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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1. 꾸바 혁명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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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820회 작성일 21-08-0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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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 미국 쎄인트 루이즈대학 류학


• 뉴욕종합대학 박사원 수료, 박사학위 받음


• 뉴욕 부통스교회 담임목사, 은퇴


• 범민련 미국지역본부, 재미동포전국련합회, 6. 15공동선언실천 미국지역위원회 등 여러 해외동포통일운동단체


• 조국통일상 수상


2021년 7월 11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서거




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꾸바혁명의 어제와 오늘

 

      꾸바의 간추린 력사

 

꾸바는 1492년에 꼴룸부스의 첫 항해중 발견되였고 1511년부터 1898년까지 에스빠냐의 식민통치지배를 받았다. 식민통치동안에 꾸바원주민 인디안들은 대량학살을 당하였으며 살아남은 인디안들은 탄광과 농장에서 혹사를 당하였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에서 끌어온 흑인노예자수는 100만명에 이르렀다. 17세기에는 에스빠냐와 유럽나라들간에 경쟁적으로 수없이 일어난 꾸바쟁탈전으로 하여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세기초에 이르러 Latin America대륙의 식민지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아 꾸바에서도 1812년에 에스빠냐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대규모반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1886년에 꾸바에서 수백년동안 계속된 흑인노예제도가 끝났다.

1868년에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제1차 꾸바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불완전하였고 1895년에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Jose Marti가 《꾸바혁명당》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제2차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Jose Marti가 이끄는 꾸바혁명당의 독립투쟁이 분명히 성공할것을 미리 예견한 미국은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할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미국은 꾸바문제에 재빠르게 뛰여들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에스빠냐가 물러갔으니 《이제부터는 미국이 주인이다.》라고 미국지배세력의 야심과 간교한 술책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미국의 야심과 간교한 술책은 어떠하였는가?

미국은 1898년에 아바나항구에 정박중인 미국선박 《메인》호의 폭파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미국은 이 폭파사건을 에스빠냐의 음모라고 억지주장을 하면서 에스빠냐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에스빠냐전쟁은 4개월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에 패전한 에스빠냐는 수백년 식민지의 긴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꾸바에서 완전히 물러나고말았다.

미국은 《꾸바의 독립》을 에스빠냐에게서 빼앗은 미국의 전리품정도로 여기면서 꾸바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미국은 꾸바의 진정한 독립을 가로막고 3년동안 꾸바를 강점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꾸바의 줄기찬 독립운동에 못이겨 미국은 1901년에 꾸바의 독립을 승인하기는 하였지만 꾸바에 대한 내정간섭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건부승인을 하였다. 그 조건부승인이 이른바 《플라트수정안》인데 이것을 독립헌장에 추가해넣을것을 강요하였다.

《플라트수정안》의 골자는 무엇인가?

그 조항은 꾸바의 관따나모만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영원토록 허용한다는 조항이다. 그래서 꾸바가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꾸바령토의 일부분인 관따나모는 여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놓인채 오늘까지 이르고있는것이다. 미국의 속심은 꾸바를 영원토록 미국의 보호령으로 묶어놓으려는것이였다.

오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전쟁포로들을 잡아다 가두어놓고 비인간적으로 고문과 인권침해를 저지르고있는 곳이 바로 이 관따나모이다.

1901년에 미국의 이 불완전한 꾸바독립의 승인으로 꾸바에는 《정권》이 수립되였다. 꾸바는 불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독립후 1906~1917년사이에 세차례의 반란이 일어나 큰 혼란에 빠졌다. 그후 1924년과 1934년에 쿠데타가 일고 1935년에 바띠스따가 친미쿠데타를 또 일으켜 1958년까지 악명높은 바띠스따친미독재정권을 유지하였다.

한편 까스뜨로가 1953년 7월에 《7. 26운동》을 벌려 바띠스따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투옥되였다가 1955년에 석방되였다.

석방된 까스뜨로는 그해 메히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체 게바라와 동생 라울 까스뜨로와 함께 꾸바혁명군을 조직하고 게릴라작전을 준비하였다. 1956년에 까스뜨로와 체 게바라 그리고 라울 까스뜨로는 81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꾸바에 상륙하였다.

꾸바혁명군은 마에스뜨라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게릴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58년에 까스뜨로는 반바띠스따통일전선을 새로 결성하였다. 1959년 1월에 꾸바혁명은 드디여 성공하여 까쓰뜨로는 꾸바정권을 장악하였다.

그해 2월에 총리에 취임한 까스뜨로는 《꾸바사회주의선언문》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 까스뜨로는 꾸바공산당을 창당하였다. 까스뜨로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여 대지주와 대기업의 토지를 몰수하였고, 석유법과 대기업국유화법을 만들어 미국계사탕가루와 석유회사를 접수하였다.

