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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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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97회 작성일 21-07-1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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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1

로병의 가정에 경사가 났다.

류한무가 추억많은 려행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바로 그 이튿날 김정일동지께서 그에게 감사를 보내주시였다. 인민무력부에서 최근시기 높이 발양되고있는 군민일치의 미풍에 대하여 그이께 올린 상세한 종합보고속에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사는 예비역상좌 류한무로인이 옛 련대를 방문하여 자기 대원들의 묘소부터 찾아보았으며 전연초소에서 하루밤 묵다가 적들의 도발로 전투가 붙자 손자벌인 병사들과 나란히 진지에 엎드려 그들을 고무한 사실 등이 밝혀져있었던것이다.

바로 그날 류수진이 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임명되고 다음날에는 창광거리아빠트로 이사하였다. 새집들이 한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여서 온 일가가 수진의 집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할아버지며 수진을 떠들썩하게 축하하고는 방들을 돌아보고 큰방에 둘러앉아 행복감에 겨워 이야기판을 벌렸는에 그자리에서 성희가 한 이야기는 모두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니 이번에 할아버지를 따라 전연초소에 나가 만난 장군님의 전사들이 더 생각나요. 전… 전… 그들을 한평생 잊지 못할것 같아요…》

성희는 이렇게 운을 떼고는 할아버지가 도착하자 군단사령관이 아침식사에 초청한 사실이며 련대에서는 직속구분대들이 군기를 앞세우고 분렬행진을 하며 대렬경례로써 초대련대장에게 경의를 표시한것을 비롯하여 전연방어선에서 보고듣고 느낀것을 죄다 이야기 하였다.

《전 여태 수도에서 호강스럽게 살면서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전초선병사들은 밤에도 옷을 입고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자요. 적이 준동하면 순간도 지체없이 달려나가기 위해… 그들은 자기를 다 잊고 청춘을 바칠 각오로 바람같이 달려나가지요. 진지로… 거의 나보다 어린 병사들이예요…》

처녀의 눈에 이슬기가 반짝이였다.

《고급아빠트에서… 따뜻한 방에서 매일밤 편안히 단꿈을 꾸며 자면서도 여태 그 병사들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한적이 없었어요. 전연초소에서 묵은 그밤에 병사들뿐아니라 최고사령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군관, 장령들이 자지 않고있다는것을 느꼈어요. 할아버지가 묵으신 바로 그 소대 전연에서 이른새벽에 혈투가 벌어졌어요. 놈들의 무장도발로… 정치지도원이 희생되였어요. 결혼도 못해본 29살의 중위였어요. 백명의 대원들을 다 리수복영웅처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 당일군이였어요. 그런 사람이 적탄에… 아!… 그날아침 출근길에 나선 여기 평양사람들은 바로 두세시간전 분계선에서 또 피가 흘렀다는걸… 어떤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는걸 상상이나 하겠나요.》

딸의 얼굴만 지켜보며 이야기를 듣던 하정녀가 할아버지한테 얼핏 눈길을 돌렸다가 웬일인지 얼굴이 해쓱해지며 고개를 숙이였다.

성희의 목소리는 떨렸다.

《전 정말… 정말… 우리 생활이 어떤 희생의 대가로 차례지고있는지 정말 몰랐어요. 나이만 먹었지… 아이처럼…너무 철없이 살았어요. 그 정치지도원은 오영준이라고 할아버지를 안내해주었어요…》

성희는 목이 메여 잠시 말을 못하였다.… 인간들의 운명선에는 리합집산이라는 법칙이 집요하게 작용하여 모였다가는 헤여지고 헤여졌다가는 기어이 만나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그때 성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오영준중위를 다시 만나리라고야 생각이나 할수 있었으랴.

