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전역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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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2-04-09 02:41 조회 5,712 댓글 0본문
제 57 회
섬에 남은 세사람
정 철 학
3
물은 계속 불어올랐다. 그들이 나무우에 오른지 30분도 채 못되여 섬의 건물들은 모두 지붕마저 완전히 물에 잠겨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더기비는 사정없이 내리퍼붓는데 태풍은 더더욱 세차게 불어 그들이 오른 버드나무는 금시라도 뿌리채 뽑혀질듯 마구 몸부림쳤다. 세차게 이리저리 흔들리우는 버드나무가지를 꽉 부여잡은 세사람은 능히 목숨을 건질수 있는 제방뚝을 저도 모르게 제각기 바라보았다. 그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들의 뇌리로는 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그때 그들은 가슴속에 품었던 꿈들과 가장 소중한것들에 대해 생각하였으며 지나간 자신들의 인생을 돌이켜보았다. …
나무에 오른 세사람들중에서 리선향은 제일 나이가 어렸다. 광룡과 성준은 자기들은 먼저 죽더라도 나어린 선향이가 꼭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모신 함을 안겨주고 제일 웃쪽가지에 올려보냈다.
세찬 비바람속에서 모심함을 꼭 그러안은 선향은 자신이 품었던 꿈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우리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자주 꿈에 대해 이야기하군 하였지, 소중한 꿈이 없다면 결코 인간의 생이라고 말할수 없다고.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나는 대학으로 가는것이 꿈이였다. 꿈은 간직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그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바로 그래서 인생에서 꿈이 소중한것이라고 말해준것도 우리 선생님이였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보람이 있어서인지 졸업을 앞두고 대학입학자로 선정되였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던가. 이것은 온 집안의 경사이기도 했다.
집안의 막냉이로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나는 그때에 가서 일체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고스란히 대학갈 공부만을 하는 일종의 신성불가침 비슷한 존재처럼 되고말았다. 어찌다 사소한 집일이나마 손을 대려고 하면 온 집안식구가 큰일이나 난것처럼 말리며 책상으로 떠밀었다. 집식구들의 이런 관심속에서 대학에 갈 준비를 열심히 하던 그해 12월 위대한 장군님께서 너무도 뜻밖에 우리의 곁을 떠나시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 청천벽력같은 비보앞에서 얼마나 땅을 치며 통곡하였던가. 그 피눈물의 12월에 나는 왕재산혁명사적지에 모셔진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앞에서 내리고 또 내리는 눈발을 밤새워 맞아가며 맹세하였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인민생활문제를 두고 그리도 마음쓰시던 우리 장군님의 생전의 뜻을 가슴에 새겨안고 쌀로써 당을 받들리라고, 항일의 피어린 항쟁사가 깃들어있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불멸의 령도사적이 어려있는 영광의 이 땅에서 자라난 딸답게 일생을 살리라고 심장의 맹세를 다졌다.
나는 이 맹세를 지켜 학교를 졸업하고 농장으로 진출하였다. 당세포위원장을 하던 아버지도 나의 이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소녀시절의 황홀한 꿈은 사라졌다. 나는 대신 새로운 꿈을 농장벌에서 시작하였다. 나는 영광의 사적을 전하는 이 땅의 포기포기마다에 나의 꿈을 심었고 정성다해 자래웠다. 농장에서는 나를 통신대학에 추천해주었다. 일하면서 배우며 나의 꿈은 더 커졌고 넓어졌다. 농사를 과학화, 집약화하여 보다 많은 소출을 내게 하는데서 전초병이 되리라, 그래서 이 땅에 년년이 대풍을 안아와 우리 원수님께 기쁨을 드리리라.
이제 얼마후이면 통신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는데 정말 아쉽구나. 많이 배워 농사를 한번 잘 지어보려고 했건만…)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가 피워올리는 물안개너머에 있을 고향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향은 제방뚝을 돌아보았다.
목숨을 구할수 있는 그 뚝은 손을 뻗치면 닿을듯 가깝게 바라보였다.
하지만 그 땅에는 그의 소중한 꿈이 없었다. 선향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사는건 사는게 아니야. …)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도 어둠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준다. 더우기 재난을 당한 그들에게야 더 말해 무엇하랴.
최성준도 폭우와 돌풍속에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랭기와 함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를 느꼈다. 그는 은연중 어린시절에 있었던 일을 련상하였다.
