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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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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667회 작성일 23-08-1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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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제 1 편

8

 

그곳은 서울 제4보병사단 전방지휘소였다. 류현수가 상급예심원을 업은채로 은페부앞에 드리운 병사용 개인천막을 들치고 들어서자 그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무전수와 전화수, 통신참모라고 짐작되는 위급군관이 토굴 한쪽에 있었고 포대경앞에는 새파랗게 젊은 장령이 서있었다. 그는 포대경을 마주하고서 누군가와 전화로 말하고있었다. 감시구로 검은연기가 쓸어들 때마다 가볍게 흥흥 코김을 불군 했다.

《뭐라구? 무엇이 가능하단 말이요?》 그는 별로 어성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강경하게 말했다. 《지금 적들은 동무네 익측을 돌파하려고 노린단말이요. 그곳 린접점을 특히 잘 살피오.… 그러게 82mm 한개중대를 증강해주지 않았소. 그걸 잘 써먹으란 말이요… 뭐 땅크?… 땅크는 내버려두고 뒤따르는 보병부터 먼저 족치시오. 동무! 동문 내게 포병전술강의까지 시킬셈이요?… 좋소, 기다리겠소. 결과를 즉시 보고해주오!》

그가 바로 사단장 박정덕이다. 련합부대장들가운데서 제일 나이 어린, 이제 31살에 난 박정덕은 바로 10일전에 장군님의 신임에 의해 사단장으로 임명되였었다. 전사참모부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5사 사단장 김창덕이 자기네 련대장이였던 그를 내놓으면서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박정덕은 전화를 끝내자 곧 현수에게로 몸을 돌렸다.

《동문 누구요?》

현수는 급기야 군모채양아래까지 손을 올렸으나 그대로 굳어지고말았다. 보고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는 견장도 없는 군복차림이였다. 때마침 등뒤에서 상급예심원이 입을 열었다.

《장령동지! 앉아서 보고하는걸 용서하십시오… 전 야전군사재판소 상급예심원 김병국입니다. 전선사령관동지에게 직접 보고드릴 문제가 있는데… 제 상처가 위급해서 때를 놓칠가봐… 곧장 여기로 왔습니다.》

사단장은 잠간 생각하였다.

《좋소, 전선사령부와 련계를 취해주겠소.》

박정덕사단장은 즉시 전화수에게 임무를 주었다. 잠시후 전화가 련결되였다. 그러나 전선사령관은 나오지 않았다. 박정덕은 송수화기를 내리고 상급예심원에게 말했다.

《마침 여기로 떠났다오. 곧 도착할거요.》

이리하여 현수는 자기가 이제 전선사령관을 여기서 보게 되리라는것을 알았다. 보통 전사들은 자기네 사단장도 한번 보기 어려우나 보위성직속 도하대대라는 특수한 조건으로 하여 현수는 많은 장령들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전선사령관은 한번도 본 일이 없다.

사단장 박정덕이 통신참모에게 위생병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때 밖에서 몰방으로 터진 포소리와 함께 째지는듯 한 구령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를 질책하는 엄한 소리가 들리더니 병사용개인천막을 들치고 키큰 장령이 들어섰다. 무전수와 전화수, 통신참모 등이 일시에 일어나 허리를 꼿꼿이 폈다. 박정덕이 청높은 소리로 규정의 보고를 했다. 은페부에 들어선 사람은 전선사령관 김책이였다.

《여기선 든든히 자리를 잡았구만!》

김책이 한 말이였다. 롱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이였으나 김책은 날카로운 눈초리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로 그리고 침착한 동작으로 자기의 엄엄한 엄격성과 본성적인 지혜, 강인성을 드러내보이고있었다.

《사단장!》 그가 또 말했다. 《왜 여길 떠나기 싫은가?… 영영 눌러앉을 잡도리요? 동무도 최현동무를 본따는게 아니요?》

《보고하겠습니다. 전선사령관동지!》

박정덕이 한발 앞으로 나섰으나 김책은 가볍게 팔을 내저었다.

