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련재 《너를 사랑하기에》 제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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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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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빛이 뜨겁게 내리쪼인다.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파아란 하늘에 떠있는 해는 그야말로 이글이글 타면서 백광을 내뿜는다. 한바탕 해수욕을 하고나서 달아오른 모래불에 등을 대고 누운 주승혁의 머리속에는 카바이드전기로의 눈부신 백광이 떠올랐다.
저 해의 열을 그대로 옮겨 지금 멎어서있는 전기로들을 돌릴수는 없단 말인가.
주승혁은 인차 자기의 허망한 공상을 비웃으며 쓴입을 다시였다.
전기로들에 열이 부족하여 돌물을 끓이지 못하는것은 결코 아닌것이다. 여러 생산조건들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어디 전기로뿐인가? 합성직장은 무엇으로 어떻게 돌린단 말인가?
주승혁은 따끈따끈한 모래불에 등을 비비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있지만 따거운 해빛은 부드러운 바늘잎처럼 두눈을 자극한다. 온몸에 느껴지는 강렬한 빛살은 무한대한 열정과 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아, 저런 열정, 저런 힘이 있다면 우리 비날론공장이 다시 일떠서는건 시간문제일텐데… 그러나 아직은…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주승혁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점차 몸이 노곤해져왔다.
그속에서도 바다물결이 출렁이는 소리,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면서 즐겁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기분좋게 귀전을 울린다.
(또 한해가 지났구나.)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기도 하였다. 주승혁은 어쩐지 허무감이 가슴을 쑤시고드는것을 느끼였다.
함흥사람들은 해마다 삼복철이면 어김없이 이 마전유원지를 찾아와 해수욕을 하군 하였다. 가족들끼리 오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기업소별로, 직장별로, 부서별로 음식들을 잘 준비해가지고와서 놀다가 돌아가군 한다. 고난의 행군과 강행군의 어려운 속에서도 사람들은 생의 의욕을 잃지 않았고 마전유원지는 계속 흥성거렸었다. 주승혁이도 2.8비날론련합기업소에서 수십년간 일해오는 동안 마전유원지행차에 빠지지 않았다.
오늘도 2.8비날론련합기업소의 많은 사람들이 휴식의 하루를 마전유원지의 이 해수욕장에서 보내고있었다. 이런 해수욕이 너무나 즐겁고 또 인상에 깊이 남는것이여서 해수욕철이 끝날적이면 한해도 지나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 주승혁은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나 아쉬워 마음이 서글퍼지는것이다. 글쎄 사는 보람이 뭐란 말인가? 그시그시 맡겨진 일이나 하고 이렇게 더위를 피해 해수욕이나 하면서 즐기면 그만이란 말인가?
(이제 내 나이 58살, 2년만 있으면 60살이 되는구나. 아직도 기운이 펄펄하고 의욕은 이 가슴에 차넘치건만…)
명색이 비날론공장이라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멎어선 비날론생산공정은 아직까지 돌지 못하고있었다. 그때문에 기업소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동원을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고있었는데 주승혁이도 마찬가지였다.
승혁은 몸이 점차 달아오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바다물속에서 식었던 몸이 해볕과 모래불에 의해 다시 열을 내는것이였다.
승혁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이에 비해 아직도 검고 숱이 좋은 머리칼을 두손으로 반듯이 뒤로 쓸어넘기였다.
주위에는 승혁이처럼 수영복차림의 사람들이 누워있거나 엎드려있었고 저앞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있었다. 서로 가까운 친척들로 짐작되는 녀자 두명이 무섭다고 소리를 지르는 한 처녀를 붙들어 바다물속에 내던지고 좋아라고 웃어댄다. 아이들 서너명이 그 녀자 두명에게 달려들어 갈갬질을 벌린다. 녀자 두명은 그 아이들을 안고 바다물속에 뛰여들었다.
해빛이 호듯호듯 뛰는 바다물은 사람들과 노는것이 흥에 겨운듯 흥떡거리며 파도를 련속 보내여 모래불을 핥는다.
《승혁동지, 또 한바탕 해봅시다.》
한사람이 승혁의 곁을 지나치며 부추기는 소리를 한다. 승혁의 대답을 들어볼새도 없이 그 사람은 바다물을 향해 달려가고있었다.
승혁은 땀이 나서 겨드랑이가 축축해졌지만 왜선지 또 해수욕을 하고싶은 흥은 잃어버리고말았다.
(그늘속으로 들어가야겠군.)
