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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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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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군으로 들어가는 산골길을 따라 한대의 승용차가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달리고있었다.
차안에는 도당책임비서 박윤식이 앉아있었다. 차창밖으로 가로수들이 날아지나가고 앞에서는 길이 물살같이 빠른 흐름으로 달려와 차체밑으로 사라지건만 차가 느리게만 움직이는것 같았다.
박윤식은 평양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비서들과 부서책임자들에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전달하고는 (예견했던 집행위원회는 뒤로 미루고) 곧장 송탄으로 향하였다.
그는 도당책임비서로 오래 사업하면서 이 길을 수없이 다녔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함박눈이 퍼붓는 낮에도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도… 길, 길은 그에게 있어서 사람들의 생활이 흐를뿐아니라 당의 령도력이 줄기차게 뻗쳐나가는 혈맥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길가에 드문드문 서있는 해묵은 가로수와 이끼오른 석축이며 흙먼지를 들쓴 너럭바위, 퇴색한 리정표, 산비탈들의 다락밭과 무성한 뽕나무밭… 이전에는 무심히 보이던 그 모든것들이 오늘은 새로운 의미를 띠며 안겨왔다. 해빛이 불꽃튀는 차창유리에 차영진의 얼굴이 언뜻 어리기도 하였다.
이웃군당에서 사업하던 차영진은 송규태가 정권기관을 강화하기 위한 당적인 조치에 따라 도행정경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올라오게 되자 그 후임으로 송탄군당책임비서로 왔다.
두사람은 한주일이 걸려 군당사업에 대한 인계인수를 끝마치였다. 군을 인계하고 도에 올라온 송규태는 얼굴이 환해서 부서들로 돌아다니며 부임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며칠후 도당에 올라온 차영진은 그렇지 못하고 얼굴빛이 어둑했다. 중책을 걸머져 마음이 무겁기때문인것만 같지 않았다.
그와 담화하였다. 그때 박윤식은 사람들에 대하여 인계한 내용들을 알아보고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는 선임자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말고 일을 시켜보면서 자기 신념에 따라 평가하라고 일러주었다. 차영진은 침울한 얼굴로 말하였다.
《군의 인구장성률이 낮습니다. 지난 20여년간 산아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사망률은 점점 줄어들었는데도 인구가 늘어나지 못했습니다. 원인을 밝혀보니 살기좋은 벌방지대와 도시로 계속 새여나갔습니다….》
그는 이 몇해동안 군을 벌방지대 못지 않게 추켜세우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아득한 옛날 사람 못살 두메산골 송탄땅에 인총이 생기고 늘어난것은 세상을 등진 기구한 운명의 사람들이 흘러든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세상의 버림을 받은 그들은 숯구이나 사냥질, 혹은 화전을 일구어 근근히 연명해갔는데 그 시절에는 누구나 송탄다음에는 저승이라고 하였다.
해방후에는 사람들의 생활이 한결 펴이고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오늘도 송탄군은 나라의 경제발전에 전혀 보탬을 주지 못하고 식량만 겨우 자급자족하는 척박한 고장이다. 송탄이라는 지명은 도의 경제생활에서 부담의 대명사였다. 그는 언제나 송탄을 측은하게 여기면서도 나라의 식량문제해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창지대의 군들과 경제적의의가 큰 공업이 집중된 시, 군들에 더 큰 관심을 돌리게 되였던것이다.
승용차는 나지막한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저 멀리에 군소재지가 바라보였다. 삼면이 산들에 둘러싸인 산간읍 여기저기에 우뚝우뚝 솟아오른 벽체들이 보이고 거리바닥이며 산기슭, 시내가 그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들끓고있었다. 박윤식은 군을 꾸려보려고 떨쳐나선 인민들의 뜨거운 마음이 안겨와 그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차가 산굽이들을 우불구불 에돌아간 길을 따라 가볍게 미끄러져내려 평지길에 들어서는데 운전사가 차속도를 늦추며 조용히 말했다.
《저기 오는게 군당책임비서동지가… 아닙니까!》
오른쪽 들판의 달구지길을 따라 작업복차림의 사람이 자전거를 정신없이 몰아오고있었다. 어찌나 기운차게 발디디개를 밟아대는지 자전거가 좌우로 기우뚱거리고 머리에서 벗어진 농립모가 어깨너머에서 바람을 안고 춤을 추었다.
