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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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1
류수진이 려권검사를 마치고 여러 나라 손님들과 함께 출구를 지나 광실에 나서니 우리 대사관 영접부의 젊은 지도원이 다가와 인사했다. 젊은이는 수진의 손에서 트렁크를 앗아들고 곁으로 다가온 나이지숙한 두 로씨야사람을 돌아보며 대학에서 마중나온 동지들이라고 소개하였다.
한사람은 후리후리한 키에 밤빛 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칼칼한 인상의 얼굴이고 다른 한사람은 중키의 비만한 체구에 도수높은 안경을 낀 침울한 인상의 얼굴이였다. 그들 손님과 주인들은 몇순간 서로 인사도 못하고 뚫어지게 지켜만 보았다. 다난한 세월이 들씌운 서리와 주름살과 로년의 침중한 그늘을 밀어제끼고 40년전의 홍안을, 청춘의 생기를 찾아보려고 애쓰며… 그러다가 무슨 표적이 뇌리에 번개쳤던지 류수진은 몇년가야 성낼줄 모르던 호인 글레브와 대학축구팀 방어수, 대식가 미샤를 알아보았고 두사람은 공부밖에 모르던 금욕주의자 《아리랑》의 명창 수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셋은 떠들썩한 포옹도 없이 나이와 지체에 어울리게 손에 손을 뜨겁게 잡아쥐고 말없이 흔들뿐이였는데 누구의 눈에나 이슬기가 어리였다.
얼마후 그들이 탄 승용차는 이 나라 자동차공업의 년대기를 말해주는듯 한 형형색색의 차들의 흐름속에 끼여 모스크바시가 중심부쪽을 향해 달리였다. 앞에서는 영접부 지도원의 차가 길잡이를 하듯 신호등불이 위혁적으로 번쩍거리고 차들이 줄줄이 멎어선 십자로며 인파가 굽이치는 건늠길들에서 재치있게 속도조절을 하며 침착하게 미끄러져나가고 뒤차안에서는 기쁜 소식들이 이야기되고있었다.
앞좌석의 글레브 라옙쓰끼는 내내 침묵을 지키고 수진의 곁에 앉은 미하일 포멘꼬만은 20대의 대학시절로 돌아간듯 명절기분이 되여 떠들어대였다. 그는 기쁨에 겨워 도이췰란드, 체스꼬, 마쟈르, 로므니아, 몽골, 중국, 윁남…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졸업생들이 한두명씩은 왔다고, 안올줄 알았던 조선에서 수진이까지 오니 출석률이 70%는 넘을것 같다고 하였다.
《우와로브동지도 대만족일세. 이건 단순한 동창회가 아니라 무슨 국제적인 축제로 될것 같네! 그럼 축제가 아니구… 참가자들이 허술한 인물들인가. 여보게, 웨베르가 생각나? 웨베르! 우리 축구단 문지기, 그 친군 도이췰란드내각 국장이네, 국장… 기사장, 부지배인, 박사, 교수는 또 몇이고… 우와로브동지는 어제도 참가자들을 료해하다가 이건 우리 대학의 영예라고 했네…》
류수진은 그의 말에 두번이나 오른 우와로브란 누구일가 하고 생각하였다.
포멘꼬는 신명이 나서 동창회준비위원회가 어제 일정계획을 대폭 변경하여 상봉모임, 과학기술통보모임, 경험교환모임, 학술토론회, 야유회외에 《시대와 개편》, 《과학기술과 개편》, 《기술인테리와 개편》등 흥미있는 쩨마의 《토론의 밤》, 여러가지 참관사업, 발레뜨예술의 기적 마까로바가 출연하는 발레뜨소품공연을 비롯한 명작공연관람과 같은 일정을 더 포함시키기로 토의하였다고 말했다.
라옙쓰끼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깊이 잠긴듯 화제에 전혀 비치지 않고 앞쪽만 줄곧 내다보고있었다. 차창밖으로는 깔리닌대통로의 인적이 드문 한산한 상점가가 흘러지나가고있었다.
