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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2.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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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3-02-23 18:22 조회 3,2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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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2

우리 아버지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우리 아버지는 1953년 12월 8일에 돌아가셨다.

이웃 집에 살고 있는 신대양반이 우리집 웃방에 문을 열어보니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직접 와서 방문을 열어 본 것이다. 지금 같으면 심장마비가 왔거나 혹은 독약을 드시고 자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사망원인을 규명해줄 의사의 진단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면에서 대 지주인 홍가네 집에서 20년 남의집 살이에서 얻은 아주 척박한 논밭 10여마지기로 벌어 먹고 사는데 일년 농사를 지어도 선자, 공출. 그 외에 갖은 수탈 등으로 남들처럼 일년 열두달 먹고 살 수 없어 봄이면 식량이 다 떨어져서 겨울이면 아침 저녁만 밥을 해 먹고 낮에는 아침밥을 두어그릇 남겨 솥에 물을 붓고 끓려서 한 그릇씩 나누어 먹으며 끼니를 떼우기도 했다.

그래서 봄이면 산에 올라가 고사리 취나물 죽순 등을 뜯어와 말려서 영광 백수면 들역에 가서 쌀과 맞바꾸어 오곤 했다. 이렇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은 어머니가 일을 다 했다. 아버지는 남의 산에서 숫돌을 캐낸다

이것도 징으로 파고 들어가면 날이 궃으면 굴 천정에서 토사와 돌이 떨어져서 몸에 안 맞을 수 없어 맞으면 며칠씩 아파 눕기도 한다.

지금처럼 안전한 동발을 세우지 않고 혼자서 파고 들어가 바깓에서 들여다 보면 위험천만한 굴속이었다.

점심밥을 내가 들고 가기라도 하면 위험하다며 굴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가끔 연암리 하세미주막집에서 막걸리 한병 받아오라면 사다 들이기도했다.

이렇게 숫돌을 파서 잘 다듬어 지개에 짊어지고 장날이면 시장에 가서 팔아 식량과 부식을 사 온다.

이때는 내가 소학교 다닐 때인데 장날에 언제나 캄캄한 밤에 오신다.

그래서 집에서 장까지 20리인데 10여리는 마중을 가서 아버지 인제 오시냐고 인사하면 오냐 하면서 손에 들고 온 부식거리를 건네주어 내가 직접 받아 들고 온다.

장날이면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마중 나가서 인사하고 들고 온 물건을 받아 들고 오기 때문에 여간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웃집 아저씨들도 부러워 한다.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배부르게 먹지 못해 항상 배고파 했다.

나도 열 너댓살 먹었을 때 지게를 맞추어 장작을 7-8개 짊어지고 10리길에 있는 함평 문장날에 가서 장작을 팔아 필기도구를 사기도 했다.

이 때 어른들 장작지개 더미 속에 내 지게를 받혀 놓으면 어른들이 이놈아 이게 장작이라고 하겠느냐고 웃으면서 말한다.

하루 종일 지게에 받혀 놓고 있어도 누구하나 물어보는 사람 없었다.

해가 기울어져 어둠이 들어 딱하게 보는 어른들이 팔아주어 공책 1권과 연필하나 사니 돈이 다 떨어져서 털털 굶고 집에 와 밥을 먹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하여 부모님께 말하니 가지 말라고 말 들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후에도 한두번 문장장에 짊어지고 가서 어른들에 끼어서 팔았다.

우리 아버지는 엄격해서 어렸을 때는 무서워했다. 한 번은 큰 누나가 쟁기 보습을 깨놓고 아버지 두려워 내가 깼다고 말하여 호되게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깨지 안했다고 끝까지 두들겨 맞으면서도 부인하니 어머님이 그 장면을 보고 그만 때리라고 회초리를 빼앗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그후에사 알았었다. 우리 아버지는 한문을 배워야 장차 출세도 하지 언문(국문)을 아무리 배워봐야 소용이 없다고 해서 서당에 3년을 다녔다.

광복 후에 돈이 없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없는 사람 집안의 어린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해서 학교에 들어가려 하니 한문을 그대로 배워라 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면 오전에 학교 공부하고 오후에는 이웃집 서당에 가서 공부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다가 서당을 그만두고 학교 공부에 열심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1949년 여름에 (당시 6월)묘량면 연암리 뒷산에서 숫돌을 캐는데 연암리 당시 하세미 주막 앞으로 연정골에서 연암리로 오는 다리에서 밀재 출장소에 있는 전투경찰대 7명이 여자들을 죽창훈련 시키기 위에서 광주에서 영광읍으로 오는 버스에 올라 타 삼학리 산산마을 에 있는 분교에서 죽창 훈련시키기 위해서 매일 버스를 타고 오는 경찰을 빨찌산이 다리에서 기습하였다.