도당책임비서는 도로교차점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달구지길을 따라 마주 걸어나갔다. 자전거가 몰아오는듯한 훈훈한 바람에 옷깃이 날렸다.
차영진은 열댓걸음앞에서 자전거에서 뛰여내려 달려왔다. 환갑이 다 된 도당책임비서는 눈꼬리에 미소를 그리며 나이로 보아 자기 동생벌인 그한테 손을 내밀었다.
《수고하오!》
《책임비서동지.》
두사람은 어느 사이엔가 손을 뜨겁게 잡아쥐였다. 군당책임비서의 얼굴이며 목, 손은 해볕과 바람에 그슬려 검스름한 빛갈이고 몸에서는 흙냄새며 능쟁이풀냄새같은것이 물씬 풍겨왔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
《기암리에서…》
《참, 거기 나가 현실체험을 한다지?… 저쪽에 가서 좀 앉자구.》
《읍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소. 오늘은… 인차 돌아가서 집행위원회를 해야 되오.》
그들은 길가의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도당책임비서는 실눈을 짓고 바람결에 술렁거리는 강냉이밭을 둘러보았다. 그자신 이런 밭들을 지켜 피흘리며 싸운 전쟁로병이고 대대로 내려오며 피눈물과 비지땀으로 이 땅을 걸군 농군의 자손이여서 밭머리에 앉으면 가슴속에 이름할수 없는 감회가 차오르는것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져 조용히 모두숨을 내쉬였다.
《강냉이작황이 괜찮을것 같은데…》
《예…》
박윤식은 매사에 민감한 영진이 벌써 무엇인가 느끼고 흥분한 기색이여서 그의 마음을 눅잦히려고 누굿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였다.
《현실체험은 언제까지던가?》
《오늘이 마감날입니다.》
《리에 내려가 세포비서사업을 해보니 어떻소?》
《군당에 앉아서는 느끼지 못한 문제들을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인민들의 고충, 심정도 깊이 알게 되고… 농장원세포비서의 눈으로 군당위원회사업을 올려다보니 빈구멍이 많습니다. 관료주의, 주관주의 요소들이 똑똑히 보입니다. 우선 제 사업에서부터…》
《우에서 내려다보기만 해서는 모르지. 아래에서 올려다봐야지.》
《어제 기암에서 협동화시기부터 오래동안 관리위원장을 한 로인이 사망했습니다. 닷새전에 손자한테 업혀 저를 찾아와서 당비를 물고 한가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기암사람들의 선친들은 저 기암산너머 공동묘지에 다 안장되여있는데 거기로 가는 길이 가파롭고 구배가 심해 추석때마다 아이들이 발목을 접지르는가 하면 녀인들이 엎어져 제주병을 깨고… 사고가 나지 않는 때가 거의 없는데 그 길을 새로 닦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묘지는 왜 다니기 불편한 그런데 써가지고…》
《예전 여기서 군당위원장을 한 종파쟁이가 산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농사가 아니라 목축이 기본이 돼야 한다면서 야산들을 다 방목지로 리용하자면 거기에 묘를 쓰는것을 엄금하고 있는 묘도 기암산뒤로 옮기도록 호령했답니다.》
《흥… 그런 낮도깨비가 있었지…》
《로인은 자기가 관리위원장을 하면서 그자한테 맹종맹동해서 그렇게 되였다면서 자기는 죽은 뒤에도 그 길때문에 사람들의 욕을 먹을것이라고, 인민들의 소원인데 길을 새로 번듯하게 닦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로인은 마지막당비와 함께 그 청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래서 리당비서동무한테 의견을 주었습니다.》
《참… 심중한 문제요…》
《지난날 리당비서나 관리위원장들이 사람들의 그런 불편을 알고있었겠는데 늘 일이 바빠 다음해… 다음해에 하자고 미루다나니 30년이란 세월이 흐른것 같습니다.》
《일군들의 사상관점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보오.》
《저도 기암에 나와 현실체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낼번했습니다.》
《음…》
두사람은 생각에 잠겨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평양에서 언제 내려왔습니까?》
《오늘… 도당에 잠간 들렸다가 동무한테 달려왔소. 기쁜 소식을 알려주자고…》
《예?!》
도당책임비서는 차영진의 팔목을 꽉 잡아쥐였다.
