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9. 빨찌산 투쟁에서 지울 수 없는 최고위 간부동지들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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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9
빨찌산 투쟁에서 지울 수 없는 최고위 간부동지들의 인상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박영발 전남도당위원장동지
박영발동지는 경북 봉화출신으로 일제 때 인쇄노동자로서 항일 노조투쟁을 전개했으며 8.15해방 후 전평 책임자이며 모스코바 공산대학 재학 중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에 동원되어 전남도당위원장으로 일했다.
9.28후퇴 후에는 어느 도당보다 먼저 당 합법체제에서 빨찌산 비합법체로 전환하여 본격적인 빨찌산 투쟁을 조직지도했다.
박영발동지는 일제때 항일투쟁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많이 당하여 하체를 잘 못쓴다. 그래서 적들이 소위 토벌하려 올 때는 항상 땅굴 비트에 들어 갔다가 적들이 빠지면 나와서 지상 아지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장이 안 좋아 음식을 아무거나 들지 못한다.
필자는 1951년 12월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공세 때 마지막 공세가 끝날 무렵에 뵙고 보위대와 함께 제 1차 동기공세를 승리로 끝마치고 백운산 88트에서 일상적으로 1952년 4 월 5일까지 함께 있었다.
그리고 1953년 9월 15일 제5지구당이 빗점골 아지트에서 해체된 후 박영발 상임부위원장을 보위하고 지리산 뱀사골 토끼봉 밑에 임시 아지트를 썼을 때까지 함께 있었다.
항상 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수령, 당, 인민은 전일적인 일원체제다”라는 말씀이었다. 그분의 말씀하나하나는 마치 나무에 대못을 박으면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빈말이없고 간단명료하였다. 이에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백운산에 있을 때 “영승동무는 동기공세 때 누구못지 않게 잘 싸웠다. 앞으로 고향 영광군당위원장 후비군으로 잘 키워야 한다”라고 말한 인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박영발동지는 지리산 뱀사골의 함박골 동굴에서 1954년 2월 21일에 희생되었다. 시신은 적들이 산내면 초등학교까지 운반해 갔으나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다.
2)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동지
방준표동지는 1952년 10월에 전남 백운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뱀사골 이현상 동지 아지트에서 있었던 제 5지구당 결성회의에 참석을 위해 박영발동지가 지리산에 왔을 때 노고단 능선까지 이현상동지와 함께 마중나와서 동행 보위하는데 처음 뵈었다.
그 때 임걸령 약수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주고 받는 말씀을 들었다. 방준표동지는 박영발동지에게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기공세 때 방준표 동지는 보위병이 2명이 있었으나 보위병은 다 전사하고 방준표동지는 중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전북도당은 의사들이 모두 희생을 당하여 치료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당시 지리산 의무과장으로 있던 리영원동지를 파견하여 지하 땅굴에 같이 기거하면서 치료한 결과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중 어느 분이 방준표동지에게 왜 권총만 찼으면 되지 칼빈2까지 이중무장을 하는가, 몸도 약한데 무겁지 않은가라고 묻자 “나는 보위병에게만 의뢰해서는 안된다. 내가 직접 전투할 준비를 갖추어야 적과 부닥쳐 전투를 할 수 있고 스스로 전투력을 길러야한다”고 말씀하였는데 그것에 토를 단 동지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53년 부터는 당 간부나 군사간부들의 보위병 연락병제를 없에고 집단보위제로 항일빨찌산 투쟁체제로 재편성해 투쟁하게 되었다.
지리산 뱀사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는 방준표동지 아지트를 52년 가을 두 번이나 간신히 무배추 배낭을 짊어지고 찾아뵙고 드렸다. 그리고 또 52년 12월 말경에 박찬봉동지를 보위하고 광산골 남원군당을 찾아 방준표동지를 만나려고 했으나 눈 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남원군당위원장동지의 말을 듣고 반야봉 및 대소골 지구당 아지트로 되돌아 온 기억이 마지막이다.그 당시에는 남원군당부를 거쳐야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준표 동지는 1953년에 덕유산으로 나가 망봉에서 2월 19일에 일행과 함께 희생되었다. 그해 몇월달에 뱀사골에서 나갔는지는 아직까지 모르고 있으며, 뱀사골 아지트 위치도 추정만 할 뿐 단정은 못하고 있다.
