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련재 《조선의 힘》 제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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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 회
제 2 편
10
최고사령부 련락군관을 만난 최현은 장군님의 명령대로 한개 부대만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나머지 부대, 구분대들은 적후활동구역에 남겼다. 마지막으로 최현은 서울 제4보병사단의 한 문화부중대장과 한 약속을 상기하였다. 한달전 문경고개에서 있은 일이였다. 그때 최현은 그들의 부대를 만나게 되면 보내주겠다고 했던것이다.
최현은 주영섭을 불러 대원들을 데리고 자기 부대로 돌아갈것을 허락했다.
《부대에 돌아가면 박정덕사단장한테 내 인사도 전하라구.》
《알았습니다. 사단장동지!》
주영섭은 기쁨에 넘쳐 대답하였다. 어쨌든 자기 부대, 자기 중대가 더 그립고 간절하였다. 최현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이봐, 문화부중대장, 포위란게 뭔지 알지?… 그런데 걸리면 아주 힘들지. 전멸되던가 항복하는게 일쑤야. 하지만 동무네 사단은 살아있어. 우리도 이렇게 살아있구. 내 전에 말했지. 자기 부대로 꼭 가게 된다구…》 별안간 최현은 두눈을 슴벅거리며 주영섭의 어깨를 꽉 그러쥐였다. 《가서 잘 싸우라. 우린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계속 행군해가는데… 아무튼 또 만나게 돼!》
《고맙습니다. 사단장동지!》
주영섭은 진정으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리하여 주영섭은 17명 대원들을 이끌고 자기 부대를 찾아갔다. 드디여 자기 중대로 가게 됐다고 그는 흥분을 이기지 못해하였다. 람루해진 군복을 손질하고 목달개를 갈아달고 로지봉의 옷주머니속에 있는 작은 손거울을 빌려 수염도 깨끗이 밀었다. 더는 손질할데가 없는데도 자꾸 쓸고 닦고 밀었다.
이틀후 그들은 부대와 만났다. 참모부에 갔다온 주영섭은 약간 서운해하는 기색이였다. 그와 늘 붙어있다싶이한 로지봉의 눈으로 보건대 자기의 실망감을 겨우 참아내는듯 했다.
그는 말했다.
《동무들, 우린 당분간 계속 함께 있게 됐소. 그리고 중요한 소식은… 래일밤 우리도 습격전투에 참가하게 된거요. 독립소대로 말이요. 소대장은 나요!》
습격대상은 신평에 있는 적대대지휘부였다. 주영섭자신이 대원 2명과 같이 정찰을 하고 돌아왔다. 문화부중대장더러 정찰을 하게 한것도 로지봉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주영섭은 그저 한마디로 《여긴 내가 잘 아는 고장이요.》 했을뿐이였다.
이윽고 기다리던 습격의 밤이 왔다. 날이 어두우면서 싸락눈이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엇비듬히 날려온 싸락눈이 따끔따끔 얼굴을 침질하듯 했다.
소대는 괴뢰군복으로 갈아입고 신평읍으로 대렬을 지어갔다. 적들은 매일같이 북으로 이동해가고 또 새로 옮겨왔으므로 빈틈이 많았다. 이 점을 리용하기로 했다. 주영섭은 걸어가면서 거듭 임무를 료해시켰다.
멀리 뒤쪽에서 전조등의 불빛이 날아오자 길섶의 앙상하게 베여낸 강냉이그루터기들이 피끗피끗 드러났다. 불빛은 잠시 사라졌다가 또 날아왔다. 굽인돌이를 돌아나선 모양이였다. 대렬은 길옆으로 비켜섰다.
로지봉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지금 뒤쫓아오는 그 전조등불빛이 괴뢰군복장을 한 그의 정체를 환히 발가낼것 같은 느낌이여서 자꾸만 돌멩이를 걷어찼다. 가운데 단추 하나만을 채운 상의 앞자락을 쥐여당기느라고 걸음이 떠지기도 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걷고있던 박영일이 잔등을 쿡 찔렀다.