《이보, 사단장! 다시 말하지만 장군님께서는 우리의 전략적후퇴는 반드시 기동방어의 형식으로 진행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소. 그러므로 우리는 후퇴하는 지대의 모든 다리와 철길, 도로 등을 파괴하고 적들로 하여금 기동과 군수물자보급에서 막대한 지장을 받게 하는 한편 도처에서 반타격을 진행하여 적의 전투력을 극도로 약화시켜야 하오.》

《알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나타난 리유도 알만 하겠소?》

《알만합니다. 적의 공격을 저지시키는 한편 련합부대주력을 곧 철수하겠습니다!》

《교호식으로 철수하시오. 그러되 최현동무네 2사와의 린접점을 강화해야겠소.》

《알았습니다. 전선사령관동지!》

김책은 포대경에 눈을 가져갔다. 통나무를 가로지른 엄페부 천정에서 흙가루들이 떨어져내렸다. 김책은 성가신 파리를 쫓듯이 그것을 털어버리면서 포대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있었다. 그때 박정덕이 입을 꽉 악물고있는 상급예심원을 돌아보았다. 비로소 생각이 난듯 했다. 그는 《전선사령관동지!》하고는 상급예심원의 일을 천천히 몇마디로 요약하여 보고했다.

김책은 머리를 돌리고 처음엔 류현수를, 다음엔 상급예심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요, 어서 말하오!》

그러자 상급예심원은 그 찌르는듯 한 눈빛을 현수에게로 돌렸다. 현수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렸다. 사단장을 향해 나가있겠다고 조용히 말하고는 출입구로 걸어갔다. 개인천막을 쳐놓은 그 출입구까지의 몇발자국을 겨우 옮겨놓았다. 속이 메슥메슥하고 두다리가 휘청거렸다. 밖에 나오자 교통호벽에 머리를 기대였다. 가까운 곳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멀리 앙상하고 성깃성깃한 참대숲쪽에서 적땅크들이 굴러나오다가 반땅크포화력을 맞고 불타버렸다. 박격포들은 뒤따르는 적보병들을 향해 부동조애사격으로 급속히 포화를 들씌우고있었다.

그 시각 지휘감시소에서는 상급예심원이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류현수와 결부된 일을 보고하고있었다. 무정장령에게서 받은 명령과 자기가 료해한 내용을 말하고 이렇게 계속하였다.

《전선사령관동지! 저는 상급예심원으로서 그를 체포하여 총살할데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후퇴가 시작된 준엄한 때인만큼 단호하게 군기를 세워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자기의 의무가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혁명동지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주는것이 바로 첫째가는 의무이라고 가르쳐주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전선사령관동지에게 직접 청원합니다. 제가 알아본데 의하면 그의 중대 전사들은 그를 존경합니다. 부상병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가 얼마나 가슴을 태웠는지… 다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철직시켜 전사로서… 전투에서, 피로써 과오를 씻게 하자는것을… 제의합니다. 그를 총살하는것은 최고사령관동지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상급예심원은 흐려지는 눈에 애써 빛을 모으며 간절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김책은 중좌직급의 이 상급예심원이 고맙게 여겨졌다. 그는 한 젊은 지휘관을 치욕과 불명예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치명상을 입은 자기 몸도 돌보지 않았던것이다. 하긴 그렇게 하는것이 그의 임무였다. 후퇴하는 엄혹한 정황이 그에게 자기임무의 중요성을 더더욱 자각케 한듯싶었다.

잠시후 위생병이 건장한 병사들을 데리고와 상급예심원을 후송해갔다. 교통호에 서있던 류현수는 그가 담가우에 실려가는것을 보았다. 상급예심원은 아픔에 질린 눈빛으로 묵묵히 현수를 보고있었다. 그는 자기의 임무를 수행한것이다. 잠시후 그는 교통호를 지나 멀어져갔다.

어데선가 발연탄의 검은 연기가 흘러왔다. 가까운 포진지에서 항공습격의 피해를 막기 위해 쏘아댄것 같았다. 이윽고 전선사령관 김책이 지휘감시소에서 나왔다. 피복창고의 곰팡내가 그대로 풍길것 같은 새 군복차림의 젊은 사단장 박정덕과 통신참모도 따라나왔다. 그들은 반대쪽 교통호를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벌써 류현수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있는것 같았다.

현수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뻐근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통신참모가 그의 어깨를 흔들어서야 피끗 정신을 차렸다.

