 잔뜩 실린 향나무가지에도 발이 빠질만큼 두텁게 쌓인 보도우에도 그리고 언제나 검게만 보이던 지붕들에도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있었다.
비가 오면 앞날을 생각하게 되고 눈이 오면 추억에 잠기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어쨌든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밤이였다.
창가에서 물러나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집무탁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시였다. 책상에는 여러가지 서류들과 신간도서들이 놓여있지만 거기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오늘따라 여러가지 생각을 더듬게 되시였다. 크고작은 문제들이 각이한 양상을 띠고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며칠전에 있은 엄한정과의 담화만은 계속 뇌리에 갈마들면서 무시로 신경을 자극하고있다.
한낮처럼 밝은 이 정의로운 로동당시대에 자기 마음에 없는 연극을 담당할수 없다는것으로 해서 연출가가 벌목공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생겨났고 며칠전에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문제때문에 허담이 찾아왔던것이다. 이렇듯 비정상적이고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모두 높은 직책상 권위를 걸고 감행되고있다는 거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현상들을 요약해보면 결국 혁명과 건설에서 당의 령도적역할문제에로 귀착되고있음이 명백하였다.
우리 당이 창건된지 어언 20년. 그동안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을 겪었고 혁명도상에는 적지 않은 난관과 곡절도 있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였고 현재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김정일동지께서는 내외의 정세를 종합분석한데 기초하여 우리 당이 명실공히 자기 사명을 다하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시였다.
당이라고 할 때 그에 대한 해석이 여러가지가 있다. 정당의 조상은 영국이라고 주장한 정치학자 바카의 견해도 있고 정당은 의회주의자들이 낳은 사생아라고 한 미국의 후리드리후의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맑스로부터 시작해보아도 결코 간단치 않은 력사를 가지고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당은 리념을 같이한 정치적조직체이다. 로동계급의 당은 계급투쟁대오의 참모부이며 로동계급의 전위부대이다. 이것은 물론 그자체로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본질, 그 핵을 찌르지는 못한 일면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당이 로동계급의 최고형태의 정치조직이라고 하자.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 창건자이며 령도자인 수령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하고 김정일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최근에 있은 심상치 않은 일들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업과정에 있을수있는 어떤 실책도 아니며 어느 누구의 견해상착오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도 아니다. 그런즉 이것은 그 어떤 딴생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만들어낼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태인것이 분명하다. 사사건건 일어나는 그 맨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현시기 가장 큰 위험성을 띠고있는 수정주의사상을 비롯한 온갖 잡사상이 깔려있다는것을 즉시에 알수 있게 된다.
《똑똑똑…》 문기척소리가 났다. 응대에 뒤이어 가볍게 문이 열리더니 허담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람보다 안경이 먼저 나타나군한다는 그였는데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허담의 눈은 빛나고 온몸에서는 정열이 내뿜기였다.
《어떻게 이렇게 한밤중에…》
《매우 긴절한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긴절한 용무라구요?》
그이께서는 의아해서 받아외우시였다. 허담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속생각이 있는 모양이였다.
허담이 이따금 재밤중에 그이를 찾아오군하였는데 일이 있어 찾아오기보다는 그이께서 계속 밤이 지새도록 일을 하는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따라 생각이 더 깊어지는게 있어서 그럽니다.》
《생각이요? 하긴 눈이 오니까요.》
언제인가 김정일동지께서는 눈오는 밤에는 저절로 추억에 깊이 잠기게 된다고 하신적이 있으시였다.
《별건 아니구요. 어떻게 하면 국제공산주의운동안에서 불어치는 수정주의역풍을 막고 우리 당을 끄떡없는 당으로 만들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허담은 언제인가 재밤중에 외무성청사에 찾아오시여 하신 그이의 말씀을 회상한것이였다.
《그건 그렇고 용무라는건?》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그저 퇴근하는걸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벌써 12시가 넘었습니다.》
《그래요?》
(퇴근하는것을 보는것이 간절한 용무라?)
많은 뜻을 담고있는 그 《용무》에는 가슴뜨거운 진정이 담겨있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감사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내가 속한 당세포비서동무한테서도 의견을 듣고있습니다. 그러나… 부상동무, 저의 물음에 하나 대답해주시오. 제가 하는 사업이란 결국 수령님의 로고와 심려를 덜어드리자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편안히 지내면 그 부담이 고스란히 수령님께 돌려지게 됩니다. 그래도 일없겠습니까?》
《…》
허담은 순간에 입이 얼어붙고말았다. 불덩어리같은것이 뜨겁게 목으로 올리밀었던것이다. 허담은 천천히 그이께로 다가갔다.
