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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넋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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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16회 작성일 21-08-09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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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분계연선의 종착역에 도착한 양은순은 렬차에서 내렸다. 자그마한 우유빛가방을 어깨에 멘채 한동안 역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오도카니 서서 주위를 살폈다. 102련대에서 정치위원을 하고있는 오빠는 편지에서 당부하기를 떠나기 전에 꼭 418련대 정치위원네 집에 전보를 치라고 하였다. 주소가 지금 자기의 가방안에 있었다. 그는 애초에 전보를 칠 생각을 하지부터 않았다. 오빠하고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학생선발을 가는 자기가 그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 호의적인 편의부터 바라겠는가? 더구나 정치위원네 딸의 재능을 오빠의 장담으로만 가늠할수 없는 조건에서 더더욱 따분한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고 우려했던것이다.

은순은 생소하고도 자그마한 읍거리를 서름서름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특이하게 눈에 띄우는것은 오가는 사람들 거의모두가 군인들이라는것이다. 방금 역밖으로 쏟아져나온 렬차손님도 사민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았고 엷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모두 군용차들이였다.

은순은 비로소 자기가 분계선을 가까이 한 전선지구에 와있음을 느꼈다. 이젠 누구든 만나 어떻게 418련대로 가는가를 물어야 했다.…

한 녀인이 예닐곱살쯤 되여보이는 사내애의 손목을 잡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은순의 곁에서 서성거리고있었다. 땅에 놓인 커다란 가방이며 배낭을 봐선 그들도 방금 렬차에서 내린듯싶었다.

은순이가 막 길을 물어보려는 찰나 중좌령장을 단 군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사내애가 마주 달려가 군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오, 우리 혁이 왔구나!》

중좌는 아들을 번쩍 안아올리더니 안해에게도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느라 수고했소!》

녀인도 마주 반겼다.

《마중나오셨군요.》

《마침 후방물자를 실으러 나오는 차가 있었소.》

중좌는 길옆에 서있는 화물차를 가리켰다. 마대같은것을 골삭하게 실은 적재함우에는 이미 여러명의 군인들이 타고있었다.

은순은 용기를 내여 중좌앞으로 다가갔다.

《군관동지…》

가방이며 배낭을 집어들던 중좌가 주춤 은순이를 바라보았다.

《저, 418련대로 가자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군관은 이 고장 처녀가 아닌듯싶은 은순의 류다른 차림을 의아히 더듬어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헌데, 저 자동차는 사단지휘부까지 가는데…》

《사단에서 련대까지는 멉니까?》

《멀지. 헌데 우린 임무받은 시간이 있어놔서…》

중좌는 잠시 역앞을 두리번거리다가 은순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쪽방향으로 가는 차는 현재 우리 자동차밖에 없으니 결심대로 하오.》

은순은 앞뒤를 가릴 사이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여기 역앞에서 오도가도 못할것만 같았던것이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그곳까지라도 타고 가겠습니다.》

마침내 은순은 그들을 따라 자동차있는 곳까지 갔다.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적재함우에 오르자 자동차는 곧 출발했다.

녀인이 소곤소곤 묻기 시작하였다.

《418련대에 누가 있는가요?》

《학생선발을 갑니다.》

《학생선발이요?》

《금성제1고등중학교 성악반 학생모집입니다.》

《그러니 금성제1고등중학교 교원인가요?》

은순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녀인의 호기심이 더 커진듯싶었다.

《418련대라면 모집대상자가 누구의 자녀인데요?》

《정치위원동지의 딸입니다.》

《그런데 왜 마중나오지 않았어요?》

은순은 대답대신 또다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녀인은 저 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서둘러 차에 오른게 아닐가요? 지금쯤 마중나올수 있겠는데…》

은순은 녀인의 질문을 피할겸 부드럽게 물었다.

《친정집에 갔다오는가요?》

《예, 남새종자를 가지러…》

《남새종자요?》

은순이가 의아해하자 녀인은 약간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해에 있은 가물이나 큰물피해를 봐도 그렇고 올해에 들어와 더 긴장되는 국가사정을 두고봐도 그래, 이젠 군대가 부식물까지 농장에만 의거할수는 없게 되였어요. 그래서 우리 군인가족들이 부업반을 조직하고 남새는 물론 고기생산까지 맡아하자고 나섰어요.》

은순의 눈가에서 미타해하는 빛을 느낀 녀인은 가볍게 웃었다.

