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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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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86회 작성일 23-11-0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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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1

(2)


조선식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정남문인 광화문에 다달은 다까하시부인 나쯔미는 명성황후의 청첩장을 내밀었다.

광화문의 수문장은 그를 말없이 통과시켰다.

나쯔미가 탄 조선식가마는 강녕전 뜰에서 멎었다. 4명의 조선교군들이 지정된 장소로 가마를 옮겨가는 사이 나쯔미는 명성황후의 부탁을 받고 대기하고있던 궁녀들에게 안내되여 전각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휘황하고 아악이 은은하게 울리는 전각안은 명절분위기로 흥겨웠다.

서양식으로 문에는 두터운 모직문발을 드리우고 바닥엔 페르샤주단을 깔았으며 고급안락의자들이 벽을 따라 주런이 놓인 응접실은 서양귀족저택의 홀을 련상시켰다. 서양식으로 꾸린 홀의 모든 비품이며 음료, 다과들도 고급서양제품들이였다. 탁자에 놓인 담배는 에짚트 아니면 마닐라산이였고 차대신 커피잔들이 과자접시와 함께 놓여있었다.

응접실에서 대기하고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녀인들이였고 남성은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인 선교의사 호레이스 뉴톤 알렌뿐이였다. 명성황후의 전속의사로서 명성황후의 신임이 큰 그는 아무때나 명성황후의 접견을 받을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이였다. 알락달락한 기모노를 입고 버선발에 게다를 신은 다까하시부인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한쪽안락의자에 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앉아 명성황후의 초대를 받은 외국녀인들을 은근히 살펴보았다. 명성황후의 전문의사인 미국인 호르똔녀사, 로씨야 웨벨공사 부인과 그의 언니인 손타크청국대표 원세개의 부인, 프랑스공사 꼴랭드 쁠랑시의 부인, 영국공사 오코너의 부인, 도이췰란드령사 랜스돌프의 부인, 미국공사 딘스모아의 부인 그리고 조선을 방문중인 영국왕실 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바드 비숍이 어딘가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명성황후의 초대를 받는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이며 그야말로 무상의 영광이라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키가 꺽두룩한 알렌이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는중이였다. 알렌은 이야기의 능수여서 늘 녀성들의 호감을 사고있었다.

《녀성들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것이 실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명성황후전하를 존경하는것은 그가 도덕관념, 찍어 말한다면 정조관념이 높다는것입니다. 로씨야에서 비범한 녀황제로 떠받들리운 예까쩨리나2세만 보아도 아주 호색적인 녀인이였지요. 그가 얼마나 남색을 즐겼는가 하는 일화가 있는데 유명한 뾰쫌낀장군을 유혹하려고 했을 때 뾰쫌낀은 그에게 〈페하, 소신은 페하의 16번째 수말이 되고싶지 않소이다.〉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결국은 뾰쫌낀도 예까쩨리나의 수말이 되고말았지만… 아니, 력사를 보면 고대에짚트의 클레오파트라나 중국의 무측천, 지금 〈빅토리아시대〉 구가하고있는 대영국제국의 빅토리아녀왕도, 청국의 서태후도 다 치정관계에서 추문을 남기고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관없는 녀왕인 명성황후는 전혀 그런 추문이 없는분입니다.》

모두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자 로씨야 웨벨공사 부인의 언니인 손타크가 야릇한 눈길로 알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알렌씨, 당신은 어떻게 되여 명성황후전하의 신임을 독차지하게 됐습니까?》

알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왕비전하의 접견을 처음으로 받은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일입니다. 그때 나는 미국북장로회에서 선교의사로 조선에 파견되였는데 서울에 오자 곧 미국공사관소속 의사가 되였습니다.》

아유, 그렇게 오래전에?…》

다까하시부인은 저도 몰래 놀란 소리를 했다. 그는 스기무라서기관이 조선에서 오래 근무했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알고보니 미국사람들도 자기네 일본 못지 않게 꽤 오래전부터 조선에 관심을 돌리고있지 않았는가.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속담 그른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렌이 씨물씨물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날 나는 조선왕비가 앓으니 궁전으로 왕진해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나는 왕비전하를 진찰하기 위해 궁성으로 갔지요. 그때 나는 선교사의 직분에 의사의 명분까지 가지고있었으니까요. 그날은 동양에 대해서, 조선에 대해서, 왕비전하에 대해서 잘 알게 된 극적인 모멘트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나쯔미는 물론 다른 외국녀인들도 호기심으로 눈빛들이 반짝였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감회롭다고 했던가. 당시를 회억하는 알렌자신도 새삼스러운 감흥을 느끼는 모양이였다.