《뜻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밤을 패는것도 한두번이지 어떻게 매일같이.》
그래도 그이께서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되자 허담은 그이앞에 놓인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정 그렇다면 오늘만이라도 이만하고 일어나주십시오.》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용무라는것이 그게 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100년사상사총화 그게 지금 어떻게 되고있는지…》
《아, 그거요. 잘 진척되고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그저 그렇구나 했는데 차츰 심화되고보니 역시 그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1년 거진 돼오는데 맑스, 엥겔스 저작들은 절반이상 진도가 나갔습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현대수정주의자들의 견해에 독성이 많고 또 그들이 악랄하게 책동하고있다는것이 알립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저자신은 그런 중요한 일에는 끼여들지 못하고 동서방 여기저기 밤낮 뛰여다니기만 하잖습니까. 무사분주지요.》
《무슨 좋은 소식이 없는가요?》
《좋은 소식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여느때처럼 책을 몇권 구해가져왔습니다.》
허담은 가방을 열어 소설책 세권을 내놓았다. 그리고나서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였다.
《요새 가만 동향을 보면 제국주의자들이 더 음흉하게 나오는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반쏘, 반공깜빠니야를 완화하는척하면서 각방면으로 사상문화적침투를 강화하고있습니다. <대량보복전략>으로부터 <유연반응전략>으로 각도를 약간 돌리였습니다. 사상문화적공격을 강화하는겁니다. 동유럽나라들에는 미국화장품들이 물밀듯이 쓸어들어오고있고 미국식생활양식이 류행하고있습니다.》
이윽고 허담이 봉투에 넣은것을 꺼내였다. 끼우개에 물린 서류인데 몇장 되지 않는 타자본이였다.
《요새 쏘련에 나돌고있는 흐루쑈브의 <6대과오>라는 자료입니다. 참고될것이 별루 있을것 같지 않습니다만.》
김정일동지께서 자료철을 펼치며 말씀하시였다.
《그에 대해서는 흐루쑈브를 해임한 며칠후 전원회의에 관한 당보의 보도에 다 나있잖습니까?》
《그런데 여기는 좀더 자세히 내놓은것 같습니다. 정치국회의보고서니까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 <쁘라우다>에는 주관주의자, 정신착란자, 허풍쟁이, 개인숭배자, 관료주의자라고 했고 정치적착오에서 까리브해위기 등을 들었는데… 아하, 여기는 맨처음에 개인숭배에 대한것을 지적했군요.…》
그이께서는 자료를 보시였다. 흐루쑈브의 <6대과오> 1964년 10월 14일부 정치국회의에서 제기한 쑤슬로브의 보고에서 첫째,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조성. 둘째, 자기만 아는체하고 사람들을 닦아세우거나 권력으로 억압. 셋째, 말을 망탕하고 고집을 부리고 자주 경솔하게 처신하는것. 넷째, 공업관리를 되는대로 하여 생산의 계통적저하를 초래한것. 다섯째, 잘못된 가격정책의 실시, 그로 인한 축산물생산의 급격한 감퇴. 여섯째, 농업지도에서 혼잡조성, 그로 인한 알곡생산 저하… 원사, 교수, 박사인 력사학자 메드베제브의 증언에 의하면 흐루쑈브는 1963년에만도 120회나 자기 사진을 당보에 내도록 하였다. 1964년은 4월에까지에만도 140회를 내였다. 반면에 쓰딸린은 년평균 10회내지 15회뿐이니 흐루쑈브는 그의 10배이상…
잠간동안에 자료를 다 읽고난 그이께서는 웃몸을 뒤로 제치면서 쓴웃음을 지으시였다.
《이걸 읽고보니 참으로 생각되는바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쑤슬로브의 고충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그것은 6대과오안에 흐루쑈브가 범한 정치적, 전략적 과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잖습니까. 이것은 순전히 문학적입니다. 흐루쑈브가 어떤 인간인가. 이를테면 흐루쑈브는 쏘련공산당이라는 크고 권위있는 당의 총비서자격이 없다, 인간됨됨을 보라, 이런 식입니다. 한편 쑤슬로브가 그렇게밖에 나올수 없었던 사정은 현시대의 평가에서 제국주의본성이 변했다든가, 핵전쟁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 또 적아간의 력량타산을 해보니 이제는 프로독재가 필요없다는 등등의 과오에 대하여서는 말할수 없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것에 대해서는 그들모두가 공모한것이기때문입니다. 이런정도로 만들자니까 그들의 고충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수 있잖습니까. 그리고 이 6대과오를 분석해보면 총비서자리에는 변동이 있을수 있겠지만 정치로선상변화는 전혀 없을것이라는것이 명백해집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해석이…》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담이앞으로 나서시였다.