《이거 왜 이래요. 술에 취했나?》
어느덧 자동차의 발동소리도 들려왔다. 머리우를 날던 전조등불빛이 길바닥을 휘저었다. 그때 주영섭이 구령처럼 웨쳤다.
《길을 막소. 다들 길복판으로!》
지봉은 다른 전사들을 따라 길가운데로 들어섰다.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주영섭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길을 막으면서 가오. 슬슬 애를 먹이면서… 무슨 말인지 알겠소? 어떤놈인지 보잔말이요. 케를 보다가 뺏아탈수도 있지.》
주영섭은 태연했다. 그 느릿한 어조도 변함이 없었다. 이번엔 로지봉을 소리쳐 불렀다.
《지봉동무, 경상도말 할줄 아오?》
《전라도 말은 좀…》
《좋소! 이제 놈들이 길을 내라구 고아대면 아무 소리나 한마디 하오!》
《예, 그러지유.》
《그럼 다른 동무들은 내 구령을 기다리오. 자 자- 거지반 다 온것 같소. 정신을 바싹 채리오!》
경적소리가 울려왔다. 벌써 자동차가 대렬꽁무니에 바싹 붙어서고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연신 경적소리를 울려대나 《괴뢰군대렬》은 흘끔흘끔 뒤돌아보면서도 그냥 걷는다.
《여, 여!》 뒤에서 소리친다. 《길을 비켜!… 느들 귀구멍이 메였어?》
뒤에서 길을 좀 틔워준 모양이다. 불쑥 앞으로 나서던 차가 또 속력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자동차는 대렬가운데 들어섰다. 괴뢰군장교가 문짝을 열어젖히고 고함을 질렀다.
《이 자슥들아, 느들 어느 부대야? 이 쌍것들 비키지 못하겠어?》
그때 박영일이 지봉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렇지, 무슨 말이건 하라고 했다. 경상도말, 아니 전라도말이든 뭐든!… 로지봉은 고개를 돌렸다. 전조등불빛이 눈을 때렸다. 홀연 모든것이 사라지고 자기를 겨눈 불빛밖엔 없는듯 했다. 악이 치밀었다. 그는 전조등불빛을 향해 소리쳤다.
《무슨 소릴 함닝껴. 우린 머 귀가 젬벽인가 하는강?… 소래기는 웨 지르능겨?!…》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 투닥투닥하는 소리와 혀를 깨문 비명소리가 울린것 같았다. 앞서가던 전사들이 우- 차에로 밀려갔다. 로지봉의 눈을 때리던 전조등불빛이 사라지며 눈앞이 새까매졌다.
《지봉동무, 빨리 와 타오!》
주영섭이 그를 부르고있다. 로지봉은 그때에야 자동차있는데로 걸어갔다. 벌써 적재함우에 올라앉은 전사들이 저마끔 손을 내밀었다.
《지봉동무, 이걸 잡소!》
《여게 오라구. 얼뜬!》
《뭐 귀가 젬벽이라구? 하하… 이 친구 이따금 택수가리가 떨어지게 웃긴다니까!…》
로지봉은 쑥스러웠다. 주영섭이 시키는대로 한마디 했을뿐인데 마치도 그가 자동차를 로획하기라도 한것처럼 떠들고있다. 그 누군가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탄약상자를 가득 실은 차였는데 좀 불편하긴 했지만 적재함너머로 발을 드리우고 남의 잔등에 기댈수 있었다. 주영섭이 주의를 주었다.
《조심하오. 조금 가면 놈들의 경계초소가 있소.》
경계초소의 적들은 제편차려니 하고 세우지도 않았다.