포멘꼬는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모스크바는 이전의 모스크바가 아니네. 온통 혼란일세. 이전보다 못할수 있네. 량해하라구. <개편>이 벌어져 모든것을 뜯어고치는중이니까. 한채의 집을 개건해도 벽을 치고 뻬치까를 허물고 울타리를 밀어제끼고 하수도관을 파헤쳐 이전의 생활질서가 뒤죽박죽이 되지 않는가. 하물며 쏘련이라는 대국을 <개편>하는데야 무슨 혼란인들 없겠나. 그러나 혼란… 부족… 이건 과도기의 일시적현상이네. 현상만 보고 환멸을 느끼지 말라구.》
류수진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포멘꼬는 잠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제 여기 모스크바에 동성련애자들도 생길거네. 서유럽의 류행이 홍수처럼 밀려드니까… 내 말이 틀리는가 보라구. 동성련애자들은 다 패덕한이고 성망나니이고 미치광인줄로 알지만 아닐세. 륜리적기준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달려있네. 그들은 새 세기, 새 사조의 첨단에 섰다고 자부하네. 그들은 개성의 자유를 주장하네. 절대적인 자유를… 개성에 따르는 다양한 혼인, 다양한 생활양식… 이 모든것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네. 서구의 동성련애자들은 국회가 혼인법을 개정보충하라고 웨치네. 다양성, 다원주의… 이건 금세기말 인류의 보편적지향인가 보네. 여보게, 아이적부터 단순성으로 길들여진 우리가 대학시절 가슴이 터지도록 느낀 행복감이란 무어겠나? 오늘에 와서 보면 어리석은 자기만족의 도취였네.》
《미샤…》 하고 라옙쓰끼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핀잔조로 나직이 불렀다. 포멘꼬는 입을 다물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류수진은 가슴이 서늘해지고 혐오감까지 들었으나 갓 도착한 손님의 립장을 지켜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그는 화제를 가벼운 일상사로 돌리고싶어 포멘꼬에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롬시 전동기공장에서 책임기사로 일하다가 해고되여 실업자로 되였는데 우와로브동지의 요청으로 대학기숙사에 들어와 묵으면서 동창회준비사업을 돕는다고 하였다.
《우와로브동지란 누구인가?》
《아니 모르나? 우리 상급학년 겐나지 우와로브를… 부학장이고 교수, 박사… 주쏘베트 대의원이네, 대의원… 생각나나?》
생각나지 않았다.
수진은 좌석등받이에 기대여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우와로브… 우와로브… 지나간 40년이란 망각의 파도로 모든것을 휩쓸어버린 세월의 흐름이였던가. 이마에 식은 땀이 내배였다.
차안에서는 내내 말이 없었다. 차창밖 차도로는 여러줄로 늘어선 승용차며 식료차, 구급차, 화물차들이 분주히 달려지나가고 저쪽 누렇게 황이 든 가로수밑으로는 사람들의 물결이 흐르고있었다. 사람들은 무엇에 쫓기우는듯, 그 무엇이 소리쳐부르기라도 하는듯 창황히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그들이 탄 승용차는 공중에서 울긋불긋한 표식등불이 비치는 네거리에서 골목길로 꺾어들어 얼마간 달리다가 성벽처럼 길고 우중충하게 솟은 건물의 현관앞에 멎어섰다.
《로씨야》호텔이였다. 류수진은 라옙쓰끼, 포멘꼬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먼저 도착한 영접부 지도원이 달려와서 수진의 트렁크를 받아들었다.
그들은 현관에서 쏟아져나오는 서구관광객들인듯 한 한떼의 청춘남녀들과 어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저녁시간이여서 불빛이 찬란한 광실은 접수수속을 하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여기저기에 아시아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일본사람들인것 같았다. 포멘꼬가 수진의 려권을 금발머리접수원녀인에게 맡기고는 과장벽이 있는 사람이면 중세기 성문열쇠와 같다고 할수 있는 투박하고 육중한 호실열쇠를 받아가지고 왔다.
그들은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 구석쪽의 한 호실로 들어갔다. 욕실겸 화장실이 붙은 어수선한 단칸방, 벽지며 주단은 퇴색했으며 시꺼먼 도장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투박한 가구가 어설프게 벽에 붙어있었다. 벽장안에 들어있는 구식 소형랭장고가 눈에 띄였다. 포멘꼬가 문을 열어보니 안에는 그래도 청량음료 서너병이 들어있었다.