《못할건 없어요. 벌써 세대들에서도 집짐승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전연지대 군인가족들이 그런 일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라의 짐을 덜어주어야 할게 아니나요.》

전연지대 군인가족, 남새생산, 고기생산… 은순에게는 그의 말들이 모두 생소하게만 여겨졌다.

차가 거의 한시간쯤 달려 갈림길이 있는 곳에서 천천히 멈춰섰다.

중좌가 운전칸에서 나오더니 적재함우의 은순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차는 이제 사단지휘부로 들어가는데 련대까지 꽤 걸어가내겠소? 여기서 25리요!》

25리?… 은순은 출퇴근차를 간혹 놓쳐 걸어보던 평양에서의 거리들과 시간을 피끗 가늠해보았다. 자기의 걸음으로 세시간, 극상 많이 잡아 네시간이면 넉근히 가고도 남을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중좌에게 인사를 했다.

《정말 여기까지 태워주어 고맙습니다. 전 걸어갈수 있습니다.》

은순은 오를 때처럼 중좌부부의 부축을 받으며 적재함에서 내렸다.

중좌가 곧바로 뻗은 도로앞쪽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농장마을을 가리켜보였다.

《저기서 다시 남쪽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가느라면 련대지휘부가 바라보이오. 더러 군인들을 만날수 있는데 길을 꼭 다시 묻소.》

녀인이 미타해하는 어조로 은순을 걱정해주었다.

《예서 좀 기다리는게 어떨가? 혹 정치위원동지가 마중나올지 알겠어요? 만일 여기서 기다리다가 가지 못하면 우리 집에 오세요.…》

녀인은 골짜기의 굽이진 길 저쪽을 가리켰다.

《저기 산굽이를 돌면 군인사택마을인데 혁이네 집을 찾으면 돼요. 하루밤 우리 집에서 지내느라면 련대로 가는 차도 만날수 있을거예요.》

은순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형편을 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좌도 옆에서 안해의 편을 들었다.

《어려워하지 말고 꼭 그렇게 하오.》

마음씨 후더운 군인부부의 당부를 남기고 자동차는 서서히 산굽이쪽으로 향하였다.

은순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부부한테 불편을 주고싶지 않았고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는데 그때까지 련대에 도착 못하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농장마을까지 도착한 그는 중좌가 대준대로 남쪽으로 향한 길로 꺾어들었다. 길 좌우로는 두엄무지들이 군데군데 쌓여있는 강냉이밭이 펼쳐져있었다. 그때까지 힘이 아직 빠지지 않아 걷기도 수월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강냉이밭도 끝나고 인가 하나 없는 무인지경이 시작되자 점차 맥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태여나 여직껏 혼자서 이런 먼길을 걸어보기는 처음일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친 그 순간부터는 왜서인지 긴장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부지대의 무연한 고원을 막연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갈대가 무성한 진펄이며 바위와 새초로 혼잡을 이룬 크고작은 언덕들이 연줄연줄 그의 눈앞에 다가왔다.

은순의 가슴속으로는 비로소 도시에서의 호젓한 저녁길과는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엷은 두려움과 걱정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곳의 어디엔가 성악에 푸른 꿈을 둔 소박한 처녀애가 살고있다고 생각하니 떠나오던 때의 호기심이 더해짐을 어쩔수 없었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머리속에는 이번 려행길을 두고 편지에 써보낸 오빠의 부탁이 돌이켜졌다. 단순한 학생모집이 아니라 조국이 겪는 준엄한 현실을 최전연과 이어보는 중요한 계기로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지 않아 최전연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않던 그로서는 그 권고를 받고 더욱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서둘러 이번 려행길을 결심했던것이다.

은순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 생각에는 몇십리길을 걸은듯싶었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련대지휘부 같은것은 보이지조차 않았다. 이제 또 얼마나 가야 할가?…

그는 노근해오는 다리의 아픔을 느끼며 길옆으로 걸어가 힘겹게 주저앉았다. 바람 한점 없는 초봄날의 따스한 해빛이 내리비치고있었다. 발치의 묵은 풀잎을 헤치고 새파란 냉이싹이 돋아나고있었다. 그 싹을 바라보느라니 이제 자기가 만나게 될 소녀의 표상이 여러모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저 합격기준에 도달할 처녀애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이처럼 먼 려행길을 걸은 보람도 있을게 아닌가.…

