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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4 싼디노민족해방전선 지도자 다니엘 오르떼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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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775회 작성일 21-08-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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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영 박사

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싼디노민족해방전선 지도자 다니엘 오르떼가대통령

 

싼디노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떼가(Daniel Ortega Saavedra)대통령이 2007년 1월 10일에 또다시 니까라과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1945년 11월 11일생으로 중산층사업가집안에서 태여난 인물이다.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떠 열다섯살때부터 친미독재자 소모사정권에 대항하는 반정부활동을 시작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악질세력과 생사를 걸고 투쟁하여 집권에 성공한 민족해방지도자이다.

오르떼가대통령은 20년전 1985년 1월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1990년까지 5년동안 집권한 경험이 있는 전직대통령이다.

그후 16년동안 재야에서 싼디노민족해방전선(FSLN)의 지도자로 투쟁하다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우익보수진영의 부호은행가 에드아도후보자를 꽉 누르고 또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여 두번째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 트리벨리 니까라과주재 미국대사가 직접 나서서 우익보수정당후보자에게 지원을 약속하였고 또 꼰뜨라스반군을 지원하였던 노스 전 백악관보좌관까지 니까라과를 직접 방문하여 오르떼가의 당선을 가로막으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내정간섭을 한다는 국제적여론과 비난의 소리를 못들은척 하면서 끝까지 친미우익보수정당의 에드아도후보자를 지원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실패하고말았다. 그 결과 미국이 제일 념려하고 무서워하는 남아메리카의 좌파대통령을 또 하나 탄생시키고말았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당선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20여년전에 소목사독재와 싸울 때보다는 지금에 와서 많이 변하였는데 랭전론리를 고집하는 미국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소모사독재자를 몰아냈던 오르떼가대통령은 20년후에 또다시 미국의 반사회주의음모를 보기 좋게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침략과 독립의 력사

 

고대마야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부족들이 태고적부터 메히꼬에서 살고있었다. 여러 부족중에서 Nicoya, Nicarao, Diriagon 세 부족이 메히꼬를 떠나 남하하여 니까라과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정착을 한 후 에스빠냐침략자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수세기동안 니까라과에서 평화롭게 살고있었다. 이 세 부족을 니까라과의 인디안토착원주민들이라고 부른다.

이 세 부족들은 각각 추장이 있고 언어와 규률과 지역간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별되여있지만 추장을 통해서 세 부족들이 상호교류하고 친교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시적마야문화권에 속하는 공동체였다.

에스빠냐탐험가들이 니까라과를 처음 발견한 때는 1508년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지나치고 메히꼬로 향해갔다. 그후 1522년에 에스빠냐원정대가 에스빠냐황제의 명령을 받고 다시 와서 니까라과를 점령하여 에스빠냐의 관할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에스빠냐원정대 대장 곤잘레즈는 인디안추장 니고야를 잘 설득하여 추장이하 6 000명을 카톨릭교신자로 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에는 인디안의 다른 부족인 니카라오추장에게 접근하여 곧 친근해졌는데 이번에는 접근한지 8일만에 추장이하 9 000명에게 영세(세례)를 주는 쾌재를 올렸다.

선교의 쾌재뿐만아니라 니카라오추장은 곤잘레즈에게 큰 황금덩이를 선물로 안겨주었다.

곤잘레즈원정대장은 추장의 이름 《니카라오》를 본따 그곳 지명을 《니까라과》라고 명명해줌으로 더 큰 카톨릭교선교의 개가를 올렸다고 기록되여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곤잘레즈원정대장은 세번째로 만난 인디안 디리아곤추장으로부터 된서리를 맞게 되였다.

디리아곤 인디안추장은 접근해오는 곤잘레즈원정대장에게 3 000명의 부족군대를 거느리고 대항하며 말하기를 목숨을 구하려면 니까라과에서 곧 떠나 물러가라고 위협하였다. 곤잘레즈원정대장은 아무 말도 못하고 즉시 니까라과를 떠나 남쪽 빠나마로 피신해내려가게 되였다.