…왕진가방을 든 알렌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조선왕비가 있다는 경복궁 교태전의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가 궁녀들이 읍을 하고 서있는 합문앞에 이르자 조상궁이 안에 대고 소리치는것이였다.

《중전마마, 미국의사 안련(알렌의 조선식이름)선생이 대령하였소옵니다.》

안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위엄기있는 녀인의 목소리가 올렸다.

《드시라 해라.》

합문이 열렸다. 그러자 이번엔 내시대신 늙수그레한 어의와 조상궁이 알렌을 안내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선 알렌은 의혹에 찬 눈길로 두리번거렸다. 방 복판에 병풍이 세워져있을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문득 병풍뒤에서 좀전에 들었던 그 녀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오시느라 수고했소.》

고개를 기웃거리는 알렌에게 어의가 《중전마마이시오》하고 알려주어서야 알렌은 비로소 조선왕비가 병풍뒤에 《숨어있다》 는것을 알게 되였다. 알렌은 어의가 시키는대로 병풍앞에 가서 조선식으로 무릎을 끓고 보료우에 앉았다.

그제야 알렌은 남녀사이의 내우가 심한 조선의 풍속이 리해가 되는듯싶어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어의에게 왕비의 진맥을 보아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병풍짬으로 왕비의 손맥과 련결된 명주실이 나오는것이 아닌가. 조선녀인들은 외간남자에게 손목잡히는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기는데 하물며 존귀한 왕비가 어찌 손목을 함부로 내놓을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 물론 이것은 그가 후에 안 사실이고 이때로써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어 꼭 손목을 만져보아야 한다고 강경히 요구해서야 손목부위만을 내놓고 온통 천으로 감은 명성황후의 손이 병풍짬으로 나오는것이였다. 또 혀를 보아야겠다고 하니 얼굴을 가리운 혀만을 내보이는것이였다. 어쨌든 이날 환자인 왕비의 얼굴도 보지 못한채 그가 내린 진단은 신경쇠약으로 인한 불면증이였다. 그는 수면제로서 아편분말을 처방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하여 그 이튿날 곤경을 겪게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알렌이 집에서 책을 보고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안련선생안련선생!》

알렌이 문을 열어주자 얼굴색이 흙빛이 된 내시가 성급히 뛰여들어왔다.

야단났습니다안련선생.》

《왜, 무슨 일입니까?》

《중전마마가! 중전마마가!…》

내시는 너무도 급하여 말도 제대로 번지지 못했다. 알렌이 덤비지 말고 말하라고 해서야 내시는 울상이 되여 중얼거리였다.

중전마마께서 5시에 선생이 준 약을 잡수셨는데 아직까지 깨여나지 못하십니다. 이를 어쩝니까?!…》

알렌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있었다. 손가락을 꼽아보던 알렌도 펄쩍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니! 19시간이나?!…》

기급하며 왕진가방을 꾸리는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 와서 내 운명이 끝장나는게 아닌가, 오, 하느님아버지시여!

내시가 발을 구르며 독촉했다.

안련선생! 빨리!》

예예.》

하며 겁에 질려 서둘던 알렌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내시에게 물었다.

《가만, 그런데 어느 5시입니까? 어제 저녁 5시입니까? 오늘 아침 5시입니까?》

내시는 별것을 다 묻는다는듯 시틋해서 대꾸했다.

중전마마께서야 새벽에야 잠드시지 저녁에야 잠드시나요?》

《예?! 그러니 오늘 새벽 5시?… 까뗌!》

알렌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의자에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알렌의 회상담을 듣는 녀인들은 모두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의 웃음이 멎자 알렌은 능청을 떨었다.

《이런 경우에 조선사람들은 십년 감수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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