(어렸을 때 이렇게 높은 나무우에 올라왔던적이 있었지. 나무가지에 매달린 연을 떼러 올라갔었는데 내려가려니 도무지 혼자서 내려갈수가 없었다. 나무에는 오르기보다 내리기가 훨씬 어렵다는 말은 정말 옳은 말이다. 나는 끝내 나무를 내려가지 못하고 겁에 질려 쿨쩍쿨쩍 울고만 있었다. 해가 저물어 밤도 이슥할무렵 나를 찾아 온데를 다 헤매이던 어머니가 그 나무있는데까지 찾아왔다.
그때 너무도 걱정하였던 어머니는 미처 꾸중할 생각도 못하고 나를 나무에서 받아내리워 잃었던 아이를 찾기라도 한듯 소중히 품에 꼭 안아주었었다. 그때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포근하였던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무서운 장난꾸러기였고 밸통머리가 사나워 남의 말을 통 듣지 않았다. 그 버릇이 지금도 남아 때때로 남의 말밥에 오르군 하지.
그런 나를 키우느라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였던가. 어머니가 보고싶구나.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나무우에 매달려있는것을 알면 얼마나 가슴을 조일가. 정답고 그리운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나를 낳은 친어머니가 아니다. 친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형과 나, 두형제를 남겨놓고 일찌기 세상을 떠났다. 그후에 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 나와 형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지난 겨울에 어머니는 고뿔에 걸려 심하게 앓았지. 거기에는 잉어탕이 좋다고 해서 밤에 강으로 나가 얼음구멍을 까고 잉어낚시질을 했었다. 찬바람이 불어치는 추운 겨울밤에 얼음구멍앞에 쭈그리고있는데 얼마전에 농장에 새로 온 회계장이 지나가다가 웬일인가고 물었다. 사연을 설명했더니 그는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었다.
《동문 이붓어머니와 함께 산다고 들었는데 참 끔찍하구만. 정말 쉽지 않소.》
그로서는 감탄하느라 한 말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몹시도 귀에 거슬렸다.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도 내앞에서 이붓어머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중학교때 우리 어머니를 이붓어머니라고 하는 애가 있으면 나는 한사코 따라가서 때려주군 하였다. 나는 울컥하여 회계장에게 쏘아주듯 말했다.
《우리 어머닐 이붓어머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어머닌… 진짜 우리 어머닙니다.》
회계장은 당황한 어조로 변명하였다.
《이거 정말 미안하오. 안됐소.》
그날 밤 끝내 잉어를 낚지 못하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번열이 심하게 나는 속에서도 나를 꾸중하였다.
《밤중에 어딜 나가다니느냐? 꼭 완두콩처럼 새파랗게 얼었구나.》
빈손으로 들어온지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야단을 그냥 맞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회계장이 큼직한 잉어 한마리를 들고 집에 나타날줄이야. 잉어를 놓고 가며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거 아들 하나만은 참 잘 두었수다.》
그 말에 어머니는 머리가 쏜다고 이마를 질끈 동이고 앓으면서도 자랑스레 이렇게 대답하였다.
《왜 하나뿐이겠소. 우리 집 아들들은 다 괜찮수다.》
회계장은 소리를 내여 웃었다.
《어머닐 보니 아들들을 어떻게 키웠겠는지 짐작이 가웨다.》
알고보니 회계장은 마음이 어진 사람이였다. 그 잉어도 집에 대사가 있어 구했던것임을 나는 후날에 알았다. 그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기침소리를 섞어가며 또 나를 욕하였다.
《좀 있으면 나을걸 가지구 얼어죽자구 이 추운 날 강에 나갔댔느냐. 별치도 않은 고뿔이나 가지구 큰변이나 난것처럼 동네방네 소문을 놓고 다니다니.》
무엇때문에 영화나 책들에서 좋은 후어머니를 그릴 때에는 성미가 얌전하고 온순하며 이붓자식들의 눈치를 보고 할말도 못하고 참기만 하는것으로 그리는지 모르겠다. 더우기 자기가 데리고 들어온 친자식이 있으면 이붓자식들앞에서 고와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될수록 멀리하는척 하거나 심지어 먼데 보내기까지 하는것으로 그리는데 나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는다. 만일 실지 그렇다면 그것이 오히려 인위적인것으로 여겨지지 않을가.
