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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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야 꾸즈네쪼바…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는 겨울 어느날, 그림자처럼 말이 없던 처녀가 뜻밖에도 야릇한 탄성을 지르며 그의 생활속에 뛰여들었다.
수진은 체신소에서 조국에 보내는 아홉통의 편지에 우표들을 사서 차례로 붙이고있었다. 갑자기 곁에서 《아이, 하느님맙시다!》 하는 웬 처녀의 놀라움에 찬 비명비슷한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한숨섞은 소리였다. 돌아보니 리자… 빨간 외투차림에 장화를 신고 우산까지 든 처녀는 눈이 둥그래서 무슨 편지를 그리 많이 부치느냐고 물었다. 유리칸막이안에서 뚱뚱한 아주머니가 처녀한테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열다섯통 부친때도 있어, 한달에 두번 꼭꼭 부치네 하고 소리쳤다.
처녀는 편지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누구들한테 쓴것인가고 물었다.
수진은 마지막봉투에 우표를 붙이고나서 아홉개의 편지봉투를 한장 또 한장 보이며 이건 중대장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이건 정치부중대장, 이건 1분대장, 이건 2분대장, 이건 3분대장, 이건 어느 병사, 이건 아버지와 동생한테 보내는것이라고 하면서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처녀는 그 편지들을 두손으로 정히 들어올려 가슴에 꼭 붙이고는 우체통으로 다가가 한장한장 세여 우편접수구에 넣어주고는 그것들이 구만리 저쪽 수난의 땅에 무사히 날아가기를 비는듯 머리를 소곳이 숙이고있었다.
그해 모스크바의 겨울은 례년에 없이 푸근하여 부실부실 날아내리는 함박눈은 내려앉자마자 녹아 가로수들의 가지며 줄기를 거멓게 적시고 차도와 인도들이 질적해졌으며 다층주택들의 로대가녁이며 오랜 건물들의 현관채양끝에서 락수물방울까지 떨어졌다.
그들이 체신소에서 나왔을 때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의 장막에 거리는 온통 희붐한 안개속에 묻힌듯 저쪽에서 움직이는 행인들이며 차들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대기는 눅눅하면서도 상쾌하였다.
무슨 일로 체신소에 왔댔느냐고 물으니 리자는 지나가다가 년하장을 파는가 해서 들렸노라고 대답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인들속에 끼여 나란히 걸었다. 날아내리는 눈때문에 우산을 펴들고 한참 걷다가 도로 거두었다. 눈을 맞으며 걷는편이 더 상쾌하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였다. 리자의 금발머리와 빨간외투의 어깨며 가슴에 눈석임물이 방울방울 맺히며 더더욱 생동해지는 얼굴과 온몸에서 순결하고 신선한 기운이 풍겨나오는듯하면서 로씨야처녀는 겨울에 더 피여난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누가 누구의 보조에 맞추는지 그들의 발은 눅눅한 눈을 차면서 가락맞게 옮겨졌다. 무슨 생각에 골똘하는지 내내 말이 없던 리자는 골목길옆 소공원으로 들어갔다.
둘은 눈에 덮인 장의자앞에 마주섰다. 함박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리자는 우산을 펴들었다. 그리고 괴로운듯한 얼굴로 따뜻한 입김을 내불며 속삭이였다.
《용서해요… 전 오해했어요. 아시아사람들은 편협하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어서… 동무를 방조만 받을줄 알고… 자기 공부밖에 모르는 폭이 좁은 리기주의자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죄하듯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오늘… 오늘에야 알았어요. 리해했어요. 동무는 가슴속에 싸우는 조국에 대한 생각이 꽉 차있지요? 그렇지요? 피흘리며 싸우는 동포들을 잊을수 없지요? 그래서 놀수도 춤을 배울수도 없지요? 공부만 파고들게 되지요? 그렇지요?》
《리자…》
이국처녀의 그런 리해와 공감에 감동된 수진은 목이 메는듯하였다.
