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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에서 찾은 광명의 참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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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1,384회 작성일 23-09-1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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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에서 찾은 광명의 참세상입니다

 

9월의 하늘가에 이 나라 인민의 꿈과 리상이 실린 람홍색국기들이 세차게 펄럭입니다.

75년의 만단사연을 전하는 람홍색기폭들을 바라보느라니 저 국기아래 흘러온 나의 길지 않은 후반생이 삼삼히 돌이켜집니다.

내가 45년간의 곡절많은 과반생이 얽힌 암흑의 괴뢰사회와 결별하고 공화국의 품에 안긴지도 어언 서른세해가 흘렀습니다.

45년과 33년,

한 인간의 서로 다른 인생사가 실린 두갈래의 세월이였습니다.

만일 이제 다시 나에게 두 인생길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33년을 택할것입니다.

그것은 생의 가치나 보람이 결코 년륜에 있는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불모의 땅에서의 45년


인생은 꿈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목적없는 항해처럼 무의미하며 리상을 실현하려면 거기에 운명을 걸어야 한다는것이 나의 인생지론이였습니다.

하지만 생활은 운명을 걸고서도 이룰수 없는것이 꿈이라는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원래 내 생의 뿌리는 여기 공화국땅에 있었습니다.

내가 태여난 강원도 철원군은 고구려때부터 철이 나는 고장이라 하여 철원으로 불리워온 오랜 력사를 가진 고을이였습니다. 그런데 8. 15해방과 함께 국토분렬의 희생물로 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 고향 보막리에서 멀지 않은 남쪽으로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38°선이 지나가면서 철원지역이 북과 남으로 갈라졌던것입니다.

38°선 남쪽에서 악명높은 미군정이 실시되고있을 때 우리 마을에서는 민주개혁의 봄빛이 흘러넘치고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짓는 마을사람들의 행복의 웃음소리가 그칠줄 몰랐습니다. 내가 3살나던 해에는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여 자주독립국가의 첫 공민으로 된 고향사람들의 환희와 만세소리가 온 골안을 진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세가 곧 신념의 표현은 아니였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자기 보금자리도 지켜낼수 없다는것을 우리는 그후의 쓰라린 체험을 통하여 똑똑히 알았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는 일시적으로 강점한 공화국북반부지역에서 쫓겨가면서 원자탄사용을 운운하며 각성되지 못한 인민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그것이 공화국정권으로부터 인민들을 떼여내기 위한 술책임을 알리 없던 나의 부모들은 며칠밤을 뒤척이다가 공화국에 대한 신념이 확고치 못한탓에 자식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솔가도주하는 운명적인 착오를 범하였습니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5살이였습니다.

정전후 우리 마을 남쪽산기슭을 가로지른 군사분계선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수 없게 된 우리 가족은 할수 없이 정든 향촌이 바라보이는 경기도 포천군에 눌러앉고말았습니다.

이렇게 나는 행운이 기약되여있던 고향땅을 버리고 운명의 광풍에 휘말려 불모의 땅에 휘뿌려진 불행한 씨앗이였습니다.

암울한 세상일수록 꿈은 더욱 소중합니다. 그 희미한 등불마저 없다면 우리처럼 돈없고 힘없는 인생들이 살아나갈 용기조차 낼수 없었을것입니다.

생전에 나의 아버지는 일년지계라면 곡식을 심고 십년지계라면 나무를 심으며 평생지계라면 사람을 돌보고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자주 외웠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엉뚱한 생각으로 자주 집식구들을 놀래우군 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며 장사일에 바삐 돌아가는 형님들을 보면서 돈만 아는 인간이 되지 않으리라 속다짐하였습니다.

고등학교졸업후 괴뢰군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23살의 혈기방장한 나는 부조리한 사회에 도전하는 심정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자선학교를 세울 대담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무지막지한 군사독재하에서 사회주의국가에서나 가능할 리상실현에 나선것부터가 일종의 객기였으나 어쨌든 부패한 괴뢰교육제도에 대한 일대 《선전포고》로 될 나의 대망을 실현하자고 보니 첫째도 둘째도 걸린것이 돈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험악한 세상에서 제 돈으로 남의 아이들을 공부시키려는 나의 리상을 대번에 망상으로 치부하며 거절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나의 끈질긴 설득에 못이겨 나의 세간분배몫으로 저축하였던 예금통장을 꺼내놓으면서 자금이 떨어지면 다시는 돈을 달래지 말라고 랭정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타향에서 일찌기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6남매를 키우며 피나게 모은 밑천을 아들의 허망한 망상에 밀어넣고 한숨짓던 어머니의 정상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학교건설에 달라붙었습니다. 하여 1968년 당시 괴뢰지역에서 제일 큰 자선중학교였던 운천재건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였습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 공부도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던 270명의 아이들을 공납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공부시켰습니다. 자금이 떨어지면 여러가지 축산과 뽕밭조성, 과일장사 등으로 간신히 학교를 유지하였습니다.