그후 에스빠냐정부는 페드라리아를 니까라과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1531년까지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후부터 오랜 세월동안 니까라과는 에스빠냐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되였다. 왜냐하면 니까라과는 땅도 작고 탐낼만 한 자원이 없어보였기때문이였다.

침략자들은 니까라과보다는 뻬루, 꼴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남쪽에 있는 인까제국의 광활하고 기름지고 부유한 령토를 점령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그곳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였기때문이다.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오히려 니까라과에서 인디안원주민 2만명을 붙잡아 인력이 부족한 남쪽 뻬루지방으로 팔아넘겼다. 그 결과 니까라과에서는 인디안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후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소수의 백인침략자들이 주로 소도시를 이루어 정착하여 몇백년을 살았다. 이 몇백년동안 니까라과에서 발생한 침략자들과 원주민들에 대한 력사적기록은 별로 특기할만 한것이 없다.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1600년대가 지나가고 1700년대도 거의 해저문 석양에 이르렀다. 300년동안 라틴아메리카대륙을 휩쓸고 모두다 점령하였던 화려한 해양제국 에스빠냐도 역시 석양을 맞이하였다.

남아메리카의 그 넓은 대륙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면서 은과 금을 몽땅 긁어가던 에스빠냐대제국인데 어찌하여 교활한 프랑스에게 그리도 쉽게 무너졌던가!

1794년에 에스빠냐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다. 그렇게도 당당하던 해양제국 에스빠냐황제는 페위를 당하고 프랑스가 시키는대로 그의 동생이 왕위에 대신 올라앉는 비극에 처하였다.

침략자도 한때가 지나면 침략을 당하는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력사의 산 교훈인것 같다. 유럽에서 에스빠냐제국의 위세가 추풍락엽처럼 떨어졌다. 에스빠냐의 위세가 떨어지고 급변하는 대세를 틈타서 남아메리카에서 많은 에스빠냐식민지나라들이 저마다 독립운동의 선풍을 일으켰다. 남아메리카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있었다.

까리브지역에서도 례외는 아니였다. 남아메리카대륙의 영향을 받아 1821년에 이르러서 꼬스따리까, 엘 쌀바도르, 과떼말라, 온두라스, 빠나마 등 여러 까리브해의 작은 나라들이 메히꼬제국의 주도하에 에스빠냐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그후 또다시 니까라과를 비롯한 5개 나라들은 1838년에 메히꼬제국의 통제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각각 독립을 성취하였다.

에스빠냐의 침략을 당한 후 300년만에 니까라과는 1838년에 드디여 하나의 독립국가가 되였다. 하지만 니까라과는 독립의 기쁨을 누릴만 한 기회도 없이 또다시 비운에 처하게 되였다.

독립한지 4년후에 영국의 해양함대가 니까라과의 싼 쥬안항구에 마구 상륙하여 인디안원주민들은 물론이고 기타 주민들을 전부 추방하면서 니까라과정부를 위협하였다.

새시대에 새로운 방식의 침략행위가 다시 시작되였던것이다.

겁에 질린 니까라과정부는 미국에 호소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오히려 영국과 타협하여 니까라과와는 아무런 합의도 없이 1850년 4월 19일에 《영미클레이튼조약》(ClaytonㅡBulwer Treaty)을 맺고 영미 두 나라가 공동으로 까리브해협을 관리하고 니까라과도 역시 영미 두 나라가 공동으로 지배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니까라과에게 내외의 모든 문제를 미국에게만 토의하고 미국의 지시만을 따르라고 협박하였다. 니까라과는 꼼짝도 못하고 공식적선포도 없이 미국의 군정하에 들어갔다.

미국군부를 대표하는 William Walker와 미국의 대기업가 Vanㅡderbilt 두사람의 영향아래에서 니까라과와 미국과의 관계는 차라리 합방이라고 말할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Walker는 눈가림으로 리바스를 니까라과의 초대대통령으로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Walker자신이 니까라과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영어를 니까라과의 공용어가 되도록 선포하였다.