그분의 본 부인과 아들이 인천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한의원을 하고 있어 한번 찾아 만난적도 있는데 어머님은 당시 치매에 걸려 사람을 못알아본다고 해서 찾아뵙지 못하고 그후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듣고 있을 뿐이다.
3) 경남도당 위원장 김삼홍동지
전쟁 때 중앙당에서 파견한 남경우 경남도당위원장 동지가 1952년 1월 19일 저 지리산 대성골 전투에서 경남도당이 전부 희생을 당하며 동기공세가 끝나자 이현상동지 부대에 정치위원으로 있던 김삼홍동지가 경남도당위원장으로 파견되었다
1952년 10월에 지리산 뱀사골 이현상동지 아지트에서 5지구당 결성을 위한 3개도당위원장 희의가 일주간 열렸는데 필자는 당시 전남 지리산 전투지구당 박찬봉 위원장동지를 보위하고 가서 처음 뵙게 되었다.
1953년 8월에 박헌영 리승엽 미제의 고용간첩 도당들이 적발되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5지구당이 해체된 후 전북도당 부위원장하다가 5지구당 조직부장을 했던 조병화 동지가 경남도당위원장으로 감에 따라 김삼홍 동지는 도당 위원장 직을 내려놓고 지하로 들어갔다가 체포되었다. 그의 몸집이 작다는 것만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감옥살이 중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필자와 만나 생활하였다.
김삼홍동지는 비전향으로 출옥했다가 병사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도 치루었다.
4) 경남도당 위원장 조병화동지
조병화동지는 해방공간의 합법 때 전북도당 부위원장을 하다 52년 제 5지구당 결성 때 5지구당 조직부장을 했으며 53년 9월 5지구당 해체 후 경남도당위원장으로 나갔다. 1953년 지리산 조계골 지하 아지트에 있다가 발각되어 생포되었다.
그후 남원수용소에 구금 중 당시 이발에 면도까지 해주고 있었는데 그 면도날로 목 울대를 잘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죽지는 않고 남원 경찰서 유치장에 분리 수용하고 있을 때 필자가 사형을 언도받고 수용소에서 남원경찰서 유치장으로 분리 수용될 때 같은 유치장 감방에 있었다.
필자는 54년 5월 10일에 사형수로 대구감옥으로 이동됨에 따라 이감왔고 그후에 2차로 사형을 받아 조병화동지는 사형수 동료들과 함께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유치장에서 두 번째 만나게 되었다.
54년 12월 24일에 다른 사형수 동지들과 함께 대구 수색장 사형장에서 총살집행을 당하여 54년에 체포된 동지들의 종말을 고하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5) 제 5지구당 위원장인 이현상동지
이현상 동지는 남부군 사령관으로 적아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현상동지는 충남 금산출신으로 일찌기 소학교 시절 때 댕기따고 공부하면서 일제 선생을 때려패기도 한 반일 투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현상동지는 일제 때 항일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박달동지를 만나 항일 투쟁을 벌리고 있는 김일성 장군님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항일 투쟁 로선을 구체적으로 알고 빨리 나가 투쟁하기 위해 병보석투쟁을 전개하여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가 덕유산에서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현상동지는 감옥에 있을 때 “아무리 열성을 가지고 투쟁을 해도 올바른 로선에 의한 령도를 받지 못하고 운동하는 것은 종이 위의 불과 같다”는 교훈을 받았다고 했다.
공산당 시절 당 간부부장을 했고 역시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 로동당이 되었을 때도 간부부장을 했다.