나는 자본주의세계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교육복지를 실현할수 있다는 기대와 신심에 넘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를 막론하고 사회정치적리상을 실현하자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사회적조건과 환경이 담보되여야 합니다.

리상을 새에 비유한다면 사회정치제도는 그 새가 나래칠수 있는 창공과도 같기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사회는 구조적으로나 리념적으로 볼 때 하나의 거대한 조롱이고 감옥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자선학교의 운영으로 일정하게 명성을 얻은 나는 1978년 5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란 당시 박정희역도가 장기집권을 위해 꾸며낸 어용도구로서 《대통령》 직접선거가 아니라 2 500여명의 대의원들이 투표하는 간접선거의 방법으로 뽑기 위한 꼭두각시기구였습니다.

나는 어용기구의 불순한 목적보다 당시 위세가 당당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신분에 현혹되여 그것을 리용하면 학교운영과 파쑈악법철페와 같은 사회적활동에 유리할것으로 타산하고 학부형들과 군내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33살의 젊은 나이에 대의원으로 당선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끝났습니다. 내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서 야당계인물들과 접촉하고 악법철페투쟁을 벌려나가자 괴뢰당국과 《공화당》, 경찰서깡패들은 2중3중으로 압력을 가하다못해 나중에는 우리 학교를 강제페교시키는 파쑈적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열두번째졸업식을 마감으로 학교의 문을 닫던 날 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교직원, 학부형들과 함께 군사파쑈도당을 끝없이 저주하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의 첫 꿈은 이렇게 참혹하게 짓밟혔습니다.

그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사퇴한 나는 민주사회당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11대 《국회》의원선거에도 나서보았으나 당국의 집요한 탄압으로 중도에서 정치적리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경제계와 체육계를 전전하며 중진노릇도 해보았습니다.

허나 어디가나 자선과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나의 리상이 랭대를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썩어빠진 미국식가치관과 철저한 반공리념에 기반하고있는 괴뢰지역의 기형적이며 반동적인 체제하에서는 1%도 안되는 특권족속들과 재벌들만이 저들의 부패타락한 욕구를 끝없이 만족시킬수 있을뿐 절대다수 근로인민들에게는 초보적인 정치적자유와 권리, 생존의 요구도 실현될수 없었던것입니다.

《살기도 힘든 세상에 꿈은 무슨 꿈》라고 하던 형님들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부지중 나의 입에서는 아버지가 즐겨부르던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왔습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밤도 애절구려

불러보니 신통히도 번지없는 내 인생을 노래하는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있는한 절대로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나는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희망은 포기할수 없었습니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다는 알수 없었지만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부터인가 암야의 초불처럼 희망을 주는 한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산정리에 가면 《산정호수》라고 부르는 크지 않은 인공호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조선식기와를 얹은 수수한 집 한채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집을 《태양별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해방후 김일성장군님께서 이곳(전쟁전 공화국북반부지역)에 찾아오시여 농민들과 허물없이 마주앉으시여 호수를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농사를 잘 지을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38°선너머 남쪽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시며 미제의 식민지통치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처지를 두고 몹시 가슴아파하신 이야기에서 유래된 이름이였습니다.

