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0. 전향을 거부하자 반공법위반으로 조작하여 옥살이를 계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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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3-01-31 16:36 조회 3,316 댓글 0본문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0.
전향을 거부하자 반공법위반으로 조작하여 옥살이를 계속하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74년 4월 28일이 만기었다. 그런데 74년 만기자가 8명이었는 데 내가 첫 만기자였다.
특별사동에 64명의 비전향 장기수 동지들이 있었으나 제 1차 고문구타에 17명이 남아 있었다.
적들은 나를 꺽으면 나머지도 전향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무지막대한 고문구타를 감행했어도 끄떡하지 않자 나를 교화과에 호출해서 특별사로 돌려 보내지 않고 병사 2층 1방에 들여보내고 곧 이어 전향자 차양진과 출옥해 지금 살고 있는 한정방이 들어와 3명이 한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차양진은 전북빨찌산 출신으로 영웅칭호까지 받았는데 탈장이 심하게 걸어 다니는데 여간 불편을 느끼지 않했다.
적들은 전향해야 수술을 해준다고 약점을 이용했다. 테러가 시작되자 전향했다.
전향 후에 교화과에 이용당하여 전향공작의 자문위원이 되었다.
그자가 우리동지들 한사람한사람 사상적 입장과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강제전향시키는데 누구는 어떻게 하면 된다는 자료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그런자와 한방에 있었다. 나머지 한정방은 고춧가루 고문에 전향했으나 양심은 조금 살아있어 들러리로 합방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차양진은 교화에서 제공한 연필과 수첩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의 동태를 기록하여 매일 교화과에 불러나가 보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에 적이 되어 나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 잘 아는 사이라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특별사에서는 우리동지들을 고문구타해서 많은 전향자를 낸 살인 깡패 정무종과 원삼실,노상기, 이준원, 서원배 등 깡패 소제들중 고문구타에 많은 전향을 시킨데 대하여 자랑으로 여기는 정무종놈은 김영승이 전향했다고 복도에서 큰소리로 말을 하고 다녀서 우리동지들 중에는 김영승이 전향할 사람 아니다라고 믿는 동지들이 있는가하면 그래도 전향했다고 하니 반신반의 하는 동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속에서 나는 우리동지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불어넣어주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시 사방구조 형태가 74년 4월부터는 전향자를 낼만치 냈기 때문에 운동은 사방 뒤에서 했는데 내가 있던 방 뒤창문을 열면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나 차양진의 감시 때문에 그러지 못하다가, 그자가 교무과에 나갔을 때 문을 열고 우리동지들이 나를 보더니 누구하나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하던가 눈만 깜박하던 동지들은 찾아 볼 수 없었고 경직된 얼굴만 보일뿐임을 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전향 안하고 있다는 신심을 보여 줄 수 있는 가를 생각했다.
그후 차양진이 없는 틈을 타서 한정방도 모르게 변소에 들어가 뒤 공기통을 열고 운동나온 동지들을 보면서, 2000년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간, 한장호 선생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쥔 팔둑을 내보이며 단호한 얼굴빛을 보여 주었더니 운동이 끝나 사방 복도로 들어가면서 김영승이 전향 안 했다고 사방동지들이 들을 정도로 큰소리를 해서 우리동지들이 그러면 그렇지 김영승은 전향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일로 한 장호 동지는 불려나가 많이 구타당했던 것이다.
그후 열흘 쯤 있다가 본 특별사로 되돌아 왔는데 동지들의 웃는 얼굴 모습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그 때 느낀 것은 죽으나 사나 함께 투쟁해야지 벗어나면 적이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적들은 감쪽같이 할려던 일이 폭로되자 이제는 할 수 없다고 우리 동지들 곁으로 전방을 시켰던 것이다.
2) 책과 소지품은 다 동지들에게 주고 몸만 가지고 만기날을 맞아 출옥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3시가 되어도 부르지 않고 있다가 4시 경에 나오라 해서 계호과에 나갔더니 색안경을 쓴 놈이 대뜸 저자가 김영승인가 하고 묻더니 앉으라 하면서 10년을 더 살어야 정신 차리겠구만 하고 말하였다.
사실 출소하면 받아 줄 사람이 없어 광산군 큰누님집으로 출소 예정지가 되어 광산경찰서에 인수인계조치를 취해 놓았었다. 그러나 나를 살려서 내 보낼수는 없다고 적들은 생각 끝에 조작반공법을 적용할 15건을 3인이 5건씩을 조작해서 고발서류를 만들어놓았고, 만기 2일전에 당시 내 전향담당관 정일봉놈은 고발서류를 보여주며 전향하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협박했다.