《여보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동무가 일을 어떻게 하는가고 물으셨소. 한번 꼭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시였소…》
차영진은 눈물을 쏟지도 환성을 터치지도 못했다. 얼굴빛이 침착해져 깊은 생각에 잠기는듯, 모진 가책에 깊이깊이 빠져드는듯 눈을 지그시 내리뜨며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내리드리운 머리칼만이 바람에 흔들렸다. 밭들의 강냉이들도 숨을 죽이는듯 하였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으로 도당책임비서를 돌아보았다.
《이거 정말… 어떻게 저를 다… 불과 몇분간 만나주셨댔는데… 제가 그때 다리를 상해 절뚝거렸으니까 아마… 그 인상이 잊혀지지 않았을가요?》
《나도 좀 생각해봤소. 그런 인상… 어느 누구에 대한 인상문제가 아닌것 같소. 여기에 두메산골의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수만명 인민들이 있고 동무가 그들의 운명을 책임진 군당책임비서이니 잊지 못하신거요.》
영진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박윤식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중간지대의 두개 군 형성도안을 보시고 하신 말씀들을 빠짐없이 전달하고 이렇게 물었다.
《동무네가 짓는 살림집들은 어떻소? 부엌이나 창고가 좁지 않소? 크기가 어느 정도요?》
《…》
영진은 대답을 못하였다.
《자로 재본 일이 없소?》
《제가 정말 부실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설계부터 뜯어고치겠습니다. 벽체를 올리는중이거나 완공돼가는 집도 좁으면 벽을 치고 다시 쌓더라도 넓히겠습니다.》
도당책임비서의 얼굴에 불만의 빛이 어리였다.
《그렇게 실무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닌것 같소. 설계를 뜯어고치기전에 일군들의 사상관점을 바로잡아야지… 위원회에서 경제부문 책임일군들을 다 참가시키고 인민들을 위해 어떻게 일해왔는가, 인민의 충복답게 살아왔는가? 이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하도록 해보지 않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이번에 또다시 강조하셨소. 남들이 <개편>을 하건 무엇을 하건 우리는 무익한 론쟁에 말려들지 말고 사회주의건설을 잘해서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우리 인민들이 모두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느끼는것만큼 우리 제도가 공고해진다고 간곡히 가르치셨소.》
《예…》
《그이께서는 우리 일군들이 인민의 충복이 되여 집을 한채 짓고 길을 하나 닦아도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일해야 한다고 하시며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 이 구호를 마음속으로 외워보라고 하셨소. 그러면 수령님의 한생이 떠오르고 힘과 열정이 생긴다고 하시며…》
차영진은 그 함축된 구호속에 담긴 령도자의 뜻이 뜨겁게 안겨와 저도 모르게 나직이 속삭이였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함!… 복무함…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일하겠습니다.》
도당책임비서는 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손을 얹었다.
《이보라구, 그이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80돐까지 평양에서 5만세대의 살림집을 짓는데 대해 말씀하시며 사회주의건설을 잘하여 80돐을 계기로 우리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더욱 빛내이자고 하셨소. 동무네도 수령님의 탄생 80돐까지 군을 잘 꾸려 수령님과 당에 기쁨을 드려야 하겠소.》
박윤식책임비서는 한시간 남짓 앉아있다가 떠나갔다.
도당책임비서의 차가 고개마루 저쪽에 사라질 때까지 길복판에 서있던 영진은 모든것이 꿈만 같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스라하게 높은 파란 공간에서 백열로 불타는 해가 이글거리고있었다.
(나를… 우리 군을 생각해주시다니… 아! 아!)
