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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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바래워주고 방에 들어온 송규태는 느닷없이 밀려드는 자기 허무감에 쓸쓸한 얼굴로 쏘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입에서 한숨과 함께 뿜어나오는 담배연기가 파르스름한 타원을 그리며 허공에 날아올랐다. 억척같은 기력과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군을 추켜세우고있는 차영진이 돋보이고 자기는 허울뿐인 무맥한 존재로 여겨졌다.
자기가 못한 일을 하는 그가 고맙기도, 부럽기도 하였다. 은근히 존경심도 갔다. 그런가 하면 가슴속 깊은데서 남몰래 얄궂은 심리가 꿈틀거리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송탄에서 건설이 시작되여 오늘에 이르는 기간 엇갈린 심리를 체험해왔었다.
청년시절에 건설대학과정을 마친 그한테는 건설판을 크게 벌리고 이끌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선차적인 과제가 아니였다. 그는 송탄에서 군당책임비서로 사업한 전기간 석비레땅이 태반인 산간지대의 토질을 개량하고 농업을 추켜세우며 지방산업의 기술개조와 원료기지들을 조성하는데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신하였다. 그뿐아니라 당대렬을 늘이고 농촌의 계급적진지를 튼튼히 꾸려 당의 정치적지반을 다지는데 전념하면서 군을 새롭게 좀 꾸리다가 소환되였다. 차영진은 자기가 다져놓은 그 정치경제적토대우에 화려한 궁궐을 세우는셈이다. 만약 그런 토대가 없었다면 그가 아무리 날구뛰여도 석비레땅을 걸구고 다락논을 풀고 유지림을 조성하는 등 힘겨운 일에 깊이 빠져 살림집 한채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할것이다. 그렇지만 누구의 덕이라는것을 알아달라는것도 아니고 다져놓은 토대의 값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받자는것도 아니다.
섭섭한것은 다른데 있었다. 자기가 군을 인계하고 떠난 다음 차영진이 읍거리와 농촌마을들을 돌아보며 시대에 뒤떨어지고 당의 요구에도 맞지 않는 이런 생활조건을 더는 참을수 없다, 모두 수고는 했지만 문화적인 락후성은 완전히 가셔버리지 못했다, 나는 이런것과 타협할수 없다, 이제부터 때벗이를 해야 한다고 소리쳤다는데 모두 수고는 했다는 그 말은 선임자의 사업을 념두에 둔것이 분명하였다. 더우기 거리의 단층마을에 둘러친 울담을 허물 때 차영진의 고무를 받으며 청년들이 괭이로 담벽을 찍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슴이 저려들었다. 하지만 옛정이 그리워 찾아온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는 감정을 누르며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가. 락후한것이야 단호하게 짓부셔버려야지, 내가 일을 쓰게 못한탓이라고…
더더욱 아프게 자극한것은 사람문제였다. 차영진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평가와 조치들을 일반적으로는 존중하는것 같았으나 어떤 경우에는 인정사정없이 뒤집어놓았다. 충실한 일군으로 평가하며 아꼈던 사람을 호되게 답새겨 눌러놓는가 하면 눈밖에 두었던 사람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내세웠다. 대표적인 례가 주상민의 문제였다. 전쟁때 월남도주한자가 이 땅에 뿌린 씨앗인 주상민은 타고장에서 화재를 일으켜 엄중한 손실을 주었으나 관대조치에 의하여 교화소로 가지 않고 송탄에 굴러온 전과자였다. 그가 두번째 사고를 저질렀을 때 법의 철추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류들의 인간들이 범한 죄가 보고되면 어릴적에 가슴에 맺힌 어혈이 사그라지지 않아서인지 계급적의분이 치밀어 용서하고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고의적인 죄행이란 근거가 불충분하고 손실도 별로 없으므로 농촌건설대에 내보내여 로동을 통하여 개조하겠다는 의견에 가까스로 동의하였다. 그가 시도했다가 매번 실패하는 창의고안이란것은 진심이 안받침된것으로 믿기 어려웠다. 고의적인 죄행이 아니더라도 그런 계층의 사람들속에서 종종 보게 되는 보신과 회복의 수단일수 있었다. 그런데 차영진은 건설을 벌리면서 그를 옆에 끼였으며 나중에는 세멘트공장까지 책임지웠다.
식료공장 지배인 리순희의 동생 창길의 문제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도시나 벌방지대보다 살기 불편한 산간군에서 주민들의 이주를 제한하고 로동력을 고착시키는것은 옳은 처사이지만 옮겨주라고 한 문제를 굳이 깔아버려야 하는가…
지난날의 관계를 생각해도 이럴수 있는가. 내가 만약 행정경제사업으로 돌지 않고 도당에 있다면 그가 이럴수 있겠는가. 노여움이 들었다. 군을 인계하고 떠나올 때에는 자주 찾아오겠다고 했으나 날이 갈수록 자연히 마음이 상하여 꼭 필요한 일이 없으면 송탄땅을 밟지 않게 되였다. 그러나 이전 책임비서를 못 잊어 우정 찾아오거나 도에 왔다가 들리는 사람들은 여간 반갑지 않았다.