《태양별장》에 깃든 사연을 전해들은 후부터 나의 뇌리에는 어버이수령님의 위인상이 깊이 새겨지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자선학교를 운영할 때 과외수업의 명목으로 자주 그곳에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태양별장》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고 주변에 나무와 꽃도 심고 가꾸면서 민족의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군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방송과 공화국의 소식에 더 자주 귀를 기울이면서 공화국에 펼쳐진 인민의 리상사회를 눈앞에 그려보았습니다. 그럴수록 공화국현실을 내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싶은 욕망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의 정치가 꽃피는 해빛밝은 세상에서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1989년 《전민련》고문 문익환목사와 《전대협》대표 림수경이 련이어 평양을 방문하고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 소식은 나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온갖 번거로운 상념을 털어버리고 인생전환의 대용단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비록 청춘의 혈기도 다 지나고 인생의 저물녘에 들어선 중년기였지만 더이상 저주로운 땅에서 여생을 덧없이 허비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 형제들의 얼굴이 무시로 눈앞에 떠오르며 발목을 붙잡았지만 이 길이 나와 어머니, 겨레의 소망과 념원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결심을 가다듬었습니다.

1989년 10월 중순 나는 눈에 뜨이지 않는 관광객차림으로 성공을 기약할수 없는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내 인생에서 두번째로 운명을 건 인생전환의 꿈이 실린 초행길이였습니다.

머나먼 유럽땅을 돌고돌아 10여일간의 긴장한 려정끝에 드디여 공화국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다섯살때 9살짜리 누나의 등에 업혀 폭탄구뎅이를 에돌며 고향을 떠났던 철원군의 산골마을 초동이 근 40년만에야 중년의 객이 되여 어머니조국에 다시 안겼습니다.

나는 흐르는 눈물속에 어머니를 불러보았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꿈결에도 오고싶던 공화국에 규진이가 왔습니다. 저혼자 온것을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맑고 푸른 하늘에서는 눈부신 태양이 따사로운 해살을 뿌리며 암흑의 동토대에서 얼어든 나의 온몸을 포근히 감싸주고있었습니다.


행복의 년륜으로 아로새겨진 33년


사람의 일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은 자기의 꿈과 리상이 이루어지는 때인가 봅니다.

공화국에로의 의거입북은 내 인생에서 단순한 방향전환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리상이 참답게 실현되는 새 세계의 대문을 연 중대한 사변이였습니다.

듣던바대로 공화국은 정말 볼수록 매혹적이고 알수록 더욱 수수께끼같은 나라였습니다.

공화국에 들어서면서 내가 처음으로 받은 강렬한 인상은 평양시입구에 나붙은 구호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였습니다. 공화국정치의 자주적특징이 간결하게 응집된 구호를 보는 순간 오랜 세월 막혀있던 가슴이 쩡 열리는것만 같았습니다.

괴뢰당국자들은 걸핏하면 공화국정치를 《페쇄정치라고 헐뜯으면서 저들의 사대매국정치는 《열린 정치》, 《실용정치》로 미화하고있습니다.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생명으로 간주하는 나라, 단 한명의 외국군대나 외국군사기지도 없고 거리와 상점들은 외래어가 아닌 아름다운 우리 말로 단장된 주체가 선 나라.

이런 나라를 《페쇄적》이라고 헐뜯는것은 결국 세계가 선망하는 자주강국에 대한 극도의 렬등감에 사로잡힌자들의 치졸한 앙탈질에 지나지 않는것이였습니다.

공화국현실에서 내가 제일 놀란것은 당과 국가가 인민들의 운명과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보살펴주는것이였습니다.

세계의 그 어떤 부유한 나라도 직업, 주택, 교육, 보건에 대한 인민들의 요구와 부담을 국가가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국민총생산액이 그들과 비교도 안되는 공화국에서 그러한 리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고있다는것이 한뉘 자본주의세계에서, 그것도 《동족대결론》과 《동족혐오론 밤낮으로 불어대는 《반공》세계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선뜻 리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모든것을 자본주의자막대기로 재여보는데 습관된 나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세금을 아는가고 물었다가 《우리 학교에는 해금, 가야금, 목금은 있어도 세금은 없습니다.》라는 왕청같은 대답이 튀여나와 모두를 웃기였고 안해가 평양산원에서 퇴원할 때에는 수술비가 얼마인가고 물었다가 의사선생들을 아연케 하였습니다. 내가 진지한 태도로 문제를 제기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사실 경우를 따지면 쌀값과 집값, 치료비, 교육비와 같은 초보적인 생계비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내가 더 이상히 여겨야 할것이였으나 그들은 응당 알아야 할것도 모르고 지내는데 대하여 전혀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는 이민위천의 세상에서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고 인민은 그것을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는것이 바로 공화국특유의 사회주의,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의 현실이였던것입니다.