은순은 별안간 털썩털썩 울려오는 발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동보총을 멘 여러명의 군인들이 렬을 지어 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있었다. 그들한테 418련대지휘부를 묻고싶었으나 왜 그런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저 멀리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은순은 대충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해는 퍼그나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하늘가를 초조하게 둘러보던 은순은 걸음을 다그치기 시작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갈대와 새초만이 무성한 이 들에 갇힐것만 같았다. 점점 무릎이 아파나고 갈증까지 겹쳐들었지만 걸음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덧 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고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은순의 눈앞에 불쑥 갈림길이 나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으로 향한 길을 그냥 가느라면 련대지휘부가 보인다던 중좌의 말이 언뜻 떠올라 다시금 갈림길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야산까지 길이 뻗어있었다. 점점 내려앉는 어둠때문인지 무성한 나무숲만 우거진 그쪽으로는 건물같은것이 보이지 않았다. 련대지휘부라면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있을텐데…

마침내 갈림길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기진맥진하여 가느라니 또 한갈래의 좁은 갈림길이 나졌다. 반가움과 기대를 안고 갈림길 량쪽을 바라보았으나 높고낮은 구릉지대를 타고 뻗은 길들 끝쪽에는 무성한 갈대숲만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펼쳐져있을뿐이였다.

은순은 더럭 겁이 났다. 정말 련대지휘부를 찾지 못하고 갈대숲만 바라보이는 여기서 오도가도 못하고 밤을 새울것 같은 그 촉박감을 안고 역시 갈림길을 지나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상싶은 길우에 이제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속에서 무슨 괴물같은것이 뛰쳐나올것 같은 짜릿한 공포심으로 가슴은 점차 조여들었다.

은순은 별안간 자기가 밟고 가는 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른 풀대같은것이 발목을 휘여잡는걸 보면 사람의 래왕이 영 있은것 같지 않았다. 마침내 더 걸어갈 용기를 잃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자기가 두번이나 지나쳤던 갈림길이 생각났다.

그 두 갈림길중 어느 한끝에 련대지휘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리쳐 울며 구원을 바라고싶었지만 온몸을 바늘끝으로 찌르는듯 한 공포심에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은순의 눈앞에 두명의 검은 형체가 불쑥 나타나더니 눈부신 전지불이 자기쪽으로 쫙― 비쳐졌다.

은순은 그만 악! ―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어푸러졌다. 몽롱한 의식속에서도 날카로운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섯!…》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던 은순은 자기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느라 얼핏 전지불에 드러난 형체를 가려보고 그들이 군대임을 알아보았다. 안도감으로 하여 다시 주저앉으려는데 가까이로 다가온 군인이 나직하나 선뜩하게 소리쳤다.

《일어섯!》

은순은 아무런 항변도 할수 없는 자기의 처지를 원망하며 비칠비칠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걸엇!》

은순은 그들이 재촉하는대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무엇때문에 《체포》되였는지 그 리유를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다. 가는 도중 기운이 빠져 몇번이고 주저앉을번 하였으나 자그마한 병영까지 겨우 자신을 지탱해냈다.

드디여 눈앞에 드러난 건물, 창문가에서 고요히 흘러나오는 불빛, 그 불빛에 실리여 어둠짙은 대기속에서 뜻밖에도 황홀히 녹아드는듯한 서정짙은 노래소리…

 

병사가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총메고 떠나온 산천에 물어보라

록음기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였다. 그 노래소리는 의혹과 당황함으로 제정신이 아니였던 은순의 가슴속에 안정을 가져다주기 시작하였다. 노래소리에 혹하여 계단을 오르던 은순은 한쪽신발뒤축이 삐뚤하는 바람에 하마트면 뒤로 벌렁 넘어질번 하였다. 옆에서 호송하던 병사가 날래게 부축하여 위기를 면했으나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신발뒤축이 떨어져나갔던것이다. 그것을 주을념도 못하고 그런대로 한발을 절며 계단을 올랐다.