작은 읍거리였다. 산자드락에 붙어있는 집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가운데에서 큰길이 두갈래로 갈라졌다. 한길은 동뚝을 따라 났고 다른길은 산밑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갔다. 갈림길어구에서 차를 세운 주영섭은 다시 대렬을 지어가게 하고 걸어가면서 임무를 확인했다. 방뚝 근처의 석조건물이 첫째 목표였다. 건물 뒤쪽에 오늘 전선으로 가다가 멎어있는 105mm곡사포 10문과 10대의 포차, 2대의 연유차가 있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소비조합상점건물이 있는데 지금 그곳은 연유저장고로 되고있다. 주영섭이 걸어가면서 설명하는 말이였다. 그는 눈을 감고도 이 모든 대상들을 찾아낼것 같았다.
골목길을 지나자 대렬은 멎었다. 목표까지는 약 200m, 벼락같이 달려들어 족쳐대야 한다. 주영섭의 명령에 의해 소대는 2개의 기습조로 갈라졌다.
《전투준비!》 주영섭이 낮게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 우측에서 강렬한 불빛이 날아왔다. 집담벽 가까이 세운 찦차의 전조등불빛이였다.
《홀트 워트 아유?!(어떤자들이야?!)》
찦차안에 웅크리고있던 미국놈이 겁에 질려 소리지르고있었다. 껌벅껌벅 전조등을 켰다 껐다 하더니 주영섭이 다가가려고 하자 미식소총을 겨눠들었다.
차에 앉아 졸고있던 운전수놈이였는데 벗어던진 모자가 문짝너머로 흘러내리고있었다.
뜻밖의 정황이였다. 겁에 질려있는 그놈은 주영섭이 한발자국만 더 내짚어도 무턱대고 쏠 태세였다. 주영섭은 불빛에 홀랑 드러나있었다.
《빌어먹을!》
주영섭이 한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불이 꺼졌다. 차에 앉아있던놈이 뛰여내리려는것 같았다. 그 순간 그쪽으로 수류탄이 휙-날아갔다.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 주영섭이 돌격구령을 웨쳤다.
로지봉은 달려갔다. 석조건물, 연유저장고, 석조건물, 연유저장고!…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였다. 그가 맡은 습격대상물이다. 우익에서 몇사람이 달려가고있었다. 어데선가 콩볶듯 총소리가 터졌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서 박영일이 수류탄을 쥐여뿌렸다. 그러나 지봉은 계속 헐떡거리며 달려갔다. 앞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파편이 귀뿌리를 스치며 날아갔다.
《나가자- 앞으로!…》
누군가 사납게 웨쳤다. 석조건물이 보였다. 건물창문들에서 불꽃이 펑끗거리고있었다. 적들이 브로우닝기관총을 휘둘러대는것 같았다. 로지봉의 좌익에서 뛰여나가던 분대장과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전사가 벌떡 몸을 솟구치면서 쓰러졌다. 우익에서도 누군가 신음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꺾었다. 로지봉도 무엇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뼈가 으깨여진것 같았다. 기관총이 비질하고있는 창문쪽에 수류탄을 연거퍼 던졌으나 사격은 계속되였다. 예광탄의 불줄기가 이마빡을 지져대는듯 낮추 날았다. 또 몇사람이 약진해나갔으나 대여섯걸음도 못나가서 엎드렸다. 적들이 건물안에서 고아대고있었다. 불의적인 기습이 실패하는것 같았다. 적들이 수습하고 반격해나온다면 력량상 대비도 안되는 기습조는 위험하게 된다. 박영일이 기여와 그를 향해 부르짖었다.
《수류탄이 있으면 줘요, 예? 내가 이제 저놈을…》
수류탄은 없었다. 언제 어떻게 쥐여뿌렸던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대신 머리속에서 펀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로지봉은 석조건물의 담벽쪽으로 기여갔다. 그곳에 도람통들이 몇개 있었다. 그것을 건물앞에 굴려보낼 생각이였다. 기름을, 불을 들씌워야 했다. 놈들이 눈도 못뜨게 해야 했다. 눈도 못뜨고 숨도 못쉬며 타죽게 해야 했다.
