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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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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922회 작성일 21-05-0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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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7

 

집에 돌아오니 출입문이 잠겨져있었다. 초인종을 눌렀으나 집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비여있는것이 분명했다. 여느날은 늘 먼저 돌아온 딸애가 저녁을 지어놓고 아버지를 기다리군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학교에 저녁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할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고중환은 옷주머니들을 뒤지며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에 간수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딸애보다 먼저 출근을 하고 늦게 돌아오는 고중환은 열쇠를 사용해보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옷주머니를 뒤졌으나 열쇠를 찾을수 없었다. 그는 손맥이 풀려서 한순간 문앞에 서있었다. 무슨 사정이 있기는 하겠지만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는 딸애가 원망스러웠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딸애를 무작정 기다리며 그냥 서있을수는 없었다. 다시 옷주머니들에 손을 넣어 찬찬히 더듬어보았다. 그러던 끝에 혁띠밑의 작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았다. 회중시계를 넣기 위해 만든 주머니였다. 깊숙이 간수하느라고 거기에 넣어둔것인데 기억을 되살리지 못했던것이다. 잃었던 보물을 찾은것처럼 기뻤다. 방금전까지 딸애한테 품었던 원망도 가셔지고 도리여 그 애가 자기 생활에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새삼스레 느꼈다. 집안에 들어가서 딸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가정에서나 저녁이면 직장과 학교에서 돌아온 식구들로 흥성거리기마련이지만 고중환의 집안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저녁마다 반겨맞아주던 딸애마저 없고보니 전에없이 쓸쓸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상실의 비애가 남겨놓은 마음의 상처에는 어지간히 덕지가 앉았지만 안해가 차지했던 생활의 공간은 텅 비여버린채 지워질줄 몰랐다. 느닷없이 울리는 출입문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아버지!》

반가운 부름소리를 앞세우며 향미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늦어져서 미안하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어지간히 들뜬 기분이였다.

《어델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오느냐?》

부지중에 이런 꾸짖음이 튀여나갔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어린것에게 가정의 부담을 지워놓고도 좀 늦어 돌아왔다고 성을 낸것이 마음에 걸리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은게로구나.》

고중환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울리였다. 불가피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늦어 돌아올 향미가 아니였다.

《지난 한주일동안 푼 수학문제를 가지고 정금화선생님을 찾아갔댔어요. 선생님과 수학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시간가는줄 몰랐어요.》

《그랬댔구나.》

향미는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선생님은 제가 푼 수학문제를 검열해보시더니 칭찬해줬어요. 1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보다 수학공부를 더 잘한다고 했어요.》

고중환은 눈웃음을 그리며 자랑스레 말하는 딸애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애가 들뜬 기분으로 방안에 들어서던 까닭을 비로소 알았다.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잘한다는 교원의 칭찬을 받을 때보다 더 기쁜 때는 없는것이다.

《일반중학교엘 다니면서 1중학교 수학교재를 배우려고 애쓰는 네가 기특한 나머지 정도이상으로 칭찬을 하였겠지.》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게 공부를 잘하면서 왜 1중학교 입학시험을 치지 않았는가고 물으셨어요.》

《그래 사실대로 말했니?》

《대답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향미는 입술을 비죽이 내여물며 눈을 곱게 할기였다. 어떻게 사실대로 말할수 있느냐는 뜻이였다. 고중환은 가슴에 마쳐오는 짜릿한 아픔을 느끼며 시선을 떨구었다. 응당 1중학교에 갈수 있는 딸애의 앞길을 자기의 잘못으로 가로막은듯 한 막연한 죄책감이 치밀었다. 어머니가 있다면 또 모른다. 어린것이 집안일을 맡아하면서 일반중학교 과목공부를 하는것외에 1중학교 수학공부까지 하자니 얼마나 힘에 부치겠는가.

《너 배고프겠구나. 어서 저녁을 지어먹자.》

고중환은 딸애를 도와 저녁을 함께 지을 작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고중환은 번거로운 사업에서 풀려나 휴식의 한때를 보내였다. 그는 자기 사무실 서가에서 양장을 한 두툼한 책 한권을 찾아들었다. 지금처럼 일정한 시간여유를 얻게 되면 늘 독서를 하는것이 굳어진 버릇이다. 젊어서부터 오락이나 체육에 취미가 없었던 그는 독서를 제일 좋은 휴식으로 알고있었다. 보고싶던 책을 보면서 그 세계에 잠기면 사업에 몰두하던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책임적인 일군으로 사업한지도 퍽 오래되였지만 전공학문에 대한 미련과 애착은 버릴수 없었다. 금속공학에 접하면 그 학문에 열정을 쏟아붓던 청춘시절로 되돌아가는듯 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는 흘러내린 돋보기를 바로잡고 책을 펼치였다. 전부터 틈틈이 보던 책인데 로문판으로 최근에 간행된 《21세기의 금속재료》였다. 그 책은 표제가 말해주는것처럼 금속재료의 21세기 발전추세를 서술했다. 그중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것은 21세기 금속의 왕좌에 철을 대신하여 티탄이 오르게 되며 모든 금속가공에서 현재의 압착가공이나 분말가공대신 초소성가공방법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이였다. 우리 나라에서 티탄합금초소성가공문제가 초미의 연구과제로 나서고있기때문에 특별히 주의깊게 읽어나갔다. 전화종이 울리였다. 고중환은 책에 시선을 준채 수화기를 귀가에 가져갔다.

