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5-12. 복잡다단한 길을 걷는 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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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3-12-16 01:26 조회 6,325 댓글 0본문
복잡다단한 길을 걷는 요르단
저자 고 류태영 박사
요르단의 력사를 바로 리해하려면 먼저 팔레스티나의 력사부터 폭넓게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B.C. 18~17세기경에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서 유목민을 이끌고 팔레스티나에 정착했는데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동안 이동하면서 통과한 지역들은 지금의 뛰르끼예, 이란, 수리아땅들이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수세기동안 계속하여 이동한 목적지는 결국 우유와 꿀이 풍성한 땅이였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의 팔레스티나이다.
그리고 그 당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정착했던 땅은 지금의 수리아,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부지역의 일부를 포함한 아라비아반도의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팔레스티나땅에 기근이 극심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꼽의 12명의 아들형제들은 팔레스티나땅을 포기하고 집단적으로 에짚트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수세기동안 살았다. B.C. 13세기에 이르러 유태인은 수십만의 큰 집단을 이루었다.
그러던중 유태인들은 에짚트를 떠나 모세의 지휘하에 시나이반도에서 북상횡단하여 광야생활 40년만에 또다시 팔레스티나땅에 돌아와 정착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티나땅에 또다시 정착하여 생활하던 때인 B.C. 11세기에 사울과 다비드는 예루살렘에 큰 성곽을 쌓고 유태왕국을 세웠으며 솔로몬왕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중동지역에서 제일 큰 왕국을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고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티나의 솔로몬왕국은 남북으로 대립되여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태왕국으로 분렬되였으며 B.C. 63년에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로마제국에 의하여 남과 북의 두 왕국은 모두다 붕괴되였다.
A.D. 100년경에 팔레스티나는 완전히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유태인들은 팔레스티나밖으로 모두다 쫓겨나는 비운에 빠졌다. 그후 유태인들은 처량한 신세가 되여 전세계로 흩어진 망국민족이 되고말았다.
로마제국은 점령한 팔레스티나의 이름을 수리아-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끊임없는 력사적변천에 따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티나는 아랍인들의 뿌리가 내려진 아랍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였다.
하지만 팔레스티나는 그동안 한번도 독립국이 되여본적이 없고 줄곧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 등 여러 강대국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에 점령당하였다.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영국은 현재의 수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가자지대 등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영국의 팔레스티나침략과 분할정책
오스만제국과 도이췰란드가 련합한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날것이 거의 확실시되고있었다. 이제 오스만제국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그때는 팔레스티나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오랜 식민지통치도 완전히 끝나게 될것이였다.
그러나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싶은 야욕을 품고있던 영국은 하루속히 오스만제국을 팔레스티나에서 축출하고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한가지 묘안을 고안해냈다.
영국이 고안한 묘안은 1915년에 작성한 맥마혼선언에 반영되였는데 이에 의하면 영국은 팔레스티나의 아랍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편에 서서 참전을 한다면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에 팔레스티나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이였다.
영국은 이 묘안을 실행하기 위해 당시 메카의 후쎄인왕의 셋째아들인 파이살이 오스만제국을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도록 비밀공작을 했다.
파이살의 봉기는 드디여 성공하여 1918년에 팔레스티나의 일부 지역인 수리아의 디마스끄를 오스만제국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파이살은 디마스끄를 통치하는 왕이 되였다.
그리하여 아랍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기만 하면 팔레스티나땅에 아랍독립국이 창설될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후에 팔레스티나인들의 아랍독립국창건에 대한 꿈은 깨여지고 영국에 리용만당한 파이살왕세자는 전쟁이 끝난 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디마스끄의 왕위에서 축출당했다.
사실 1916년에 영국은 프랑스와 이미 비밀리에 협정을 맺고있었다.
이 비밀협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팔레스티나땅을 둘로 분할하여 수리아지역을 프랑스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준다는 협정이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는 수리아를 전리품으로 소유하고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다가 1943년에는 수리아를 다시 둘로 분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레바논을 수리아에서 떼여내여 따로 독립을 시킴으로써 팔레스티나안에 분렬된 독립국들을 새로 만드는데 동의했던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어떠했는가?
