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4. 나의 빨찌산 투쟁에서의 최후의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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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4
나의 빨찌산 투쟁에서의 최후의 결전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우리 전남부대는 나와 운명을 같이했다.
전남부대의 이력을 간단히 말한다면,
1953년 1월에 지리산에서 백운산 도당부로 내가 소환되어 온 후 88근위중대가 조직되었다.
이 88근위 중대는 도당지도부를 집중보위하면서 독자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10대 후반 나이의 정예부대였다.
투쟁에서 전진과 승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장차 당 후비 간부로 육성 발전 시킬 유망한 혈기왕성한 청년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2년 3월에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공세가 일차로 마무리된 후 살아남은 동지들은 재편성 조직되어 당직속인 전남연대가 3개 중대로 조직되어 투쟁했다.
일년의 투쟁과정에서 한개 중대세력의 희생으로 인하여 88근위중대가 들어가 전남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리하여 1,2중대는 전투중대였고 3중대는 후방중대였다. 1953년 여름부터는 한 개 중대가 줄어들어 2개 중대만 남았다.
그래서 1중대 3중대로 편입되었다. 당시 부대장은 이봉삼 동지고 마지막에는 임종윤 동지이고 정치위원은 양순기 동지이고 참모장은 최복삼동지이고 강사는 리영원동지고 1중대장은 권영용동지고 3중대장은 오덕윤동지였다.
이렇게 두 개중대로 나누어 일중대는 부대장이 맡고 삼중대는 참모장이 맡아 적정에 따라 분산과 집중투쟁을 전개해 오던 중 1954년 2월 20일 백운산 옥용골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 과정을 서술한다면, 우선 54년 2월 8일 광양 진월면으로 보급사업을 나갔다가 새벽 3시경에 진상골에 무사히 도착했다.
당시 1953년 7.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일선의 정기군 중 5사단이 후방 빨찌산 토벌에 동원되어 53년 가을부터 야지에서 백운산 지리산등으로 포위망을 좁혀들어 오고 있었다.
드디어 백운산에는 35연대가 상봉을 비롯한 봉우리 능선고지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낮에는 소조로 빨찌산들이 걸었던 발자취를 발견하기 위하여 더듬고 있었다.
진상골 기슭에 도착한 전남부대는 보급한 식량을 골짝 바위틈에 비장하고 하루 먹을 것만 짊어지고 상봉능선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부대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매일 전투속에서 밤이 되면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피로가 겹친 상태 속에서 보급사업을 나갔다 들어 왔지만 새벽행군에 좀 쉬었다하면 코를 골며 녹아 떨어져 깨워야 행군하는 상태라 행군속도가 너무도 더디었다.
날이 새기 전에 상봉능선을 넘어 내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날이 새었다.
이 때도 필자는 선두에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날이 밝자 우선 배가 고파 아침밥을 해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밥 준비하는 동지들은 밥을 하고 부대원들은 녹아떨어져 잠을 청하고 있는데도 필자는 소능선에 올라 중초를 책임져 서고 있는데 박우리봉 중턱길을 돌아오면서 우리의 족적을 발견하기 위해 오는 적을 발견하였다.
부랴부랴 밥이 끓고 있는 불을 끄고 동원 태세를 갖추고 우리 있는 쪽을 향해 살피는 적을 향해 돌격 고함소리를 지르며 접근해 가는데 능선에 올라 우리적정을 살피던 3놈이 깜짝 놀라 한놈은 엠원총을 놓고 능선 넘어로 도주했는데 그 총을 주으려 우리가 달려가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총을 놓고 넘어간 놈이 자기 총을 주으려 넘어오다 우리의 돌격소리에 놀라 3번 넘어갔다가 우리의 속도가 너무 느린 것을 보고 4번째 넘어와서 총을 쥐고 달아났다. 그 장면을 보고도 너무 피로해 가파른 산길을 단번에 올라 칠 수 없어 한자루의 총을 노획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진상골 중허리 길에서 박우리봉 중턱길을 돌아 800고지 넘어 옥룡골 입구에 도달하니 해는 서산에 걸터앉고 있었다.