《이제 우리는 100년사상사총화에 대한 중간단계의 결속을 인차 지으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혁명에서 수령 그리고 당건설에서 수령의 지위와 역할에 관하여 론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혁명에서 원칙적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고있습니다.》
한껏 근엄했던 허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몸가짐을 하고 그이께서 내놓은 의견에 전적인 동의를 표시하였다.
잠간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허담은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지금 밖에서는 눈이 오고있습니다.… 기왕 왔던김에 한가지 알려드릴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약 한달반동안을 기한으로 서아프리카 몇개 나라에 갔다오게 됩니다. 용무는 그 나라 실정을 더 자세히 알아보는 한편 신흥세력나라들간의 호상협조를 강화하는 방도를 모색하는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있습니다.》
잠시후 그이께서는 현관을 나서시였다. 눈은계속 내리고있었다. 현관에서 몇걸음 나서신 그이께서 손을 펴서 앞으로 내드시였다. 햇솜같은 눈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그이께서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허담이쪽으로 돌아서시였다.
《눈오는 밤길을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이런 밤이야 발등을 적시면서 걸어야 제멋이 날게 아닙니까? 》
《좋습니다. 찬성입니다.》
그이를 앞세운 허담은 한걸음 사이를 두고 따라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정문을 지나 대동강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검은색 외투에 역시 같은색의 털모자를 쓰시였다.
눈, 눈이 내리고있다.
어느덧 유보도를 따라 련광정쪽으로 올라가게 되시였다. 강가에 드문드문 서있는 무리등이 가까스로 어둠을 물리치고있다. 그것으로 해서 강기슭에는 꿈결같은 신비경이 펼쳐졌다. 설경이 좋아서 그런지 밤이 깊었는데도 사람의 래왕이 그치지 않았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이따금씩 좌우를 살피군하시였다. 어데를 보나 모두 낯익은것들이였다. 이제는 한껏 자란 수양버들도 그렇고 재간스럽게 쌓아올린 강뚝의 산보길도 모두 정다웠다. 앞에서 인적기가 나면서 털모자와 어깨우에 눈이 잔뜩 쌓인 청춘남녀가 걸어오고있었다.
《허담동무는 스키나 스케트 같은것을 탈줄 압니까?》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웬걸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헤염은 칠줄 알겠지요.》
《그것도 모릅니다. 물에 들어서면 저는 돌덩이와 같습니다.》
《아하, 그건 정말 그래선 안되겠는데요.》
《그대신 저는 땅속에서는 훌훌 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럴 사연이 있습니다.》
《흥미있는데요.》
이렇게 되여 허담은 《땅속에서 훌훌 난다.》는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가 나서자란 이야기를 하게 되였다.
…허담은 서울에서도 한쪽구석에 썩 나앉은 왕십리라는 빈민굴에서 나서자랐다. 그때 사람들은 왕십리라고 하면 거지와 빈대가 많은곳으로 알고있었다. 그가 열살을 넘기였을 때 아버지는 지게 하나에 가산을 몽땅 올려놓고 정처없이 길을 떠나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게 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황해도 골짜기 신평이라는데 이르게 되였다. 중석광이 많이 매장되여있어 백년은 문제없다 하여 백년광산이라는데 이르러 다섯식구가 살아갈수 있는 움막을 짓고 가마를 걸었다. 아버지한테 끌려 광산로무계에 찾아간 허담은 《너 몇살이지?》 했을 때 얼결에 《열여덟입니다.》라고 해서 허양 다섯살이나 나이를 불궈놓았다.
《키가 좀 작기는 하지만 해볼테면 해봐. 오늘부터 너는 노미도리 (정대운반공)다!》라고 하며 안경쟁이가 허담의 엉덩판을 철썩 갈기였다. 그때부터 허담은 자기 키보다 훨씬 큰 정대를 두세개씩 메고 끌고 해서 채광막장으로 드나들게 되였다. 간데라불이 꺼지면 먹물속같은데를 손으로 더듬어 앞으로 기여나가군하였다. 그 과정에 후각이 발달하여 공기냄새를 맡고도 길을 가릴 정도로 되였다. 이렇게 되여 땅속에서는 어데라없이 마음대로 찾아다닐수 있는 자신심이 생기였던것이다.
