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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너를 사랑하기에》 제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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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30회 작성일 23-05-28 18:31

본문

(제 5 회)

제 1 장

3

(2)


주승혁은 머리속에 떠오른 유년시절의 추억을 강영식에게 말하고나서 덧붙이였다.

《그때 형님은 카바이드직장의 네개 굴뚝에서 다 연기가 나오면 우리 나라가 통일된다고 했는데… 그건 이를테면 소년특유의 랑만과 공상이였다는걸 난 후날에야 알게 되였소. 하지만 그 말이 내 머리속에 박혀 떠나지 않는단 말이요. 지금은 굴뚝들이 더 늘어났는데 저 굴뚝들에서 다 연기가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할수 있겠소?》

《나라의 경제가 활기를 띤다는걸 말할수 있겠지.》

《우리 형님식으로 말해본다면 우리 나라가 강성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시각이겠지. 우리가 그런 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나 비참한 일이 아니겠소.》

《그야 그렇지.》 영식의 살이 빠진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피여났다.

《강성국가의 대문으로 들어설 날이 멀지야 않았겠지.》

《그래, 멀지 않았소.》

주승혁은 신심어린 말을 하면서도 왜선지 다물렸던 입술이 열리면서 한숨이 새여나오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오늘은 마음이 통하는 강영식에게 모든 괴로움을 다 털어놓고싶었다.

《비날론을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슬퍼지오.》 하고 승혁은 말하였다.

《이젠 가성소다와 염화비닐직장이 살았으니 어느 정도 힘이 생기긴 하지만 비날론생산공정이야 페허나 다름없지 않소. 난 유기합성공학기사인데 이젠 불필요한 존재가 되여버렸거던.》

《왜? 연구사업을 하면 되지 않소?》

《연구사업도 합성공업이나 비날론을 위해서 필요한건데 그 공정들이 다 죽었는데 무슨 연구가 제대로 되겠소.》

《주동무 심정이 리해되오.》 영식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나도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 때가 많소. 숱한 예술단들과 기자들이 우리 공장 앞도로를 지나쳐 룡성기계나 흥남비료와 같은 기업소들에만 달려가거던. 우리 도를 둘러보면 소리치는 기업소들이 많고 거기선 때없이 만세소리가 터져나오군 하는데 우리 공장은 손님들도 찾아들지 않는 형편이요. 하기야 생산이 멎어있는 공장에 찾아올 멋이야 없지.》

《10여년전까지만도 온 나라가 다 알던 우리 공장이 이제는 허울만 남은 공장으로 되였소. 나라의 많은 사람들속에서 우리 공장은 죽어버린 공장으로 인식되고있단 말이요.》

《그러니 사람들도 자꾸 떠나가지. 나이많은 기능공들은 죽고 년로보장으로 넘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딴 공장으로 가고 기술자들도 떠나가오. 최성복이 있지 않소, 그 애도 가겠다는 판이요.》

《뭐 성복이도 간다구?》 승혁은 놀라면서 영식에게 눈을 흘기였다.

《그 애를 보내면 어떻게 하오. 그 애야 재능있는 청년이라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자꾸 가겠다는걸 난들 어쩌는 수가 있소.》

《안돼. 성복이 애비가 자식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는데… 어쩌면 그럴수가 있소?》

승혁은 마치 성복이가 공장을 떠나가게 된데 영식의 책임이 있는것처럼 성을 냈다.

《흥분하지 말라구.》 영식이 승혁의 손에 자기 손을 얹어 꼭 잡았다.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놓을수야 없지 않나.》

승혁은 갑자기 방안이 숨막힐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무더위는 황혼이 가까와오는데도 사라질줄 모른다. 그의 광대뼈가 두드러진 갱핏한 얼굴에는 땀발이 구슬처럼 돋아났다.

강혜경이 병원 기본건물 현관문을 나서 정원도로를 걸어가는데 비닐공 한개가 앞으로 굴러왔다. 한 네댓살 나보이는 사내애가 공을 주으려고 뛰여왔다. 혜경은 공을 주어들고 무릎이 드러난 짧은 바지를 입고 노란색샤쯔를 입은 사내애를 보았다. 해맑은 얼굴과 까만 눈동자의 사내애가 귀여워 한번 안아주고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내애가 혜경의 앞에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달라. 내거야.》

《응? 이거 네거였구나.》 혜경은 웃으면서 인차 공을 주지 않았다.

《우리 같이 놀아볼가?》

《응.》

혜경은 사내애에게 공을 던지였다. 사내애는 공을 잡았다가 서투른 발동작으로 혜경의 쪽으로 공을 찼다. 그 공이 왕청같이 꽃밭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통에 혜경은 그 공을 잡으러 뛰여갔다. 혜경은 공을 주어들고 사내애에게 짐짓 엄하게 말하였다.

《똑바로 차요.》

혜경은 허리를 굽히고 어느새 뒤따라온 사내애의 볼을 손가락으로 꼭 찔렀다.

《아파.》 사내애가 큰소리쳤다.

