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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0. 빨찌산투쟁에서 내가 보위했던 간부동지들에게서 받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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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983회 작성일 21-05-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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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0

빨찌산투쟁에서 내가 보위했던 간부동지들에게서 받은 교훈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1) 불갑산 빨찌산 무장부대장 동지에게 맹세

1948년 10/19일 여순 14연대 애국병사 봉기가 일어난 후 영광 불갑산에도 30여명의 무장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마을 주민들은 밥을 지어주곤 했다.

이 때 빨찌산 부대장 밥을 우리집에서 지어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밥을 먹을 때 방에 들어와 들고 가곤했다.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교양을 받곤 했다. 그 때 우리 누나가 빨찌산과 연계되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밥을 들을 때 “나도 빨찌산이 되어 투쟁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하니 너는 어리니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여 장차 커서 우리 뒤를 따르라고 해서 그리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지금도 그 때의 다짐한 맹세가 엊그제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2) 김용우 위원장

1950년 9.28 후퇴 후 입산하여 장성 태청산을 거쳐 불갑산에 들어가 불갑지구당 연락병을 하면서 김용우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입산한 함평군당 무안군당 지구사령부 등 위원장동지의 레포를 직접 전달하는 연락사업을 하고 있을 때로부터 동나주 다도면 도룡굴 마을에 있을 때인 1951년 5월까지 김용우 전남도당 제 3지구당 위원장 밑에서 역시 입산한 목포시당 지구당 각부서 지구여맹 지구사령부 위원장동지의 직접 쓴 레포 연락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 김용우 위원장동지의 활동모습이 나의 이상형이 된 것이다. 김용우 위원장은 내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용감하게 투쟁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김용우동지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6.25전부터 투쟁의 지도자로서 합법 때 목포시당위원장을 했으며 9.28후퇴 후는 불갑지구당위원장을 하다 1951년 4/20일 불갑지구와 유치내산지구가 합쳐 제 3지구당 위원장을 했다.

그 해 5월에 도당의 소환을 받고 백아산으로 이동하여 전남도당 조직부장을 하다 도당 부위원장이 되어 전남 서부지부 지하로 내려가 지하조직사업을 전개하다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광주감옥에서 1957년 10/19일 사형대의 이슬로 산화하여 갔다.

시신은 나주 금천면에 묘를 쓰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빨찌산 영웅칭호도 수여받았다.


3) 김용우동지가 도당으로 소환되자 그 후임으로 리방휴동지가 제 3지구당 위원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1/28일 까지 그 동지 밑에서 연락사업을 했다. 이 때부터는 적들의 침공이 잦아서 한군데 아지트를 오래 쓰지 못하고 적정에 따라 이동하면서 투쟁을 했다.

리방휴동지도 전쟁 전 빨찌산 투쟁의 지도자로서 투쟁했고 합법 때는 도당 노동부장을 했다. 불갑산에 있을 때 월구로 내려와 지도부와 함께 투쟁하는 과정에 1951년 불갑산 2.0작전 때 지하비트에 들어가 살아남았다.

리방휴 동지가 유치내산에서 제 3지구당 위원장을 할 때다. 여름 무지개재 투쟁에서 영암국사봉으로 후퇴중 `많은 동지들이 희생을 당하는 과정에 지도부와 선이 떨어져 지구사 참모장과 필자가 단둘이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아 밤늦게 지구당지도부를 찾았을 때 희생된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돌아왔다며 반갑게 포옹해 준 것이 엊그제 같이 느껴지고 있다.

그리고 “내 밑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백운산 도민청학원에 입학하여 공부열심하라”고 추천하였던 기억이 새로워지고 있다.

리방휴동지는 9.28 후퇴 때 북상하는 과정에 추풍령 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 와 도당 부윈장까지 투쟁하다 1953년 가을에 유치내산 지하 아지트에서 희생되었다.

박영발도당위원장은 리방휴 동지가 북상을 접고 다시 돌아온데 대하여 특별한 신임과 사랑을 했다고 들었다. 왜냐면 모두가 합법지구로 후퇴를 희망하고 있으나 리방휴동지만큼은 동지들이 사선에서 싸우고 있는데 동지적 양심이 동지들을 놔두고 나혼자 북상할 수 없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함께 투쟁하겠다는 의지로 돌아온 것에 너무도 고무 받았다는 것이다.


4) 도당정치공작 대장인 조동만 여천군당 위원장을 보위하고 투쟁했다.

백운산 도민청학원에 와 일주일 공부하다 민청학원 해체로 학원공부는 접고 여천군당으로 가서 투쟁했다. 당시 여천군당은 용개산 용지동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다.

적들의 대대적인 제1차공세가 15일간 지속하다가 제2차 침공까지 일주일의 공간이 있었다.

