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9. 박영발 동지의 생을 마감한 '박영발 천연동굴'을 찾는 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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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9
박영발 동지의 생을 마감한 '박영발 천연동굴'을 찾는 분들에게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박영발동지는 경북봉화 출신으로 인쇄노동자로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후 전남 전평초대 의장을 했으며 북상해서 모스크바 공산대학 재학 중 조국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전남 도당위원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입산하여 비합법적 빨찌산 체제속에서 모든 투쟁을 조직지도했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가 심하여 1951년 8월에 큰 산인 광양백운산으로 이동하여 옥용골의 88트 골짝에서 도당부 각 부서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잣나무 귀틀집을 마련하여 온돌방까지 만들어 동기를 준비하면서 지도하였는데 그때는 반해방구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영발동지는 빨찌산 투쟁을 그의 몸 건강 상태로보아서는 오래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신변을 보호해주는 믿음직한 동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팔로군 출신인 김정태동지와 리정예 여성동지가 마지막생을 다할 때까지 비서격으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1951년 적들의 동기공세가 백운산을 뒤덮다시피 했을 때도, 지형지세를 잘 이용하여 파놓은 지하 아지트에 들어가 있을 때도, 아지트 주위를 맴 돌면서 저녁이면 적들의 적정과 식사제공은 하루도 빠집없이 제공하며 지시문을 받아 연락부에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간고한 투쟁을 전개하여 제1차공세를 승리로 마감했었다.
김정태동지는 1952년도에 도당 직속 전남연대가 결성될 때에 연대장으로 투쟁하다 가을에 진상골에서 적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소식을 듣고 박영발 위원장 동지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필자는 당시 정태동지와 같이 두 번의 지하아지트에서 적들과 싸워 살아남았었다. 그래서 공세 끝나기 전에 빈공간이 있어서 뵙게 되었다. 박영발동지는 정태동지로부터 필자의 투쟁소식을 듣고 칭찬도 받았었다.
그리하여 장차 앞으로 영광군당위원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더 열심히 투쟁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후 1952년 10월에 뱀사골에서 제 5지구당 결성을 위한 3개도당위원장 회의에 박찬봉보위대원으로 참석했을 때 또다시 뵙게 되었다.
그후 1953년에 백운산으로 와 투쟁할 때에 한때 5지구당이 똬리봉 옥용골쪽 기슭에 있었다. 그 때 이현상동지도 위원장이기 때문에 와 있었다.
그후 다시 지리산으로 5지구당이 옮겨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박영발동지는 지금의 삼도봉 밑에 임시 아지트를 쓰는 동안 보위대원들이 각 골짝 암바위 밑을 탐사하여 반야봉 밑 함박골에서 동굴을 발견하여 아지트로 쓰게 되었다. 거기서 조국출판사란 명칭을 갖고 조선의 삐피 통신을 받아 등사하여 각 도당에 내려 보내는 실질적인 5지구당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한 군데 오래 아지트를 쓰면 족적관계도 있고 적들의 수색작전에 발각될 우려도 있어 다른 안전한 곳을 물색하고 있던 차에 당시 주치의원이었던 000씨가 노고단 전투에서 중상을 당하여 동굴에서 기거하면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자기를 죽이고 갈 것이란 피해망상증을 가지고 저녁 동초 보는 순간을 이용하여 박위원장을 비롯한 4명을 쏘아 희생시키고 말았다.
이 때 리정례여성동지가 동굴안 삐피통신하는 곳에 있다가 수류탄을 던져 그자를 사살시켰다. 이때가 바로 1954년 1월21일이다.
이때에 정례동지도 쓰러졌는데 하동군 학예면으로 보급사업을 나갔던 동지들이 와서 그 비참한 참상을 보게 되었다. 우선 생명이 붙어있는 정례동지를 구출하여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눈이 쌓여 있을 때 족적을 내고 그후 눈이 오면 덮어져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데 3월이라 눈이 녹기시작하면 내린 눈이 녹으면서 원 발자국이 남게 된다. 적들의 수색에서 남은 발자국을 따라 가보니 동굴이 발견되게 되었고 동굴안을 들어가 보고서 동지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때가 바로 3월 21일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수년전에 돌아가신 박남진 선생이 동굴안에서 며칠 있었고 그후 54년 8월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후에 이 동굴이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가이다.
