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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우수한 창조적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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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나이
댓글 0건 조회 1,168회 작성일 23-01-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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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우수한 창조적재능​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총명하고 문명하며 우수한 민족입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조선민족은 자기의 창조적재능으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창조하여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다.

우리 민족은 삼국시기에 벌써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키는데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세계적으로 오늘까지 남아있는 천문기상관측대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는 경주의 첨성대(7세기 중엽)는 삼국시기의 천문학과 기상학의 발전수준을 잘 보여주고있다.

삼국시기에 벌써 천문기상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관청과 학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천문기상관측을 진행하였으며 이 사업을 위하여 천체관측시설인 첨성대가 건설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첨성대가 삼국시기에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도 건설되였었다고 한다.

경주의 첨성대는 높이가 약 9. 1m, 웃직경이 약 2. 9m, 밑직경이 약 4. 9m로서 원통형으로 된 석조건물이다. 첨성대의 맨 웃부분은 4각형의 귀틀로 되여있으며 가운데부분에 남향으로 네모난 나들구멍이 나있다. 학자들은 이 나들구멍을 통하여 첨성대안에 들어가 사다리를 타고 맨우에 있는 관측대에 올라가 기상천문현상을 관측하였다. 첨성대를 통하여 우리 인민은 일식과 월식, 살별(혜성), 행성, 별찌(류성) 등의 천문현상과 가물과 큰물과 같은 여러가지 기후변화들을 관측하고 미리 알아내였는데 이것은 당시 농업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높은 창조적재능은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시기에 이르러 더욱 높이 발양되였다.

이 시기에 발명되여 사용된 금속활자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 고려시기의 금속활자 -


11세기말~12세기초 고려에서는 금속주조 및 가공기술이 발전하면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 글자가 뚜렷이 새겨진 구리돈이 광범히 주조되였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목판인쇄의 부족점을 극복하기 위한 고심어린 연구속에 마침내 인류력사상 처음으로 금속활자가 발명되여 인쇄기술발전에서 전환의 길이 열리였다.

고려에서는 금속활자를 리용하여 1170년에 《고금진보대전》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으며 1234~1241년에는 50권에 달하는 《고금상정례》라는 책을 금속활자로 28부나 인쇄하였다. 1076년에 씌여진 《남명천화상증도가》라는 책은 1239년에 강화도에서 목판으로 다시 인쇄되였는데 그전에 이미 개경에서 금속활자로 출판인쇄된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13세기 초엽에 이르러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널리 진행되였으며 고려에서 금속활자의 발명시기가 늦어도 12세기 전반기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 금속활자를 만드는 우리 선조들을 형상한 그림 -


세계적으로 볼 때 1423년에 네데를란드의 코스타가, 1450년에 도이췰란드의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있는데 고려에서의 금속활자의 발명은 그보다 근 300년이나 앞선것으로 된다. 1377년에 고려에서 출판된 《직지심경》(《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현재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들가운데서 가장 오래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직지심경》이 오늘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들가운데서 가장 오랜 책이라는것을 세계각국에 통보하였으며 주체61(1972)년에 《국제도서의 해》의 행사의 하나로서 프랑스 빠리에서 진행된 《책의 력사》종합전람회에 이 책을 전시하였다.

우리 민족의 뛰여난 창조적재능은 조선봉건왕시기에 와서도 남김없이 과시되였다.

15세기에 비내림측정기구로서 창안제작된 측우기는 우리 민족의 창조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원래 천문학과 기상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온 우리 인민은 일찍부터 비가 내린 량을 측정하여 생산과 활동에 적극 리용하여왔다.

그러나 측우기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강수량을 비가 온 후 비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는 방법으로 측정하였다.

그런데 비물이 땅속에 스며드는 깊이라는것은 토질에 따라 다를수 있었고 같은 토질에서도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리고 마른 땅인가, 습한 땅인가에 따라 다른것으로 하여 비가 내린 절대량을 정확히 알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우리 선조들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던 끝에 1441년에 과학적인 비내림량측정기구인 측우기를 발명하게 된것이다.

당시에 창안제작된 측우기는 높이 약 40cm, 직경 약 16cm의 쇠로 만든 둥근 통모양으로 생긴것으로서 대우에 올려놓고 비물을 받아 그 량을 재게 되여있었다.

이후 측우기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마당안에 설치되였는데 중앙에서는 철이나 동으로, 지방에서는 자기나 질그릇으로 만들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개인 시간, 그동안의 비내림량을 측정하였다.

측우기에 의한 비내림량에 대한 과학적인 측정방법과 제도는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먼저 창안하고 도입한것이다.

유럽에서 천문기상학자로 널리 알려져있는 이딸리아의 베네데또 까스뗄리가 기구를 가지고 비물의 깊이를 측정한것은 1639년이였으며 측우기를 전국적규모에서 설치하고 비내림량을 중앙에서 장악하는 제도를 세운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의 일로서 우리 나라에서 창안리용한 측우기는 유럽에서 발명한 측우기보다 근 200년이나 앞선것으로 된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높은 창조적재능으로 세상에 자랑할만한 과학문화유산들을 창조하여온 슬기로운 민족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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