아까 찾아준 순희 역시 그러했다. 그 녀자는 쏘파에 앉아 귀염성스럽게 웃으며 군의 소식을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사촌동생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였다.
이거야 전에 책임비서로 계실 때 이미 결론한 문제가 아니냐고, 공교롭게도 인차 인계하여 새 책임비서가 오는 바람에 깔리게 되였다고, 차영진책임비서한테 한번 전화로 상기만 시켜도 부위원장동지의 얼굴을 봐서 풀어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 녀자한테 이런 문제를 들고다니면 안된다, 의견이 있으면 자기 군당에 청원하는것이 옳다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러자 순희는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책임비서한테 직접 부탁해봤는데도 소용이 없다고 하며 창길의 성미가 칼날같아서 저러다가 무슨 일을 저지르겠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였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차영진이 당일군으로서 아무리 옳은 일을 하여도 인민들속에 불만이 생기게 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는 창길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해보겠다고 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애매한 대답이고 맞대놓고 거절할수 없어 한 소리였다. 섭섭하고 분했다. 처음으로 모처럼 부탁한건데 그럴수 있는가. 자기는 도움을 받자고 하면서… 내가 도당에 있다면 저러겠는가… 리성적으로는 그를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노여움이 들었다.
그는 도행정경제위원회로 올라왔을 때 처음에는 당사업을 떠난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설을 담당한 부위원장으로서 도적인 판도에서 사고하고 사업을 포치하고 내밀면서 두메산골군의 책임비서로서는 느낄수 없는 자부심이 생기고 이런저런 건축물이 완공되였을 때에는 형언할수 없는 보람과 만족감으로 하여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그리고 자기의 지령과 결재에 따라 수많은 인원과 물자들이 움직이는것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가슴벅차게 느꼈으며 자기 말과 수표는 곧 물질적힘으로 변한다는데 습관되였다. 하여 몸과 마음이 커지고 행동거지도 틀지게 되였다.
세멘트 몇t쯤은 새발의 피였다. 건설문제에서는 사람들이 그의 의사에 순응하였다. 그는 주인이였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어려워했다. 그가 가지고있는 힘을 알고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차영진은… 그래서 불쾌했다.
송규태도 구체적인 인간이였다.
그는 송탄군을 떠난다음 입밖에 내여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그 두메산골에 이루어놓은 모든것을 잊을수 없었으며 그것들을 추억하면 자기 인생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되였다. 차영진은 그것들을 허술하게 여겨 제마음대로 뜯어고치는것이 아닌가. 특히 사람문제에서는 선임자의 의사와 감정, 위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것 같았다.
송규태는 더운숨을 후- 내쉬였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아들이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엉?…》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아니다.》
송규태는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휘장을 약간 열어제치고 창문을 반쯤 열어놓았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와 아들을 곁에 앉히였다.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휘장이 너울거리고 담배연기가 스민 방안의 무거운 공기가 말끔히 가시여지는듯 하였다. 아버지는 의자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여 대견스럽게 아들을 돌아보았다.
《어디 아까 이야기나 마저 들어보자꾸나.》
《그 얘기요? 그저 그렇지요 뭐…》 기선은 어줍게 웃어보였다.
《이름이 성희라고 했지… 류성희… 아버지가 한때 재외대표부에서 사업했다니까 그 처녀 쁘라하나 부다뻬슈뜨… 어디 그러루한데서 태여나 자란게 아니야?》
아버지한테서 나무라는 기색을 느꼈는지 아들은 눈살이 꼿꼿해졌다.
《아닙니다. 나이가 몇살인데요. 여기서 났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향긋한 연기를 들이켰다가 안도의 숨과 함께 후 내뿜었다.
《처녀집에는 가봤느냐. 가정환경은 어떤것 같으냐?》
《한번 가서 성희동무 엄마하고 이야기해봤어요. 아버지는 박사… 책밖에 모르는 지식인이구 할아버지가 있는데 전쟁때 련대장을 했대요. 삼촌은 당중앙위원회에 있구…》
송규태는 당중앙위원회에 올라갔다가 류수명을 만나 둘의 관계를 비쳐보니 좋은 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해주고싶었다. 그러나 아들한테 좋지 못한 영향을 줄것 같고 혹시 여론화되면 그 무슨 배경을 바라보고 혼인을 맺었다는 뒤소리를 들을수 있다는 로파심에 입을 다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나 다름없이 그도 자신에게는 이러저러한 흠이 있어도 아들만은 곧바르게 살게 하고싶은 심정이 본능적인 욕구처럼 강했던것이다.
《아-니 그런거 말구 사람들이… 사람들이 모두 어떤가 말이다.》
《어머니가 마음이 좋아요… 다 쑬쑬해요. 아버지, 평양에 올라오시면 한번 그 집 어머니를 만나보지 않겠어요?》
송규태는 대답을 안하고 담배를 성급히 뻑뻑 빨았다. 하나의 아리숭한 의혹이 가슴에 스며들었던것이다. 아들이 무슨 행운을 타고나서 어느모로 보나 빠진데가 없고 기품도 도고하고 의젓할것임에 틀림없는 처녀가 그토록 정신없이 쫓아다녔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아들을 외면하여 허공의 한점만 지켜보며 좀 거칠게 물었다.