11개월후였다. 의학계에 이름난 박사, 교수들로 강력한 의료진을 뭇고 인민군병원들을 돕던 대학병원이 어느날 한 불구의 제대군관을 실어와 성희가 근무하는 병동에 입원시켰다. 적탄에 척추가 부서져 하반신이 완전마비된 환자인데 대수술을 하여 끊어진 신경선들을 잇고 뼈이식을 한 다음 회복시켜 대오에 다시 세워주기로 결의했다는것이였다. 그날 성희는 과장실에서 환자의 병력서를 펼쳐보다가 오영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얼굴이 해쓱해졌지만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세상에 동성동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영영 갔어. 련대군의소에까지 와서 심장이 멎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부상날자가 그날… 할아버지와 자기가 전연초소에서 묵은 그날, 바로 그날이였다. 머리가 핑 돌아가는것 같았다. 어떻게 뛰여일어났는지, 어떻게 문을 차고 달려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복도로 지나가는 간호원들이 눈이 휘둥그래서 돌아보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달려갔다. 백m도 못되는 복도며 층계가 십리길인듯싶었다.

석양녘의 노을빛이 불그스름하게 흘러드는 창문가의 침대에 허약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파리한 얼굴, 열기가 이릉거리는 크게 뜬 눈으로 천정의 한점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인가 골똘히 하고있었다. 주름살이 간 미간, 검푸르스름한 눈확, 말라터진 입술에 번뇌의 흔적이 력연했다.

중위 오영준의 생기와 기백은 간곳 없고 불구의 고통과 그것과 싸우는 의지만이 앙상하게 드러나보였다. 성희는 등뒤로 출입문을 똑똑 두드려 기척을 내였다. 환자는 천정에서 눈길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치지도원동지, 저예요!》

오영준은 힘들게 처녀를 알아보고 가까스로 웃어보였다. 성희도 그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아 침대로 조심조심 다가가 곁에 놓인 걸상에 조용히 앉았다. 눈물겹도록 반갑지만 손도 잡지 못하였다.

인사말이 오간 다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오영준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 기적이라고 하지요.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까… 나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아놓고보니 이 꼴이지요. 젠장… 그새 여기저기 병원에 실려다녔지요. 수고만 시키고 차도가 전혀 없으니 정말… 죄송하기만 하고… 이번에도 안오자고 했는데 모두 너무 떠밀어 왔습니다.》

《우리 의료진을 믿으세요. 의학계의 권위자들로 무어졌어요.》

《…》

그는 회의적인 표정이였다.

《믿으세요. 신심을 가져요!》

《할아버지는 건강하십니까?》

《녜…》

《아…놀라운분입니다…》

성희는 과장한테 찾아들어가 오영준환자의 간호를 자기가 맡겠다고 제기하였다. 이튿날부터 처녀는 오영준에게 모든 정성을 다 쏟아부었다.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병원에 온지 닷새째되는 날 환자는 자기 가방에서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달라고 하였다. 그것들을 꺼내주고 받치개도 갖다주니 반듯이 누운채로 종이에 무엇인가 또박또박 적어넣더니 그 종이장을 누워서도 잘 보이는 침대옆 벽에 붙여달라고 하였다. 종이에는 중대의 일과표가 큼직큼직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몇시 기상, 몇시 몇분부터 몇분까지 아침체조, 몇시부터 몇시까지 아침식사… 그것은 병동의 일과하고는 다른것이였다.

그래서 환자는 병원일과를 따라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니 웃어보이며 그저 붙여놓고싶어 그런다고 하였다. 주의깊이 여겨보니 그는 병원일과를 지키면서도 중대의 일과와 함께 숨쉬고있는것 같았다. 밤… 중대의 군중문화시간이 되면 전연고지에서 울리는 병사들의 노래를 듣는듯 눈을 내리감고 명상에 잠겼으며 때로는 빙그레 웃기도 하였다.

성희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더워졌다.

(이 사람은 여기 병원침상에 누워있으면서도 중대의 병사들과 함께 살고있어… 아, 어떤 사람인가!)

중대와 병사들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그들한테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될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 가슴이 찢기는듯 아파났다.

동정심이 북받치며 무엇으로나 그를 위로하고싶었다.

어느날 중대의 군중문화시간, 성희는 전연소대병실에서 그가 기타로 반주하던 노래를 입속으로 조용히 불러보았다.