쏟아져내리는 해빛속에 푸른 산발들이며 푸른 밭들, 푸른 가로수들, 반짝이는 시내물… 대지우의 모든것이 새로 태여난듯 청신한 기운을 풍기며 설레이는것만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터져오르는 격정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그는 철부지 사내아이처럼 해빛속을 정신없이 달려가며 목이 터지도록 환성을 터뜨리고싶었다. 그러나 군당책임비서는 깊은 생각에 잠겨 그자리에 서있기만 하였다. 이윽고 그는 자전거를 끌고 읍쪽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다가 시내가의 수풀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풀속에는 오솔길이 나있었다. 누구인가 하얀 모래를 깐 오솔길에는 자연의 싱그러운 정취가 고즈넉이 흐르고 애어린 버들가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였다. 어느덧 그의 앞에 잔디가 주단처럼 깔린 공지… 중키로 자란 잣나무들에 에워싸인 아담한 공지가 나타났다. 영진은 한그루 잣나무곁에 서서 다감한 눈매로 공지를 둘러보았다.
잊지 못할 그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다가 수원들과 함께 잠간 들려 휴식하며 점심을 드신 자리이다. 아마 읍에 들리면 페를 끼친다고 이런 시내가에서 려행길에 즐기시는 줴기밥으로 점심식사를 에우신것 같았다.
시원한 바람에 설레이는 버드나무잎새들도 해빛에 반짝이는 시내물의 흐름도 그날의 감회를 끝없이 속삭이는듯 하였다.
그날 영진은 상한 다리때문에 제대로 운신할수 없어 집에 앉아 지방산업공장들의 개축설계도안들을 살펴보고있었다. 보름전 밤중에 읍농장의 다락밭들을 돌아보다가 발을 헛디뎌 석축밑으로 굴러떨어졌는데 의사들이 발목뼈에 금이 간것만큼 절대 안정하지 않으면 골수염이 생긴다고 위협했던것이다.
정오가 퍽 지나서 밖에서 승용차의 다급한 경적소리가 울리고 뒤따라 군당위원회 한 일군이 뛰여들어와 숨이 턱에 닿아 믿을수 없는 소리를 하였다. 저 시내가에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와계신다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충격적인 소식에 접하면 침착성을 잃기 일쑤인데 충격도 보통 충격이 아닌, 그이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그 소리에 영진은 자신도 모를 탄성을 터뜨리며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났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는 비틀거리는 자기한테 누가 지팽이를 쥐여주었는지, 어떻게 밖으로 뛰여나가 차에 날아들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두손으로 황황히 머리를 쓸어넘기고 옷차림을 바로잡았다.
시내가로부터 멀지 않은 길목에 멎어선 차에서 뛰여내리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젊은 일군이 앞을 막아서며 누구냐고 물었다. 영진이 자기 소개를 하자 그 일군은 반색을 띠며 지금 식사중이니 좀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길가의 수풀속으로 가볍게 걸어들어갔다. 수풀에 가리워 보이지 않는 저쪽 시내가쪽에서 유쾌한 웃음소리와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니, 저런 한지에서 식사를…)
그는 저도 모르게 수풀속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발걸음을 옮겨가다가 자신의 실책에 흠칫 놀라 버드나무곁에 멎어섰다. 사업수첩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달려왔던것이다. 군당사업과 군살림살이에 대하여 물으시면 수자적으로도 정확히 보고드려야겠는데 어떻게 하는가. 이제 도로 갔다올수도 없지 않는가…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휩쓸어드는 불안감과 소심한 마음에 버드나무뒤로 물러서게 되였다. 그리고는 머리를 수굿하고 군안의 당원수와 그 구성상태, 군의 경제형편과 관련된 필요한 수자들을 바람같이 더듬어보았다. 다락밭의 평수, 새로 조성한 뽕밭의 면적, 새땅찾기운동의 실적, 벼와 강냉이의 작년수확고, 금년예상수확고, 식료공장의 간장, 된장 하루생산량, 군안의 텔레비죤수상기 총대수, 부족량… 온갖 수자들이 머리속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회오리쳤다.
문득 곁에서 인기척이 나 놀라서 돌아보니 아까 그 젊은 일군이 손으로 시내가쪽을 가리키며 부르신다고 말하였다.
영진은 눈앞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개치는것 같았다. 지팽이를 옆으로 홱 내던진 영진은 젊은 일군의 존재도 까마득히 잊고 앞으로 정신없이 걸어나갔다.
시내가 풀밭, 화보사진이나 문헌영화에서 본것처럼 수수한 보위색 잠바옷차림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7∼8명의 수원들과 무슨 이야기인가 청높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다가 돌아보시였다.