이때 의사복을 입은 주선철이 병원건물에서 밖으로 나왔다. 선철은 2층의 외과의사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좀전에 작별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 혜경이 사내애와 노는것을 발견하고 찾아나온것이였다.

《애와 재미나게 노는군요.》

그제야 혜경이 선철을 보고 웃었다.

《애가 너무 고와서 그래요.》

애어머니가 와서 사내애를 찾았다. 사내애가 공을 안고 뛰여갔다.

《혜경동문 아이들을 고와하는것 같군요.》

《예, 난 저런 애들을 보면 막 안아주고싶어요. 티없이 깨끗한 그 무엇이라고 할가… 아이, 잘 모르겠어요. 그저 애들과 상대하면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것만 같아요.》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병원정문이 저기 바라보이였다. 선철이가 이렇게 입원환자의 가족을 정문까지 바래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환자가 아버지의 친구여서인지, 처녀에게 마음이 끌려서인지 그자신도 명백치는 않았다.

《그동안 선철선생의 수고가 많았어요.》 혜경은 선철에게 충분히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쳐 말하였다.

그들은 강영식의 입원실에서 나온 후 담당의사와 환자가족들사이에 오가는 평범한 인사말을 하고 헤여졌던것이다.

《뭐라고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 아버진 인차 퇴원하겠다더군요.》

《나야 의사로서 책임을 다하는것뿐이지요. 아버지가 퇴원하게 되면 혜경동무를 만나보기가 힘들겠는데요.》

선철의 말에는 서운함이 짙게 어려있었다.

《저같은걸 만나선 뭘하겠어요.》 혜경은 살그머니 웃음을 머금었다.

《선철선생이야 대상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아요. 환자들도 많고 그들의 가족들도 그렇고… 나같은건 얼마 안있어 잊어버릴거예요.》

《물론 난 많은 사람들을 돌봐야 합니다. 하지만…》 선철은 머뭇거리다가 심각한 얼굴로 혜경을 보았다.

《하지만 다 쉽게 잊지는 않지요.》

(주선철… 이 동문 참 성실한 사람이야. 그래, 무엇보다도 좋은 남자지. 처음부터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였어.) 하고 혜경은 생각하였다.

몇달전 저녁에 있은 일이였다.

함흥시내에 있는 좁은 철길역 표파는 곳에 한 처녀가 락심한 얼굴로 서있었다. 함흥설계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함흥화학설계연구소에서 설계원으로 일하는 혜경이였다. 그는 제기된 설계과제를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퇴근시간을 놓치고 급히 달려나왔는데 그만 렬차표가 다 팔렸다는것이 아닌가.

혜경은 집이 있는 흥덕에서 함흥까지 협궤렬차를 타고 출퇴근하였다. 다음차를 타려면 1시간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그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여서 빨리 퇴근하여 저녁상을 차리려고 작정했는데 다 틀리고말았다.

(난 정말 맹꽁이야. 왜 그렇게 정신이 없을가?)

혜경이가 자신을 나무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데 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가 왜서인지 놀라는 눈길로 혜경을 쳐다보았다. 혜경이가 의아하여 마주보자 청년은 당황하여 눈길을 돌렸다. 이윽고 청년이 물었다.

《차표를 사지 못해 그러는게 아닙니까?》

《예.》

혜경은 고수머리에 얼굴이 곱살한 청년을 깔끔하게 쳐다보았다. 혜경의 얼굴에는 (그런데 무슨 상관이예요?) 하고 묻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마침 잘됐군요. 난 일이 있어 다음차를 타려고 했댔는데… 어서 차표를 받으십시오.》 청년은 차표를 내밀었다.

혜경은 기뻐서 활짝 웃었다가 인차 못미더운 빛을 띄웠다.

《혹시 나때문에 양보하는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걱정말고 받으라니까요.》

혜경이 차표를 받아들자 청년은 돌아섰다.

《저, 돈을 받으십시오.》

《됐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데…》

청년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역사밖으로 사라지고말았다. 혜경은 청년에게 변변한 인사말도 하지 못한것을 아쉽게 생각하였다.

인차 렬차가 도착하였고 사람들이 차표찍는 곳으로 나갔다. 혜경이 렬차에 올라 의자에 앉았는데 차창밖으로 그 청년의 모습이 보이였다. 혜경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청년은 렬차원과 무슨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하며 걸어갔다.

(그럼 저 사람이 나때문에… 아닐거야.)

혜경은 살레살레 머리를 저었다.

(아마 렬차원과 아는 사이겠지.)

문득 혜경은 표파는 곳에서 청년이 놀란 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왜?)

의혹이 머리속에 스며들었으나 괜한데 신경을 쓴다고 자신을 탓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흥덕역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혜경은 다시한번 놀랐다. 례의 그 청년과 마주쳤던것이다. 혜경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러니 일이 있어 다음차를 탄다는건 거짓말이였군요.》

《허 이거 빵났군요. 실은 동무가 표파는 곳앞에서 안타까와하는 모양을 보니 도와주고싶더군요.》

청년은 쾌활한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비날론공장 카바이드로에서 내비치는 화광과 보라빛저녁노을이 청년의 얼굴에 얼른거리였는데 혜경에게는 청년이 반할만 한 미남자로 안겨왔다.