라옙쓰끼가 방안을 두루 살펴보고나서 죄송스러운 얼굴로 《개편》이 시작된후 외국손님들이 밀려들어 호텔들이 차고넘치기때문에 이런 호실밖에 차례지지 못했다고 량해를 구하였다. 그리고 지금 대학당국이 교섭중이니 동창회참가자들이 모두 좋은 호텔로 옮기게 될것이라고 했다. 영접부지도원은 두 로씨야인이 조선말을 모른다고 꺼리낌없이 험구를 하였다.
《고려호텔은 내놓고 대동강호텔하고만 비교해도 이것도 호텔입니까,이 방 꼴을 보십시오. 이래서 편의봉사부문부터 <개편>을 한다는데 무슨 개판인지… 선생님, 정 불편하면 우리 영접부숙소로 옮깁시다. 래일 제가 전화를 걸지요.》
그들이 간 다음 수진은 행장을 풀고 옷가지들을 대수 갈아입은 다음 쏘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가슴으로 스며드는 향긋한 담배연기와 함께 이름할수 없는 감회가 밀려들어 마음이 마냥 설레였다. 모스크바… 포멘꼬의 동성련애론이 혐오스럽고 방이 좀 초라해도 모스크바는 그한테 르바쳅쓰끼의 립체기하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배워주고 영구동력기관의 허황성을 일깨워주며 청춘시절의 꿈을 키워준 도시, 5. 1절시위때마다 함께 노래부르며 거리를 활보했고, 오이쓰뜨라호의 바이올린음악을 함께 들으며 명상에 잠겼고, 쓰딸린의 서거때 함께 붙잡고 울었던 학우들이 사는 고장, 레닌이 영민하고있는 성지였다. 여기 이 《로씨야》호텔에서 붉은광장이며 대극장도 《구움》백화점이며 스따니슬랍쓰끼 및 네미로위츠 단체꼬 명칭 모스크바예술극장도 지척이라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게 되였다.
그는 창문을 통하여 바깥거리풍경을 내다보았다. 소슬한 바람에 누렇게 황이 들어 시든 가로수들에서 락엽이 한잎 두잎 날아떨어지고 그밑으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오갔다. 가로등불빛에 차창을 번들거리며 택시 한대가 천천히 굴러오다가 멎더니 운전칸문이 열리고 한 녀석이 머리를 내밀고 호텔 어느 층인가 쳐다보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니-나-… 니-나-》
저녁식사후 수진은 가을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자기전에 산책도 할겸 밤거리를 구경하고싶었다.
호텔에서 나온 그는 붉은광장쪽으로 갔다. 선기를 품은 대륙의 가을바람이 광장을 휩쓸며 먼지를 부옇게 날리고 휴지쪼박들을 굴리였다. 레닌묘에는 예나 다름없이 쌍보초가 조각처럼 완전부동자세로 마주서있는데 이전과는 달리 그앞에 구경군들이 서너사람밖에 없었다. 광장저쪽 맞은편에는 숱한 사람들이 장사진으로 늘어서 무엇때문인지 왁작 끓어번지고있었다.
수진은 무심결에 그쪽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거기에는 색색의 수지나 마분지 혹은 합판이나 널판자로 대수 지은 가게방들이 어깨겯고 늘어섰는데 그앞에 사람들이 몰켜서서 류행복들이나 외투, 가죽장화, 양산, 선풍기, 전기면도칼, 각종 록음기들, 사진기따위들을 들고 생활전선에 나선 가정부인들이나 멀쩡한 젊은 놈팽이들인 장사치들이 귀청이 떨어져나가도록 큰소리로 고아대며 흥정판을 벌리고있었다. 그 고함소리속에서 히다찌, 산요, 토시바라는 소리들이 유표하게 들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상품들에 끌려 이 가게에서 저 가게에로 정신없이 돌아치고있었다. 물욕과 리윤추구열이 충돌하고 교차되며 란무하는 그 광기속에 끼여들 엄두는 내지 못하고 뒤쪽에 우두커니 서서 희한하게 바라보는 구경군들도 적지 않았다.
수진이도 그런 사람들속에 서있었다.