그이의 시선이 와닿는 순간 영진은 화기속에 든듯 얼굴과 온몸이 확 달아오르고 숨이 막혔다. 주춤 멎어서게 되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병사시절의 목청으로 우렁차게 보고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군당책임비서 차영진입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러는것이 우스운지 밝게 웃으며 손짓하시였다.
《여기로… 가까이로 오십시오.》
인정깊은 눈매와 다정한 미소에 좀전의 불안감이며 긴장이 가뭇없이 사라져 침착하게 다가갔다. 그이께서도 환히 웃으며 걸어나와 손을 스스럼없이 잡아주시였다.
《이거 주인도 모르게 군경내에 들어와서 미안합니다!》
영진은 소탈하신 그 모습에 감동되여 진정을 담아 말씀드렸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들어가십시다! 지도자동지를 우리 고장에 모시고싶은것은 군안의 전체 당원들과 인민들의 소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일정이 급해서… 당원들과 인민들에게 들려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나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언제 왔는지 그이의 뒤켠에 서있는 도당책임비서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일이 바쁘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책임비서로 사업합니까?》
도당책임비서가 그의 경력을 이야기하며 이 고장태생이고 제대군인출신이며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말씀드렸다.
《아, 그렇습니까. 군의 농사작황은 어떻습니까?》
《늦은 봄과 초여름에 가물이 들었지만 관수체계가 은을 내서 작황이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수령님께서 도시나 벌방지대보다 산간지대 인민들의 생활에 대하여 더 걱정하시는데 작황이 좋다니 기쁩니다. 뭐니뭐니해도 농사가 잘되여야 합니다.》
《이 동무가 군당책임비서로 와서 일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군을 현대적으로 꾸리기 위해 건설판도 크게 벌리고…》 하고 박윤식이 말씀드렸다.
《좋은 일입니다!》
영진은 그런 치하로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리였다.
《이전 책임비서동무가 여기서 오래 사업하면서 일을 많이 해서 군소재지도 농촌테제에서 밝힌 사상, 기술, 문화 혁명의 거점답게 기본적으로 꾸려졌습니다. 인민들의 요구수준이 점점 높아져 군소재지를 현대화하고 리소재지들도 번듯하게 꾸려보자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현대적으로 번듯하게라! 그렇게 해야 합니다. 평양에서도 60년대, 70년대에 지은 살림집들은 벌써 낡아졌습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세대가 교체될수록 인민들은 더 좋은 집, 더 문화적인 환경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자주적이며 보람찬 삶을 한껏 누리려는 인민대중의 지향을 실현시켜주는것이 우리 당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웬일인지 그이의 다심한 눈길이 영진의 얼굴에서 손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멎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뒤에 슬그머니 감추었다.
《새까맣게 탔구만…》
그이께서는 매우 만족하신듯 영진의 팔굽을 뜨겁게 잡아쥐시고는 수원들을 돌아보시였다.
《이 동무의 얼굴색을 보오. 어떻게 일했는가 짐작이 되오. 인민대중과 혼연일체요. 우리 당일군들의 얼굴색은 근로대중의 얼굴색과 이렇게 같아야 하오… 모든데서 군당책임비서의 표준입니다.》
그러시고는 부드럽게 말씀하시였다.
《대도로와 철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이런 외진 산골에서 일하자니 애로와 난관이 한두가지 아니겠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얼마전 함북도를 현지지도하시면서도 산간지대의 인민생활을 벌방지대 못지 않게 추켜세워야 한다고 간곡히 교시하시였습니다. 무엇이 제일 애로입니까? 제기하십시오.》
《…》
목이 메였다. 풀어달라고 제기하고싶은 문제란 한두가지 아니였다. 백가지, 천가지… 수송수단, 뜨락또르, 농약, 철강재, 판유리, 방송차, 악기… 그 모든 요구들이 한꺼번에 터져올라 불덩어리로 되여 목구멍을 지지는듯 하였다. 그래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무엇이나 제기하십시오!》
수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팔목시계를 보았다. 떠날 시간이 된것 같았다. 영진은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나라의 경제생활에 아무런 보탬도 주지 못하면서 부담만 끼치겠는가싶어 목안을 지지는 불덩어리 같은것을 간신히 삼켜버렸다.
