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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천리 종군의 나날을 더듬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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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1,844회 작성일 23-07-27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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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천리 종군의 나날을 더듬어 (1)

 

- 종군작가 리계심 -


내 나이 이제는 92살입니다.

전승의 축포가 터져오른 때로부터 어언 70년, 하지만 나의 마음은 지금도 불비가 쏟아지던 화선천리를 종횡무진하던 20살 단발머리 처녀주필의 그 시절에로만 달려갑니다.

가보처럼 간직해온 누렇게 색바래고 보풀이 인 전선신문들과 창작수첩들, 신문들에서 오려둔 나의 시작품들을 쓸어볼 때마다 총포탄이 작렬하고 천연바위마저 불타버린 고지들로 부상병들을 찾아 콩튀듯 뛰여다니던 사단군의소 준의시절이 어제런듯 떠오르고 불덩이같은 시구절로 전우들의 심장에 불을 달던 군단신문주필시절이 주마등처럼 흐릅니다.

그러면 한생토록 터치고터쳐온 전선처녀의 심장의 목소리를 숨이 진하는 마지막순간까지 새겨가는것이 《강철부대》신문주필, 조선인민군신문사 종군기자, 종군작가로서의 나의 소명임을 자각하며 무정한 세월과 함께 무디여진 붓대를 비껴들고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전선처녀의 심장속에 간직된것은


나라없던 그 세월에 나의 이름은 《무녀》였습니다.

8형제의 맏이로 태여났지만 아버지는 셋째인 내 동생은 맏아들이라고 이름대신 《들보》라 부르면서도 녀자는 출가외인이라 필요없다는데로부터 나를 《무녀》로 불러왔습니다.

그 《무녀》가 해방이 되자 《계심》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새 조선의 첫 대학,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종합대학의 학생이 되였습니다.

그 《무녀》를 전우들은 《전선처녀》로 불러주었습니다.

《전선처녀》, 얼마나 뜻깊고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어떤 전우는 《전선처녀》를 생략해서 《선녀》라고도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낳았다고 쓰디쓴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는 돌아앉아 독한 담배연기속에 긴 한숨만 짓게 한 오두막속의 그 《무녀》가, 위대한 사랑의 태양 그 은혜로운 해발아래 오이꽃 노랗던 얼굴에 함박꽃웃음 활짝 피운 그 계심이가, 원쑤들이 줄폭탄 퍼붓던 날 남먼저 전선을 탄원한 대학생처녀로부터 화선용사들의 사랑을 받는 《선녀》, 《전선처녀》로 되였던것입니다.

《전선처녀》, 그 이름은 사랑이였습니다.

해방전 피눈물로 열두자락치마폭을 다 썩이던 수난많던 녀성으로부터 군녀맹부위원장, 군의 첫 녀성대의원으로 자라난 나의 어머니모습이 그리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설음과 모멸이 뒤따라 생활이 눈물이고 세월이 눈물인줄로만 알던 천덕꾸러기소녀로부터 해방후 실시된 민주개혁을 실시하기 위한 대중계몽사업으로 낮과 밤을 몰랐던 사리원녀자고급중학교 민청부위원장시절의 자랑스러운 나의 모습이 《전선처녀》 그 이름속에 다 비껴있었습니다.

《전선처녀》, 그 이름속에 해방전에 결핵에 걸려 다 죽게 되였다고 밀어던졌던 몽당치마소녀애가 고향마을의 첫 대학생이 되였다고 온 동네가 떨쳐나 바래주던 동구밖 아름드리느티나무도 있고 장군님 안겨주신 대학생복 입고 행복에 넘쳐 오가던 룡남산기슭의 교정과 산책길들이 다 있었습니다.

해방후 꿈만 같이 흘러온 행복한 날들이, 그속에서 마음껏 웃고떠들며 지지리 못살던 그 세월을 열배, 백배로 벌충하고도 남았던 5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아직 인생의 초엽이라 할수 있는 19살 꽃나이에 살점이 튀고 창자가 쏟아져나오고 피가 강물을 이루는 전선으로 제일먼저 탄원해 달려나올수 있었겠습니까.

전우들은 처녀병사들을 끔찍이도 사랑해주었습니다.

《전선처녀》, 그들은 곧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였고 누이와 동생의 모습, 사랑하는 자식들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우들을 위해 피와 살을 바치고 지어 생명까지도 바치는 우리 전선처녀들을 화선병사들 누구나 사랑하였습니다. 인간의 진가를 판가름하는 가장 준엄한 전쟁시기에 군복을 입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사랑했고 총폭탄이 우박쳐 쏟아지는 고지에 달려가는것은 버들방천 시내가에 빨래하러가는것쯤으로 여기는 그 배짱에 반해 사랑해주었습니다.

《전선처녀》, 그 이름은 증오의 대명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제 몸무게만한 배낭을 연약한 어깨에 메고 물집투성이의 발바닥에 딱총 뜨며 남몰래 눈물흘리던 애숭이간호원으로부터 곁에서 폭탄이 터져도 눈섭 한번 까딱이지 않고 수술칼 잡던 파릿한 화선준의로 자라난 나날에 나의 가슴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터져나갈듯 팽배해졌습니다.

미제가 지른 전쟁의 불길만이 아니라면 귀여운 자식들을 거느린 한가정의 아버지로,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냉이로, 처녀들의 눈길을 모으던 쾌남아로 행복만을 누려갔을 생때같은 전우들이 원쑤들의 폭탄에 사지가 잘리우고 적들이 쏘아댄 흉탄에 피투성이가 된채로 담가에 누워 수술장으로 들어올 때면 격분에 치가 떨려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놈들이 진종일 퍼부어대는 자욱한 포연탄우속에서 쓰러진것이 아니라 증오의 감정을 호흡하고 복수의 감정을 뿜어내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강렬한 심정으로 몸부림쳤습니다.

