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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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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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고중환은 과학원 함흥분원에 나가있었다. 그곳에서 김정일동지의 과학원 현지지도말씀을 관철하기 위한 일련의 조직정치사업을 힘있게 벌리였다.
볼일을 마치고 렬차로 돌아오면서 그는 차창밖으로 흐르는 도시와 마을들을 바라보며 최근의 과학연구성과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러저러한 난관과 애로가 있지만 우리의 과학은 전례없는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함흥분원에서는 며칠전에 탄산소다와 석고를 대량적으로 생산할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았다. 전자공학연구소에서는 불가피하게 다른 나라의 집적회로소자들을 부분적으로 쓰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형의 콤퓨터를 개발했다. 아직은 그것이 앞선 나라들의 수준에 이르자면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의 수준에서는 커다란 전진이라고 할수 있었다.
과학기술혁명의 봉화는 연구기관만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도 거세차게 타오르고있었다.
김정일동지의 발기에 따라 지난 9월명절을 계기로 과학기술축전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무려 71 500여건에 달하는 가치있는 기술혁신안들과 발명론문들이 제출되였다. 이번 축전에 내놓지는 않았으나 락원기계공장에서 생산중에 있는 산소분리기에 적용된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자랑할만 한것이다. 헌데 이런 지표들은 여러해전부터 추진시켜오던것이다. 새롭게 설정한 지표들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함흥분원에 내려갔던김에 9월제련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시원치 못한 소식이였다. 첫 시운전에서 실패했다고 하였다. 초기에 제련소에 내려갔던 림수봉의 말을 들었을 때는 마음을 놓았었다. 그의 과학적권위를 믿었다. 만일 티탄합금가공에서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과학기술발전 3개년계획에 예견된 고도기술개발에서 첫 돌파구를 여는것으로 될것이다. 그러나 시운전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앞으로 어찌될는지 알수 없었다.
갑자기 렬차바퀴소리가 쿵쿵 웅글게 울리였다.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렬차가 금야강다리를 건느고있었다.
바다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멀리 보내는 시야에 누렇게 펼쳐진 벌판이 아득히 안겨왔다. 그러자 지금껏 머리속을 맴돌던 상념을 지워버리며 하나의 애틋한 추억이 떠올랐다. 저 벌판의 한끝에 향미의 외가가 있었다.
고중환은 안해와 함께 그 마을을 다녀온적이 있었다. 풍치수려한 마을이였다. 그는 안해에 대한 생각에 잠겨들며 오래도록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특별히 잊을수 없는것은 청춘시절에 첫사랑을 나누던 때의 일이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생생히 남아있는 법이다. 범상치 않았던 인연으로 사랑이 맺어졌던 고중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전후 대학교단에 처음 섰을 때 고중환은 미혼의 청년이였다. 학생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점잖은 풍모에 강의를 잘하는 그를 존경했다. 그런데 졸업반 녀학생들속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한 학생이 있었다. 고중환이 강의에 들어가면 내처 책상우에 눈길을 떨구고 한번도 주의깊게 쳐다보지 않았다. 제시해준 숙제도 풀어오지 않았다. 몇번 충고를 주었지만 듣지 않았다. 고중환이 배워주는 과목학습을 일부러 태공하면서 교원에게 엇서보려는 앙심을 품고있는것 같았다. 졸업시험때 그 녀학생은 금속공학과목에서 겨우 락제를 면했다. 그런데 다른 과목들의 성적은 비교적 높은편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고중환은 조용한 틈을 타서 녀학생을 강좌실로 불렀다. 졸업을 며칠 앞둔 때여서 이때만은 그가 솔직한 심정을 터놓으리라고 생각했다.
《동무는 다른 과목들의 강의를 성실히 받아왔고 성적도 우수합니다. 그런데 금속공학학습은 왜 태공했습니까?》
늘 외면을 하던 녀학생이 이때만은 뚫어지게 마주보았다. 동그랗게 벌려뜬 눈동자에 강렬한 빛발이 어리였다. 갸름한 얼굴의 살갗도 한껏 붉어졌다. 고중환은 금시 격정을 터칠상싶은 그의 표정에 놀라며 먼저 시선을 떨구었다. 녀학생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소리만이 들릴뿐이였다. 고중환은 마음을 다잡고 정중히 말했다.