이현상동지는 일제시대부터 1953년 9월 18일 빗점골에서 희생될 때까지 잠간 김일성 주석동지를 만난 후 줄곧 남쪽 땅에서 산을 등에 업고 산속에서만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미제와 가열찬 투쟁을 하다 마지막 고귀한 생을 마감했다. 이현상동지의 투쟁중에, 당시 낙동강 도하작전을 미제의 맹폭격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현상부대는 도하에 성공하여 미제의 주둔처를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한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했었다.
1952년 4월 6일 빗점골 아지트에서 필자는 처음 뵈었는데 인상에 남아있기로 작달막한 키에 언제나 인민군 군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지금도 경남 하동군 학예면의 빗점마을에 살았던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현상 부대는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고귀한 인품에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까운 지도자가 죽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눈물을 지었다고 했다.
희생된 후 시신을 사진으로 찍어서 빨찌산 활동지역에 비행기를 동원하여 삐라를 뿌리기도 했었다. 시신은 목을 전시하고 섬진강모래사장에서 화장해 섬진강물에 뿌렸다는 소식만 듣고 있을 뿐이다.
공화국에서는 영웅칭호와 각급훈장이 수여되고 혁명열사릉에 제1호로 안치되었다는 소식만 접하고 있을 뿐이다.
6) 마지막 전남도당위원장인 김선우동지
김선우동지는 전남 보성 웅치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머리가 영특하여 그 어려운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다 때려치우고 원산에서 항일 노조투쟁을 전개했다. 8.15해방을 맞아 경기도당 부위원장을 하다 전남도당 위원장까지 했다.
1950년 전남 7.23 해방을 맞이할 때 봉두산에서 하산하여 인민군대와 광주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발동지가 하고 부위원장겸 9.28후퇴후 전남 빨찌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후 지대편성에 따라 제 7지대장으로서 전남유격대 총사령관이었다. 백아산에서 백운산으로 도당부가 이동 후 박영발위원장이 제5구당 상임부위원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당위원장으로 승계되었다. 1954년 4월5일 백운산에서 희생 될 때까지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전남 빨찌산 투쟁을 총 지도했었다.
선우 위원장은 하부성원들에게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이므로 하부일꾼 들이 우러러 받들고 잘 따랐다. 간부 정책에서 “헌옷은 버리지 말고 빨아쓰라, 찢어진 옷이라도 버리지 말고 꿰매어 쓰라”라는 비유적인 말이 명언으로 되어 있었다.
백운산에서 희생된 시신을 당시 토벌대장은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인품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신을 원능선 모처에 훼손하지 말고 묻어주라고 하였다. 그후 수십년이 흘러 당시 시신을 메고 능선까지 올라 매장했던 동지의 기억을 더듬고 일가견을 가진 동지들이 수차의 탐지과정에서 매장지를 발견하였다.
당시 매장했던 자리를 6.15고지라 명명했다. 지금은 가묘고지다. 그리하여 시신을 다시 찾아 웅치면 선산에 매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조선 도당위원장으로서 묘가 있는 것은 김선우 위원장뿐이다
지금도 백아산 지대에 사는 인민들은 우리사령관이라고 부르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것이 전남의 인민성이었다.
지금도 선우동지의 인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필자가 중상으로 생포되어 남원수용소에 있을 때 뒤에 체포되어 들어온 동료에 의하면 “영승동무는 적들에게 체포될 동무가 아니라”고 말씀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1953년 8월 14일 백운산 옥용골 모 마을 옆 똥섬에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주둔한 적들을 기습하기 위하여 진격하다 지뢰에 걸려 50여개의 곳에 지뢰 파편을 맞고 진지에 거의 당도 했을 때 나를 마중나와 맞이한 감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감옥살이 동안에 놈들의 고문구타속에서도 항상 선우위원장의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전향으로 살아 출옥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남조선 빨찌산 투쟁에서 최고위 간부들에 대하여 내게 남아있는 인상을 일차적으로 서술했다. 세월은 반세기가 지났어도 그분들로부터 받은 지도와 깊은 인상을 후세를 위하여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바입니다.
2021. 4/20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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