밤이 되자 도당지도부에 연락을 띄우고 아침 밥솥을 적들이 수색해 가져가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3중대원 2명을 파견했었다.
오고가는데 늦어도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인데도 적정을 살피면서 가다보니 새벽 4시경에 밥솥을 짊어지고 도착해서 우선 한 숟갈씩 나누어 들고 도당지도부에 파견한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외곽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내곽 적정을 살피어 20일 매복지를 어디로 해야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은 트기시작해서 무조건 중허리를 돌아 내곽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먼저 띄운 연락동지를 만났다. 듣고 보니 적들의 20일 총공격목표가 내곽이 될 것이니 외곽으로 후퇴해 매복지를 선택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간적으로 다시 봉강능선이나 상봉능선을 넘을 수도 없었다. 숲이 없어 능선에서 쌍안경으로 보면 개미기어 가는 것도 다 보일 정도여서 어찌할 도리 없이 돌고 돌아 88능선 발치 빠꾸바위 밑에 도달했다.
도착하자마자 아침밥을 짓기 위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적들은 날이 훤이 새자 전날 우리가 내곽으로 들어 온 것을 알고 밥을 짓는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상봉능선에서 88보초선 능선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는 재빨리 불을 끄고 옥용골 하봉능선에서 옥용골로 내려오는데 깃대봉 능선에 주둔한 적들이 옥용골 입구에서 새까맣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당시 옥용골에는 우리 전남부대와 남태준 부대 일개 대대와 도당지도부가 있었다.
우리 부대가 전면에서 발견되어 적들의 포위망속에서 전투하는 바람에 남은 두 부대는 무사했었다.
우리 부대는 하봉에서 옥용골로 내려오는데 너들강 바위가 많았다. 여기에서 배낭을 바위틈에 다 비장하고 총만 들고 최후결전을 바위를 방패삼아 일렬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과 한판승부를 다짐하고 있었다.
드디어 적의 접근에 따라 전투는 시작되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과정에 내옆에는 언제나 부대장이 있었다 바위를 사이에 두고 결전을 하고 있는데 적의 숫자는 우리 숫자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앞의 적만 바라보고 전투중인데 옆바위를 돌아 온 놈의 총탄을 맞았다.
어깨를 뚫고 견갑부를 거쳐 목과 턱을 향해 뚫고 나갔다. 이때 왼팔은 쓸수가 없었다.
이 때 부대장 동지에게 나는 총맞아 한팔밖에 쓸 수 없으니 내 앰원과 부대장 칼빈과 바꾸자고 했다.
부대장동지는 영승동무가 총을 맞아 전투를 못하니 어떻게 하느냐는 근심이 얼굴에 비쳐지는 것을 보며 항상 대비해 목에 감고 있는 명주 목도리로 팔과 목 턱을 감아 팔을 몸에 감아 매고 우측 손에 칼빈을 들고 전투중 불가피적으로 골짝으로 후퇴를 하는 과정에 왼팔을 또한방 맞게 되었다.
우리 전남부대는 적들의 포위속에 한사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분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옥용골짝을 건너 봉강능선 기슭에 붙었다. 이봉강능선을 넘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이 골짝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었다.
봉강능선 쪽에 붙었으나 적들은 새까맣게 뒤따라 추격하며 쏟고 달려오는데 역시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다가 동지들이 거의 전사하고 필자는 적의 총탄이 궁둥이를 뚫고나가 쓰러졌으나 다시일어나 적들의 집중공격을 피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 연기를 감싸고 봉강능선을 향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한손 밖에 쓸수 없었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마른 풀을 한웅큼 뜯어 입에 물고 가지고 있던 용개라이타로 불을 붙였는데 마른 풀잎들이라 단번에 타올라 나는 연기속에 몸을 감추어 봉강능선 50여m 전방까지 접근했다.