 

이제는 옛 전호에 탄피도 삭았으리

고지엔 산딸기가 빨갛게 익었으리

그러나 잊지 마시라 그 열매 드리운곳에

그 땅에 묻혀있는 탄피를 탄피를…

 

오영준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채 잠자코 누워있었다. 그의 눈꼬리에서 물기가 반짝이였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환자는 성희에게 더 스스럼없어져 어려운 부탁도 망설이지 않고 하고 이야기도 곧잘하게 되였다.

성희는 그것이 무등 기뻐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해주었다. 처녀는 환자를 위하여 뛰여다녔으며 그때문에 괴로와하고 기뻐하고 고민하고 더 좋은 모포를 내지 않는 맹꽁이같은 경리간호원과 언쟁도 하고 과장을 뛰여넘어 외과학박사인 기술부원장한테 찾아들어가 치료전망에 대하여 여러모로 알아보기도 하였다. 성희의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와 삼촌어머니, 시간이 제일 없는 삼촌까지도 입원실로 찾아와 환자를 위로하고 고무해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오려다가 공교롭게도 지방에서 친정집켠의 친척이 찾아와 떠나지 못하였는데 간다간다 하면서도 매번 다른 일이 생겨 오지 못하였다. 오영준은 기분상태가 대단히 좋아져 식사도 잘하게 되였으며 성희는 기쁨에 넘쳐 환자간호를 더 알뜰살뜰히 하게 되였다.

온 병동이 성희를 도와나섰다. 그러나 환자와 성희가 단둘이 있을 때면 어느 누구도 그 호실문을 함부로 두드리지 않았다. 성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몇몇 다감한 처녀들이 뒤에서 무엇이라고 소근거리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어느날 오후 과장이 불러 찾아가니 얼굴이 벌개져 오영준환자의 간호담당에서 뗀다고 하며 그 호실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처녀는 너무 놀라와 왜 이러느냐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따져물었다. 과장은 한숨까지 지으며 그것은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통 영문을 알수 없다, 아무리 까닭을 물어도 환자는 대답을 안한다고 하였다.

성희는 가슴이 무너져내리는듯 하고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들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여 동그랗게 영글어진 눈으로 과장을 지켜보다가 맥없이 돌아서 복도로 나왔다.

그는 환자의 호실도 가지 못하고 간호원실로 들어가 구석쪽 걸상에 주저앉아 얼굴을 싸쥐였다. 간호원들이 찾아들어와 동정어린 얼굴로 그런 환자는 례외없이 신경과민인데 본의아니게 그를 모욕하지 않았느냐,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시간후에는 아래층의 성미 괄괄한 키꺽대간호장이 올라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님자 고민하지 말라구, 내가 자네 자리에 임명됐네, 그녀석을 잘 다스려 해명해줄테니 가서 인계인수나 하자구 하고 롱조로 말했다.

마침 오영준환자는 렌트겐촬영실에 실려가고 호실이 비여있었다.

간호장은 병동적으로 성미가 괄괄하기로 소문난 녀자인데 그날만은 어찌나 깐깐스럽게 구는지 인계하는 비품들의 개수만 세여보는것이 아니라 손으로 쓸어만져보고 백포나 모포 같은것을 걷어올려 털기까지 하였다.

그가 베개를 들어올렸을 때였다. 베개잇속에서 네모지게 접은 종이장이 빠져나와 너울너울 날아떨어졌다. 방바닥에 떨어지며 펼쳐진 종이장에는 낯익은 필치의 글자들이 성희의 크게 뜬 눈으로 불찌처럼 날아들었다.

그것을 얼른 집어들어 번개같이 읽어내려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눈앞에서 황갈색화염이 회오리치는듯싶었다. 키꺽대간호장이 그것을 활 빼앗아 읽었다. 소리를 내여…

《류성희동무, 나는 오늘 우연히 동무한테 일생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소. 그가 동무를 찾아 호실로 뛰여들었다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소. 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하여 성희동무가 나의 간호를 맡은 다음 그를 너무 외면했으며 그한테 번민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리라는것을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소. 나는 오늘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동무의 정성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댔소. 자기만을 생각하는 리기주의자처럼… 나는 자기때문에 남들의 행복에 그늘이 던져지는것을 바라지 않소.