전투경찰 6명이 사살되고 애 밴 여자 한명이 죽었는데 오후에 영광기동대가 동원되어 족적을 따라 불갑산으로 추격하는 도중에 숫돌굴을 발견하고 총소리에 놀라 겁을 먹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꺼내놓고 무조건 두들겨 패면서 “네가 빨찌산부대에 알려준 것 아니냐”고 막 두들겨 패어 나는 숫돌만 캐는 영감인데 모른다고 말했으나 결국 아버지를 총살시키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총살시키려고 할 때 마침 밀재 출장소 소장이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사람이냐고 얼굴을 감싼 수건을 벗기니 우리 아버님인 것을 알고 ”이 영감은 숫돌만 캐는 영감이며 밀재 출장소 지을 때 돌담벽을 쌓은 영감이라고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하여 살아났다.

그놈들이 아버지를 실어다가 하세미주막집에 갖다 놓고 우리집에 알리어 우리 형님이 찾아가서 데려와 방에 눕히여 놓고 당시 약이 없어 두들겨 맞은데는 똥물이 특효약이랴 하여 농촌 소망에 똥덩어리를 제끼고 똥물을 먹고 살아났던 것이다.

이렇게 고생한 우리 우리 아버지는 1950년 9.28 후퇴 때 면 산인 장안산 태청산에 입산했다가 피난민들을 다 죽일 수 없어 자기가 사는 마을로 내려가라는 면당의 지시에 의해서 마을로 내려왔다.

당시 내촌마을이 가장 반동 마을이었고 강씨 집촌마을 인데 강대전이란 경찰놈이 살아 돌아 와서 근방마을 청년들을 개인감정으로 모두 학살하는데 형님과 술 친구사이라 형님은 죽이지 않고 살았다.

내가 불갑산에 있을 때 두 번 내려왔었다. 집안식구들을 입산시키려고 내려와 방문을 여니 아버지 혼자 있었다. 어머니는 이웃집 물레 품앗이 가 있었다.

깜짝 놀라면서 네 친구도 중학교에 아무런 일 없이 다니고 있으니 너도 올라가지 말고 중학교에 다니라고 간곡하게 요구하는 것을 뿌리치고 제2국민병 모집에 아버지도 끌려 갈 수 있으니 몇일날 다시 올 것이니 입산할 준비 하고 있으라고 주문하고 나왔다. 이웃집 물레 품앗이 가신 어머니를 뵙기 위해 가서 보니 할머니들이 대여섯명 되는데 깜짝 놀라며 어떤 일인가하고 묻기에 며칠만 더 참으면 다시 해방세상이 된다고 말하니 참 좋아라 했었다.

당시 전남북 무장부대가 합동작전을 하려고 준비중에 있을 때였다. 이렇게 말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왔었다.

그후 며칠 있다 또 내려가니 집안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이웃집 할머니와 손자들과 같이 불갑산으로 오는 길에 용천사 뒤 능선 길에서 우리 부모님과 여동생 둘, 이웃집 신대양반 부부와 손자들이 이불짐을 짊어지고 오는 것을 반갑게 만났다.

그래서 오도치마을에 불타버린 집터 위에 칸막이를 가로 질러 치고 불을 때여 먹여 살리었다.

그렇게 1951년 2월 20일 2.0작전 때 전투지구를 벗어났기 때문에 살아났다

그 때 나는 나주 금성산에서 내 어린 두 여동생을 데리고 있었다

그후에 안일이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를 찾는다고 얻어 먹어가며 샅샅이 불갑산 산간을 해매고 다녔다 한다.

그후 53년에 어린동생들과 살아 고향에서 합류했다 한다.

자수자들의 말에 의하면 산에서 내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죽은 줄로 생각하고 잊고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죽은 줄로 생각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항상 이 자식을 잊지 못해 영승이를 불렀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배운 것 없어도 귀동냥해서 내가 한문 천자를 외울 때 더듬거리면 듣고 있다가 이런자 아니냐고 말씀하시기도 한 영리한 분이었다.

문중 일도 혼자 도맡아서 하고 마을의 궂은 일도 도맡아하고 이웃집과 시비가 있어 싸울 때도 중매 역할을 다했다.

그래서 근방에서는 평판이 자자했었다.

나와의 부자간의 관계에서도 내 말이라면 그대로 듣고 이행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내가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알았을 때는 이미 저세상으로 가셨다. 그래서 효 속에 충을 찾지 말고 충 속에서 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 말은 내 조국과 인민을 사랑하는 그 충성 속에서 효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충성은 모든 인민에 대한 효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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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23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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