《그냥 그렇게 해요. 훼방군이 있으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우리 슬라브계통 말이 어렵지요? 어제 미샤와 론쟁했어요. 포멘꼬하고… 공청조직에서 외국류학생들을 더 잘 도울데 대해 토론하면서 비판도 좀 있었는데 미샤가 괴짜리론을 내놓았지요. 정말 괴짜예요.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인간은 언어적형식으로 사고한다면서… 수진동무가 조선식으로 조선문법체계로 생각하는 한 어쩌는수 없다, 우리는 <나는 간다 집으로>라고 평이하게 생각하는데 그는 <나는 집으로 간다.> 이렇게 단어들을 꺼꾸로 바꿔놓고 까다롭게 생각한다… 라고 했지요. 모두 처음으로 그런 소리를 듣고 벙벙해졌어요. 미샤는 말했어요. 존경하는 동지들, 사태는 바로 이렇다, 간단한 사고에서도 이렇게 판판 다른데 복잡한 과학적사유가 표현되는 로씨야교수의 강의를 어떻게 슬슬 알아듣는가, 조선식이 아니라 우리 식으로 로씨야문법체계로 생각하도록 두들겨 고치기전에는 안된다.…
모두 미샤를 달래며 설복했지요. 난관도 많고 힘들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도와야지… 하고, 그러자 미샤는 쓰딸린의 <언어학의 제문제>를 읽어보고 말하라고 소리쳤어요. 참을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내가 반박했지요. 쓰딸린을 자기편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쓰딸린은 언어적형식으로 사유한다고만 했지 문법체계가 다른 민족들의 언어학적관계는 그 론문에 언급한것이 없다고…
그리고 또 마리야 큐리는 뽈스까녀자지만 빠리에 류학가서 프랑스어로 공부하여 라듐까지 발견했다고… 박수를 치는 동무도 있었지요. 미샤는 아니라고 두손을 벌려보이며 고집을 부렸어요.
저녁에 집에 가서 할아버지한테 죄다 말하니 포멘꼬 그녀석은 확실히 괴물이야… 이러지요. 확실한 괴-물…》
그리고는 천진란만한 소녀처럼 깔깔 웃어댔다.
《정말 안됐소. 나때문에 공연한 론쟁을 하게 되고… 미샤는 비판까지 받고…》 하고 수진이도 웃었다.
《그런데… 나는 동무말처럼 그렇다치고 동무는 어째 학급에서 말도 별로 없고 공부만 하면서 그렇게 조용히 지내오?》
리자는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되여 귀엽게 웃어보이고는 간다는 말도 없이 돌아서 소공원밖으로 탄력있게 걸어나갔다. 그는 장의자앞에 선채로 사람들의 물결속에 들어 눈을 맞으며 총총히 걸어가는 리자의 모습만 지켜보았다. 처녀의 빨간 외투가 사람들의 흐름속에 잠겨들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진은 소공원에 그냥 서있었다. 리자가 한 이야기는 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학급의 공청원들이 자기를 돕자고 서로 비판을 하고 론쟁을 하고… 그러나 자기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아픈 마음, 전우들은 피를 흘리고있는데 나는 여기서 너무 호의호식한다는 아리숭한 가책에 노상 빠져 소심하게 외토리로 지내며 저들속에 뛰여들어 크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이것이 나를 류학에 파견한 조국의 의도, 아버지의 기대에 맞는 일인가? 아니다, 아니다… 포멘꼬의 말대로 로씨야식으로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로씨야사람들의 사고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강의도 쉽게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로씨야사람들의 사고방법, 언어생활, 풍습, 심리, 격언, 속담까지 다 알자면 리자, 포멘꼬, 라옙쓰끼… 저들의 생활속에 뛰여들어 어울려야 하지 않는가. 범을 잡자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다… 여기서 공부는 전투의 련속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학공부가 공격출발진지를 파고 진격로를 막은 공병장애물을 해체하는 작업으로, 강의내용을 습득하는것이 적진으로 진격하여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가는것으로 느껴졌다.
