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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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 (1)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총련이 걸어온 자랑스러운 력사에는 총련을 전체 재일동포들의 권리와 리익을 대표하는 주체적해외공민단체로 강화발전시켜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현명한 령도와 크나큰 심혈과 로고가 깃들어있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4월의 봄날 이역의 동포들이 어머니조국으로부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또다시 받아안았다.
어느덧 169번째, 동서고금에 그 류례가 없는 사랑의 력사가 66돌기의 년륜을 아로새기였다.
대를 이어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그 사랑, 그 은정에 누구나 감격에 울고웃으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의 력사가 시작되던 60여년전의 그날에로 추억의 배를 거슬러오른다.
총련이 결성될 당시 민족교육의 실태는 매우 엄혹하였다.
재일동포들이 한푼두푼 돈을 모아 일본 각지에 학교들을 세웠지만 그 토대는 너무나도 빈약하였다. 많은 학교들이 설립후에도 여러해나 가교사신세를 면하지 못하고있었다.
비바람이 새여드는 판자집교사, 백묵 하나 변변한것이 없는 교단에서 배움의 기쁨과 희망에 한껏 부푼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이역의 교육자들이였다.
많은 동포들이 술과 담배를 끊고 반찬값까지 절약하여 한푼두푼 모은 돈을 민족교육에 바치였지만 도저히 자금난을 해소할수 없었다.
거치른 이역땅에서 동포들이 겪는 수난, 그중에서도 민족교육이 처한 어려운 실태를 깊이 헤아려보신분은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주체44(1955)년 9월 29일 조국해방 10돐경축 재일조선인축하단 성원들을 만나주신 자리에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말씀하시였다.
공화국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교육사업을 힘껏 도와줄것이다. 교육원조비와 장학금도 보내주고 교과서도 보내주려고 한다.
그때는 우리 공화국이 전후복구건설로 한푼의 자금도 귀하던 때였다. 파괴된 공장과 농촌들을 복구해야 했고 학생들에게 해빛밝은 교실을 안겨주어야 했으며 아이들의 발에서 아버지들의 지하족도 벗겨주어야 하였다. 인민들의 생활은 의연히 어려웠고 아이들의 교육환경과 조건도 불비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살림이 어렵다 해도 이역에서 고생하는 동포자녀들을 위해 꼭 돈을 보내주어야 한다는것이 어버이수령님의 뜻이였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없는 예산항목인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태여나게 되였다.
주체46(1957)년, 그해는 제1차 5개년계획수행이 시작되는 첫해였다. 달성해야 할 방대한 목표에 비해볼 때 자금, 자재, 로력이 엄청나게 모자랐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강선을 찾으시여 강재 1만t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펼수 있다고 하신 그 사실이 바로 그해에 있은 일이였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해 거액의 돈을 뚝 떼서 보내주실 결심을 하시고 주체46(1957)년 재일동포자녀들에게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시였다.
후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력사의 나날에 대해 이런 감회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재일동포자녀들에게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낼 때 우리 나라의 경제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렇지만 수령님께서는 조국인민들이 허리띠를 좀더 졸라매고 공장을 한두개 더 짓지 못하더라도 재일동포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자금을 보내주자고 하시면서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사랑담아, 정을 담아 보내주신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였다. 생명수였다. 거치른 이역땅에서 민족의 혈통, 애국의 넋이 꿋꿋이 이어지게 하는 사랑의 젖줄기, 귀중한 자양분이였다. (계속)
- 민족교육의 대화원에서 자기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는 재일동포자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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