Walker대통령의 독재강경정책은 미국과 영국의 반감을 샀다. 그뿐만아니라 니까라과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하고있는 《자주진보개혁》세력의 항쟁에 몰려서 Walker는 1860년에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곧 피살되고말았다.

그후 1800년대가 지나가고 1900년대의 초반에 이르는 50년동안에 니까라과에서는 《외세의존보수파》와 《자주진보개혁파》 두 진영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과 분렬이 계속되였다.

해마다 정권이 교체되고 대통령이 새로 등장하는 혼란속에서 미국은 잘 짜여진 교란작전과 간섭으로 외세의존보수진영을 일방적으로 밀어줌으로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였다.

식민지에서 독립은 하였다고 하지만 착취를 당하는 근로대중들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허황한 말뿐이고 하나의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빠냐나 영국이나 미국이나 모든 백인들의 침략행위는 하나같이 악마적이고 교활하며 인종주의적탄압행위들뿐이였다.

착취를 당하는 대중에게 외세는 오직 비극만 가져다줄뿐이였다. 카톨릭교든 그리스도교든 기만과 위선에는 하나도 다를바가 없었다.

당시의 니까라과는 믿고 의지할 곳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국제정세속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조개속에서 진주알이 나고 자라듯이 니까라과에서도 억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람들속에서 항쟁의 씨앗이 움트고 자라나고있었다.

 

 

     소모사독재정권의 등장

 

소모사가 니까라과정치무대에 등장한것은 1932년부터였다. 소모사는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닌적이 있으며 미국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은 경력을 가지고있다.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니까라과에 주둔하고있는 미국외교관들과 군인들을 위하여 통역관으로 일하는 기회를 통하여 미국과 가까워졌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에 사카사대통령이 니까라과의 제16대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사카사대통령은 소모사의 삼촌이다. 삼촌이 대통령이 된것은 소모사의 큰 행운이였다. 사카사대통령은 보수와 진보 량진영을 혼돈하여 왔다갔다하면서 무능을 드러냈다. 사카사대통령은 자기 조카인 소모사가 미국인들과 가깝게 지내는것을 활용하여 소모사를 방위군의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방위군은 그때 헌법이 인정하는 정규군은 아니였다. 하지만 어용군이 필요했던 미국이 뒤에서 적극 지원해준것으로 하여 정규군처럼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있었다.

소모사는 삼촌이 대통령이라는 배경과 친미적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니까라과정치무대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였다.

한편 니까라과에 싼디노라고 하는 에스빠냐계백인혼혈인이며 량심적인 젊은이가 있었다. 이 청년은 부모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산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력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미국의 노예가 되여 고통을 받아온 빈민들을 빈곤에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큰뜻을 품고 미국침략자들과 친미정권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게릴라전투부대를 조직하였다.

싼디노는 농촌과 탄광을 찾아가 근로대중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생활도 해보았다. 싼디노는 대중의 호응을 받아 3 000명의 게릴라부대를 조직하고 교양하여 니까라과에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친미적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게릴라활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정권에 야욕을 품고 기회를 찾고있던 소모사는 싼디노의 게릴라활동을 주시하고있으면서 싼디노를 제거하기만 하면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보다 더 큰 미국의 신임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삼촌이 대통령이며 미국의 신임도 어느 정도 받고있는 소모사는 방위부대의 지휘권까지 가지고있으니 《내가 못할 일은 없다.》라고 장담하였다.

그래서 소모사는 싼디노가 어느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것을 길목에서 기다리고있다가 부하를 시켜 싼디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후 곧 처형하고 시체를 비밀리에 암매장하였다. 이런 행위는 마치도 박정희군사독재시대에 《중앙정보부》의 방식과 똑같이 닮았다.