《나는 조금의 편견도 없이 동무를 대하여왔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나에게 그 어떤 원망을 품고있는것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선생님앞에서… 어째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드디여 입을 연 녀학생의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어졌다. 다몰아치는 그 무엇에 짓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번지기 어려워했다. 무엇때문에 이처럼 흥분하는가? 철부지도 아닌 과년한 녀대학생이 교원앞에서 스스로도 알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면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리해하여야 하는가? 고중환은 어성을 높였다.
《나는 동무처럼 교원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학생을 처음보았습니다. 동무의 행동은 도무지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녀학생은 참기 어려운 모멸을 당한듯이 아래입술을 감쳐물며 눈물을 머금었다.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무엇을 용서하란 말입니까? 나한테 할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시오!》
《할말이 없습니다.》
《동무는 정말 리해할수 없는 학생입니다. 돌아가보시오!》
아무래도 녀학생의 속심을 알아낼수 없을것 같아서 돌려보냈다. 강좌실을 나서는 녀학생의 입에서 애달픈 탄식이 터지는듯 했다.
그로부터 몇달후였다. 대학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독신자합숙으로 돌아가는데 합숙정문에 그 녀학생이 서있었다. 아니, 이때는 녀학생이 아니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업출판사에 배치된 녀류기자였다.
《아니, 동무가 어떻게 왔습니까?》
고중환은 주밋거리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네였다. 그가 대학시절에는 설명할길 없는 태도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겨주었지만 그것은 지나간 일이였다.
《선생님을 기다렸습니다.》
《나를?… 오래 기다렸습니까?》
《한시간쯤 되였습니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한시간이나 기다렸다면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것이 분명했다. 학창시절에 품었던 그 어떤 원망을 터치려고 온것이나 아닌지…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예상밖으로 부드럽게 안부를 물어주었다. 자신을 수습한 그의 몸가짐과 언행은 어엿했다. 고중환은 자기앞에 숙제를 하지 못해 당황해하던 녀학생이 아니라 기자라는 사회적직분을 가진 처녀가 서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그러고보니 상대는 지난 몇달사이에 학생티를 가시고 성숙된 처녀의 녀성미를 풍기고있었다.
《보다싶이 나는 여전히 건강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그 물음에 처녀의 낯빛이 홀연 달라졌다. 처녀는 머리를 숙이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의젓하고 당당하게 대하려던 방금전 마음의 다잡음이 뒤흔들린것 같았다.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하는 그의 모습은 졸업을 앞두고 강좌실에 불리워왔던 그날을 련상시켰다. 고중환은 야릇한 느낌을 받으며 대답을 기다렸으나 처녀는 그날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튼 날씨가 찬데 내 방으로 들어갑시다.》
처녀는 망설이는듯 하더니 말없이 따라섰다.
고중환의 호실은 2층 남쪽끝에 있었다. 고중환은 호실에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손님에게 권하고 자기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혹시 나한테 원고를 청탁할것이 있어서 왔습니까?》
자신없이 어름어름 말문을 열었다.
《학창시절에는 말할수 없었던 심정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뭐 지나간 일을 가지고…》
고중환은 심상한 투로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자연스럽지 못했다. 자기를 겨누고 뿜겨져오는 처녀의 눈빛이 피부에 스미는듯 했다. 거기에 자극된 심장이 어떤 판단에 앞서 두근거리기 시작했던것이다.
처녀는 용기를 가다듬는듯 아래입술을 한번 깨물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교실에 나타나면 마음의 안정을 잃군 했습니다. 숙제를 하려고 〈금속공학〉교과서를 펼치면 글줄이 아니라 선생님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을 스승으로서가 아니라 련정의 대상으로 여기는것은 학생으로 도덕에 어긋나는 태도라고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선생님한테 품어서는 안될 감정을 품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오래동안 두고두고 가슴속에 벼르어오던 말마디들을 비로소 터치듯이 어조가 절절했다.