영국은 프랑스에게 넘겨준 수리아지역을 제외한 팔레스티나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고 식민지통치를 실시했다.
그런데 영국은 또 다른 비밀협정을 이중으로 이미 맺어놓고있었다.
이 비밀협정은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티나땅에 《이스라엘국가》를 세운다는 벨푸어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인하여 팔레스티나땅에는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등이 출현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가자지대와 웨스트뱅크라는 분쟁지역들이 발생하고있는것이다.
《지혜의 일곱기둥》과 《아라비아 로렌스》
영국정부의 고급스파이로 오래동안 팔레스티나사막에서 활약한 로렌스는 자기의 자서전격인 《지혜의 일곱기둥》이라는 책을 1935년에 출판했다.
제1차 세계대전당시 아랍세계에 뛰여들어간 로렌스는 영국의 비밀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순진한 팔레스티나민중들은 팔레스티나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함께 싸웠다고 하면서 로렌스를 오히려 사막의 영웅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면 《지혜의 일곱기둥》속에 묘사된 로렌스는 자기자신에 대하여 정말로 무슨 말을 하고있는가?
그가 쓴 자서전의 문장들을 보느라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로렌스의 량심적고민을 발견할수 있다.
1. 영국정부가 약소민족들에게 거짓약속을 하고있다는 사실과 자기자신의 행동이 위선적이며 이률배반이라는것을 잘 알고 고민하고있었다.
2. 로렌스는 영국군의 정보장교로 군사적작전과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자신은 절대로 군인이 아니라 사막에 매혹된 탐험가이며 문학가라고 생각하는 착각과 이률배반에 사로잡혀 있었다.
3. 로렌스는 자기자신에 대하여서는 허무주의자로서 고뇌에 빠져있었으며 그는 또 《정의》와 《륜리》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상적갈등속에서 옳은 답을 찾지 못하고 정신적인 고뇌와 심리적인 방황을 하고있었다.
이와 같이 로렌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기둥》에서는 비밀정보장교와 한 인간으로서 자기자신을 배반하고있는데 대한 고민이 혼합되여있는 글들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하지만 영국은 로렌스를 무작정 《영국의 애국적인 영웅》으로 부각시키고있다. 영국은 정치적인 목적으로부터 로렌스의 자서전인 《지혜의 일곱기둥》을 소재로 하여 영화까지 제작하였는데 그 제목이 《아라비아 로렌스》이다. 이 영화속에 묘사된 로렌스는 로렌스자신이 생각하고있는 자기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영국이 막대한 투자를 들여 영화를 제작한데는 영국의 침략행위를 미화시킴으로써 아랍세계에 대한 저들의 침략과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정치적의도가 분명히 숨어있는것이다.
그랬건만 영화는 아라비아사막이라는 대자연안에서 벌어지고있는 전쟁과 배신의 추한 모습을 유감없이 잘 묘사하고있다.
아마도 영화제작을 통해 추구한 영제국주의자들의 숨은 의도와는 정반대로 영화를 직접 제작한 감독은 배신자의 출세를 위한 이중인격의 추악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보이려는 의도가 따로 있은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로렌스라는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대자연앞에서 벌어지고있는 인간의 잔인한 침략과 배신을 함께 보고 느낄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군인 스파이 로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에 영국이 약속한 《아랍독립국》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데 대한 량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여 군복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방황하다가 어느날 오토바이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로렌스는 자기의 죽음을 통하여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는 거짓말이라는 량심적고발의 웨침을 후세에 남기고있는것이다.
트란스요르단왕국의 출현
팔레스티나를 완전히 점령한 영국은 요르단강을 경계선으로 만들어놓고 동안과 서안으로 갈라놓는 분할정책을 또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영국은 1922년에 요르단강 동안의 분리된 지역에 트란스요르단이라고 하는 새로운 왕국을 창설했다. 트란스라는 말은 동쪽이라는 뜻이다.