이 와중에 조동만위원장동지는 도당 간부부에 와서 동무 한사람을 달라고 했는데 민청학원이 공세로 해체되는 찰라에 직접가서 맘에 든 동무를 선발해 가도 좋다는 간부부의 의견에 따라 30여명의 민청학원생들이 한 아지트에 앉아 있는데 조동만동지는 학원생들을 이리저리 들러 살피더니 필자를 지명하여 초기 여천군당에 들어가 투쟁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군 유격대가 10여명 뿐이었지만 적들의 동기 공세 때 잘 싸워 100여명의 무장대로 발전하게 되어 도당 전 부서를 보위하며 투쟁했다

그리하여 군유격대가 도당정치공작대로 발전하여 무적의 용맹한 부대가 되었다 조동지는 지하 비트에서 희생되었으나 영웅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필자는 적과의 직접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5) 마지막으로 박찬봉동지를 보위했다.

박찬봉동지는 경기 고양출신으로 희생될 때에 40대 초반으로 알고 있다.

일제때 반일투쟁을 했으며 광복후 경기도당 부위원장을 하다가 1949년에 전남도당으로 와 투쟁했다.

중앙선을 연결하기 위해 안내원과 북상하다 전북순창에서 안내원의 변절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놈들에게 고문을 많이 당하여 하체를 잘못 쓴다. 6.25해방 때 광주감옥 미결사에 있다가 옆방의 동료들까지 끌려나가 학살을 당하는 와중에 인민군대의 광주입성으로 살아남았다.

합법 때 전남도당 조직부장을 하다 후퇴 후 입산하여 1951년 5월에 김용우동지에게 조직부장을 인계하고 국제 평화 투쟁위원회 부위원장과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며 51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를 맞이했다. 그러나 보위병이 둘이었으나 다 전사했다.

제1차 동기공세가 1952년 3월초에 일차로 끝났다.

끝난 후 도당지도부 보위대에서 적들의 공세에 살아남은 동지들이 백운산 88지도부 트에 모여 있었는데 박영발도당위원장동지는 “김영승동무는 공세 때 누구 못지 않게 잘 싸웠는데 내 밑에서 있는 것보다 몸도 성하지 못한 박찬봉지를 보위하라"해서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2년 4/5일에 지리산전투지구당부가 새로 결성되어 지리산으로 와서 1953년 1월까지 보위했다. 그후 박찬봉동지는 제5지구당 유격지도부장을 하다 5지구당 해체로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나갔다가 1953년 초겨울에 덕유산 황전골에서 희생되었다.

박찬봉동지는 감옥에 있을 때 약초공부를 해서 약초이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리산에 있을 때 노고단 능선에 약초가 많이 있다면서 직접 약초를 보면 이 약초는 어데 쓰면 좋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박식했었다.

덕유산에서 희생될 때에 보위병하던 친구를 남원수용소에서 만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그 때 “동무는 살아남아 내가 여기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리라”고 유언을 했다고 들었다.


6) 그 외 몇 간부동지들을 생각할 때, 첫째로 남태준 동지를 잊을 수 없다.

남태준동지는 여수출신으로 14연대 이등중사였다. 남태준동지는 지하 아지트에서 체포되었지만 1954년 12/24일 총살 집행 될 때까지 누구보다 당당하게 적들과 잘 싸웠으며 적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백운산 유격대 사령관까지 하다 체포되었다.

남원유치장에 분리수용시켜 필자 옆방에 있었다. 그 때에 의용경찰대들이 토벌작전에 동원되었다가 남태준부대에 포로되었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석방해 살아남은 수십명이 남원유치장에 찾아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진정서까지 제출해 주었으나 워낙 이름난 동지라 결국 총살 집행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유치장에 있을 때 가족면회를 시켜주지 않았으나 70대 노모가 살아 있어 놈들은 특별면회를 시켜주어 철창사이로 어머님 얼굴을 한번 뵈 온적이 있었다.


두 번째는 구례군 문척면에서 출생한 최복삼동지를 잊을 수 없다. 

구빨찌로서 후퇴 후 1연대 부연대장까지 하다 1952년 지리산 부대장을 했으며 1953년에는 전남부대 참모장을 하다가 54년 2/20일 옥용골 전투에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어 남원 외과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놈들의 불성실한 치료를 받다가 하체에 피가 통하지 않아 다 썩어들어가는 과정에 유언을 남기고 희생을 당하였다.

그 때 나에게 “나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고 죽어나간다. 동무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살아나가서 내가 여기서 굴하지 않고 놈들에 의해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동지들에게 알리라고” 유언한 사실이 엊그제 같이 회상되고 있다.

최복삼 동지는 기본출신인데 개잡이는 잘해도 학습을 게을리 해 발전하지 못하고 맹 그 자리에서 맴돌다시피 하고 있어 자기 밑에 중대장하던 동지가 발전하여 부대장까지 하는 부대에 그 밑에서 투쟁하는 것을 보고 아무리 리력이 화려해도 학습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산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이상과 같이 빨찌산투쟁에서 내가 직접 보위하며 투쟁한 간부들의 투쟁 지도 모습은 나의 이상형이 되어 오늘날까지 투쟁속에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21. 5/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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