고중환은 처녀의 눈굽에 물기가 어리는것을 보았다. 전등빛이 역광으로 반사되는 그 눈물에서 무지개빛이 부서졌다. 고중환은 자기를 두고 남모르게 애를 태웠던 처녀의 고민이 얼마나 컸던것인가를 한순간에 헤아렸다. 그러자 한번도 폭발해보지 못했던 청춘의 정열이 불타올랐다. 온몸이 화끈한 열기에 휩싸이는듯 한 가운데 이처럼 열렬한 사랑을 거역한다면 다른 녀성에게서는 도저히 그러한 사랑을 찾을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학생으로서는 허용하기 어려웠던 그 감정이 기자로 된 지금에는 도덕에 부합되지 않을가요?》
처녀는 눈물이 글썽한 눈을 크게 뜨며 허둥거렸다. 하더니만 숨을 흑 들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달음에 달려와 쓸어안길듯 성큼 다가오더니 눈앞에서 자신을 억제하며 멈춰서버렸다. 반사적으로 고중환도 일어섰다. 호실을 나선 그들은 새로 개업을 한 대동강반의 빵집에서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밤이 이슥하도록 유보도를 거닐었다. 꽃도 록음도 다 져버린 초겨울의 유보도는 이를데없이 한산했다. 얼어붙기 시작한 강폭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일듯이 찼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듬해 봄에 그들은 결혼했다. 그후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언제한번 다투어본 일이 없었다. 다정한 부부, 화목한 가정이였다.…
하지만… 이젠 어차피 재취를 해야 할것이다. 언제까지나 향미에게 가마목을 맡겨둘수는 없다. 그렇다면 첫사랑이 그러했던것처럼 두번째 사랑도 스스로 찾아오지는 않을가?…
평양에 돌아온 고중환은 티탄합금가공설비의 그후 시험생산정형부터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책상 한귀에 양영복박사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자기가 없는 사이 사무실에 도착한 그 편지가 얼마나 오래동안 주인을 기다렸는지 알수 없었다. 일부인을 눈여겨보니 달포전에 부친것이였다. 고중환은 제때에 만나주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듯 한 미안한 감정을 앞세우며 서둘러 편지를 뜯어보았다.
《…병원의 침상에 누운 몸이지만 한가지 안타까운 일이 무시로 마음을 괴롭혀서 그 누구에게 하소할것인가를 두루 생각을 굴리던끝에 붓을 들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금 9월제련소에서 한창 공사를 벌리는 티탄합금의 압착가공설비문제올시다.》
양영복은 자기 주장의 과학성을 증명해보이려는 의도가 앞선 나머지 상대가 티탄합금전문가가 아니라는것을 고려하지 않고 복잡한 기술적문제들과 우리 나라 티탄합금의 물리화학적성질들을 장황히 설명하였다. 고중환은 긴장감을 느끼며 점점 더 주의깊게 글줄을 더듬었다. 편지는 압착가공설비에 대한 합평회가 있을 때의 진상을 자세히 밝히고 이렇게 썼다.
《…그 누구의 잘못을 캐기에 앞서 중요한것은 그 공사를 당장 중지시키고 과학기술토론을 다시 벌리는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지금 시간마다 나라의 귀중한 재산과 로력이 랑비되고있습니다. 내 비록 병석에 누운 몸이지만 과학기술토론회가 다시 열린다면 기여서라도 찾아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공사가 벌어진것을 보았을 때 진작 부부장동지에게 그 무모성을 알렸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워낙 궁냥이 트이지 못한데다가 즉흥적인 충동이 앞선 나머지 손관식소장을 꾸짖고 즉시에 공사장으로 달려가 군중앞에서 황석태비서와 대결하였습니다. 뜻은 이루지 못하고 격심한 충돌끝에 심장병만 심해졌습니다. 나는 때늦게야 초소성방법에 의한 티탄합금가공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하해같은 믿음과 기대를 미처 따르지 못한 나로서는 버젓이 머리를 들고다닐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재산이 탕진되는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세에 급급하여 입을 봉한다면 두번다시 잘못을 저지르는것으로 될것입니다. 날로 짙어가는 고민속에 이 편지를 보내오니 부부장동지가 지체없이 해당한 조치를 취해주기 바랍니다.》
고중환은 편지를 든 손이 후두두 떨리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이런 경우를 예견하시고 광범한 토론을 거쳐 정확한 결론을 주라고 하시였다. 그런데 림수봉은 어찌하여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하였는가? 그에 대한 의분과 불만이 끓어올랐다. 그를 부르려고 전화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다음순간 림수봉이 지금 외국출장중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였다. 고중환은 잠시 생각을 더듬던 끝에 장거리전화로 금속공학연구소 소장을 찾았다.
전화는 몇분후에야 련결되였다. 그 몇분이 10년맞잡이처럼 느껴졌다. 고중환은 재가 일도록 타드는 입술을 혀끝으로 추기며 황급히 물었다. 좀처럼 침착성을 잃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가슴을 옥죄이는 초조감을 어찌할수 없었다.