《접수실입니다. 1중학교에서 정금화라는 녀교원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가? 일요일에는 보통 특별히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외부손님을 접수하지 않기로 되여있다. 그런데 접수실에서도 거절할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들여보내시오.》

잠시후에 정금화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산뜻하게 봄철옷차림을 한 그는 전에없이 품위있고 현숙해보이였다.

《부부장동지, 안녕하십니까.》

그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이제는 구면이여서 스스럼없는 표정이였다.

고중환은 친절히 의자를 권하며 그가 이 사무실에 두번째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국제수학올림픽참가문제를 가지고 처음 왔던 그날 자기의 그릇된 견해때문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커다란 실망을 안고 문밖을 나설 때 그는 금시 울어버릴듯 한 모습이였다. 그 모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고중환은 우리 학생들이 국제수학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온 며칠후에 평양제1중학교에 나갔다. 그들을 열렬히 축하해주고나서 정금화에게 사무실에서 있었던 그날의 일을 사과했다. 그러자 정금화는 오히려 당황해하면서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십분 그럴수 있었던 일인데 뭘 그러십니까.》

고중환에게는 그러한 태도가 뜻밖이였다. 국제수학올림픽에 정식성원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을 할 때의 그는 당돌하고 지어 도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이렇게 난처해하다니… 원칙적인 문제를 가지고는 자기를 굽힐줄 모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겸손하고 모든것을 너그럽게 리해할줄 아는 녀성이 아닐가? 아무튼 그를 만날 때마다 처음의 인상을 뒤집으며 그의 인간됨을 한갈피한갈피 새롭게 헤쳐보는듯 한 느낌이였다.

《오늘은 접수를 하지 않는 날인데 접수원을 용케 설득시켰습니다.》

여적 서있던 고중환은 빙긋이 웃으며 인사를 대신하는 말을 하였다.

《접수원동무는 제 신분증을 보더니 지난해 국제수학올림픽에 우리 학생들을 데리고 갔던 교원이 아닌가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때늦게라도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면서 이 방에 전화를 걸어주었습니다.》

《아, 그랬댔구만.》

고중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국제수학올림픽에서 돌아온 후 박상수학생과 함께 정금화도 여러 출판물들에 소개되였다. 접수원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학생의 뒤에는 훌륭한 스승이 서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것이다. 그들은 앞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향미학생때문에 찾아왔습니다. 먼저 집에 들렸댔는데 사무실에 계신다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향미때문에?…》

고중환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정색해졌다. 수학공부를 지도해주기는 하지만 향미는 다른 학교의 학생이다. 그런데 그 애때문에 찾아왔다는것이 선뜻 리해되지 않았다. 정금화도 어느새 정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내보니 향미는 수학적두뇌가 비상한 학생입니다. 수학실력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있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중에서도 향미만 한 학생은 몇명 안될겁니다.》

《거야 선생이 과외수업으로 잘 가르쳐주었기때문이지요.》

고중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랬으나 정금화는 그런 치하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아다싶이 요즈음 새 학년도가 시작되고있습니다. 저는 제가 개별지도를 하던 일반중학교의 학생들중에서 두 학생을 우리 학교에 편입시킬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실력을 담보하는 조건에서 우리 학교에서도 초보적인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이 점찍은 두 학생중의 하나가 우리 애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한 학생은 어느 학교 학생입니까?》

《평천구역 봉지중학교 남학생입니다. 오전에는 그 학생의 집을 찾아갔댔습니다. 알고보니 그 학생은 우리 학교 입학시험을 칠 때 유감스럽게도 페염을 앓고있었기때문에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향미처럼 뛰여난 학생입니다.》

《부모들은 뭘합니까?》

《아버지는 화력발전소 열관리공으로 일하고 어머니는 편의봉사사업소에서 리발사로 일하고있습니다.》

고중환은 경건한 마음으로 정금화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자기가 찾아낸 학생들의 재능을 꽃피워주려고 그리도 애를 쓰는 교육자적풍모에 내심 머리가 숙어졌다. 동시에 자기 아들의 장래를 위해 집에까지 찾아온 정금화를 보고 더없이 감격했을 남학생의 부모들이 방불히 련상되였다. 정금화가 말했다.