싼디노를 살해하고 그의 게릴라부대 3 000명을 해산소탕시킨 소모사는 미국의 든든한 신임과 막강한 군사력을 보다 더 확고히 장악하여 앞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모사는 바로 그때 자기 삼촌인 사카사대통령의 정권이 점점 쇠퇴해가고있는것을 악용하고 미국의 힘에 의존하기만 하면 삼촌의 정권을 넉넉히 탈취할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936년에 사카사대통령의 경제정책의 실정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사카사대통령은 보다 더 강력한 친미정권을 추구하는 미국의 압력 또한 감당할수 없게 되였다. 조카가 지휘하고있는 군부의 위력은 도움보다도 오히려 더 큰 압력이 되여 대통령의 사퇴를 재촉하였다. 이와 같은 대세에 못이겨 사카사대통령은 할수없이 권좌에서 사퇴하고 물러났다.

1937년 1월 1일에 소모사는 자기의 삼촌인 사카사대통령을 보기 좋게 권좌에서 몰아내고 미국과 군부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니까라과의 제17대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소모사는 싼디노를 살해한 후 게릴라를 소탕하였다고 일시적으로 안심을 할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싼디노의 혁명정신은 절대로 소탕하지 못하였다. 싼디노는 여전히 생생한 씨앗으로 살아남아 근로대중의 저항세력으로 재생되여 소모사를 괴롭혔을뿐만아니라 소모사를 죽음의 골짜기로 한걸음한걸음씩 몰아가고있었다.

싼디노는 죽었지만 그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은 《싼디노민족해방전선》(FSLN)이 1961년에 니까라과에서 창설되였다. 이 조직은 대중속으로 들어가 대중과 련결되고 확장되여 소모사정권기간 줄곧 거센 항쟁을 계속하였다.

소모사는 싼디노민족해방전선의 저항투쟁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하였다. 소모사는 싼디노저항세력을 랭전이데올로기분파로 규정해놓고 애국적저항운동을 무섭게 탄압하였다.

미국CIA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소모사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1979년 7월 17일에 42년동안의 극악한 소모사독재정권은 끝장나고 소모사는 권좌에서 쫓겨나고말았다. 미국의 CIA도 싼디노저항세력의 위세를 막을수 없었고 점점 기울어져가는 소모사의 몰락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소모사는 1937년 1월 1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1979년 7월 17일에 권좌에서 쫓겨났는데 42년동안 니까라과력사상 전무후무한 무서운 독재를 실시하였다. 소모사는 미국 마이아미로 막대한 딸라뭉치를 가지고 도망갔다가 그후에 다시 빠라과이로 가서 숨어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1980년에 피살되였다. 소모사가 미국의 CIA의 보호아래 42년동안 독재하면서 저지른 살인과 탈취와 인권탄압에 대한 량심적인 카톨릭교신부와 수녀들의 생생한 증언과 또한 국제인권운동가들이 경험한 기록들을 간추려 몇가지를 살펴보자.

카톨릭교회는 소모사와 미국의 남아메리카침략정책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극소수의 량심적인 카톨릭교수녀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교회의 침묵을 깨고 불의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항거는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는 근로대중과 함께 아파하고 같이 고민하는데 큰뜻이 있었을뿐 미국의 침략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독재자를 타도하고 축출하는 투쟁에 있어서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한편 교권적카톨릭교회는 이 량심적인 수녀들과 성직자들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1960, 1970년대에 니까라과에서 비밀로 나온 증언들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오늘도 외세가 지배하고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제2의 소모사가 존재하고있으며 고난당하는 인민들의 증언은 여전히 들려오고있다.

다음은 니까라과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소모사에 대한 증언중 몇개를 소개한다.

1960년대말에 이르러 사실상 맑스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자본주의가 공적 제1호로 라틴아메리카에 등장하였다. 특히 억압적인 군정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소모사정권아래 세워진 총살대를 비난한 카톨릭교신부들은 투옥되거나 추방의 위협을 항상 받았으며 그중 버트란드신부는 추방당하였다. 철학교수 페트난도는 1976년에 소모사정권에 의하여 피살된 224명에 대하여 미하원에서 증언한 뒤 추방되였다. 소모사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거세한 돼지》들이 되고만다.