《중대장동무, 전선사령관동지가 부르시오!》

《?!…》

현수는 그가 잡아끄는대로 따라갔다. 교통호를 따라 얼마쯤 가니 자동총을 멘 병사들이 교통호 한쪽에 서있고 전선사령관은 사단장과 같이 따로 서있었다.

현수가 규정의 보고를 하는동안 김책은 주의깊게 그를 훑어보았다. 장령모의 채양아래 날카로운 두눈이 그의 마음속 생각까지 파고드는듯 했다.

《언제 입대했소?》

《47년 봄입니다.》

《어느 훈련소?》

《제1소 직속 3대대였습니다.》

《어떤 전투들에 참가했소?》

《전쟁 첫날부터 도하대대에서 전진보장대로 싸웠습니다. 북한강, 금강, 락동강…》

현수는 말끝을 떨었다. 별안간 학질에라도 걸린듯 마구 오한이 났다.

김책이 또 물었다.

《강건너에서 오지 못한 부상병들이 얼마였다구?》

《10여명이라고 했습니다. 간호장과 간호원들, 담가병들 7~8명이 또 강을 건너갔습니다.》

김책은 알릴듯말듯 거무스레한 볼편의 근육을 떨었다.

《그들한테선 아직 소식이 없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동무야… 그들이 간곳을 알면서 왜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소? 다리는 명령된 시간에 폭파하고 둬개 분대쯤 떼여보낼수 있지 않았는가?!》

《전선사령관동지! 전 미처… 그 생각은…》

김책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눈언저리가 시퍼래지고 꽉 다물린 입술에 경련이 일고있었다.

《이녀석!》

마침내 그는 이 한마디를 거칠게 내뿜었다. 사납게 변모된 그의 얼굴전체가 고통과 혐오에 못이겨 이즈러지고있었다. 무섭게 쏘아보다가 박정덕에게 덕암산의 이전 진지에 즉시 정찰병들을 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교통호를 따라 걸어갔다. 자동총수들이 뒤따랐다. 박정덕역시 한동안 그뒤를 따라갔다. 다시 현수만이 홀로 남았다. 반나마 무너진 교통호로 누르끄레한 연기와 재티들이 바람에 날려오고있었다.…

날이 어두울무렵 현수는 박정덕사단장의 호출을 받았다. 낮에 상급예심원을 업고 들어섰던 그 지휘소였다. 그때와 다름없이 눈을 쓰리게 하는 화약가스가 차있는 그속에서 박정덕은 지도를 마주하고있었다. 현수가 규정의 보고를 하자 《음- 왔소?》하고 말했다. 지도를 접고 일어서더니 주의깊은 눈초리로 현수를 뜯어보았다.

《동문 자기가 얼마나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는지 아는가?》

조용한 물음이였다. 그러나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강경한 어조였다.

《알고있습니다. 사단장동지!》

《아직 다는 모를거요.》 여전히 낮고 빈틈없는 어조로 박정덕은 말하였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해. 동문 자기가 받은 명령을 제때에 수행하지 못했을뿐아니라 군관이라면 응당 했어야 할 의무도 수행하지 못했소. 그때문에 동문… 당장 처리될수도 있었소. 그러나… 동무문제는 최고사령부에 보고될거요.》

《예?!》

현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사단장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경련이 줄달음쳤다. 그 순간 박정덕이 또 말했다.

《전선사령관동진 우선 동무를 전투장에 내보내여 피로써 과오를 씻게 하라고 했소.》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렬참모한테 가보시오. 기다리고있을거요!》

사위는 아직도 짙은 포연에 덮여있었다. 병사용개인천막을 들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가까운 비탈면에서 폭발의 불기둥이 잇달아 솟구쳐오르고있었다. 그러나 현수의 귀에는 아무런 폭음도 총성도 들리지 않았다. 물결처럼 밀려들고 또 밀려가는 불의 파도가 보일뿐이였다.