《처녀가 싫다는 소리는 한번도 안했어?》
《참 아버지두… 좋으면서도 싫은척 꼬지 않는 처녀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그런 계교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
《한번은 약속한 시간에 안왔지요. 그다음부터는 찾아오는걸 아예 만나주지 않았더니 눈물을 짜며 용서해달라고 빌겠지요. 버르장머리를 떼놓았습니다.》
《음, 음… 허허… 야, 너무 그러면 못써…》
송규태는 흐뭇한 얼굴로 의자등받이에 기대여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몇해전에 작고한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손자가 남자싸게 커가는것이 무등 기뻐 세월이 이렇게 좋아지는데 오래오래 살아 저애가 장가가는것도 보고 증손자도 안아보겠노라 했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인차 이어졌다. 일시적후퇴시기 저 멀리 고향, 정평땅에서 적들에게 참혹하게 피살된 아버지… 가슴이 얼얼해졌다.
《야, 너 언제 고향에 가봤던가?》
《아이적에 할머니하고… 한달전에 함흥에 출장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로 정평을 지나왔어요.》
《고향마을에 들렸나?》
《바빠서 그냥 지나왔어요.》
《자식두… 아버지도 20여년간 한번 찾아가지 못했는데 할아버지묘소를 찾아 술이라도 붓고 절을 하고 올것이지 그냥 지나다니…》
《아버지, 저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좀 의젓해져서 할아버지도 찾아뵙구싶었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가정과 제 처지를 놓고 생각이 많았습니다.》
《음?!…》
《이제는 아버지도 년세가 많은데 현직에 오래 있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말년의 아버지를 잘 모시자면 제가 빨리 추서야겠는데 아직도 지도원자리에서 뭉개고있으니… 이거야…》
송규태는 자식이 대견스럽게 여겨졌지만 뚝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내 걱정은 말구 일이나 잘해라…》
《아버지, 강재를 5t만 풀어주십시오.》 하고는 거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듯 황급히 설명하였다. 회사에서 인민군대원호사업으로 한 해안방어부대의 문화회관건설을 돕고있는데 강재가 모자라 건설이 중지되였다는것이다.
《사장동지는 속을 썩이다가 저보구 아버지한테 가보라고 했어요.》
《없어! 그 령감이… 내가 뭐 무슨 창고장인줄 아는 모양이구나. 지금 강재가 얼마나 긴장되여있는지 알아? 엉? 인민무력부를 통해 풀것이지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 나한테…》
《제철소지배인한테 편지 한장 써주십시오.》
《편지라구? 어리석다. 제철소지배인이 움쩍이나 할것 같아? 너 왜 이런 부탁을 받느냐, 나를 뭘로 만들자는거야?》
《아버지, 사장동지가 저보구 벌써부터 중어와 영어를 잘 공부해두라고 했어요. 방코크나 싱가포르 같은데 회사의 해외지사를 설치한다는데…》
다급한 전화종소리가 모든것을 삼켜버렸다. 송규태는 구석쪽의 원탁으로 가서 송수화기를 들며 아들을 흘깃 돌아보았다. 기선은 얼른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강재때문에 제철소에 나가있는 도건설총국 부총국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리근우지배인이 1호용광로를 세우자고 한다, 당분간 도에서 강재를 받기 어려울것 같다고 하였다.
《정신들이 있는가. 왜 세운다는거요?》
《새벽부터 로체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답니다. 과부하로 로가 폭발할수 있답니다. 이제 생산이 중지되면 강재생산이 긴장되여 도에 주기로 한 강재를 돌려 바쁜 모퉁이를 메꿀것 같습니다.》
《허 참… 그 사람들이 정무원의 승인은 받았다오? 후과를 책임지겠으면 마음대로 세우라지. 동무는 일체 삐치지 말고 올라오오.》
송규태는 송수화기를 놓고 자리로 돌아와 단숨을 몰아쉬며 분을 묵새기다가 곁의 쏘파에서 바늘처럼 반짝 빛나는것을 발견하였다. 녀자의 머리핀이였다. 리순희한테서 떨어진것이 분명했다. 그 녀자와 별다른 관계가 없었지만 공연히 안해를 자극할것 같아 그것을 쥐여 창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기앞으로 결패스럽게 걸어갔다.
제철소 업무부지배인을 찾다가 없으니 판매과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강재여분이 좀 없느냐고 물었다.
《…개인적으로 쓸려고 그러네.》
《예? 개인적으로요?》
《허허… 내가 강재로 국을 끓여먹겠는가, 인민군대원호사업에 쓰려고 그러네. 후에 업무부지배인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소.》
《부지배인동지한테 보고하겠습니다.》
송규태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에도 무엇인가 잊은듯싶어 어둑한 얼굴로 원탁곁에 서있었다. 그제야 차영진의 부탁을 그만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간후 그는 제철소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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