《지금도 저는 아무리 캄캄한 밤이라 해도 길을 헛드는 법이 없습니다.》
허담은 약간 어줍은 낯빛이기도 하지만 자기 경력의 한토막을 서슴없이 내놓았다.
《아!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고보니 땅속에서 훌훌 난다는 말이 믿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물속에서 헤염치는것보다 더 나을것 같습니다.》
《그저 그런거지요. 망국노의 신세가 준거니까요.》
허담은 서글프게 웃음을 지으며 그이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저는 이번에 아프리카를 한바퀴 도는 기회에 전번에 일깨워주신대로 수령님의 권위를 옹호하고 빛내이는 높은 안목으로 대외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많은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일에서 자기자신을 채찍질해야겠다는 립장에 서게 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상동무는 백전백승의 무기를 걷어쥔셈입니다. 언젠가 손자의 병법이라는것을 보니까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요,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백전백패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만을 알면 이길수도 있고 질수도 있다. 이렇게 되여있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허담은 명랑하게 웃었다. 그의 외투어깨에 내려앉았던 눈이 떨어져내리였다.
《자, 그럼 이젠 여기서… 허담동문 저쪽으로 올라서 가야지요?》
《네.》
허담은 헤여지기가 아쉬운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하였다.
《여기서 지체하지 마시고 빨리 댁으로…》
《알겠습니다.》
허담이 눈발속으로 사라졌으나 그이께서는 어째선지 이 눈내리는 강반에 더 오래있고싶어지시였다.
인적기가 나서 돌아보니 저만치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퍼그나 깊었는데도 설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다니고있다. 거리가 차츰 가까와지자 움직이는 그 형체는 더 뚜렷이 륜곽을 드러내였다.
두개의 그림자가 떨어졌다붙었다 하는것을 보면 한가한 걸음같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길을 비켜주고섰노라니 한쪽은 군복을 입은 남자이고 다른 한쪽은 흰 머리수건을 쓴 녀인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혹시 어데를 다친 부상자를 부축해오는게 아닌가 생각되여 급히 다가가시였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다리를 다쳤습니까?》
저쪽에서 무어라고 대답을 하기는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좀더 다가가 물으시였다.
《다리를 다쳤는가요?》
《아 아닙니다. 그저!》
군인이 고개를 들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는데 부축을 당한 녀인은 입김을 훅훅 내불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있다.
《혹시 다리를 다쳐서 부축해가는가 했습니다.》
《아니지요. 늙으시니 고집이란 참말…》
하고나서 장화를 신은 군인은 녀인의 어깨에서 눈을 털어주고있다.
《지금 우리 어머니는 강행군을 하고있답니다. 그렇지요. 행군이지요.》
젊은 군인은 우연히 만난 고마운 손님에게 스스럼없이 롱말을 하고있다.
《행군을 한다구요?》
《그렇습니다. 뻐스에 앉으면 잠간사이에 갈수 있는데 언제 이런 눈내리는 밤을 다시 만날수 있는가고 하면서 끝내 걸어가자고 해서… 선교에서부터 이렇게…》
아들이 행군이라고 불러주는통에 한층 더 신바람이 난 녀인은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모양 목에 감았던 머리수건을 벗어들었다. 그바람에 코마루가 덩실하고 아래턱이 기름한 얼굴이 활짝 드러났다.
《아니…》
김정일동지께서는 흠칫 놀라시였다.
《이게 누굽니까. 김명화어머니가 아닙니까?》
그이께서는 결코 빗보지 않으시였다. 그렇게 되자 저편 군인과 녀인은 너무 놀라서 그런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한밤중에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이름까지 부르며 알아보았던것이다. 군인은 어느새 알아보았는지 발뒤꿈치를 모으며 경례를 붙이였다.
《아니…》
녀인은 눈이 잔뜩 묻어 말박만 해진 털신을 옮겨짚으며 한걸음 다가서서 이쪽을 찬찬히 쳐다보는것이였다.
《접니다. 정일입니다.》
《아이구나, 이거 한밤중에 백두광명성이!…》
녀인은 팔을 벌리고 다가서더니 이쪽의 어깨를 와락 그러안는것이였다. 이런 밤중에 이런데서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다리를 상한게 아닙니까?》
김정일동지께서 물으시였다.