1976년 2월 한 증인의 말이다.

《소모사국민방위군들은 명단을 가지고 동리마다 옮겨다니면서 남자들을 끌어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하고 그리고 몰살하였다. 그렇게 총살을 당한 사람들의 토지는 방위군 총사령관의 토지가 되였다.

소모사의 방위군 4분의 3에 해당되는 5 600명이 미국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고 미국의 훈장도 받았다. 수많은 방위군의 학살행위는 소, 돼지, 토지, 녀자들이라는 전리품을 탐하는것때문에 자행된다.

싼디니스타의 협력자라고 누군가가 고발을 하기만 하면 립증할 증거가 없어도 그냥 수십명, 수백명이 총살을 당하였다.

26개의 교회들이 군막사, 고문장소 그리고 농민부녀자들의 강간장소로 리용되였다. 교회의 평신도지도자는 모두 구타와 고문을 당하였는데 그중 한사람은 며칠동안이나 매달아놓아 식물인간이 되였다.》

60년대와 70년대 내내 소모사가문은 미국의회 원조청문회에서 《까스뜨로가 지원하는 싼디니스타게릴라》를 막기 위하여 원조가 필요하다고 몇십년동안 거짓증언을 하였는데 원조는 소모사가문과 군부의 호화를 위해서 전부 사용되였다.

1979년 7월 19일 소모사가 축출되고 미국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42년 독재를 청산하는 값은 대단하였다. 소요로 인한 사망자는 5만명이며 외국으로 도망간 소모사의 추종자는 150만명이였다.

 

 

      싼디노민족해방전선

 

1934년에 소모사는 음모를 꾸며서 싼디노를 살해하고 암매장하였다. 그리고 소모사는 1937년에 권력을 과시하면서 니까라과의 대통령이 되였다.

하지만 피살당한 싼디노는 멸망하지 않고 다시 부활하였다. 1961년에 싼디노의 정신을 이어받은 진보적세력들이 련합하여 《싼디노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였다. 싼디노는 혁명의 씨앗을 뿌려만 놓고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소모사의 잔인한 칼에 희생되였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혁명과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후배들이 싼디노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니까라과인들속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싼디노전사들이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후 놀라운 활약들을 많이 하였는데 1974년에는 소모사대통령의 가까운 친척들을 대거 랍치하여 몸값으로 100만US$를 받아내는 쾌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후부터 싼디노전사들은 소모사독재정권타도와 사회주의개혁운동을 통한 민족해방을 목표로 대중에게 접근하면서 점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싼디노전사들의 활동은 소모사정권에게 큰 위협이고 골치덩어리이기도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남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단체들과 련대를 가지게 되므로 미국에게도 큰 부담이 되였다. 싼디노전사들의 저항운동과 그들의 위력이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고있었다. 카터대통령은 니까라과에 제공하는 정상원조를 삭감하면서 경고하였다.

《만일 소모사가 싼디노와 대화를 하지 않고 인권개선을 하지 않으면 원조를 아주 끊겠다.》라고 카터대통령은 소모사에게 경고까지 하였다.

하지만 소모사는 미국의 공화당강경파에 의지하고 카터대통령에게는 거짓말을 해가면서 싼디니스타에게 점점 더 극심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소모사대통령은 언론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방위군을 증가하여 독재정권을 오히려 더 튼튼히 강화하였다.

소모사대통령은 싼디노저항운동을 마음속으로 환영하는 순진한 사람들을 무조건 《빨갱이들》이라고 규정하고 수십만 량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소모사정권은 방위군에게 초법적권한을 허용해주었다. 방위군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탄압략탈하면서 학살행위도 자행하였으나 소모사정권은 공산당을 소탕하는것이니 아무 문제될것 없다고 오히려 방위군을 두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였다.

42년동안이나 계속된 독재로 인하여 국민들의 가슴속에 쌓이고쌓인 원한은 1979년에 최고절정에 이르렀다. 소모사정권은 드디여 무너지고말았다. 소모사정권을 호위하던 방위군은 해체되였다. 해체된 방위군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까리브나라들로 도피하거나 국내에 숨어있다가 자수하였다.

