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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첫 국제축구련맹 녀자심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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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나이
댓글 0건 조회 3,106회 작성일 22-05-24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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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첫 국제축구련맹 녀자심판원

 

우리 인민들이 기억하는 체육인들중에는 평양국제축구학교 교원인 공훈체육인 리홍실도 있다. 그에게는 조선녀자축구의 첫 세대라는 긍지와 함께 공화국의 첫 녀자축구국제심판원이라는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그는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구역 대서리(당시)의 어촌마을에서 태여났다.

어린시절 체육에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있던 그가 처음 녀자축구조에 들어가던 당시는 공화국에서 녀자축구를 조직하는 선풍이 일고있을 때였다.

1985년말, 모든 체육단들에 녀자축구조를 내올데 대한 조치가 취해진데 따라 리홍실은 함경북도체육단 녀자축구팀에 들어가 팀의 주장으로, 중앙공격수로 되여 자기의 축구기술수준을 부단히 높여나갔다.

그는 훈련의 나날 축구로 조국의 명예를 빛내이리라는 애국의 마음을 안고 뛰고 또 뛰였다.

1988년 6월 동해안지구 녀자축구팀들의 축구경기에서 함경북도체육단 녀자축구팀은 단연 1위를 쟁취하였으며 10월에 평양에서 진행되는 전국인민체육대회 녀자축구경기참가자격을 받게 되였다.

그후 그는 국가녀자축구종합팀에 선발되게 되였다.

주체78(1989)년 6월 2일 리홍실은 우리 나라 녀자축구선수들이 진행하는 경기를 세번째로 친히 보아주시기 위하여 새로 건설된 양각도축구경기장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경기를 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녀자축구선수들의 경기를 마지막까지 다 보아주시고 선수들의 기술수준이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 축구선수들이 국제경기경험이 없는것만큼 앞으로 대담하게 아시아녀자축구선수권대회를 비롯한 여러 국제경기들에 참가시켜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날밤 그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들수 없었다.

(나라의 북변 자그마한 어촌마을의 평범한 소녀였던 내가 이런 영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다니. 내 기어이 축구를 잘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만을 드리는 충직한 전사가 되리라.)

이날에 다진 맹세는 그대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빠른 속도와 재치있는 빼몰기, 정확한 문전결속은 그의 특기였다.

리홍실은 벌가리아에서 진행된 국제녀자축구경기대회에서 조선팀이 넣은 총득점수의 절반이 넘는 7개의 꼴을 넣은적도 있었다.

청춘시절의 꿈을 푸른 잔디우에서 꽃피워가는 나날에 그는 축구와 함께 한생을 빛내일 결심을 품게 되였다.

하여 선수생활을 마친 후 조선체육대학을 나오고 축구심판원이 되였다.

주체86(1997)년 공화국의 첫 녀자축구심판원에 이어 첫 국제축구련맹 녀자심판원이 된 리홍실은 10여년동안 국제녀자축구경기대회들에서 훌륭한 심판활동으로 전문가들과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 기간 선수후비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심판사업을 끝마친 다음해인 주체102(2013)년부터는 평양국제축구학교에서 전망성있는 선수후비들을 직접 키워오고있다.

축구공과 인연을 맺고 축구발전을 위한 길에서 생의 보람을 찾는 리홍실녀성은 이렇게 말하군 한다.

축구로 이어진 자신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본사기자 권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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