《아니지요. 그저 늙은게 그래보는건데…》
《그런데 행군이라는건…》
《글쎄말이오다. 로망을 해서 그런지 눈오는걸 보면 자꾸 밖에 나오고싶어지지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밤중에…》
《저도 눈오는 밤이 그리워서 거닐던중입니다.》
《그것보지. 생각은 누구나 다 비슷한걸… 이사람아, 들었나?》
김명화는 아들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차를 타지 말고 숫눈길을 걸어보자고 하니까 한다는 소리가 그건 로망입니다 하더라니까. 산에서 싸운 사람들은 눈오는걸 보면 마음이 들떠서 가만있지 못한다우. 그래서…》
《그래서 행군을 하던중이군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지 다리라도 혹시 삐게 되면 고생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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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아직은 일없다우. 천식기가 있어 숨이 좀 차서 그러지… 이렇게 만나고보니 해방후 일이 생각나누만. 해방된 이듬해였지. 토지개혁을 하기 착 전이니까 2월말경이였어. 그때도 어머님이 밖에 나가보자고 해서 밤중에 여기 대동강가에 나와서 눈을 맞으며 행군해보았드랬소… 빨찌산시절처럼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노래도 불러보았구. 어머님은 행군두 잘하구 노래도 잘 부르구 총도 잘 쏘시더니… 내가 오늘밤 기어이 눈길을 걷자는것도 그때 어머님생각이 나서 그랬던거라오.》
김명화는 코멘소리를 하면서 목도리로 입을 가리운다. 아무때고 만나기만 하면 김정숙어머님 이야기를 꺼내고 그런후에는 눈물을 보이고야마는 녀투사였다.
《그럼 오늘은 저와 같이 걸읍시다. 제가 대신하지요!》
김정일동지게서는 팔을 부축하여 앞으로 내끄시였다. 몇마디만 더하게 놔두면 틀림없이 오열이라도 터치게 될것 같으시였다.
함박눈은 계속 펑펑 쏟아져내리고있었다. 발을 옮겨짚을 때마다 눈가루는 량쪽으로 갈라지고 그밑에서 굳어진 눈이 빠드득빠드득 소리를 냈다. 이따금씩 버드나무가지가 쳐져내리면서 눈가루가 허공에서 날리기도 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녀인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겨나시였다. 행군이라고 말을 붙여 그런지 평탄한 유보도가 아니라 어떤 령마루에라도 오르는것 같은 기분에 잠기시였다.
《우린 정말 걸음을 많이 걸었어. 밤에도 걷고 낮에도 걷고 비가 와도 걷고 눈이 와도 걷고…》
환갑을 넘긴지 오랜 녀인인데도 설경이 불러오는 감흥은 역시 류다른 모양이였다.
《그런데 우린 지금 줄창 방안에 들어앉아만있거든…》
《어머니! 지금도 항일유격대처럼 우리 군대는 쉬지 않고 행군을 계속하고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하기야 그렇겠지.》
《어머니! 건강에 조심하십시오. 먼저 간분들의 몫까지 합쳐서 오래오래 앉아계셔야지요.》
《고맙소. 그런데 수령님 건강을 잘 돌봐드려야 하는건데… 하기야 가까이 모시는분들이 어련하겠소만… 우리가 보건대 수령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것 같아. 언제나 공장, 광산길을 걸으시고 온 나라 방방곡곡 찾으시니… 참, 더 말은 하지 않겠소. 부탁이요, 부탁…》
김명화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끝내였다.
《이젠 다 왔습니다. 대동문입니다. 오늘밤 행군은 이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렇지요, 어머니!》
아들은 역시 군대식으로 발을 모으고 경례를 붙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창광고개를 향하여 혼자 걸음을 내짚으시였다. 인도로에는 눈이 한벌 덮이였다. 이제는 사람래왕이 거의 없어졌다.
눈내리는 밤, 어머님! 김명화가 우연히 튕겨놓은 추억의 금선은 또다시 떨리였다. 그이께서는 눈이 오면 어머님을 생각하실 때가 많았다.
어머님께서는 눈을 좋아도 하시였지만 또한 눈과 관련한 사연도 많이 남기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이 터지기전해 2월이였던것 같다. 유치원시절 그무렵이였으니까.
한밤중에 눈을 떠보니 어머님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방에도 웃방에도 부엌에도 계시지 않았다. 아버님방에는 아직 불이 환히 켜져있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였다. 현관에 나가보니 어머니의 신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밖에 나가신것이 틀림없었다.