소모사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싼디노민족해방전선은 1980년에 국가재건을 추진할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림시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림시정부는 소모사독재정권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방위군을 해산한 후에 새로운 군부를 창설하였다.

림시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4년후에 민주적선거를 통해서 다니엘 오르떼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1985년 1월 10일에 오르떼가가 력사상 처음으로 민선대통령이 되여 취임을 하였다.

 

 

      미국이 지원하는 꼰뜨라스(Contras)반군

 

싼디노민족해방전선 지도자인 다니엘 오르떼가가 니까라과의 대통령이 되여 취임을 한것은 미국공화당에게는 하나의 큰 치욕적인 사건이 되였다.

미국은 소모사독재정권이 몰락하였지만 그후에도 계속하여 친미적세력이 니까라과를 계속 지배하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보수적전략가들은 비밀리에 묘안을 연구해냈다. 그 묘안은 미국중앙정보국(CIA)을 시켜서 《꼰뜨라스반군유격대》를 1980년에 만들어낸것이다.

소모사친미독재정권이 1979년에 몰락하자 미국은 바로 그 다음해인 1980년에 벌써 극비밀리에 꼰뜨라스를 창설하여 새로 등장한 싼디노민족해방전선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앞으로 예견되는 니까라과의 민주화를 파괴할 계획을 세우고있었다.

미국은 소모사독재정권하에서 소모사에게 충실하였던 친미성향의 군인들을 재등용하여 비밀리에 온두라스 등 까리브나라들을 리용하여 그곳에서 훈련시켰다. 미중앙정보국 요원들은 꼰뜨라스를 창설하고 막대한 돈으로 지원하면서 운영하였다.

미국은 니까라과뿐만아니라 까리브 5개 나라들이 혹시 반미화될것을 두려워하면서 좌경화방지를 위해 니까라과와 련결하여 까리브 전지역에서 꼰뜨라스가 활동하도록 게릴라조직을 확대운영하였다.

오르떼가대통령이 취임함으로 미국공화당이 주도하고있는 국회는 눈가림으로 꼰뜨라스에 대한 지원을 우선 일단 중단하기로 결의하였다. 지원을 중단하는 리유는 꼰뜨라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림시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간 미국대통령은 니까라과에 대한 원조는 물론이고 모든 교역과 교류를 즉각 봉쇄하고 중단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오르떼가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하여 미국의 안보에 큰 위험이 초래되였다는 핑게로 니까라과를 봉쇄하였던것이다.

오르떼가대통령은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미국과 내통하고있는 모든 우익반동들에 대하여 강경책을 쓸수밖에 없었다. 오르떼가대통령이 미국에 대하여 강경책을 쓴다고 친미적우익언론들과 카톨릭교회는 일제히 오르떼가대통령을 향하여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며칠후에 공화당이 주도하는 미국의회는 림시로 중단하였던 꼰뜨라스에 대한 지원을 다시 재개하도록 가결하고 즉시 100만US$를 지불하기로 결재하였다.

레간대통령은 꼰뜨라스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일일이 민주당의원들의 승인을 받는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지고있는것을 느꼈다. 그래서 꼰뜨라스를 계속하여 지원할수 있는 비밀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방법은 이란에 무기를 몰래 판매하고 판매에서 얻은 돈으로 꼰뜨라스를 국회 몰래 계속 지원한다는 계획이였다.

그래서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얻은 막대한 자금으로 꼰뜨라스를 계속 지원하였다.

그런데 1986년에 레간대통령이 그동안 이란에 몰래 비밀로 무기를 판매한 사건(IranㅡContras)이 야당국회의원들에 의하여 폭로되였다. 이 폭로된 비밀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과 전세계에 초미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였다. 이란에 비밀로 무기를 판매한것은 중동정책의 모순이였고 또한 그 돈으로 꼰뜨라스를 몰래 지원한것은 남아메리카정책의 모순이였다. 민주당은 이것을 레간대통령을 공격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몰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일등공신은 현역군인 올리버 노스소령이였다. 노스소령은 국회청문회 증언에서 《레간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미국의 리익을 위하여 충성하였을뿐 죄가 없다.》라고 뻔뻔한 답변을 하였다.