《다른 학부형과 달리 부부장동지를 찾아오면서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향미와 같은 학생이 우리 학교 입학시험을 치지 않았다는것이 저로서는 리해할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을 물었지만 향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같은데 우선 그걸 말해줄수 없겠습니까?》

조심히 머리를 드는 그의 시선에는 진실을 캐려는 집요한 기대와 호기심이 어려있었다.

《거기에는 가정적인 사정이 깔려있었습니다.》

고중환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그리며 쓸쓸히 응대했다.

《혹시 향미의 어머니가 안계시기때문에?…》

얼결에 그렇게 말한 정금화는 말끝을 감추며 두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우리 애가 1중학교 입학선발시험을 칠 때 지방에 있는 조카애도 도에서 치는 선발시험을 쳤는데 그만 한점이 모자랐습니다.

그때문에 형님이 저를 찾아왔더군요.…》

고중환은 숨김없이 그때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주의깊게 듣고난 정금화는 놀라움에 잠기는듯 하더니 명백한 어조로 말했다.

《제 생각에는 형님이 비난과 원망을 한다 하더라도 그때 부부장동지가 향미를 우리 학교에 보냈어야 한다고 봅니다. 원칙적으로 볼 때 그렇게 하는것이 옳았습니다.》

《생활에서는 원칙이나 론리보다 도덕적감정이 전면에 나서는 때가 있는것입니다.》

고중환은 리해를 바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정금화는 정색한 표정으로 말마디에 그루를 박으며 입을 열었다.

《부부장동지의 그 도덕적감정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재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키우는 사업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와 관련되는 중대한 사업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미래의 수학자로 자라나야 할 한 학생이 아버지의 도덕적감정때문에 그 성장에 지장을 받는다면 교원인 저는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향미를 우리 학교에 편입시키는데 동의하십시오!》

그는 벌써 권고나 의논이 아니라 자기의 의사에 순응할것을 요구하는 자세였다. 적어도 학생의 전도와 교양문제를 두고는 그가 누구이든 학부형인 이상에는 교원인 자기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고있는듯싶었다. 오랜 교단생활에서 교육자의 존엄과 교권을 지켜오는 과정에 굳어진 성품일것이다. 고중환은 도고한 빛조차 흐르는듯 한 정금화의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그의 요구는 어디까지나 정당하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고맙기도 하다. 그러나 때늦게 지금에 와서 향미를 1중학교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쉽게 결심하기가 주저되였다. 그것이 형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낄것인가를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내심을 엿본 정금화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수재는 수만명중에서 한명을 선발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귀중합니다. 우리 나라 과학의 미래를 위해서 향미는 꼭 우리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저한테 이따금 와서 지도를 받지만 그것은 제한을 받지 않을수 없습니다.》

《우리 애가 그렇게 재능이 있다고 봅니까?》

《그렇습니다, 향미가 만일 우리 학교에서 배운다면 의심할바없이 훌륭한 녀성과학자로 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의견대로 합시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학생들의 장래는 부모들이 아니라 교원들이 책임지고 이끌어주지요.》

드디여 결심을 내린 고중환은 헌헌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정금화를 정겨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향미문제와 관련해서 부부장동지한테 또 한가지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기탄없이.》

《며칠전에 향미는 자기가 누구 딸이라는것을 실토하면서 집안사정도 솔직히 터놓았습니다. 어린 학생이 가정부담을 지다보니 학습에 지장을 받고있습니다.》

동정과 련민의 빛이 조심히 실려오는 정금화의 눈빛에 부딪치자 고중환은 가슴이 저릿했다. 그 동정과 련민은 향미를 두고 느끼는 교육자의 감정과 모성의 감정이 한데 어울려진것이다.

《말뜻을 알겠습니다. 사실 그 애한테 몇해째 가정일을 맡기고보니 마음이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인차 향미한테 정상적인 가정환경을 마련해주십시오. 가정주부가 없는 집안에서 향미는 공부하기 어렵습니다.》

정금화의 얼굴에 떠오르는 추연한 빛을 바라보며 고중환은 어두운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렇지요.… 그래야지요.… 향미한테 괴로운 일이 나보다 더 많을겁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사생활의 감정까지 나누게 되였다는것을 그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정금화는 그런 이야기가 더 깊어질가봐 겁내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고중환은 돌발적인 그의 행동을 이상스레 여기면서 아쉬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하지만 정금화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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