성희동무, 지성은 고맙지만 나한테서 물러나주시오…》

키꺽대간호장은 심란해진 얼굴로 그 종이장을 성희한테 내밀었다. 성희는 입술까지 새파래져 그것을 받아쥐여 다시 읽어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

《너한테 약속한 상대가 있었어?》

《없어요.》

《그럼 찾아왔다는건 누구야?》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내내 물리쳐왔어요. 싫어서…》

《그런 작자구나. 협잡군같은것!… 됐다, 됐어. 나는 인계받을수 없어. 성희, 네가 그냥 맡아야 해. 성희, 내 철학을 하나 풀라나. 정의… 량심이 보호를 받고 승리하는것이 우리 세상이야!》

《안돼요. 인계받아요. 환자가 날 받아들이지 않아요… 오영준동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야요. 안받아요.》

《아니… 아니…》

《인계받아야 해요. 과장동지 지신데…》

《성희, 그럼 너야 너무 억울하게 되지 않니.》

《괜찮아요. 환자 마음만 편하면 돼요…》 그리고는 얼른 돌아서 나와 바께쯔로 맑은 물을 떠온 다음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걸레를 빨아서 호실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눈앞으로 흘러내려 이따금 그것을 손등으로 쓸어올리며 정신없이 걸레질을 하였다.

키꺽대간호장은 억대우같은 남아처럼 두주먹을 허리에 올리고 창가에 버티고서서 바깥쪽만 내다보며 씨근거리고있었다. 성희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옛 련대를 방문하고 돌아온 다음 송기선은 몇번이나 만나자고 간청했으나 그때마다 피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한번은 퇴근하여 집에 오니 어머니가 여느때없이 기분이 들떠서 기선이가 왔다갔다고 하면서 포장을 한번 뜯어본듯 한 소형록음기와 난생처음 보는 희한한 화장품세트를 딸앞으로 밀어놓으며 너한테 주라더라, 별것이 아니니 다르게 생각지 말아달라더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우리 집 랭동기를 보고 박사의 집에서 저런 고물을 써서야 되겠는가, 아무래도 내가 좀 도와줘야 할것 같다는 말까지 하더라, 보기와는 달리 속이 시원시원하고 손이 큰 사람인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때 박사학위를 건드리며 자기 집 생활수준을 얕보는것 같아 속이 언짢았으며 그런 소리에 들뜬것이 분명한 어머니가 측은하기도 하고 구접스럽기도 하여 발끈해졌다. 소형록음기와 화장품세트를 밀어버리며 이따위건 왜 받는가, 돌려주라고 했다… 그따위 몇푼어치도 안되는 눅거리상품으로… 누구를 겨냥한 유혹인가… 엄마?… 나를?

성희는 설설 끓는 가슴을 일로써 눅잦히려고 걸레질을 계속하였다. 단숨을 몰아쉬며 자꾸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릴념도 못하고 방바닥을 나가며 닦고 들어오며 닦고 제자리에서 돌아가며 걸싸게 문질렀다. 엄마한테서 어떠어떠한 환자의 간호에 정신이 팔렸다는 소리를 들었겠지… 오영준동지한테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는 자기 리익,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짓도 할수 있는 인간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성희는 마음속에 찰랑거리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고상한 그 무엇이 우롱당하고 모욕당한듯싶어 가슴이 화들화들 떨리였다.

처녀는 움쭉 일어나 걸레를 방바닥에 철썩 내동댕이쳤다.

키꺽대간호장이 놀라서 돌아보고 몸을 날려 다가와 화들화들 떠는 처녀의 두팔을 붙잡았다.

《성희, 왜 이래?!》

《놓아요! 난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아니예요!》

《성희! 성희!》

성희는 그를 뿌리치고 달려나갔다. 옆으로 날아지나가는 복도벽이며 창문들이 전률하는듯… 성희는 달려갔다. 어디로 가는지 발길이 나가는대로 활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향방을 몰라 주춤거리는 일도 없이 금성청년출판사 앞거리를 따라 곧바로 걸어갔다.