까스뜨로의 혁명이 성공하여 바띠스따의 친미독재정권이 붕괴되자 미국은 즉시, 1961년에 꾸바와 국교단절을 선포하였다. 뿐만아니라 미국은 1962년에 아메리카국가기구(OAS)에서 꾸바를 제명시키고 철저한 봉쇄정책을 펴나갔다. 이로써 꾸바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고립됨을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꾸바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전 쏘련과 손을 잡았으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여 미국의 봉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오늘 남아메리카나라들중에서 꾸바와 정상외교를 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으며 유럽동맹도 최근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꾸바와 교역을 추진할것을 공포하였다. 2008년 6월 20일 AFP통신은 EU정상회담에서 각국 외교장관들이 꾸바제재해제원칙에 합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960년대에 케네디대통령은 꾸바봉쇄정책으로 대꾸바소동을 일으켰다. 그후로부터 오래동안 굳어진 량국의 관계는 1980년에 지미 카터대통령이 처음으로 꾸바와 화해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량국간의 관계가 다소 완화되는듯싶었다.

또한 1981년에는 량국간의 긴장해소를 위하여 회담이 열려 두 나라관계는 다소 희망이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쉬대통령이 꾸바를 또다시 《불량국가》, 《테로지원국》으로 지정함으로 인하여 량국관계는 전보다 오히려 더 악화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놓여지게 되였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최근 보도되고있다. 미국이 리해관계에 따라서 꾸바에 접근할수밖에 없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고있다는것이다.

특이한 상황이란 꾸바해안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였는데 최저 50억bb1의 원유와 방대한 량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여있다는것이다.

만일 꾸바가 브라질이나 다른 나라와 합영을 하게 된다면 그 개발에 수십억US$의 리득을 가져올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자원을 미국으로서는 못본척 하고 그냥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까스뜨로, 영원한 리념의 군인

 

까스뜨로는 1926년 8월 13일 꾸바의 동부지방에서 에스빠냐출신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독실한 카톨릭교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교 학생때까지 식탁에서 식사기도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유명한 달변가로 세계적기록을 가지고있다. 1960년 9월 29일에 유엔총회에서 4시간 29분동안 연설을 하여 유엔력사에서 《가장 긴 연설》로 기니스북에 올랐다. 뿐만아니라 1966년 아바나에서 열린 공산당대회에서는 7시간 10분동안 연설을 하였다.

피델 까스뜨로는 꾸바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로 꼽지만 서방에서는 라틴아메리카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게 한 명망높은 정치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만큼 세계패권주의에 몰두해온 제국주의나라들에게는 눈에 가시일수밖에 없다. 패권주의자들의 눈밖에 나면 의례히 암살대상이 되는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까스뜨로가 암살위기를 당한 회수는 놀랄만 하다.

까스뜨로는 미국중앙정보국(CIA)로부터 634(혹은 650)번의 암살위기를 겪은것으로 알려져있다. 폭발물설치, 음식에 독약주입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미국은 모두 실패하였다.

까스뜨로는 말하기를 미국의 력대 대통령들중에서 자신에 대한 암살을 지시하지 않은 대통령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뿐이며 클린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47년간 꾸바를 이끌다 물러난 까스뜨로는 최근 《꾸바와 미국관계》라는 력사시리즈로 후손들을 위한 글을 쓰고있다.

그는 말하기를 《자라나는 신세대들은 력사적으로 국가운명과 직접 관계가 있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을 바로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들이란 꾸바독립초창기에 미국의 방해와 미국이 꾸바를 미국의 보호령으로 둔 《플라트수정안》, 관따나모에 대한 불행한 사건을 지칭한것이라 생각된다.

까스뜨로가 나이 81살에 은퇴할 때 서방의 언론들은 앞을 다투어 꾸바에 정치적급변이 초래될것이라고 예측보도를 하였다. 하지만 서방언론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으며 또 앞으로도 빗나갈것이다.

퇴임소감을 묻는 《그란마》인터네트 기자에게 까스뜨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평의회의장직과 군최고사령관직을 바라지도 않고 받아들일 의사도 전혀 없으며 나의 유일한 바람은 한명의 혁명전사로서 나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것이다.》

까스뜨로는 의장직사임의 뜻을 밝히면서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단지 리념의 군인(soldier of ideas)으로 남겠다.》라고 하였다.

까스뜨로는 사임후에도 꾸바의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발전시키기 위해서 사회주의리념론쟁을 강화하는 역할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까스뜨로를 정치적아버지라고 불렀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챠베스대통령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며 친구인 까스뜨로가 의장직을 떠나는 사실을 받아들일수 없다.》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대통령은 까스뜨로의 의장직사임과 관계없이 볼리비아는 꾸바와 우호관계를 변함없이 이어갈것이라고 자신의 립장을 밝혔다.

중국도 까스뜨로의 사임에 대하여 꾸바는 우리와 혁명의 영원한 친구이며 꾸바와의 협력관계는 변함없이 유지해나갈것이라고 밝혔다.

피델 까스뜨로는 꾸바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미국의 코앞에서 거대한 미제국주의에 맞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성공적모델을 만들었으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특히 꾸바의 무상의료제도와 무상교육체계 및 85~90% 식량자급능력에 대하여 아무리 적성국가라 하지만 미국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있다.