나를 조작 고발한 놈은 나를 담당한 놈인 정일봉과 나를 무지막대한 고문구타한 정무종놈과 차양진 전향한 놈들이었다.
정보과에서 온 놈의 검은 찝차를 타고 농성동에 있는 중앙 정보부 직할 광주정보부 지하 고문실로 직행했다
나가면서 출옥일에 찾아온 동기간들이 있었다
그때 온 동기간은 13년 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옥했을 때는 거의 죽고 없었다.
당시 큰누님이 정보부에 찾아와 왜 내보지 않느냐고 물으니 10여년 더 살것이니 그리알고 집으로 가라고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신문한 조사관놈은 류시보였다.
조사서류 꾸미면서 지금 반공시국에 전향하지 않으면 출옥 못한다고 하면서 전향하라한다.
나는 못한다고 하면서 법정에서 정정당당하게 말을 할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별난놈이 다 있다고 하면서 너보다 뛰어난 사람도 정보부지하실에 오면 다 넘어갔는데 너는 당당하게 대응한다고 하면서 서류작성을 했다.
나는 전부 부인했다. 당시 사방구조가 문턱이 높은 창틀에 올라가 통방은 꿈도 꿀수 없는 고문구타가 감행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통방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했으나 전향하지않는 내말을 누가 신용하겠느냐고 조사관 놈은 말을 한다.
지하실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이틀간은 광주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냈다. 당시 유치장에는 전남대학생들이 데모하다가 붙들려와 있었다.
유치장 간수놈은 좀 괜찮아서 나를 지칭하며 징역을 20년이나 산 비전향자라고 말하니까 학생들이 고생 많이 했다하면서 자꾸 통방하려 했다
간수는 이분은 겉과 내용이 다 빨간 빨갱이지만 학생들은 수박과 같은 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나는 마지막 지하실로 불려나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전향하면 내보내 줄 수 있다. 일단 서류가 검찰로 넘어가면 전향하면 집행유예로 나오지만 전향 안하면 징역을 살게되니 잘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나 초지일관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전향은 못한다고 하면서 경찰서유치장에서 이틀을 자고 정보부 지하실에서 하루 합하여 출옥 후 3일만에 특별사로 다시 들어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검찰에 불려나가 차장검사에게 조서를 받는데 하는 말이 너 같은 무죄하게 재판받는 사람을 수없이 보지만 네가 전향했다하면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지만 비전향자로 있는한 네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반공국가에서 징역을 살 수밖에 없으니 지금이라도 전향하면 집행유예로 내보낼 수 있다고 하면서 전향을 권유한다.
결국 기소 되어 단독재판부에 적용되어 한번 받고 두 번째 부터는 합의부에에 넘겨젔다.
반공법 9조 2항에 재소시 다시 범행을 저질렸을 때 사형까지 줄 수 있다는 조항에 의하여 합의부로 넘어갔다.
6개월에서 일주일 남겨 놓고 9번 출두에 일심은 종결되었다.
재판에서 당국은 다 승인하라고 권유했다. 증인 신문에 김중종동지와 류락진동지가 증인 재판에서 독방에 있으면서 더욱이 전향말살책이 강행되는 살벌한 분이기속에서 감시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통방할 수 있는가고 증언 했다.
나를 고발한 차양진은 피고는 징역을 얼마나 사는 것에 구애 받지 않고 교도소 비행을 폭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니 내보내서는 안된다고 증언했다.
교회관 정일봉 놈은 내가 공산주의 사상이 머리끝까지 철두철미하게 밝힌 사람이기 때문에 내보내서는 안된다고 증언했다.
재판장은 15세 소년 나이에 공산주의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박혀 있다고 하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전향을 했으면 모르지만 전향을 안하고 있으니 피고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고법에 가서 재판을 한번 더 받으라고 했다.
만기 육개월인데 일주일 남겨놓고 징역 2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에 처한다고 했다. 고법에 항소했으나 기각당하고 말았다,
대법에는 돈이 없어 상고 못해서 확정 되고 말았다
감옥에서 2년을 더 사는동안 집안과 끊어진채 살다가 75년 5월 7일이 2년 만기인데 만기전 5월 3일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안 감호처분을 받고 청주보안감호소에서 13년 4개월을 더 살고 1989년 9월 5일에 비전향으로 출옥했다
2023년 1월 31일 필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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