수진이 코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슬렁어슬렁 아래쪽 가게로 옮겨가는데 곱슬머리가 더부룩하고 상판이 감스럼한 녀석이 그의 팔굽을 잡아 옆으로 끌어내더니 보자기에 싼것을 들어보이며 히쭉 웃었다. 보자기밖으로 황동제 송화구나팔이 삐죽 내민것으로 보아 구식전화기가 틀림없었다.
곱슬머리는 눈빛이 제법 신중해지며 옛날 시위수사령관이 쓰던 친용전화기인데 력사유물로도 가치가 대단하니 200루블-리만 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의 유물이고 대를 물리며 전해오는 가보인데 급하게 돈이 필요해 판다는것이였다.
《쓰딸린과 세번… 세번이나 통화한 전화기지요…》
어느새 겹겹이 둘러서 술렁거리는 사람들속에서 작달막한 검은 수녀복차림의 로파가 곱슬머리한테 종주먹을 흔들며 되알진 소리를 내질렀다.
《거짓말! 도적질했지? 이 집시같은 도적놈아-》
곱슬머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자약하여 손바닥을 오무려 귀에 붙이고는 전화 거는 시늉을 했다.
《예… 예… 이오씨프 위싸라오노위츠, 뜨로쯔끼분자 세놈을 체포했습네다. 예… 예… 까메네브, 부하린, 지노비예브도당과도 내통이 돼있던놈들입네다. 군사법정은 총살형을 예견하는데 화형을 시켰으면 좋겠습니다. 화형! 기름이 바질바질 끓게…》
기지있는듯 하면서도 엉터리없는 그 수작질에 어이없어 한숨을 짓는가 하면 혀를 차고 유쾌하기라도 한듯 껄껄 웃어대는 축들도 있었다. 검은 수녀복의 로파는 황황히 십자를 긋고 돌아서버렸다.
수진이도 돌아섰다. 그는 이런 도적물건의 싸구려판에 끼여있었다는 수치심에 목을 움츠러뜨리고 어디라없이 허둥지둥 걸음을 다그쳤는데 누구인가 뒤쫓아와서 팔을 와락 잡아챘다. 곱슬머리였다. 그는 얼굴빛이 영악해지고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살것처럼 하고 왜 그냥 가는가, 왜 사람을 속이는가고 따지며 야비한 욕설을 마구 내뱉았다. 뿌리쳐버리고 레닌묘쪽으로 가는데 지꿎게 따라와 이번에는 슬슬 구슬리기 시작했다. 180루블에 사라, 그럼 150루블, 120루블…
그가 응하지 않자 놈팽이는 성이 독같이 나서 사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테다, 지옥에까지 따라가서 복수하겠다고 을렀다.
수진은 놈팽이를 홱 뿌리쳐버리고 행인들속으로 뛰여들어갔다. 그는 녀석이 따라오지 않는가싶어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호텔쪽방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천정등의 조화로 어슴푸레한 빛이 흐르는 5층복도에는 정숙이 깃들어있었다. 호실들의 두꺼운 문들은 밤의 비밀을 가리워주는듯 굳게 닫겨져있었다. 복도구석의 어스름속에서 금발의 처녀가 꿈속에서처럼 소리없이 걸어나오다가 그에게 머리를 약간 숙여보이며 지나갔다.
수진은 자기 호실로 성급히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켰다. 코트며 양복저고리를 벗어 침대에 던지고 쏘파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출입문쪽에서 손기척소리가 났다. 들리는듯마는듯 한 소리… 무엇인가 작고 부드러운것으로 소심하게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
그는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그놈이 따라왔구나! 그놈이다… 내가 완력을 쓴건 잘못했어. 어쩐다?… 안내에 전화할가?)
다시 정적, 이윽고 동안을 두며 한번 또 한번 울리는 야릇한 소리, 똑똑똑… 똑똑…
응대를 안하고 귀만 바싹 강구니 문에 무엇인가 쓸리는 소리가 나고 발자국소리가 어디로인가 아득히 멀어져가는듯 하더니 괴괴한 정적이 깃들었다. 놈이 집요하게 들어오려고 시도하다가 가버렸다고 안도의 숨을 쉬였다.
그가 담배를 연거퍼 두대 피우고 자리에 눕자고 불을 끄려는데 출입문쪽에서 이상한 기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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