트란스요르단은 물론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다만 팔레스티나를 사분오렬시키기 위한 기만정책의 산물로서 영국의 통치밑에 놓여있는 형식적인 왕국이였다.
영국은 요르단강 동안지역일대와 아라비아반도 북쪽에 위치한 트란스요르단왕국의 초대왕으로 메카의 히쟈즈왕조의 후쎄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1세를 내세웠다.
도대체 영국은 어찌하여 팔레스티나를 동쪽과 서쪽으로 분할하고 또 동쪽에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왕국을 강제로 세웠을가?
그 원인은 1917년에 영국이 발표한 벨푸어선언에 기인한것이다. 이 선언에 의하면 영국은 팔레스티나를 강점한 후에 이스라엘국가를 창설한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팔레스티나땅에 이스라엘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팔레스티나땅에 살고있는 많은 아랍인들을 분산시킬수 있는 지역들이 필요했다.
영국은 바로 요르단강 동안과 서안을 이러한 지역들로 보고 레바논과 트란스요르단 등 여러 신생아랍국가들이 분산되여 창설되도록 하였던것이다.
실례로 요르단의 인구는 대략 600만명인데 이곳으로 흘러온 팔레스티나피난민의 수는 292만명이나 된다.
레바논도 마찬가지다. 레바논에도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피난민들이 53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트란스요르단에서 요르단으로
트란스요르단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매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땅이다. 왜냐하면 신구약성경에 언급된 가장 중요한 지명들이 거의다 요르단에 있기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요르단은 고대시기 암벽우에 건설된 도시 페르라, 느보산을 비롯하여 세계적명승지도 많아 중동의 숨은 보석으로 알려지고있다. 그래서 석유는 한방울도 없는 사막의 나라 요르단에서는 관광업이 주요산업으로 되고있다.
1922년에 영국에 의하여 생겨난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왕은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1946년 5월에야 명목상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티나문제는 유엔의 이름으로 미국이 관여하였다.
1948년에 있은 제1차 중동전쟁이 있은 후 트란스요르단은 미국의 비호밑에 팔레스티나 동부지역을 통합하였으며 나라이름을 요르단으로 고쳐불렀다.
태생적으로 영국의 통치를 받아온 요르단이 이제는 미국의 힘에 의지하고있는데 대하여 팔레스티나민중들은 분개했다.
그러한 가운데 요르단의 초대왕으로 등장하여 서방의 어용정권을 만들어놓았던 압둘라왕이 암살되고 1952년에 손자인 후쎄인1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였다. 하지만 후쎄인1세 역시 미국을 등에 업고 친미적왕권을 확립하였으며 1957년에는 아랍세계의 친미적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한편 요르단은 1967년에 있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예루살렘을 몽땅 이스라엘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뿐만아니라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생겨난 팔레스티나피난민들의 물결이 요르단으로 흘러드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또한 PLO의 게릴라세력이 요르단강 동안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함으로써 요르단정권은 진퇴량난의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요르단국내에서는 PLO와 요르단정부군과 충돌위기가 조성되고있었다. 하여 요르단국내에서 또 하나의 정권이 형성되는듯 하였다.
하지만 에짚트 등 이웃나라들의 중재로 충돌위기는 겨우 해소될수 있었다.
위기를 모면한 후쎄인왕은 또다시 미국을 등에 업고 PLO를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저질렀다. 이는 아랍국가들의 커다란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던 후쎄인왕은 1999년에 그의 친미정치로선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
결국 요르단이 1946년 5월에 명목상 독립국가로 된이래 2명의 왕이 암살로 사망한셈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여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후쎄인왕의 장남 압둘라2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친미친서방적인 로선을 그대로 추구하도록 하고있다.
이러한 요르단의 력사가 인류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일가.
아마도 그것은 자주적립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할 때 나라와 민족의 진정한 독립도 정치적안정도 번영도 이룩할수 없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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