석양빛을 반사하며 유리판처럼 번들거리는 평양국제문화회관의 검붉은 벽체, 그아래 지하의 민족식당 입구에서 서성거리던 우유빛 솜외투차림의 청년이 그를 돌아보았다. 송기선을 알아보는 순간 성희는 숨이 멎는듯 한 충격에 주춤 멎어섰다.

그제야 자기가 그한테 찾아가려고 전차정류소쪽으로 나가는 길이였다는것을 의식했으며 무엇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어찌하여 여기서 마주치게 되는가싶어 좀 아연해지기도 하였다.

송기선은 솜외투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오늘은 경사가 나서 한턱 내려고 표까지 떼놓고 찾아가자는 참인데 허, 조화야, 여기서 만났거든. 바로 여기서… 어디로 가오?》

《…》

남들을 괴로움에 빠뜨려놓고도 무슨 경사가 났다고 싱글거리는 그 유쾌하고 혈색이 좋은 얼굴을 보니 정신이 나가는듯 하였다. 걷잡을수 없게 가슴이 뛰놀고 머리속에서 바람소리가 울부짖었다.

송기선은 무엇을 느꼈는지 웃음을 거두고 주춤거렸다. 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며 노려본다.

《가자요!》

《어디로?》

《병원에…》

《왜?》

《빌어요. 잘못했다고, 없는 소릴 했다고…》

《이건?… 무슨 생뚱같은 소리요?》

송기선은 홱 돌아서 황황히 걸어갔다. 성희는 뒤따라갔다. 나직하면서도 위혁적인 소리가 총탄처럼 튀여나갔다.

《서요! 서요!》

송기선은 행인들이 보이지 않는 어느 건물 모퉁이에 멎어섰다.

《가자요! 빌라요!》

《왜 이래?!》 송기선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성희는 그의 외투소매를 잡아채였다.

《가자요!》

송기선은 뿌리쳤다.

《무얼 잘못했다구 빌어?!》

《내가 언제 약속했어요?》

《헝, 중위라고 해서 사나인줄 알았더니 성희한테 다 말했단 말이야? 소동을 피우구…》

《그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했어요. 이런 시시한 일로 소동을 피울 사람도 아니예요.》

《벌써부터 두둔해? 내앞에서… 어떻게 됐다는걸 다 안다!!》 그리고는 광인처럼 눈을 희번뜩이며 우들우들 떨다가 쥐여짜내는듯 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손을 내흔들며 절통하게 부르짖었다.

《성희!… 성희! 오늘 집이… 집이 배정됐어. 몇해동안에 텔레비, 랭동기, 세탁기, 록음기, 록화기 다 갖춰놓고 보금자리를 다 꾸렸는데 이렇게 튄단 말인가, 광복거리 세칸짜리야. 누구를 위해 그랬는지 알어?! 누굴 위해서…》

《그는 내가 맡은 환자일뿐이예요.》

《나한텐 감각이 없는줄 알아? 그 잘난 불구자한테 콱 안겨라!!》

성희는 몸과 마음이 화약처럼 터지는듯 하였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얼음장같은 몸에 전률이 흐를뿐… 어찌된 일인지 옆길로 지나가던 승용차가 멎어서더니 운전사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 기선- 이-》

송기선은 달려가 차안으로 날아들었다. 차는 떠나갔다. 성희가 맥없는 다리를 끌고 병동에 돌아왔을 때 담당호실에서 나온 키꺽대간호장이 그를 보고 황황히 달려왔다. 거멓게 질린 얼굴…

《내가 실수를 했구나. 모른척 하는건데 무슨 정신에 그 편지얘기를 했구나.》

《아니…》

《아주 내려가겠다누나. 고향으로…》

성희는 소리없이 호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등뒤로 문을 밀어닫았다.

침대에 언제나와 같이 반듯이 누워있는 환자는 그를 여겨보다가 머리를 외로 돌려버렸다.

《오영준동지,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그리고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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