며칠후 포멘꼬가 찾아와 래년 초봄에 열리는 련맹적인 대학생축구경기대회를 앞두고 대학축구단이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때문에 우와로브주장이 자기를 소환하여 이제는 학습방조할 시간이 없을것 같다고 하며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수진은 이전보다 더 진취성을 발휘하여 공부가 끝나면 라옙스끼, 리자 등을 찾아 강의에서 알아듣지 못한 부분을 보충받았을뿐아니라 그들의 생활속에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리자는 수진의 학습방조를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공청조직에 청원하여 고정분공을 받았다. 처녀는 차근차근하면서도 매우 지혜롭게 도와주었다. 강의내용을 똑똑히 리해하고 교수의 설명을 조리있게 필기한 다음 오후시간이면 대학도서관의 약속된 자리에서 만나 그가 알아듣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도록 천천히 불러주고 알기쉽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수진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선어문장구성체계를 연구하여 교수들의 은유적인 수사학적표현들과 난해한 문장들에 대하여서는 그가 리해하기 쉽도록 《나는 집으로 간다》는 식으로 단어들을 배렬하면서 설명하였다. 이 과정에 리자의 성품에 대하여서도 더욱 알게 되면서 어떤 요람에서 그런 성격이 피여났을가 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리자네 가정, 꾸즈네쪼브일가는 아르바뜨거리의 호화아빠트에서 살고있었다. 식솔은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리자… 할아버지 에핌 꾸즈네쪼브는 빨찍함대소속 포함 《크론슈타트》호의 장탄수출신으로서 10월사회주의혁명때 동궁습격에 참가하였으며 혁명승리후에는 오래동안 크레믈리위수부대에 근무한 로볼쉐비크였다. 아버지 드미뜨리 꾸즈네쪼브는 군사아까데미야출신으로서 조국전쟁에 정치일군으로 참가하였으며 꾸르쓰크전역에서 치명상을 입고 제대된 다음 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력사학 부교수였다. 리자의 어머니 예브도끼야 꾸즈네쪼바는 농업집단화시기 싸라또브지방에서 부농들에게 암살된 주당일군의 딸로서 오래동안 지방과 수도의 구역급병원들을 전전하면서 준의로 사업하다가 가정에 들어온 녀인이였다.
리자는 곁에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자기 가문에 대한 긍지를 가슴속에 품고있었다.
분명히 그해 12월 30일이라고 생각된다. 오전강의들이 끝나자 어느 학부나 설맞이가장무도회준비로 들끓었는데 리자는 수진이를 외진데 끌어내여 자기 집에 초청하였다. 오늘이 할아버지의 생일인데 자기와 함께 집에 가서 생일 68돐을 맞는 빨찌크해병을 축하해주면 고맙겠다는것이였다. 수진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 초청이 무척 기뻤다.
그가 리자를 따라 아르바뜨거리로 가서 처녀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손님들로 흥성거릴줄 알았던 집안이 예상밖으로 조용했다. 리자는 자기 집에 들어서자 숫저운 자태의 녀대생 허울을 벗어던지고 응석받이처녀애로 되여버린듯 안에 대고 엄마- 왔어- 하고 소리쳤다.
방안에서 처녀의 어머니가 뛰여나오고 아버지가 따라나왔다. 그들 부부는 반가움에 겨워 어찌할바를 모르면서도 수진을 영웅조선의 손님답게 례절을 차려 맞아 점잖게 인사를 나누고 응접실로 안내하면서 할아버지는 오전에 구역당과 구역쏘베트에서 여러 동지들이 와서 오래동안 앉아있다 갔기때문에 지쳐서 누웠다고 량해를 구하였다.
리자의 아버지는 학자풍의 체취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체구가 든든하며 표정이 근엄한 무관형의 사람이였다. 어머니는 로씨야가정의 주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몸이 뚱뚱하고 선량해보이는 녀인이였다.
수진이 리자에게 이끌려 안락의자에 앉고 처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량옆에 자리를 잡는데 저쪽 안방쪽에서 누구인가를 크게 찾는 소리가 났다.
리자가 뛰여나갔다. 이윽고 주단에 발들이 스치는 소리며 헐썩거리는 숨소리가 나더니 리자에게 부축되여 키골이 장대한 로인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후렁후렁한 바지에 목깃에 꽃수가 놓인 로씨야식적삼차림인 에핌로인은 아직도 발찍함대시절의 기개가 살아있는듯 코밑에 더부룩한 재빛수염을 쓸어만지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조선청년을 몇순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다리를 약간 벌리고 걷는 해병식걸음으로 다가와 수진을 와락 그러안고 잔등을 두드리며 영웅, 영웅이라고 웨쳤다.
간소하나 품위있게 차려진 주연… 모두 할아버지의 장수를 위하여 축배를 들었고 리자의 아버지가 미제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영웅적조선인민의 승리를 위하여 들자고 하여 서로 잔들을 찧으며 승리를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라고 속삭이였다.
그다음부터 조선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였다.
그날저녁 수진은 응접실벽에 걸려있는 하나의 사진에 자주 눈길이 갔다. 레닌과 뾰족모자를 쓴 청년적위병이 통나무에 가지런히 걸터앉아있고 그뒤에 인테리형의 중년남자가 서있는 사진이였다.
리자의 어머니가 저 적위병이 할아버지라고 하자 축배술이 거나해진 에핌로인은 옛 추억을 더듬었다.