《소장동무, 림수봉부원장이 내려갔던 그 모임에서 말이요, 황석태동무의 압력에 못이겨서 지금 시운전하고있는 가공법을 지지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전류의 흐름만이 고막을 때릴뿐 응대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소?》
어성을 높였으나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숨결같기도 하고 한숨같기도 한 불쾌한 음향이 가늘게 전류에 실려왔다.
《소장동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오. 소장동무의 견해대로 과학자의 량심을 걸고 어서 말하시오!》
《부부장동지, 용서하십시오.》
마침내 손관식의 짓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물을 필요도 없이 사실은 명백했다. 참을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동무도 학자요?》
《저는 그때 학자로서 주견없이 부끄럽게 처신했습니다.》
《첫 시운전에서는 실패했다는데 그후에는 어떻게 되였소?》
《시운전을 거듭했지만 매번 실패하고있습니다.》
고중환은 전화를 끊었다. 격렬했던 흥분이 숙어들면서 전신의 맥이 탁 풀리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가? 그이로부터 정확한 결론을 주도록 하라는 과업을 직접 받은것은 자신이였다. 자기가 림수봉을 지나치게 믿었기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것만 같았다. 갑자기 목안이 말라드는것 같았다. 움쭉 의자에서 일어나 맥풀린 다리를 가누며 책상옆에 놓인 크지 않은 원탁으로 다가갔다. 보온병의 물을 따라서 몇모금 마시였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였다. 혹시 압착가공설비가 성공할수도 있지 않을가? 이미 시운전에서 실패를 거듭한다지만 최종적인 실패를 단언하기는 어려울것이다. 과학연구사업이란 몇천번의 실패끝에 성공할수도 있는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바에는 그날에 가서 김정일동지께 저간의 사연을 말씀드리는것이 좋지 않을가? 만일 성공하는 날이면 잘못이 훨씬 가벼워질것 같은 타산이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타산이 얼마나 불손한것인가를 곧 깨달았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사태의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한채 일을 처리한 사업상의 과오는 그대로 남아있을것이다. 그것은 무엇으로써도 보상되지 않을것이다.
그날 오후에 고중환은 마음을 다잡고 김정일동지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김정일동지께서 다른 사람과 담화중이여서 그는 대기실 쏘파에 앉아 무릎우에 서류가방을 올려놓았다. 그 가방속에 양영복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이의 집무실에서 목깃이 닫긴 회색양복을 입은 손님이 나왔다. 해볕에 그을린 고동색살결과 소박한 차림으로 보아 어느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농장원 같은데 왼쪽다리를 눈에 뜨이게 절었다. 고중환은 그와 어기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방금 손님을 바래우신 참이여서 출입문 가까이에 서계시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담으신 그이의 얼굴에는 농민형의 손님과 담화를 나누시던 즐거운 감정의 여운이 비껴있었다. 인사를 올린 고중환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 손님과는 정반대로 그이께 커다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될 자신을 다시금 생각했다.
《마침 잘 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부부장동무에게 한가지 개인적인 부탁을 하려던 참이였습니다. 저기 가서 앉읍시다.》
고중환은 그이께서 권하시는 자리에 앉았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옆자리에 앉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밝은 표정으로 물으시였다.
《내 방에서 나간 손님을 보았습니까?》
《보았습니다.》
《그 동무가 바로 지난 여름 강냉이구이를 하면서 내가 말한 어릴적 벗입니다. 이번에 그 협동농장에서 평양에 견학을 왔답니다. 그래서 반갑게 만났습니다.》
고중환은 강냉이구이를 하던 즐거운 휴식일을 생각했다. 바로 그날에 구운 올강냉이를 육종한 사람인줄 알았더라면 인사라도 나누는것인데 무심히 스쳐보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미소어린 안색으로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나는 그 동무의 기탄없는 이야기를 통해서 농촌실정과 농민들의 지향을 잘 알게 되였습니다.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담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무가 매우 난감한 제기를 해왔습니다. 자기가 육종한 올강냉이종자를 가지고 학위론문을 써서 제출했는데 몇달이 지나도록 심의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 말로는 연구사도 아닌 자기가 제출한 론문이여서 시답지 않게 여긴답니다. 뭐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올종인것만은 사실인데 소출이 적어서 도입할 가치가 없다는 의견도 있는 모양입니다. 빨리 학위를 받도록 나더러 좀 도와달라는데 이거야 딱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그럴 권한이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론문심의위원회에 빨리 가부를 결정해주라는 전화쯤은 할수 있겠지만 내가 그런 전화를 하면 심의자들이 딴 생각을 가지고 본의아니게 행동할수 있을겁니다. 그 동무는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하는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장동무가 알아보고 공정하게 빨리 처리되도록 해주시오.》
고중환은 머리를 떨구고 침묵했다. 여느때라면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올렸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마디가 목안에서 감돌며 입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이께서 과학기술문제에 얼마나 심중히 대하시는가를 다시금 절감했다. 그럴수록 공정하게 평가를 하라는 과업을 자신이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티탄합금가공기술문제가 복잡하게 뒤엉킨다는 생각이 가슴을 조이였다.