그러니 공화국공민들의 꿈과 리상이 왜 그처럼 순결하고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세계에서는 누구나 꿈을 꾸어도 오로지 저 하나를 위한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벼락횡재, 벼락출세의 꿈을 꿉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존의 꿈에 시달리거나 탐욕의 꿈을 꾸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꿈많은 처녀들이 하늘아래 첫동네인 대홍단벌과 세포지구 축산기지로 달려가고 운신하기 어려운 영예군인의 영원한 길동무가 되는데서 리상과 행복을 찾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청춘의 푸른 꿈도 뒤에 두고 조국보위초소로 달려나가고 수도의 일류급대학졸업생들이 외진 등대섬과 최전연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서 남다른 긍지와 보람을 찾고있습니다.

로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학생, 평범한 가정주부 누구라 할것없이 당과 국가의 고마움과 귀중함을 간직하고 어려울수록 사회와 집단, 나라의 부강번영을 위한 숭고한 리상을 가슴에 안고 살고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들이 매 인간과 가정들, 거리와 마을들, 도시와 전야를 휩쓸고 지나갔습니까.

민족의 대국상과 련이어 들이닥친 자연재해, 사회주의시장의 붕괴와 적대세력들의 악랄한 고립압살책동, 고난의 행군…

고백하기조차 부끄럽지만 공장과 마을에 불빛이 꺼지고 달리던 렬차들이 멎어서고 원쑤들의 《3.3.3붕괴설마저 어지럽게 나돌고있을 때 나의 심경은 착잡하였습니다.

(공화국이 이 고비를 과연 이겨낼수 있을가, 혹시 동유럽나라들처럼 되지는 않겠는지, 그러면 나와 우리 가정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지만 다음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신념이 없이 미국놈의 원자탄공갈에 속아 남으로 끌려갔던 부모들의 평생절규가 나의 뇌리를 쳤습니다.

《공화국을 지키는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공화국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때처럼 자신과 공화국을 떼여놓을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로, 운명공동체로 이어놓고 공민적의무와 본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본적은 없었습니다.

극심한 고난속에서도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시책을 단 하루도 중단하지 않은 나라,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아야 한다는 숭고한 인생관과 후대관을 지니시고 장군님은 전선으로, 아이들은 야영소로 가는 나라, 천만군민이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간직하고 단순히 시련의 언덕을 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군님께서 가리키신 부강번영할 미래를 향하여 산악같이 일떠선 나라, 이런 나라에 설사 자연의 재난은 밀려올수 있어도 그 어떤 좌절이나 붕괴의 재변이란 있을수도, 상상할수도 없다는것을 나는 그때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미국과 적대세력들은 오늘도 최첨단정찰위성을 비롯한 각종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공화국에 대한 파렴치한 정탐행위와 정밀분석에 집요하게 매달리고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여 공화국이 극한의 위기에서도 몰락하지 않고 번영에로의 꿈을 안고 더 높이 비약할수 있었는지, 압박하면 할수록 더욱 강고해지는 공화국의 생존력과 불패성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끝내 밝히지 못하고 실패한 적대시정책만 답습하고있습니다.

단언하건대 미국식가치관으로는 절대로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라는 인류사적대제를 리해할수 없으며 공화국을 알려면 주체사상부터 알고 그 과학성과 진리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시련속에서 찾은 진리를 안고 전국의 학교와 마을, 공장과 농어촌들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의 인생체험과 교훈을 통하여 공화국의 귀중함을 더 잘 알고 나의 리상이며 우리모두의 운명인 부강조국건설에 애국의 구슬땀을 아낌없이 바칠것을 열렬히 호소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평생념원과 인민의 세기적숙망이 어린 사회주의강국의 눈부신 리상은 오늘 김정은시대와 더불어 찬란한 현실로 펼쳐지고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천하제일강국으로!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인민으로!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리상을 온 누리에 선포하시고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마련해놓으신 자주강국의 반석우에 세계가 알지 못하는 절대강국의 실체를 불과 10여년어간에 그처럼 빠른 속도로 쌓아올리시였습니다.

지나온 10년을 돌이켜볼수록 가슴에 새겨지는 진리가 있습니다.