노스소령은 그후에 레간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승진되였다.

이란ㅡ꼰뜨라스사건이 폭로된 이후부터 꼰뜨라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였다. 지원이 끊어지니 꼰뜨라스는 약해지고 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몇년동안 계속된 꼰뜨라스와의 랭전적내전을 가능한 한 속히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의 회복을 간절히 원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에 오르떼가대통령은 용단을 내여 해산의 위기에 처해있는 꼰뜨라스반군지도자와 정전ㅡ화해협정(Esquipulas)을 제안하고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을 당시 꼰뜨라스반군의 병력은 1만명이였다. 반군의 가족들은 미국이나 까리브지역에 거주하고있었는데 그 수는 14만명이였다. 오르떼가대통령은 꼰뜨라스단원전원과 가족들에게 사면복권을 허락하여 시민사회로 복귀시켰다. 력사적으로 길이 남을 민족대단결을 위한 결단이였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랭전의 뿌리를 깨끗이 청산하려는 용단과 민족화해를 위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것이다. 세계는 오르떼가대통령의 용단을 민족화해와 평화를 위한 위대한 용단이라고 격찬하였다.

하지만 오르떼가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용단에 치명적재난과 시련이 닥쳐왔다.

첫째는 자연에서 온 재난이며 둘째는 미국에서 온 재난이였다.

1988년과 1989년에 계속된 폭우와 태풍으로 500명이 죽고 23만명이 집을 잃었다. 자연의 재난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10억US$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또 극심한 추위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곡물생산이 급감되였다.

온 나라가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극심한 고난과 기근에 빠졌다.

이러한 극악한 상황하에서 오르떼가대통령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적투쟁이나 리념적대립을 완전히 초월탈피하여 재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하였다. 이 길만이 재난에서 소생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90년 총선을 자유로운 선거로 실시할것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대통령의 애국용단으로 평가하게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또한 너무나 순진한 결단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결과 15개의 정당에서 15명의 후보자들이 출마하여 혼란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혼란속에서 역시 미국의 더블유 부쉬(H. W. Bush)대통령은 여전히 니까라과를 지배하고싶은 욕심을 포기하지 않고 오르떼가대통령의 결단을 악용할 흉계를 꾸몄다.

부쉬대통령은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방해공작을 하면서 오르떼가를 락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후보자에게 900만US$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투표결과는 예상밖이였다. 미국이 로골적으로 지원한 후보가 55% 대 41%로 오르떼가대통령을 락선시켰다. 부쉬가 지원하는 돈의 힘이 극심한 가난속으로 파고들어가 재난으로 인하여 지치고지친 유권자들의 표를 유혹하였던것으로 분석되였다.

어쨌든 오르떼가대통령은 다음 16년을 또 참고 기다리면서 미국의 끈질긴 침략에 맞서 투쟁을 계속해야만 하였다.

 

 

      니까라과대선 미국의 패배ㅡ오르떼가 재선 승리

 

진실과 정의, 인격과 존엄, 대중적항쟁이 지속되는 한 근로대중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한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핵심리유이다.

싼디노좌파혁명의 지도자 다니엘 오르떼가가 2007년 1월 10일에 니까라과대통령으로 재선되여 력사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오르떼가대통령은 1979년에 미국이 뒤받침한 42년간의 소모사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대통령이 되였었다. 그리고 이번에 또 16년의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친미정권을 몰아내고 재선에서 승리하였다. 이번 승리는 진실과 정의의 승리이며 인민대중의 항쟁이 쟁취한 승리이다.

대통령취임식이 끝난 직후에 니까라과의 신임대통령이 제일 처음으로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챠베스대통령과 모랄레스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문건에 서명을 한것이다.