불타는 강아, 락동강아!… 하고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전쟁이 일어난 첫날부터 내 얼마나 먼길을 걸어왔던가. 북한강에서 금강에서 또 이 기슭에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헤쳐왔던가. 그런데 내 오늘 여기서 수치스러운 자욱을 남길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아 아, 이제라도 결사전에 나가 죽음으로 이 불명예를 씻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렬참모에게 갔을 때 현수는 그곳에서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련락병이였던 박원철을 보았다. 그는 어줍게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있게 됐습니다. 중대장동무… 상급예심원동무의 부탁으로 제가 오게 됐다더군요. 원, 무슨놈의 판인지… 아까는 떽떽거리며 가더니… 중대에 전화가 왔다나요.》

《…》

현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들은 대렬참모가 지시하는데 따라 방어계선의 한 보병중대로 갔다. 둘다 벽돌견장을 단 전사들이였다.

두사람이 도착하자 어깨가 널직하고 아주 대범한 인상을 주는 중대장이 무너진 교통호에 몸을 기댄채 전화기부터 끌어당겼다. 발전자돌리개를 세차게 돌리며 아직 우두커니 서있는 두사람에게 버럭 고함을 쳤다.

《허리를 낮춰!… 제길, 벌둥지가 되구싶소?》

그의 입귀엔 다 타들어간 담배꽁초가 물려있었다. 묘하게도 입술에 풀로 붙여놓은것처럼 고함을 지를 때에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갈매봉〉을 주오.》

이렇게 소리치고는 송수화기를 목에 건채 웃주머니에서 누긋누긋하고 형편없이 쭈그러든 가치담배를 꺼내여 권했다. 현수가 머리를 흔들자 입귀에 물려있던 꽁초를 뱉어버리고 그것을 새로 물었다.

《〈갈매봉〉입니까?… 예? 뭐라구?… 아- 통신참모동무댔군. 몸성히 잘 계시오?… 뭐 나야 이미 면역이 된 몸 아니요. 피탄 면적은 남보다 커두 아직 성성하오. 하하!… 헌데 이보우- 사단장동진 안계시오?… 음- 다른게 아니구 사단장동지가 말한 그 사람이 방금 도착했소. 그렇게 전해주- 음, 알겠소.》

송수화기를 덜컥 놓고 전화줄까지 툭툭 당겨보고서야 현수를 쳐다보았다.

《그와는 잘 아는 사이요?》

《?…》

《사단장동지말이요.》

《아니, 그저 좀…》

중대장은 새로 문 담배에 불을 달았다.

《동무가 도착하는 즉시 알려달라구 하던데… 지금 자리를 뜨고 없구만. 그동안 소대에 가서 낯을 익히오. 인차 놈들이 또 달려들거요.》

《알았습니다.》

현수가 또 허리를 꼿꼿이 펴자 그는 팔소매를 쥐여당겼다.

《그따위 격식은 걷어치우오. 총알이 날아오는판에 무슨 허세요. 제길, 밥숟갈 놓고싶어 그러오?!》

그는 현수에게 2소대로 통한 물홈을 가리켜보였다.

《조심해서 가오. 공병!… 나두 곧 가겠소.》

현수는 박원철과 같이 허리를 잔뜩 낮추고 물도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열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납작 엎드렸다. 자지러진 기관총사격에 이어 륙공포의 장기판사격이 퍼부어졌다. 컁- 컁! 하는 아츠러운 폭음이 계속되였다. 머리우에서 앙칼진 쇠소리와 더불어 윙-윙 돌쪼각들이 파편처럼 날았다.

현수는 축축한 도랑채기에 까딱않고 엎드려있었다. 가위에 눌린것처럼 숨이 막히고 답답해나는것이 참을수 없었다. 그는 군복저고리의 목깃을 헤쳤다. (최고사령부,… 최고사령부에 보고된단말이지, 내 문제가… 정말 그렇게 될수 있을가, 이런 때에… 총살을 해야 마땅할 날 두구…) 이런 생각이 미쳐들자 가슴이 더 답답했다. 문득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를 잃은 후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한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이 일을 아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쓰리실가… 그는 저도모르게 입을 벌리고 헉헉 단숨을 들이그으며 풀대들을 쥐여뜯었다. 그때 박원철이 그의 귀전에 대고 소곤거렸다.

《너무 속쓰지 마십시오. 중학교 수학에서 배우는것처럼 분모가 커지면 상은 작아지는법 아닙니까!》

박원철이 그를 동정해서 하는 말이였다.