까스뜨로는 미국이 주장하고있는 세계화에 대하여 로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세계화는 인민들을 배고픔으로 내모는 체제이다. 속임수와 거짓말속에서 사람들을 살아가게 만들고 리기주의의 씨를 뿌리는것이고 또 사람들을 소비주의에 빠지게 하여 마비시키고 무절제하게 만들고 그리고 타락하게 만든다.》

까스뜨로의 혁명정신을 요약하면 《그는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할수 없는것을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상상할수 없는것을 항상 상상하는 매우 과감한 혁명가이다.》라는것이다.

프랑스의 권위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인 라모네는 까스뜨로와 3년동안에 100시간 인터뷰를 하여 유명한 편집인이 되였다.

까스뜨로는 근 반세기동안 국가수반으로 있으면서 긴 인터뷰는 4번밖에 안하였다. 라모네는 긴 인터뷰를 통하여 까스뜨로를 가까이에서 본 인물평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까스뜨로는 매우 수줍고 교양이 있으며 신사적이지만 의지적위반자이며 영원한 반항아이다. 그는 풍부한 론증을 근거로 하여 놀라운 말솜씨를 휘두른다.》

그리고 피델 까스뜨로를 말할 때 체 게바라를 빼놓을수 없다.

까스뜨로는 혁명에 있어서 두사람을 가슴에 품고있는데 첫째는 꾸바독립과 혁명의 아버지이며 선구자인 호쎄 마르띠이며 둘째는 체 게바라이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띠나의 부유한 집에서 1928년 6월 14일에 태여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의사이며 지식인이다.

23살때 모터찌클을 타고 칠레, 볼리비아, 뻬루, 꼴롬비아와 과떼말라 등 라틴아메리카전역을 려행하였다. 려행을 통하여 그가 눈을 뜨게 된것은 인디안과 가난한 로동자들이 당하고있는 고생과 그 고생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였다.

그 질문의 대답은 남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하에 있다는 사실과 빈부의 격차를 해결할수 있는 길은 오직 혁명의 길뿐이라는 대답이였다.

체 게바라는 손에 주사기만 들고서는 혁명이 불가능하고 총을 메고 혁명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결의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처음 달려간 곳은 미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있는 과떼말라에서 반미투쟁에 가담한것이였다. 그다음에 과떼말라에서 죽음의 위기를 피하여 메히꼬로 피신하였다.

두번째는 메히꼬에서 까스뜨로형제를 만나게 된 운명적기회였다.

까스뜨로형제와 체 게바라는 1956년 11월에 81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꾸바에 침투상륙하였다. 혁명군은 12명만 살아남았지만 3년이 지난 그후에 혁명군은 바띠스따친미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체 게바라는 꾸바혁명이 완수된것을 확인한 후에 또 다른 새로운 혁명지를 찾아 볼리비아로 떠났다. 떠날 때 아무도 모르게 까스뜨로에게 편지 한장을 비밀로 남겨놓은것이 전부였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없어진 체 게바라에 대하여 미중앙정보국은 까스뜨로를 모략중상하여 그가 체 게바라를 감옥에 가두어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까스뜨로는 말하기를 《나는 그런 소문과 음모가 가라앉기까지 조용히 기다렸다.》고 하였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반제혁명운동을 전개하는것을 두려워한 미중앙정보국은 용병을 앞세워 체 게바라를 1967년에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9살이였다.

꾸바혁명정부는 그가 죽은지 30년이 되는 1997년에 볼리비아에 묻혀있는 그의 시체를 발굴하여 꾸바의 싼따 끌라라에 그와 함께 싸운 혁명동지 28명과 함께 안장하였다. 싼따 끌라라는 체 게바라가 선두에 서서 지휘한 꾸바혁명전쟁의 마지막전투지이며 혁명을 완수한 곳이다. 이곳에는 체 게바라가 사용하였던 카빈총, 려권, 전투장비, 라지오, 라침판과 책들이 전시되여있다.

얼마전 체 게바라가 서거한지 40년을 맞으며 추모행사가 꾸바,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과떼말라, 아르헨띠나 등 남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 동시에 거행되였다.

꾸바에서는 체 게바라의 동상이 서있는 싼따 끌라라의 넓은 광장에 10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추모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이때 까쓰뜨로는 추모사에서 《체 게바라의 죽음은 너무 일찍 가지에서 꺾어진 꽃이며 그의 죽음은 남아메리카는 물론 전세계에 사회주의적량심의 씨를 뿌렸다.》라고 칭송하였다.

특히 이날 40주기 추모행사에서는 1964년에 체 게바라가 꾸바를 마지막으로 아무도 모르게 소리없이 떠나면서 비밀로 까스뜨로에게 남기고간 편지를 대형확성기를 통해 군중들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이 문제의 편지는 체 게바라가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 혁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꾸바를 비밀로 떠나가면서 까스뜨로에게 전달한 비공개편지였다.

오늘 사회주의길을 걷는 꾸바와 북부조국 량국간의 형제적친선관계는 두 나라 령도자들의 특별한 관심속에서 날로 발전되고있다.

두 나라간에 영원한 우의와 번영을 바라는것은 인류사회의 희망인 진보사회 즉 지구촌의 리상사회인 사회주의가 건강하게 뿌리내리는것을 갈망하는 진보적인류의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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