《고맙습니다. 난 차에 타서 동지를 보았습니다. 렬차원과 무슨 얘기를 하면서 걸어가더군요. 아는 사이였습니까?》

《초면입니다. 그저 차표를 사지 못한 사정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했지요. 결국 벌금차표를 사고 렬차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됐군요. 정말 미안해요. 저 그럼…》

혜경은 덤벼치면서 가방에서 돈지갑을 꺼내였다.

《또 돈입니까? 그만두십시오.》

마다하는 청년의 말이 어쩐지 경멸조로 들리는것이여서 혜경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청년이 시시하게 무슨 돈타령인가고 질책하는것만 같았다.

《잊지 않겠어요. 후날에 신세를 갚을 때가 있겠지요. 미안하지만 어디서 일을 보십니까?》

《난 산업병원 의사입니다. 주선철이라고 합니다. 도움받을 일이 있으면 찾아오십시오.》

《난 함흥화학설계연구소 설계원입니다. 집은 여기 흥덕에 있어요.》

《나도 집이 흥덕이니 앞으로 만날수 있겠군요.》

《그런데 한가지 물어도 되겠는지…》 혜경은 좀 머뭇거리다가 말하였다.

《뭡니까?》

《날 표파는 곳앞에서 보았을 때 꽤 놀라던것 같은데요. 무엇때문인가요?》

선철은 왜선지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걸 물은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언젠가 내가 친했던 처녀가 동무와 비슷하게 생겼거던요. 그래 첨 보았을 때 좀 착각이 왔댔지요.》

별로 신통한 대답은 못되였다. 남자들은 흔히 녀자들과 사귀려고 할 때 어디선가 보았다는 식으로 말을 붙인다는것을 들은적이 있었던 혜경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선철에 대한 좋은 감정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헤여졌다. 혜경은 청년에게 고마움을 느끼였지만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화상을 입고 흥덕구역 산업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혜경은 병원에 가서 아버지의 담당의사가 다름아닌 고수머리미남청년 주선철임을 알고 놀랐다. 운명은 얼마나 묘하게 얽혀가는것인가. 다시한번 선철은 혜경에게 고마운 존재로 되였다. 그리고 선철이가 자기 아버지 강영식과 친구지간인 주승혁의 아들일줄이야 어찌 꿈엔들 생각했으랴. 물론 선철이도 강혜경이 강영식의 외딸일줄은 몰랐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서 혜경은 선철에게 말하였다.

《주선생님, 난 어떻게 해요? 그저 선생에게 신세만 지는것 같군요.》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성을 내겠습니다.》 선철은 짐짓 얼굴을 찌프려보이였다.

《선생이 성을 낼 때도 있어요? 참 언제부터 묻고싶었어요. 주선생은 어떻게 되여 의사가 되였습니까? 내가 알건대 주선생 아버님은 비날론이나 화학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있다는데 아들은 의사로 키웠군요.》

《사실 아버지는 내가 화학공대에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걸 내가 의학대학에 가겠다고 우겼거던요.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당시는 나라가 한창 고난의 행군을 하고있었습니다. 비날론공장도 멎고 사람들은 어렵게 살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비날론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람들이 살아야 할게 아닌가고… 난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가 되고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마지못해 승낙했지요.》

《선생은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것 같군요.》

《그렇게 보입니까? 그저 앓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살려내고 그들이 몸이 회복되여 퇴원해나가고 가족들의 웃는 얼굴을 볼 때 난 보람을 느끼게 되는겁니다. 비날론이 나오지 않는지 벌써 13년이 되여옵니다. 그래도 생활은 생활대로 흐릅니다. 아버지는 유기합성공학기사인데 기술을 펼칠 마당이 없지요. 그러나 성실하게 공장으로 출근하고있습니다.

병원은 생산물을 내야 하는 공장과는 다릅니다. 의사에게는 언제나 할일이 많은 법이지요.》

혜경은 선철이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니 이 선생은 자기 아버지를 동정하고있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감을 잃었다고… 비날론생산계통이 멎어버렸으니 기술자로서 할일이 없어진것은 사실이지만… 아마 이 선생은 우리 아버지도 동정할는지 몰라. 비날론공장의 모든 사람들을…)

혜경은 왜선지 분함을 느끼였다. 선철을 리해하면서도 그가 불만스러웠고 비날론생산공정이 돌지 못하는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였다. 자기가 비날론공장 종업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날론을 강렬하게 옹호하고싶어진다. 무엇때문일가? 아버지가 너무나 비날론을 사랑하기때문일가?

혜경은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위생복차림의 선철을 보았다.

《내가 지나치게 선생님을 붙들고있는게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또 만납시다. 안녕히 가십시오.》

혜경과 선철은 정문가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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