오르는 과정에 불이 꺼지면 다시 붙이고 오르는데 너댓명의 동지들이 연기에 감싸여 오르고 있었다. 3중대 오덕윤 중대장 동지를 비롯한 동지들이 마지막 능선을 올라가면서 나보고 빨리 따라오라고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동지들이 봉강능선을 넘자 적들은 능선을 점령해 내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다시 돌아 돌아오다 의영동지를 만났다. 의영동지는 당시16세 소년이었다
그의 누나는 영희 간호원동지였다. 이날전투에서 희생되었는데 분산해 봉강능선 기슭의 전투에서 나와 조우되었을 때 자기동생 의영이가 칼빈 실탄이 다 떨어졌으니 내 칼빈에 실탄이 남아 있으면 한두발이라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을 때 내칼빈총도 실탄이 떨어져 지팡이 삼고 있다고 말을 주고받은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이때 3중대 조사선동지가 희생되었는데 적들은 동지의 그것을 잘라 영희 여성동지의 국부에 쑤셔 넣고 생포자들에게 보라는 악귀같은 만행을 자행하기도 했었다.
의영동지와 만나 영승동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우리가 함께 있으면 적들의 집중 표적이 되니 여기서 분산해 우리 둘 중 한사람이라도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의영동지는 좌로 돌아가고 나는 우로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 하자하였는데 의영동지는 돌아가다 생포되고 말았다.
나는 우측으로 칼빈총을 지팡이 삼아 돌다 더 이상 힘이 없어 숲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후 눈을 떠 보니 3놈이 눈앞에 지켜보고 있더니 안죽고 살았구만 하면서 내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호주머니에는 당시 건설담배 3가치와 용개라이타 한 개 뿐이었다.
놈들은 나를 일으켜 두놈은 양옆에서 부축하고 한놈은 뒤에서 밀면서 봉강능선으로 한발짝 걸어 올라오는 데 놈들은 안죽고 살아가지고 자기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불평을 쏟아내면서 한놈이 무전으로 다죽게 생겼으니 쏘아버리겠다고 말하니 죽더라도 쏘지 말고 능선까지 부축해 올라오라고 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당시 리승만은 토벌작전에서 될수있으면 죽이지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포한 자는 일계급 특진하고 일주일 휴가를 준다고 했었다.
드디어 봉강능선에 도달하니 위생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감은 명주수건을 가위로 자르고 응급치료를 받고 붕대로 감아 치료한 후 땅거미 드는 능선을 따라 깃대봉 능선고지에 주둔한 대대본부 딸굴 트에 집어넣어 들어가 보니 우리부대 1중대장 권영용동지가 생포되어 굴안에 혼자 있었다. 그래서 둘이 되어 밤을 새우는데 굴입구에 보초를 서고 있었다
방에 신문관이 들어와 나에게는 한마디 말이 없고 중대장동지에게만 문의하는데 부대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답변에 수백명 된다고 부풀어서 말하는 것만 기억나고 있다.
21일 아침이 밝자 나를 끌어내 상처를 치료해야하니 광양읍 외과병원으로 가서 치료 잘하라 하였다. 당시 윗도리는 국군복 한겹을 입고 있었는데 피범벅이 되고 가위로 잘라 살갗이 나와 2월 추위에 견디기 힘든다고 방한복 상위를 걸쳐주었다. 옥용골 맨위 첫 동내 민간인 집 방에 들어가 보니 중상자들이 6-7명이 누워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 중 제일 먼저 광양읍 연대본부 환자병동에 보내졌다가 남원 5사사단 본부 의무실로 이동시켜 여기서 남원읍 이동외과병원에 이송할자와 포로수용소에 보내 치료할 자를 가리는데 나는 이동외과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남부대는 광양 백운산에서 2 월 20일을 기해 종막을 고하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지금 살아남은 부대 성원 중 나 혼자만 비전향장기수로 남아 있다.
2021년 6월 26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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