꿈에도 인간의 신념과 의지가 비낍니다. 그래서 강자와 약자의 꿈은 서로 다릅니다. 강자는 언제나 이기는 꿈을 꾸지만 약자는 비겨도 천만다행이라고 자체위안하는것입니다. 강자는 자기 힘을 믿지만 약자는 남의 힘을 쳐다보기때문입니다. 결국 리상은 강자의것이요 절망은 약자의것입니다.

지금도 전승 70돐경축 열병식장에 해일처럼 격랑을 일으킨 그 세찬 충격과 감격의 순간을 잊을수 없습니다.

100% 우리의 기술과 힘, 우리 식으로 완성된 최첨단전략무력이 제국주의폭제의 종말을 선고하며 굽이쳐나가던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품어온 반만년의 꿈, 부국강병의 숙원이 가슴후련히 풀려나가는 장쾌한 순간이였습니다.

나는 공화국의 그 미더운 핵병기들이 70년전 미제의 원자탄위협에 쫓겨 정든 고향을 등지고 사랑하는 혈육들과 생리별을 당해야만 했던 나의 부모들과 이 나라 수천만사람들의 가슴속에 쌓이고맺힌 원한의 눈물을 씻어주는것만 같아 눈시울이 젖어들고 목놓아 웨치고싶었습니다.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였습니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병진의 혈로에서 기어이 백년, 천년의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안겨주시기 위해 사선길에도 주저없이 나서시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행도 달게 여기며 헤쳐오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멸사복무의 헌신과 로고에 삼가 경건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것입니다.

세상에 우리 원수님처럼 인민들의 꿈과 리상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현실로 꽃펴주시는 령도자는 없습니다.

버섯공장에 가시면 우리 나라를 버섯의 나라로 만들고 백리과원에 가시면 우리 나라를 과수의 나라로 만들며 가까운 앞날에 세상이 부러워하는 과학기술강국, 인재강국, 우주강국, 체육강국으로 만드실 웅대한 설계도를 끝없이 펼쳐가십니다.

우리 원수님의 교육관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민에 대한 가장 열렬한 사랑에 기초하고있습니다.

자본주의세계에서는 교육이 철저히 리윤을 위한 자본시장으로서 자본가는 리윤을 위해 투자하고 자선가는 공명과 또다른 부가가치를 위해 투자합니다. 내가 50여년전 괴뢰지역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자선학교를 세운것도 돈없는 아이들에게 초보적인 교육이라도 주어 그들이 비참한 인생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하려는 자선적목적과 함께 그것으로 일정한 사회적명성을 얻으려는 욕망도 있었음을 부인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주체103(2014)년 6월 평양애육원에 찾아오시여 원아들을 잘 키워 앞으로 이들속에서 이름난 과학자, 체육인, 예술인, 군인도 나오고 영웅도 나오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말씀에 접하면서 나는 한때나마 자신을 량심적인 교육자로 자부해온 지난날이 더없이 부끄러웠습니다.

평양시 5만세대 살림집건설은 우리 당이 크게 벼르고 준비해온 숙원사업이라고 하시며 나라가 최악의 시련을 겪는 속에서도 해마다 1만세대이상의 살림집건설을 제1차적인 중요정책과제로 내세우시고 추진하시는 경애하는 원수님.

뭐가 넉넉하고 돈이 남아나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처럼 주택건설과 부동산시장의 활성화로 인한 경제적리득을 추구하는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살림집문제는 우리 인민들이 제일 관심하는 문제이며 사회주의제도의 혜택을 직접 페부로 느끼게 하는데서 일차적인 문제라고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를 살림집문제를 제일먼저 해결한 나라로 만드실 원대한 구상을 펼치시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보통강반에는 원래 어버이수령님의 옛 저택이 자리잡고있었습니다.

그 저택은 말이 한 나라 국가수반의 저택이였지 자신에게는 크고 화려한 집보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이 더 좋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엄격한 요구에 의하여 오늘의 다락식주택 한채보다 더 작게 지어진 수수한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자리에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평범한 인민들을 위한 새로운 주택구를 짓도록 하시였을 때 나도 온 나라 인민도 자기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언제인가 북부피해복구전투때 나라에서 지어주는 새 집이 너무 부러워 자기 집을 제손으로 허물어버린 주민에게까지 새집을 안겨주시였고 큰물피해를 입은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마을을 새로 지어주실 때에는 1동1세대를 바라는 농장원들의 《욕심》도 탓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요구대로 집을 지어주도록 하신 자애로운 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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