문을 여니 캄캄한 밤하늘에서 눈이 내리고있었다. 홀연 정신이 팔린 그이께서는 외등불빛에 비쳐 현란한 광경을 펼치고있는 어둠속을 한참이나 내다보고있었다.
얼마간 그러고있는데 어둠속에서 《왜 나왔느냐?》 하는 어머님의 정다운 목소리가 들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솜동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어머님이 현관앞으로 오시였다.
어머님께서는 스스로 야간호위를 서고계시였던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알수 없지만 비바람이 불거나 눈보라치는 날이면 이렇게 밖에서 꼬박 밤을 새군하시였다. 《별일 없다. 들어가 자거라.》
《아니, 나두.》
《그럼 솜옷을 입고 나오너라.》 어머님께서는 손짓을 하시고는 담장쪽에 있는 백양나무밑으로 걸어가시였다. 어리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방안에 들어가 솜옷을 입고 어머님이 있는곳으로 다가가시였다. 어머님께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담장모퉁이에 서 계시다가 이따금씩 집주위를 돌군하시였다. 그럴 때면 그이께서도 옆에 붙어 따라가군하시였다.
눈이 내리였다. 함박눈이 사정없이 쏟아져내리였다. 난데없는 한줄기 바람이 휘익 불어닥치였다. 그통에 백양나무가지가 흔들리며 눈가루가 뽀얗게 날리였다.
어리신 김정일동지께서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어머님의 허리를 붙잡으시였다.
《왜 춥냐?》 어머님께서는 손을 잡아 돌려세우면서 뒤를 이으시였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그러면 춥지 않다. 견디여내야 해. 이전에 빨찌산들은 박달나무가 얼어터지는 추위속에서도 숙영도 하고 행군도 했단다.》
다시 걸음을 옮기여 그이께서는 어머님의 손을 붙잡고 마당을 한바퀴 도시였다.
《정일아! 너는 눈을 좋아하지?》 하고나서 어머님께서는 솜옷자락을 여며주면서 계속하시였다.
《후날 백두산에 가자. 거기 가면 밀영자리를 볼수 있을게다. 너는 백두산의 소백수골안이라는데서 이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아침에 태여났다. 그래 그런지 너는 나서부터 눈을 좋아했다. 그렇지?》
어리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언젠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시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대동문이 바라보이는데서 걸음을 멈추고 동평양쪽을 바라보시였다.
밤은 하염없이 깊어갔다. 어데서도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머님께서는 수령님을 호위하기 위해 항상 마음을 쓰시였다. 한생을 그렇게 살아온 어머님이시다. 적탄이 비발치는 항일전의 나날에나 그리고 해방이 되여 반동들이 살판치는 그 삼엄한 속에서 호위에 호위를 계속하시였다.
해방직후 조만식이와 면담하는 날 밤에는 창문으로 총탄이 날아들었고 역전광장에서 연설하실 때 수류탄이 머리우로 떨어지는 형편이였으니까. 그런 속에서 수령님의 안녕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으신 어머님… 어머님… 그런데… 그런데 이 김정일은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것인가? 현시점에서 수령님을 호위하는것이란 신변의 안녕을 지키는것과 함께 당, 우리 당을 그 어떤 풍파에도 드놀지 않게 보위하는것이 아니겠는가… 명실공히 수령님의 의도대로 당이 꾸려지고 활동하도록 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실태는…
그이께서는 뜨거운 입김을 내불며 결연히 고개를 드시였다. 깊은 사색에 잠긴 그이께서는 만수대고개를 넘어 댁으로 들어가시였다. 현관에 들어서서 발을 구르고 모자를 벗어 어깨와 가슴의 눈을 터시였다. 어떻게나 눈이 많이 왔는지 설기떡같은 눈덩이가 와실와실 떨어져내리였다.
그이께서는 방안에 들어서는참 탁자우에 놓인 록음기의 단추를 누르시였다. 이미 흠뻑 몸에 배인 은은한 전주가 울리더니 노래소리가 시작되였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문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해
그이께서는 창가에 서서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밖을 내다보시였다. 세상만물이 다 희여진 꿈속같은 세계였다. 그토록 다양한 모습으로 그토록 많은 뜻을 나타내였던 자연은 하나의 색으로 물들어 오직 순결성만을 보이고있는것이다.
캄캄한 밤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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