《18년 3월 볼쉐비크당중앙과 전로쏘베트가 뻬뜨로그라드로부터 모스크바 크레믈리로 옮겨온 다음에 찍은걸세. 토요일이였지. 일리이츠께서 토요로동에 참가하여 우리 적위병들과 함께 통나무를 메나르다가 쉴참에 나를 불러 나이는 몇이고 고향은 어디고 위수부대생활이 어렵지 않느냐고 여러모로 친절히 물었네.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하라고 해서 먼저 일리이츠께 한대 권하였더니 담배를 피우면 머리가 아파 피우지 못한다고 사양하시면서 나보구는 자꾸 피우라고 하시였네. 정말 겸손하고 소박한분이였어. 뒤에 서있는분은 제미얀 베드늬라고… 시인이였네. 시인, 알겠나?… 크레믈리 사무국장 본치 부르예위치 밑에서 직원으로 일했지. 일리이츠는 베드늬를 아주 좋아했어…》
수령을 흠모하여 추억하는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되였다. 리자의 아버지가 화제를 돌려 자기는 현시대 수령들중에서김일성동지와같은분은 없다고 하면서김일성동지가 어떤분인가 하는것을 또쓰크종합대학에 있을 때 눈으로 직접 보고 느꼈다고 하였다.
《그때 또쓰크의 여러 대학들에서는 많은 조선청년들이 공부하고있었소. 조선의 류학1기생들은 다 또쓰크에서 공부했지. 전쟁직후라 우리가 식량사정이며 모든 생활조건이 어려워 조선류학생들도 배를 곯으며 공부했네. 영양부족으로 몸이 쇠약해져 앓는 학생도 생겼지.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네. 어느날 쌀을 실은 화물렬차가 또쓰크역에 들어왔네.김일성장군님께서 류학생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하시고 보내주신거네. 알겠나? 그때 조선도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장군께서 간부들에게 우리가 좀 못먹더라도 나라를 건설할 인재로 자라는 저 류학생들한테 쌀을 보내주자고 하시였다네. 쌀을 싣고온 조선교육일군들이 대학들에 나가 전달식을 크게 하고 류학생 1인당 흰쌀 90키로그람씩 수여했네. 쌀포대에 엎드려 울던 조선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그 광경을 보며 또쓰크종합대학의 로교수들은 세계교육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하며 절세의 애국자인 수령만이 교육을 이토록 중시하며 교육을 중시하는 나라는 번영한다고 하였네. 나는김일성장군이 이런분이시기에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믿네.》
그리고는 10월의 포성을 울린 한 로볼쉐비크가정의 명의로 그이의 건투를 축원하며 잔을 들자고 하였다. 유리잔들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 응접실의 공기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친선의 정, 취흥으로 설레이고 주고받는 말들은 어느덧 생활적인데로 번지여 대학의 가장무도회준비가 화제에 올랐다.
그러자 리자는 타는듯한 눈으로 어머니를 빤히 지켜보고 그 어머니는 딸에게 모하뜨극장 의상사가 수고했다, 찾아와서 네 방에 걸어놓았다고 하였다. 리자는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자기 방으로 뛰여갔다.
딸이 사라지자 그 녀인은 수진에게 저애가 가장무도회에 렌쓰끼로 분장하여 나선다고 하여 안면이 있는 모하뜨극장 의상사에게 부탁하여 남자연미복을 겨우 지어왔노라고 하였다.
《동무들속에서 우쭐렁대며 교만을 부리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얼굴이 깎인다고 늘 타일러오지만 실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예브도끼야어머니는 한숨을 지었다. 외동딸을 가진 녀인의 로파심은 조선어머니들이나 같았다.
수진이 너무 말이 없고 조용해서 탈이라고 하자 녀인은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연미복차림의 리자가 바람처럼 응접실로 뛰여들어왔다. 처녀는 수집음, 행복감, 흥분에 홍조가 타오르는 얼굴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서보이며 옷이 맞나, 크지 않나, 목깃이 어떤가, 남복이 나한테 어울리나 하고 어리광스럽게 물었다. 새까만 연미복도 고상하지만 눈같이 하얀 와이샤쯔목깃이 목을 떠받들어 리자는 자태가 더 생동해지고 기품이 도고해보였다. 모두 대견하여 미소를 띠고 19세기 귀족청년 비슷하다느니 키만 좀 컸으면 렌쓰끼와 꼭같겠다느니 하고 찬탄의 말을 하는데 에핌할아버지가 귀한 손님도 왔겠다, 이왕이면 가정시연회 겸 렌쓰끼의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일렀다. 아버지가 피아노앞에 앉아 뚜껑을 열고 건반을 치자 서정적인 선률이 터져나오고 리자가 손을 뒤에 감추고 벽에 붙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은은하면서도 열정이 느껴지는 녀성중음의 소박한 목소리였다.
