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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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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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후끈한 운현궁의 안방에서 민부대부인이 자영이네를 맞아주었다. 화려한 깁치마저고리에 털마고자를 덧입고 옆구리에 각종 노리개를 늘어뜨린 부대부인은 환갑이 불원한 늙은이답지 않게 아직도 미모의 단정한 녀인이였다.
그는 이미 승호에게서 자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한 모양 별로 묻는 말도 없이 그저 그의 이모저모를 찬찬히 뜯어보기만 하였다.
부대부인의 눈길이 자기 몸의 여기저기를 훑을 때마다 자영은 송구스럽고 거북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했다.
더우기 변변한 나들이옷조차 없어 늘 입던 노랑저고리에 검정치마차림 그대로 온것이 무엇보다 분하고 창피스러웠다.
옹색스러워하는 자영이의 마음을 풀어줄 양으로 부대부인이 너그럽게 일렀다.
《편히 앉거라, 일가집에 왔는데…》
이때 문밖에서 《으험.》하는 마른기침소리와 함께 버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께서 드신다.》
나직한 소리로 이렇게 이른 부대부인이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선 민승호가 자영이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손세를 했다.
장지문이 드르릉 열리더니 키는 비록 크지 않으나 틀지고 위엄있게 생긴 대원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문턱을 넘어설념을 않고 한동안 길게 째진 사무러운 눈초리로 안방의 사람들을 일별하였다.
민승호가 얼른 방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이마를 조아렸다.
《그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응,자넨가?》
대원군은 그제야 자기의 처남인 민승호에게 아는체를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깔아주는 보료우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은 대원군은 자영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자영이에 대해 몇마디 수군거렸다. 그사이 승호가 자영이에게 어서 대원군한테 인사를 올리라고 눈짓, 턱짓으로 독촉했다.
촌닭 관청에 온듯이 얼쳐있던 자영이도 그제야 정신이 들어 몸가짐을 바로하고 얌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마에 두손을 붙인채 대원군앞에 정중하고도 경건하게 절을 하였다.
점도록 자영이를 바라보기만 하던 대원군이 드디여 위엄있게 물었다.
《몇살이라 했더라?》
부대부인이 웃는 낯으로 대척했다.
《열여섯이라니 맞춤하지요. 그런데 벌써 부녀가례도 다 익히고 못하는 일이 없답니다.》
대원군이 다시 물었다.
《그래, 글도 더러 읽는가?》
《4서3경을 뗀지 이미 오래고 요즘은…》
민승호가 자랑스럽게 주어섬기는 맡을 대원군이 무뚝뚝하게 잘라버렸다.
《자네보고 묻는 소리가 아닐세.》
승호가 자영이에게 어서 대답해올리라고 눈짓했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자영이가 이마너머로 할깃 대원군을 쳐다보고나서 또랑또랑한 소리로 대답했다.
《방금까지 집에서 주자의 〈론어집주〉를 읽고있었소옵니다.》
《음.》
또다시 동이 뜬 침묵이 흘렀다. 바늘방석에 앉은듯한 자영이는 물론이거니와 민승호나 지어 부대부인까지 갑갑하고 초조하게 대원군을 흘끔흘끔 건너다보았다.
뚝한 표정인 대원군은 가타부타 말없이 웃몸만 가볍게 흔들고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그가 하는 버릇이다.
항간의 려염집들에서도 며느리를 고르는것은 중대사로 여기거늘 자기의 며느리는 국모로 불리울 왕비이다. 그러니 어찌 신중하고 신중하고 또 신중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더우기 최근 순조, 현종, 철종 3대에 이르는 60여년간 왕의 외척인 안동김가들이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고 온갖 전횡을 다 부렸다. 그통에 왕권은 여지없이 약화되고 왕족들은 거의나 자취를 감추게 되였으며 나라의 병페는 이루 말할수없이 짙어갔다.
오죽했으면 유생인 황현이가 《외척은 망국의 화근》이라고 통탄했겠는가.
대원군은 궁실의 웃어른인 조대왕대비와 짜고 12살난 아들 명복이를 철종의 후계로 왕위에 앉힌 후 국태공의 명목으로 섭정하면서 무엇보다먼저 시작한것이 외척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이였다.
그리고 다시는 외척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왕비간택에 류달리 신경을 모았다.
안해인 부대부인이 자기의 먼 친척벌이 되는 자영이를 왕비감으로 소개했을 때 대원군이 귀가 솔깃해진것도 그 애가 부모는 물론 친오라버니나 삼촌조차 없는 혈혈단신의 고아라는 사실이였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왕비감으로서의 첫째가는 조건이였던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자영이를 친히 선을 보려고 하였다.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고 행동거지 또한 량반집규수답게 얌전하다. 게다가 글까지 읽는다니 장차 국모로서 손색이 없을것이다. 더우기 민씨집안은 제3대왕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와 제19대임금 숙종의 계비(임금의 후처)였던 인현왕후를 낸 명문가이기도 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내린 대원군은 보료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여 쳐다보는 민승호와 자영이에게 짤막하게 일렀다.
《밤도 깊었으니 집에 가보거라.》
이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척되여 자영이도 미처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음력으로 3월 20일에 창덕궁의 인정전에서 왕비책봉식이 엄숙하게 거행되고 뒤이어 별궁에서 3일간의 영친례가 진행되였다. 이렇게 가난한 천애고아이던 민자영이는 며칠새에 국모인 존귀한 명성황후로 둔갑하였다.
하지만 구중궁궐속에 들어앉은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행복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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