건물담벽에 이르자 로지봉은 도람통 하나를 번쩍 들었다. 아니 번쩍 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무릎우에도 올리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이번엔 으드득 이발을 갈며 끙! 하고 다시 들어올렸다. 펑- 적탄이 도람통에 구멍을 뚫은것 같았다. 그 순간 건물 창턱에로 힘껏 굴려보냈다. 적황색의 불길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불이 달린 도람통은 창턱아래에서 다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세찬 불길이 담벽을 핥으며 솟구쳐올랐다. 우- 우- 바람소리같이 타오르며 창턱의 기관총수까지 휘감아버린것 같았다.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터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엎드려있던 전사들이 달려나갔다.…
로지봉은 비틀거렸다. 박영일이 달려와 그를 붙안았다. 울며 웃으며 그가 부르짖었다.
《어쩌문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놈들이, 놈들이 타죽는걸 보라요. 예? 저걸 보라요!-》
울고있다. 아직도 황황 솟구쳐오르는 불빛에 그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번들거리고있다. 로지봉은 우들우들 몸을 떨고있을뿐 아무 말도 못했다.
로지봉은 또 한사람이 울고있는것을 보았다. 문화부중대장 주영섭이였다. 그는 자기가 울고있는줄도 모르고있었다.
그것은 새벽녘에 있은 일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산자드락의 한 우물가에 몰켜서있었는데 그들가운데 주영섭도 있었다. 모여선 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우물은 학살된 사람들로 거의 메워져있었다. 로지봉이 그곳으로 갔을 때 전사들이 웃도리를 벗어제치고 학살된 사람들을 꺼내고있었다. 이미 꺼낸 시체는 우물곁의 밭고랑사이에 한줄로 뉘여있었다. 총탄에 뚫린 험한 상처들이 헤쳐졌다. 서로 뒤엉킨 시체들은 퉁퉁 부어서 모두다 한모양으로 참혹하였다. 한 녀인은 네댓살이나 났음직한 어린이를 자기의 치마폭으로 꽉 감싸안고 굳어져있었다. 마치도 그것으로나마 자기의 어린 생명에게 날아드는 총탄을 막아주려고 한것 같았다. 어머니의 품에서 굳어진 어린것을 떼여내려고 하였을 때 돌연 주영섭이 부르짖었다.
《다치지 마오!》
웃도리를 벗어제친 전사가 와뜰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로지봉도 그의 목소리에 몸서리를 쳤다. 그 비통한 울부짖음이 가슴을 찢었다. 녀인과 어린이를 이미 눕혀놓은 사람들곁에 옮겨가자 주영섭은 모자를 벗어들고 비청거리며 다가갔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앉아 한덩어리로 굳어진 녀인과 어린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다들 숨을 죽이고 범상치 않은 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주영섭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녀인의 크게 부릅뜬 두눈을 감겨주려고 헛되이 애쓰다가 끝내 구겨쥐였던 자기의 모자를 덮고말았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허척지척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풀어진 두눈, 허탈상태에 빠진듯 한 비틀걸음, 굳어져 내려드리운 두팔… 부지중 로지봉은 솟구치는 오열을 누를길 없어 누구든지 붙잡고 소리내여 울고싶었다. 그러나 그 무슨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입을 틀어막은것만 같았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도 괴로운 압박감에 가슴이 뻐개지는듯싶어 미칠것만 같았다. 그는 어떻게 되여 자기가 주영섭을 따라섰는지도 몰랐다. 도처에서 전장을 수색하고 정리하는 병사들이 뛰여다녔고 신작로에는 벌써 수많은 군중이 밀려나오고있었다. 가슴팍으로 기관단총을 당겨놓은 전사들이 어엿한 자세로 기쁨에 넘쳐 달려나온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인지 주고받고있었다. 터져나오는 만세의 환성, 기쁨에 울고불고하는 사람들… 그러나 로지봉은 터벌터벌 앞서가는 발자국을 따라 걷기만 했다. 모자도 없이 붕대로 감겨있는 주영섭의 머리가 맥없이 돌려졌다. 로지봉이 말없이 다가가자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를 알아본 모양으로 로지봉의 어깨를 꽉 그러안았다. 흐느낌소리와도 같은 목멘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지봉동무!-》
그러자 로지봉은 쓰라린 감정이 목구멍 가득히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주영섭의 이그러진 얼굴에서 무섭게 번뜩이는 두눈을 마주볼수 없었다. 마주보기만 하면 자기가 견딜것 같지 못했다. 슬픔과 증오가 사무쳐 펄펄 끓고있는 그 눈… 이윽고 주영섭이 그를 붙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지봉동무, 동문 우릴… 부러워했지? 고향으로 간다구 말이야. 응?… 자기는 고향에서 자꾸 멀어지는데 우리만 간다구…》
지봉은 목이 꺽 메였다. 등골의 살점이 찢겨나가는듯 했다. 이 사람은 알고있었구나. 속까지 다 보고있었구나!…
주영섭이 또 거친 속삭임으로 계속하였다.