그 문건은 《볼리바르혁명정신에 기초한 라틴아메리카 5개 나라들이 련합, 단결, 협조를 강화하여 미국의 신자유주의경제침략을 분쇄한다.》라고 하는 알바(ALBA)의 선언문이였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둘러싼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라틴아메리카와 까리브의 모든 나라들이 일치단합하여 지역안보와 발전을 성취할뿐만아니라 까리브지역의 주도권을 전세계에 밝혀야 한다.》

오르떼가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으로 카스틸라를 새로 임명하였다. 카스틸라 교육부 장관은 니까라과의 잘못된 교육제도를 당장 뜯어고치겠다고 발표하였다. 과거 친미신자유주의정권하에서 니까라과의 교육제도는 사립학교제도이며 2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교육제도이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부유층만을 위한 잘못된 교육제도를 즉시 개정하여 80%에 해당하는 빈곤층을 위한 교육제도로 개혁할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마치도 《한국》의 《한나라당》이 부유층을 위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기 위해 날뛰는것에 국민들이 반대하고있는 양상과 류사한 면모이다.

그리고 다시한번 놀라운것은 1월 13일에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대통령이 국빈으로 니까라과를 방문한것이다.

두 정상의 회담에서 1990년부터 단절되였던 국교를 다시 회복하여 정상화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리고 두 정상은 량국상호친교각서에 서명하였다. 이 각서는 앞으로 이란과 니까라과는 경제, 에네르기, 상업, 재정, 기술 및 기간산업 등에 관한 모든 경험들을 서로 교환할것을 약속하는 각서이다.

이란대통령은 니까라과의 수도 마나과(Manaqua)의 빈민촌을 직접 방문하여 가옥신축과 의료지원을 약속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이란과 라틴아메리카나라들은 단결하고 련합하여 싸울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은 우리모두를 도우신다.》

이렇듯 두 정상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당당한 교류를 선언하였다.

총인구 547만의 니까라과는 8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가 하루 2US$이하로 겨우 살아가는 극히 빈곤한 나라이다. 친미성향의 전직대통령들이 세차례나 정권을 교체하면서 친미적인 신자유주의경제체제를 고집하였는데 그 결과는 서반구에서 아이띠다음으로 가난한 나라가 된것뿐이다.

오르떼가대통령이 16년후에 다시 집권을 하게 되여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전임대통령들이 넘겨준 나라사정은 소모사독재정권이래 최악의 상태이다.

그러나 오르떼가대통령은 자신감에 가득차있다. 니까라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알바(ALBA)의 회원국인 베네수엘라, 꾸바, 볼리비아, 에꽈도르 등 나라들이 호상 우호적조건으로 지원하고 교역하게 됨으로써 니까라과는 능히 빠른 기간안에 사정이 좋아지고 급성장하게 될것으로 보인다.

오르떼가대통령은 벌서 미국에게 과거의 불공정한 자유무역으로 인하여 발생한 리윤에 대한 차감계산(Offㅡset)을 하여 부당한 리익금을 환불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의 뜻은 과거사는 물론 환불로 시정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모순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을것을 명백히 제시하는 요구인것이다.

챠베스대통령은 니까라과의 채무액인 3 180만US$를 탕감해주었을뿐만아니라 계속해서 에네르기, 의료, 기간산업, 식량 등을 원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석유저장시설을 건설하여 15만bbl을 저장할수 있도록 도와줄것도 약속하였다.

만일 미국이 오만하게 니까라과에게 원조를 무기로 삼아 위협을 한다면 니까라과는 이제는 동맹국이 된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와 같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으면서 오히려 반미련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될것이다.

오르떼가대통령은 거듭하여 력설하고있다.

《이견을 뒤로 하고 근로대중과 빈자들을 우선으로 할 새로운 정치문화를 수립할것이다.》

니까라과는 가난을 일소하도록 투자가들에게 확신을 심어줄것이다. 하지만 투자의 과감한 확대가 가슴에서 분출되는 진보개혁정신에 역행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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