출입문앞에 그를 세우고 그중 사관인듯 한 군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노래소리는 바로 그 방에서 울려나오고있었다. 수상한 녀자를 데리고왔다고 보고하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여나왔다. 순간 노래소리도 뚝 멎었다. 문이 열리며 군인이 나오더니 은순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들어가시오!》

희미한 등잔불이 내비치는 방안에는 후리후리한 키에 매우 건장하게 생긴 상위령장을 단 군관이 책상을 한옆에 두고 서있었다. 그 책상우에 록음기가 놓여있었다. 피로에 해쓱하게 질려 한발을 절며 들어서는 처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그 군관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쪽으로 왜 나왔소?》

은순이가 질문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당황해하자 상위는 여유를 두어가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인가도 없는 경계지대에 친척방문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분계선쪽으로 나오고있었소?》

은순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분계선이라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대답을 못하자 상위는 요구했다.

《신분을 확인할수 있는 증명서가 있으면 봅시다.》

은순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안에서 시민증을 찾아들었다.

옆에 서있던 사관이 그것을 받아 상위에게 가져다주었다.

상위는 의심스런 눈길로 은순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시민증에 시선을 박았다. 다음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신분은 확인되였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리유에 대해선 설명해야 합니다.》

《전… 길을 잃었습니다. 418련대지휘부를 찾아가다가…》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은순은 사정하듯 부탁했다.

《련대정치위원동지한테… 제가 왔다는것을 알려주십시오. 저는 학생선발을 나왔습니다.》

《학생선발이요?》

《그렇습니다. 전 금성제1고등중학교 교원입니다.》

은순은 상위의 놀란듯 한 눈길과 마주쳤다. 그 순간에 어쩐지 그가 별로 낯익은감이 들었다. 그러나 상위의 시선이 너무 오래 계속되여 얼굴을 붉히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별안간 상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왜 정치위원동지한테 알리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상위는 송수화기를 들더니 련대교환을 찾기 시작하였다.

은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교환수와 몇마디 말을 주고받던 그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치위원동지는 현재 중대지도를 나가고 없답니다. 며칠후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며칠후에요?》

은순은 삽시에 온몸이 노그라드는듯 한 허탈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비칠거렸다.

상위는 급기야 책상 한옆의 의자를 옮겨 은순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은순은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경황조차 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위가 두 군인에게 명령했다.

《동무들은 나가오.》

상위는 시민증을 돌려주며 여전히 실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동무의 몸상태로는 이밤중으로 련대지휘부까지 못 갑니다. 여기 군인사택에서 하루밤 쉬고 래일 아침 떠나도록 합시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위는 책상옆에서 물러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모습을 쫓던 그는 다시한번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곧 시들한 웃음을 지었다. 이 외진데서 복무하고있는 그를 도대체 어디서 본 일이 있겠다고…

한동안 시간이 흘러 문이 열리며 상위와 함께 소박하면서도 복스럽게 생긴 웬 젊은 녀인이 들어섰다.

녀인은 은순의 곁으로 다가와 친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길을 잃었다지요. 얼마나 혼났겠어요. 우리 집으로 가자요.》

녀인의 손에는 뜻밖에도 한컬레의 편리화가 쥐여져있었다.

《우선 신발부터 바꾸어신구요.》

은순은 자기 발치에 놓인 편리화를 당황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상위가 미리 말해주어 녀인이 가져온것이 분명했던것이다.

녀인은 다시금 부드럽게 권했다.

《어서요.…》

은순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과연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채 권하는대로 신발을 바꾸어신을수밖에 없었다.

《꼭맞는군요.》

녀인은 몹시 기뻐하며 한손엔 벗어놓은 신발을 쥐고 따스한 온기가 어린 다른 손엔 은순의 팔을 꼭 잡고 부축하였다.

《이젠 가자요.》

은순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뚝뚝하기는 해도 진심이 느껴지는 상위에게 감사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는 녀인을 따라 출입문을 나섰다.

그 찰나, 무엇때문인지 등뒤에서 상위가 녀인을 찾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녀인이 곧 나와 조용히 웃었다.

《평양처녀를 불편없이 돌봐주라는 당부군요!》

은순은 상위의 진심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끼였다.

녀인의 집은 병영가까이에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래목에서는 두어살난 애기가 쌔근쌔근 잠자고있었다. 수수한 앉은뱅이경대, 그리 크지 않은 장우에 놓인 두채의 이불을 보아 첫눈에 신혼살림이라는것이 알렸다.

《우리 살림이란 그저 이래요!》

녀인은 은순을 향해 어줍은 미소를 짓고나서 봄가을외투를 벗겨 옷걸이에 걸어준다, 자그마한 세면장에 더운 물이 가득 담긴 버치를 가져다놓는다 하며 부지런히 집안을 오갔다.

은순은 그 성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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