지금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모습으로 간직된 한 처녀병사, 아니 아직은 처녀라고 말할수 없을 15살 소녀의 모습이 가슴을 사정없이 찢어놓습니다.

1차남진의 길에 만났던 남강원도 양양의 고아소녀, 원쑤들의 손에 부모들을 다 잃었다고, 그래서 김일성장군님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겠다며 한사코 따라나섰던 15살의 소녀 윤금순, 눈썰미있고 어리광도 많아 온 사단의 사랑을 받던 금순이가 후송하던 환자를 몸으로 덮고 쓰러졌을 때 아, 갈기갈기 찢어지는듯한 통분한 심정을 어찌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내가 추도사를 쓰게 되였는데 나는 추도사대신 눈물로 시를 썼고 그 시를 전우들앞에서 뿜어냈습니다.


부르면 어디라없이 달려오던 금순아

사랑스러운 나의 전우야

내가 흐느끼며 웨친 자작시에 나의 단발머리전우들은 주먹을 떨며 백배, 천배의 복수를 다짐하며 불새마냥 화선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전선에 나가 처음으로 시를 썼던 때라고 생각됩니다.

군의소의 병실들에서, 포연이 날리는 전호가에서, 후송임무의 긴장한 나날에도 나는 시를 쓰고 또 썼고 전우들앞에서 읊고 또 읊었습니다.

그것만이 무지렁이소녀 《무녀》를 공화국의 첫 처녀대학생으로 키워준 내 나라에, 준엄한 전쟁의 한쪽수레바퀴를 떠멘 《전선처녀》로 키워준 내 조국에 드리는 감사의 인사였고 보답의 실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과 증오가 응축되여있고 꽃같은 생을 통채로 다 바칠 각오로 충만되여있는 그 부름 - 《전선처녀》!

양양처녀 금순이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사색은 가지를 쳐 경상북도 안동의 2 000명 소년들에게로 달려갑니다.

조국해방전쟁의 가장 준엄하였던 일시적후퇴시기 100여명의 부상병들을 인솔하고 장군님품을 찾아 사선천리를 헤쳐넘어 북행길을 다그치던 나는 뜻밖에도 태백산기슭에서 최고사령부의 전략적구상을 받들고 싸우던 제2전선부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게 되였습니다.

서로 얼싸안은 전우들과 상봉의 기쁨을 나누는 흥분의 열파속에 가까스레 벗어난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제일먼저 군단정치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장군님소식을, 최고사령부의 목소리부터 듣고싶었기때문이였습니다.

그때 전선너머에서 수많은 전사들이 목숨걸고 날라온 출판물들을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훑어나가던 나의 눈길은 《로동신문》 1950년 11월 17일부 1면에 실린 기사에 이르어 그만 못박히듯 멈추어섰습니다.

김일성장군의 품을 찾아》라는 기본표제밑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2천명의 소년들이 인민군대오를 따라서 북반부에 들어왔다》의 부제를 달고 서술된 당보기사는 글자 하나하나가 다 나의 심장을 쾅쾅 두드리는 북채였고 온몸의 피를 끓이는 나팔소리였습니다.

그때 나의 창작수첩에 씌여진 몇대목을 읽어봅니다.

《최근 경상북도 안동에서 2천명을 헤아리는 소년들이 락동강계선에서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부대를 따라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왔다. 그들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씩씩하게 부르며 험한 산발을 타고 하루에도 수많은 령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간고한 행군을 계속하면서 마음속으로 언제나 흠모하여마지 않는 경애하는 수령이신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의 품으로 찾아왔다.

이것은 특기할만한 하나의 경이적인 사변이다.

이 소식에 접한 사람들속에서는 경탄의 소리가 높이 울리고있다. 20명이나 2백명도 아니고 무려 2천명을 헤아리는 이 소년들이 그처럼 엄혹한 전쟁의 환경속에서 이런 대담한 결심을 품게 된것은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겨야 참다운 새 삶이 있고 희망찬란한 미래가 있다는것을 깊이 인식하였기때문이다.

경애하는 김일성장군은 조선민족의 태양이시며 우리 인민의 해방의 은인이시다. …》

안동소년 2천명, 이것은 제1차 남진의 길에 인민군대를 따라나섰던 윤금순이또래의 애국청소년들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은 수자였습니다. 일시적후퇴의 나날에 우리의 북행길에 합세했던 수백명의 애국적인민들도 아직은 자기들이 태양의 품을 찾아온 수십만명의 해바라기대오에 속해있는줄 알지도 못하던 때에 발간된 신문기사였습니다.

태양의 품을 찾아온 그 수천만의 대오속에 나의 소중한 전우, 온 사단이 사랑했던 《전선처녀》 윤금순이도 있었을것이였습니다.

금순이는 운명의 그 순간 나의 품속에서 이렇게 마지막소원을 외웠습니다.

《장군님…곁에…꼭…가고…싶었어요…》

그렇습니다.

위대한 년대에 산 전선처녀들, 사랑과 증오로 피끓는 그 심장속에는 언제나 태양의 모습이 소중히 자리잡고있었습니다.



장군님품에 안기고싶고 그 품속에 천년만년 길이 행복을 누리며 꽃으로만 피고싶은 그 소원을 품고 불비속을 뚫고헤쳤고 아름다운 청춘도 서슴없이 바쳤던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전선처녀》, 그 이름을 부를 때면 화선녀병사들의 심장속에 간직된 그 소원을 바로 내가 다 누리고있구나, 공화국기를 덮어주며 바래워준 우리 전우들의 몫으로 그 인생을 백곱천곱으로 살고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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