수진은 그날밤 기숙사로 돌아와 리자가 부른 그 노래의 가사를 번역해보았다.
어데로 그대 사라졌느냐
내 청춘의 시절이여
앞날은 무엇을 약속하는가
헛되도다 내 눈 그대를 찾으나
안개속에 묻혀버린듯
...
썩 후에야 그것이 가극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나오는 노래라는것을 알았다.
이튿날 밤 설맞이가장무도회 쉴참에 부른 리자의 노래는 폭풍같은 박수갈채와 환성이 터져오르게 하였다.
그날은 리자의 행복뿐아니라 모스크바의 추위도 절정에 오른듯싶었다. 밖에서는 눈바람이 울부짖었지만 강당에 꾸려진 가장무도회장은 화창한 봄날처럼 훈훈하였다.
천정밑에 드리운 장식등들의 휘황찬란한 빛발이며 그아래에 얼기설기 얽히며 휘늘어져 건너가고 건너온 오색테프들, 높이 솟은 신년송가지들에 피여난 《눈서리》며 그밑에 포도알처럼 주렁져 간단없이 깜빡거리는 꼬마장식등들의 재롱, 손을 들어 설맞이를 축하하며 미소짓는 《눈처녀》… 그 모든것이 리자를 위하여 마련된듯하였다.
무도장이 떠나갈듯이 불어대는 취주악의 흐름속에 다색다채로운 옷차림, 형형색색의 가면을 쓴 처녀총각들이 쌍을 지어 시간가는줄 모르고 정신없이 춤추며 돌아가다가 음악이 멎자 두리번거리며 벽쪽으로 우르르 밀려나갔다.
공지처럼 빈 무도장바닥, 고요, 허공에서 《눈송이》들이 반짝이며 날아내리고 렌쓰끼가 피아노음악에 실려나오는듯 머리를 약간 수굿하고 천천히 걸어나오다가 은은하게 노래를 떼였다.
어데로 그대 사라졌느냐
내 청춘의 시절이여
…
수진은 창문밑 외국류학생들을 위하여 마련된 좌석에 앉아 노래부르는 리자만 지켜보다가 가슴을 두드리는 피아노음악의 충격에 눈을 지그시 내려감았다. 웬일인지 검은 구름이 무겁게 뒤덮인 가없이 넓은 대지가 떠오르고 둥지를 잃고, 어미를 잃은 작은 새 한마리가 그 어둑한 하늘땅사이를 날아돌며 애절하고 비통하게 우짖는듯 하였다.
헛되도다 내 눈 그대를 찾으나
안개속에 묻혀버린듯…
그 소리는 홀연 피타는 웨침으로 변하여 잃어진 청춘, 짓밟힌 사랑, 사라진 모든것을 다시 오라고 강력하게 부르짖는것 같았다.
수진은 언제 노래가 끝났는지 몰랐다. 장내가 떠나갈듯이 터져오르는 박수소리에 눈을 뜨니 리자 꾸즈네쪼바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손을 들어 흔들며 대학생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에 답례하고있었다.
사회주의대국의 품속에서 나이 한살을 더 먹으며 행복의 절정에 오른 리자… 미소와 환희로 빛나는 얼굴, 눈부신 자태… 처녀는 무슨 선풍의 회오리에 휘감기듯, 대지에서 피여오르는 아지랑이속에 든듯 얼굴이 마냥 어른거려보이였다. 리자는 공산주의사회가 멀지 않아 도래하리라고 믿었으며 자기도 그 리상사회에서 살아볼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지난날 리자를 생각하면 어째서인지 로씨야땅에서 흔히 볼수 있는 애어린 봇나무가 련상되였다. 비옥한 대지에 뿌리를 깊이 박고 하얗고 깨끗한 줄기가 곧게 자라올라 부드러운 가지들을 펼쳐 푸르싱싱한 잎새들이 미풍에도 반짝이며 설레이는 봇나무… 리자는 봇나무처럼 깨끗하고 곧고 싱싱하였다.
그 처녀는 로씨야대지의 무성하는 숲속에서 설레이는 한그루 봇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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