1990년대만해도 공안의 감시 때문에 꼼짝 딸싹 할 수 없었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고 2000년 6.15공동선언이 나온 후 본격적인 전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박남준 선생의 건강상태가 지리산 뱀사골 산장까지는 천천히 갈수 있었기 때문에 갔었다. 당시 정관호 선생, 박남준선생, 박동기님 조감독님, 손영심여성동지 등이 뱀사골 산장에서 일박하면서 일러준대로 나 혼자 답사를 했는데 지금의 6.15쉼터 위에서 탐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가 2003년 11월이다. 그때는 발견 못하고 이튿날 하산해서 귀가 했었다.
그후에 뱀사골 2000만분의 일 지도를 사서 등고선 공부를 하고 다시 찾았다. 이듬해 11월 말경이다. 이 때는 박동기, 라승아, 기세문, 조감독님들을 비롯한 5명이 탐사작업을 했다.
지금의 함박골 6.15쉼터에서 나는 홀로 골짝 우측을 더듬어가고 나머지 4명은 좌측을 더듬어 탐사작업을 전개했다.
나는 우측골짝 물가를 내려가는 과정에 물가 구들장 아지트를 발견하고 옆으로 돌아 큰 암바위 밑에 구들장을 발견해 이 근처에 동굴이 있을 것을 예측했다.
그리하여 박남준선생이 가르쳐 준대로 너들강을 지나 아취형 입구를 발견하고 나무와 풀뿌리를 잡고 올라가는데 손 짚은 곳에서 다 쓴 밧테리가 땅속에 묻힌 것을 발견하고 옆을 보니 들어가 올라가는 동굴입구를 발견하였다. 밖으로 나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남은 일행들은 답이 없었다.
그래서 원자리(6.15쉼터)로 돌아 오겠지하고 기다리는 동안에 골짝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점심도 들지 못하고 배가 고파 억지로 견디면서 캄캄한 산길을 조심조심 걸으면서 저녁9시경에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남은일행은 탐사작업중 밑에까지 갔으나 힘들어 다시 올라 오지 않고 뱀사골 반선으로 내려가 구례읍에 도착하여 저녁을 들고 있었다.
서울의 손영심 누나는 동굴 탐사소식이 궁금하여 남은 일행에 전화하니 혼자 떨어졌다 하면서 내가 산타는데는 산토끼와 같아 아무런 사고 없이 돌아 올 것이라고 답변했다한다.
그러나 염려되어 노고단 산장에 조난신고를 하고는 찾아갈 준 비를 하고 있는 차 내가 노고단 산장에 나타났기에 자초지종을 묻고 안심하였다. 남은일행으로부터 동굴발견 소식과 함께 내가 노고단산장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감독님이 차를 몰고 산장까지 와서 나도 남은 일행과 합류하였다.
이 사연을 이미 민중의 소리 블로그에 올렸는데 고무 찬양죄로 입건되는 바람에 민중의 소리에서 저장한 서버를 파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기사를 찾을 수 없기에 이렇게 다시 써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그후 2005년도에는 아홉 번 동굴을 찾았다. 지금 난 길은 동굴발견 당시의 탐사길이 등산길이 된 것이다.
그후 묘향암에서 이 동굴을 깨끗이 청소하여 암자로 이용하려 한다는 조감독님의 소식을 듣고 전적지유적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암자로 이용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동굴안의 유물들은 그대로 놔두면 손상될 것을 염려하여 조감독과 박동기님과 상의하여 전남대에 보관하면서 사용시 조감독님과 필자의 승인 없이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보증서도 받아 놓고 있다.
그리고 등사기는 그후 조감독님이 지상아지트 주위의 너들강을 탐사하는 과정에 발견한 것이다.
박영발동지는 일제의 고문을 많이 당해서 하체를 잘 쓰지 못하여 재산시에도 적정이 있을 때는 지하아지트에서 지도사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심한 위장병을 앓고 있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강상태는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고 해야할 할 정도로 제대로 걸어 다닐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소리는 철소리 같이 뚜렸하게 빈말이 없이 기둥에 못을 박아 놓는 것과 같은 빈틈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인쇄물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인자한 아버지상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매년 전태일열사노동대학 2년생들이 박영발 동굴을 찾아 제를 올리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금년에는 가을에는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진달래산천팀도 여러번 찾아 제를 올기도 했다. 앞으로 동굴을 찾는 분들은 동굴사연을 듣고 대외백만의 적보다 대내 일인의 적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찾기를 바란다.
2021년 8월 1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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