《일두 참 별나겐 됐지요?… 그 간호장동무만 아니였어두… 기다려달라 해놓군… 에익, 그런 일이 벌어질줄이야!…》

리숙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수는 날카로운 눈빛을 그에게 던졌다.

《잠자코 있지 못하겠소?!》

박원철은 입을 다물고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보자 현수는 자기가 역증을 낸것이 무안해졌다. 그는 손에 쥔 풀대를 자근자근 씹다가 뱉어버렸다. 웬일인지 리숙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그들을 도와줄 생각을 못했을가, 전선사령관동지가 말한것처럼 둬개분대쯤 보내여 도와줄수도 있지 않았는가?…

리숙, 돌아오지 못한 간호장, 그가 살아있다면 이 현수를 얼마나 원망할것인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구원해주지 못한 이 못난 놈을 얼마나 경멸할것인가?!…

꺾어진 풀대들에서 애달픈 냄새가 풍겨왔다. 깨풀, 신두리, 사라구… 특히 껍질이 벗겨진 어저구에서 씁쓸하고도 쏘는듯 한 냄새가 풍겼다. 지나간 먼 시절 토장의 그 저녁에 쑥을 태우던 냄새와 흡사하였다. 그날밤에도 현수는 나어린 녀학생 리숙에게서 쓰디쓴 경멸의 눈총을 받았었다. 집집의 문창호지에 고콜불들이 어룽거리기 시작하던 저녁이였다. 그때 17살난 현수는 숱한 처서군들, 이와실이군들에게 쌔워 다모토리집으로 가고있었다. 물동을 살린 값으로 왜놈십장이 주머니에서 꺼내준 한줌의 만보 쪽지는 거절했지만 그의 용감성과 정의감을 위하여 한잔 들자고 나이든축들이 잡아끌었을 때엔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것이다.

끔찍한 참변을 막은 대장부답게 한번 으시대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눈부시게 하얀 쎄라복을 입고 머리 한쪽에 아편꽃을 꽂고 나타난 녀학생 리숙이 멀리 영림서 앞뜰에서 지켜보는줄 알자 시뚝시뚝 걸음을 더 크게 옮겼다.

써레기담배연기가 7부짜리 남포등을 휘휘 감싸돌던 술집, 누구인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양푼을 두들기며 거쉰 소리를 뽑아댔다.

분내풍기는 주인집녀자가 처음 온 현수의 목덜미를 어루쓸며 《일없어 총각, 이제야 좀 기별이 가는군 그래.》하며 술이 찰찰 넘는 종지를 입에 가져다대군 했다. 비린내 풍기는 어물장수들, 개다리소반에 마주앉은 말군들이 떠들썩 고아대며 응원을 했다.

마침내 병술령감이 흐릿해진 눈자위를 굴리며 심한 딸꾹질끝에 주인집녀자가 든 종지를 밀쳐버렸다.

《인젠 고만둬, 고만두라니. 그러다 아까운 총각 배려놓을라-》

《령감은 왜 지랄이오?》 주인집녀자가 엎지른 술종지를 들고 대들었다. 《외상준 술은 다 어쩌구 이것까지 쏟드리면서 생트집이요. 생트집이?!》

《어랍쇼, 이 엠네 수-수작질하는거 좀 보지, 머-뭐 내가 새-생트집이야?》

언제 어떻게 그곳을 나왔는지 현수는 알지 못했다. 병술령감과 물몰이때 현수의 장한 모습을 지켜본 처서군 또 한사람, 이렇게 셋이 울퉁불퉁한 토장의 막돌길을 비틀걸음으로 더듬고있었다. 병술령감은 누구도 듣지 않는 푸념을 끊임없이 계속하였고 현수는 머리속을 한정없이 쑤셔대는 동통과 괴로운 욕지기때문에 머리를 쥐여뜯군 하였다.

별안간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싸늘한 달빛이 하얗고 파르스름한 쎄라복을 비쳐주고있었다.