《지도자동지, 괜찮습니다. 부족되는것이 없는건 아니지만 자체의 힘으로 풀수 있습니다.》
그러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의 팔을 스스럼없이 툭 치며 머리를 끄덕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박윤식책임비서에게 도당에서 잘 도와주라고 이르시고 영진의 손부터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군을 잘 꾸리오. 한번 꼭 찾아와서 보겠소!》
차들이 떠났다. 너무나도 짧은 만남이고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떠남이여서 어정쩡해진 그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차들을 뒤따라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귀전에서 태풍이 울부짖는듯 하였다. 무엇으로인가 다리를 후려치는듯 한 모진 타격에 그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길가로 걸어가 가로수를 붙안고 말았다. 친애하는 그이께서 다시 찾아오겠다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가슴과 머리속에 울리며 긴 여운을 끌었다.
처음 한해동안은 혹시나 하고 그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 기다림이 얼마나 천진란만한것인가 스스로 깨닫게 되였다. 당전원회의, 최고인민회의, 북방의 대흑색야금기지와 세계굴지의 철광산, 순천비날론공장 건설장을 비롯한 사회주의대건설장들에 대한 현지지도, 조국의 운명을 위협하는 미제의 《팀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 군사분계선에서의 빈번한 도발사건, 사상류례없는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세계여론을 뒤흔드는 이러한 사변들에 대한 보도를 들을 때마다 친애하는 그이의 령도폭과 불면불휴의 로고에 대하여 가슴저릿하게 느끼였으며 자기 소원이 얼마나 철없는것인가를 깨닫게 되였던것이다.
마침내 그는 행운의 날을 기다리지 않게 되였으나 매혹된 넋의 미련이란 꺼지지 않는 불길같아 새벽녘에 전화종이 울려도 뛰여일어나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뒤에 흔히 있게 마련인 실망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나라의 령토 2백분의 1에서 힘차게 벌어지는 혁명과 건설을 정치적으로 이끄는 군당책임비서였다.
텔레비죤화면이나 문헌영화에서 그이를 보아도 그날의 감회가 되살아올라 남달리 기뻤고 말씀을 전달받아도 구절구절에서 령장의 기개와 육친의 정이 안겨와 가슴이 후더워졌다. 그이께서 오시지 않아도 언제나 가까이에 계시는듯 행복감속에 일하며 살수 있었다.…
공지둘레에 초병처럼 서있는 푸르싱싱한 잣나무들도 주단처럼 깔린 잔디도 침묵속에 그날의 회억을 더듬는듯 하였다.
차영진은 얼굴을 수굿하고 공지둘레를 천천히 걸어돌았다. 한바퀴… 또 한바퀴… 도당책임비서한테서 전달받은 친애하는 그이의 말씀, 우리는 사회주의건설의 성과로써 《개편》에 환장한 사람들한테 우리 사회주의건설로선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그 가르치심은 차영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일군이 되기 썩 이전 시기부터도 그한테는 수령님께서 하라는대로 하면 사회주의를 훌륭히 건설할수 있다는것이 생활적인 진리로, 확고한 신념으로 되여있었다. 한번도 그 진리에 의혹이 갔거나 그 신념이 흔들린적이 없었다.
때문에 쏘련과 동유럽나라들에 《개편》바람이 불어 수령과 당의 업적을 허물고 사회주의를 헐뜯고있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개편》을 생각하면 거의 본능적인 경계심에 신경이 날카로와졌었다.
그래서 인민경제대학에서도 초빙강사의 강의를 듣다가 애매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일어나 질문했었다.
영진은 그때 강사가 《개편》의 일부 측면을 긍정하는것 같아 열을 내여 《도전》했던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영진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그리고 오솔길을 따라 도로쪽으로 걸어나오며 이 산간벽지군에서도 우리 사회주의의 생활력이 나타나도록 분발하고 분발하고 또 분발해야 한다고 속다짐하였다.
문득 도당책임비서가 부엌과 창고의 크기에 대해 묻는데 대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내가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것도 구체성이 없는 빈소리가 아닌가…)
여느때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 있는 부엌, 창고의 크기, 그 문제에 담겨있는 그이의 깊은 뜻이 안겨오며 가슴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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