《부부장동무, 왜 그럽니까?》
김정일동지께서는 고중환의 낯색을 유심히 살피시였다.
《9월제련소에 내려갔던 동무들이 그저 다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티탄합금가공설비공사를 승인했습니다.》
《그때 림수봉동무가 책임지고 내려갔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림수봉동무의 보고 하나만을 믿고 그의 의견을 절대시하면서…》
《그래, 티탄합금가공설비가 어떻게 되였습니까?》
《오늘 때늦게야 양영복박사가 보내온 편지를 보았습니다.》
고중환은 가방속에서 편지를 꺼내드리였다. 편지를 읽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생각깊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편지를 보니 티탄합금가공설비와 관련해서 참으로 심중한 문제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선 동무부터 일을 잘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양영복선생을 비롯해서 일부 사람들은 그 압착가공방법을 반대했다는데 절대다수의 의견을 대변했다고 해서 림수봉의 의견을 절대시한것도 잘못입니다. 한사람이라도 반대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동무로서는 내려가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과학기술에 대한 실무적처리는 과학행정일군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과학기술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관계와 그들의 마음속 고충은 이 부문을 지도하는 당일군들이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특히 연구사업방향이 당의 의도에 맞는가 안 맞는가 하는것을 가려봐야 합니다. 그래서 과학사업에 대한 당적지도가 특별히 어렵다는것입니다. 동무는 그곳에서 벌어진 사람들의 관계를 알아보아야 했고 서로 다른 두개의 연구집단이 지향하는 연구사업방향을 정책적안목으로 가려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그 모든것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가려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심각한 교훈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중환은 뼈아픈 자책을 느꼈다. 이번의 사건은 단순한 실책이 아니라 과학사업에 대한 당적지도에서 자기 사업에 내재하던 본질적결함이 집중적으로 드러난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직권을 가지고 과학기술적문제를 좌지우지하는 페단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 그런 일이 벌어졌나봅니다. 그런데 이번사건은 보다 심각한 문제성을 띠고있는것 같습니다. 우리 일군들과 과학자들이 첨단과학과 고도기술의 요새를 점령하는데서 어떤 방법을 택하는가? 남들이 이미 개발한것을 절대적인것으로 올려다보면서 우리 현실에 맞는가 안 맞는가를 따져보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모방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걸고 독창적인 방법을 지향하는가? 양영복선생의 편지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있지 않지만 몇구절을 유심히 보면 바로 이런 문제가 사건의 바탕에 깔려있는것이 알립니다. 무엇인가 시사해주는것이 큰것만큼 앞으로 깊이 료해해봅시다.》
고중환은 그이의 예리한 통찰력에 놀랐다. 편지를 읽고 괴로움에 시달리며 많은것을 생각하면서도 그이께서 포착하신 그런 심중한 문제가 깔려있다는것을 보지 못했었다. 그이께서는 희미하게 드러난 그 사건의 륜곽에서조차 현상과 본질을 순간에 갈라보시였다. 말씀을 듣고보니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무겁게 안겨왔다.
《양영복선생의 병세는 지금 어떻습니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앙병원으로 후송되여온것을 보면 병세가 가볍지 않은것 같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심려어린 안색으로 잠시 방안의 공간을 응시하던 끝에 고중환에게 머리를 돌리시였다.
《지금 당장 나가보았으면 좋겠는데 반시간후에 외국의 당대표단을 만나기로 되여있습니다. 래일 함께 병원에 나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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