《어머!-》

가느다란 부르짖음,

뒤엉킨 머리속에 일순 번개불이 번쩍인듯 했다. 영림서앞이였다. 목책너머 안뜰에 전기기술자의 부인과 딸을 싣고온 우편마차가 있었다. 현수는 병술령감의 부축에서 풀려나왔다. 비로소 그 아편꽃같은 녀학생이 저녁에 오라고 청하던 일을 생각해냈다.… 리숙은 아무말도 없이 휙 돌아서더니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대문을 닫는 찌쿠덩소리가 현수의 애젊은 가슴을 콱 그루박으며 무겁게 울려왔다.

다음날 아침 지끈지끈 쑤셔대는 머리를 잡아뜯으며 그가 물동으로 걸어가고있을 때 전기기술자를 부축한 부인과 그의 딸 리숙이 우편마차에 오르고있었다. 내몽고산 절다말이 발을 저겨디디며 투레질을 했다. 마부가 고삐끈을 풀었다.

현수는 그자리에 굳어진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가 떠날 때에도 워낭소리가 곁을 지날 때에도 그리고 2륜마차의 바퀴소리가 차츰 전나무숲사이로 난 길로 멀어갈 때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에 동이던 광목수건을 두손에 잡고 꽉 비틀어댔을뿐이였다.

마지막으로 리숙이 그를 한번 돌아본 일이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였다. 지나가는 길손을 바라보듯 무심결에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날 아침 현수가 맛보게 된 최후의 가장 무서운 멸시였었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오늘 부디 그 일을 상기한것은 무엇때문일가? 리숙의 생사를 알길 없는 은근한 불안때문일가, 아니면 박원철이 리숙을 빗대고 나무란때문인가?… 웬일인지 화가 났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나 하고있을 때가 아니다!… 속이 뒤틀리고 숨이 가빴다. 안개발같이 드리운 화약가스때문에 가슴은 쓰리다 못해 면도날로 어이는듯 했다.

《뛰자구!》

현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2소대가 전개한 구역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모두 이제 있게 될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소대장을 찾으니 꺾어진 군모채양아래 이마가 쏙 도드라져나온 애젊은 청년이 다가왔다.

《우리 소대에?》하고 그는 보고를 받자 챙챙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얗고 애리애리한 모습의 소년같았다. 《전투에 참가해본적이 있소? 아니면 알쭌히 신병들이요?》

현수는 잠자코 있었고 박원철이 눈가에 손을 올려붙이며 대답했다.

《우린 보충병들입니다. 소대장동무!》

《그건 아오! 내가 묻는건 신병인가말이요.》

《우린… 보충병들입니다!》

《그러니까… 신병들은 아니란말이지?》

《예.》

《전투엔 참가해봤소?》

《예.》

《아무리 봐야 동문… 책상물림이야. 옷은 그슬렸지만 화약내는 안나!》

이번엔 현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동문 무슨 차림새가 그 모양이요? 군관두 아니구… 전사두 아니구… 어데서 빌려입은건 아니요?》

《아닙니다. 소대장동무.》

《뭐가 아니란말이요?》

애젊은 소대장은 마치 이발이라도 쏘는듯 잔뜩 미간을 찌프렸다. 현수의 옷차림이 비위에 거슬려 참을수 없다는투였다.

《그 전투가방은 또 뭐요?》

《저… 이건…》

현수의 궁색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해 박원철이 끼여들었다.

《소대장동무, 사실 우린… 보위성직속…》

그 순간 현수가 머리를 홱 돌렸다. 그 날카로운 눈빛이 박원철을 굳어지게 했다. 소대장이 어리둥절하여 그들 둘을 번갈아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년처럼 귀엽게 씩- 웃으며 몸을 홱 돌렸다.

《3분대장동무, 여기 오시오!》

키가 작고 둥글둥글한 하사관이 달려왔다.

《3분대장동무, 구대원 한사람이 배치됐소. 바로 이 동무요!》 그는 현수의 잔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 이거 정말 인사가 늦어졌구만.》

《류현수입니다. 소대장동무.》

《리유정이요. 닷새전에 배치됐소. 도와들주시오.》

《…》

현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애된 소대장의 그 진정에 넘친 말에 불뭉치같은것이 목구멍으로 욱 치밀었다.

소대장과 분대장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가기요.》

분대장이 말했다.

얼마후 그는 분대장의 특별한 신임의 표시인 반땅크수류탄을 받았다. 이제부터 류현수는 보병중대의 한 보총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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