《여기가 내 고향이요. 난 여기서… 해방후 토지를 분여받구… 행복을 찾았소. 그런데 이렇게 불타구… 무참히들 죽었소. 동무도 봤지? 내 처와 아들이… 학살된것을…》
《?!…》
로지봉은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또다시 등골로 줄달음쳐가는 짜릿한 전률에 몸서리쳤다. 치마자락으로 싸안은 어린이가 눈에 밟혀왔다. 그 어린이를 꽉 껴안고 굳어져있던 녀인… 움푹 꺼졌던 눈확, 푸르뎅뎅한 목덜미의 끔찍한 상처… 지봉은 자기의 두볼로 흐르는 눈물도 알지 못했다. 가슴은 쓰리다 못해 마구 저려났다. 그런걸 난… 고향으로 달려가 내 땅과 내 집을 지키고싶어했지, 내가 가면… 이 어깨로 막아서면… 분여받은 땅도 정든 안해와 지금 태여났을 자식도 다 지킬것처럼… 에구- 이 헌털뱅이, 이 게뚜더기야, 군대를 떠나 집을 지키러 간다구?!…
그는 피가 나도록 가슴팍을 허비고싶었다. 푸들푸들 입술이 얼어든 주영섭을 대신하여 막 울부짖고싶었다. 그 원쑤들을 갈가리 찢어죽이며 목터지게 고함을 질러도 성차지 않을것 같았다.
주영섭이 혁띠를 꽉 당겨매였다. 그리고 또 걸어갔다. 어데로? 무엇하러?… 지봉이 따라섰다. 한발자국 내짚을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를 대신하여 소리없이 피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걸음마다 앞서가는 주영섭을 향해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냥 가면 어쩌우. 예?… 그대루 가면 어떡하나 말이예유!… 저게… 저게다 다들 남겨두구… 가면 어데루 가나 말이유. 예? 어데루, 어데루 자꾸만 가는거예유?!…》
숨이 꺽꺽 막혔다. 눈물이 입으로 흘러들었다. 쩝쩔한 눈물이, 울컥울컥 치솟는 열물이 한데 범벅이 되였다. 차라리 주영섭이 자기를 붙안고 소리내여 울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러나 마르고 타는듯 한 눈빛을 번뜩이며... 그는 가고있다. 비청거리며 자꾸만 걸어간다.
《어데루 가는가말이예유. 한마디라도… 말이나 좀 하세유. 예?!…》
로지봉은 투닥투닥 얼어든 밭이랑을 걷어차며 계속 따라갔다. 발밑에서 비쭉비쭉한 강냉이그루터기들이 짓밟혀나갔다. 동켠하늘에 시뻘건 빛이 비꼈다. 검푸른 새벽하늘을 창살같이 꿰지르는 피빛노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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