우리 어머니는 우에서 그려진 후어머니의 형상과는 영 비슷치도 않았다. 대체로 사람들은 함경도녀인들을 두고 드세차고 개방적인 녀인들로 련상하는 일이 많은데 어머니가 바로 그러하였다.
어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온 첫날 어머니는 우리들을 불러앉히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들을 낳지는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 어머니다. 그리구 너희들 동생을 하나 데려왔는데 앞으루 친형제처럼 지내야 한다. 사내녀석들이니 저들끼리 싸울수도 있겠지만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 한다. 그래야 형제다.》
입을 열면 심장이 들여다보이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머니에게 꼭 맞는 말이였다. 어머니는 속에 있는 말을 감출줄 몰랐고 솔직한 그만큼 진실하였다. 우리가 잘못하면 성이 나서 욕도 하고 볼기짝도 소리나게 때리군 하였지만 잘하는 일이 있으면 칭찬을 해주었고 몹시도 기뻐하며 대견해하군 하였다. 어머니는 애초에 우리를 남의 자식이 아니라 친자식처럼 여긴 까닭에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간격이 없이 나와 형을 대하였다. 데리고 들어온 동생도 고와하였지만 편애하지 않았으며 우리와 차별이 없이 키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진정이 처음부터 우리 형제의 마음에 와닿은것은 아니였다. 옛말에 자식 하나를 키우는데 오만공수가 든다고 했지만 이붓자식을 제 자식처럼 키우자면 그 곱절인 십만공수가 들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집안에서 막내인 나의 위치가 데리고 온 동생에게 옮아간것이 분하여 자주 동생을 때려주군 하였다. 동생이 얌전하기라도 했으면 좀 나았으련만 그 애도 나 못지 않은 장난꾸러기였다. 둘이 같이 놀다가도 쩍하면 싸우군 했는데 그런 때면 둘 다 어머니에게 얻어맞아도 형인 내가 더 맞군 하였다.
《형이라는게 동생하구 똑같이 그게 뭐냐. 형구실을 해야지.》
동생이 있는 사람들은 어린시절에 다 체험해보았겠지만 똑같이 잘못을 해도 형은 더 꾸중을 듣기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몹시 서러웠다. 그런 날이면 동생을 끌고나가 더 때려주며 이렇게 욱박지르군 하였다.
《가라, 가라. 너희 집에 가라. 여긴 우리 집이야.》
그러면 동생은 팔소매로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슬프게 울었다.
그다음에 내가 어머니에게 졸경을 치르군 한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이제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우리를 어자어자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진정이 후덥게만 돌이켜지는것은 무슨 까닭일가.
한번은 내가 옆집애와 싸우고 눈가에 멍이 져서 들어왔다. 어머니는 내 꼴을 보고 펄펄 뛰였다.
《남의 집 애를 이렇게 때려놓다니. 어디 보자.》
어머니는 나를 끌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옆집애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체격도 더 큰 애였다.
어머니는 옆집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그 집 퇴마루밑에서 졸고있던 개가 와뜰 놀라 꽁지를 빳빳이 추켜들고 달아날 정도로 큰소리를 쳤다.
《이걸 좀 보오, 그 집 큰애가 우리 쪼꼬만 성준이를 무슨 꼴로 만들었나.》
북방녀인들은 목소리가 큰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어머니도 평상시에 하는 보통 말도 꼭 왁살스럽게 싸우는것처럼 들리는 함경도사투리가 푹 배인 녀인이였다. 그러니 잔뜩 성이 난 그런 때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옆집아주머니도 목청이 높고 드살이 세기는 우리 어머니에게 짝지지 않는 함경도토배기였으나 그때는 꼼짝 못하고 용서를 비는것이였다.
《이거 정말 안됐어요. 내가 우리 애를 단단히 혼내우겠어요.》
그 아주머니가 이붓자식을 두고 가슴이 아파 달려온 어머니의 진정이 마쳐와 그날 용서를 빈것임을 나는 철이 들어서야 리해하였다.
내가 심하게 앓아누웠을 때 어머니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나를 구완해주었다. 깊은 밤 눈을 떠보니 나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은 어머니가 근심스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나는 눈굽이 핑 돌았다.
《엄마-》
울먹이며 안겨드는 나를 품에 꼭 안고 어머니는 살뜰히 머리를 쓸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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