승혁은 바다기슭에 펼쳐진 소나무숲을 향해 걸어갔다. 그쪽에서도 사람들이 흥성거리고있었다. 배구장에서 떠드는 소리가 별로 요란스럽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배구공이 보인다.
승혁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배구장으로 향해진다. 군살이란 전혀없는 그의 갱핏한 얼굴에서 드높은 자존심을 시위하듯 코날이 날카롭게 서고 치째진 두눈이 생기있게 빛난다.
젊었던 시절부터 배구에 별로 취미를 붙이면서 열을 올렸던 승혁이다. 그는 남들보다 체소한 몸집을 가졌다. 키가 크고 체격이 큰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누군가에게서 운동을 많이 하면 키가 자란다는 말을 듣고 달라붙은 종목이 배구였다. 키는 그리 큰것 같지 않았지만 배구기술은 좀 늘어서 기업소에서 직장별 대항배구경기를 할 때면 늘 참가하여 팀을 이끌군 했었다. 승혁은 좁은 얼굴에 비해선 큼직한 입을 꾹 다물고 긴팔을 휘저으며 걸어갔다.
배구장에 가까이 가보니 배구를 치는 사람들은 비날론공장 사람들이였다. 합성직장과 2카바이드직장이 맞붙었다. 응원자들속에서 합성직장장 김명수를 비롯한 합성직장 사람들의 낯익은 모습들이 뜨이였다. 합성직장은 기업소적으로도 큰 직장에 속하는데 그 성원수만도 2백명에 가깝다. 비록 지금 생산공정들이 다 멎어버려 직장성원들이 여러 공사들에 동원되고있지만 이전의 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합성직장은 비날론공업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는 직장으로서 한창 비날론생산이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그 성원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김명수는 키가 크고 몸집이 거쿨진게 과연 큰 직장을 책임진 일군의 위엄이 몸에 배인듯싶었다. 그는 위신있게 뒤짐을 지고 자기편 선수들에게 큰 목소리로 무슨 훈시를 하고있었다.
(합성직장장이면야 저쯤 돼야지.) 승혁은 어쩐지 자기자신을 비웃는 심정으로 생각하였다.
승혁은 지금 기업소 공업기술연구소 합성실 연구사로 일하고있지만 한 몇달전까지만 해도 합성직장장을 한 사람이다. 비록 본의는 아닐지라도 과오를 범하였고 그때문에 해임된 처지에서 이전에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마음편히 대할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는데 한사람이 승혁의 팔을 붙들었다.
《주아바이.》
그 소리에 배구장주변에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응원을 하던 사람들의 눈길이 승혁에게 쏠리였다.
승혁의 팔을 잡은 사람은 2카바이드직장의 수리작업반장 김준선이다. 나이가 40대초인데 머리를 짧게 깎고 행동거지가 날파람있는게 나이보다 퍽 젊어보인다.
준선이와 같이 40대의 사람들이나 그아래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승혁을 《아바이》라고 부른다. 직장장직에서 해임된 후로 그를 부르는 호칭이였다. 처음엔 그 부름이 어색하고 어쩐지 섭섭하게도 생각되였지만 이제는 익숙되였다.
《아바이, 심판을 좀 서주십시오.》 준선이가 청을 들이대였다.
《내가 어떻게 심판을 선다는거야?》 승혁은 준선에게 난색을 보이며 투덜거리듯 말하였다.
《그러지 말고 좀 서주십시오. 기계화직장장동지가 편심을 선단 말입니다. 완전히 합성직장편입니다.》
심판을 서던 기계화직장장이 그 소리를 듣고 짐짓 화를 낸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이거 심판도 못해먹을 노릇이구만.》
기계화직장장은 승혁을 보고 싱긋 웃어보이였다.
그의 곁에 서있던 합성직장장 김명수가 주승혁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직장장동지, 어서 오십시오.》
기업소 종업원들속에는 명수처럼 아직도 승혁을 보고 직장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을 례의라고 해야겠는지 존경이라고 해야겠는지 알수 없으나 승혁은 아직까지 그 부름을 듣는것이 저으기 거북스러웠다. 합성직장장인 명수에게서 《직장장》이라고 불리우는것은 더욱 민망스러움을 자아냈다.
《합성직장장동무가 사람을 잘못 보는군. 내가 무슨 직장장이요? 다시는 실수하지 말기요.》 그는 명수에게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명수는 지난날 주승혁이가 한창 합성직장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 대학을 졸업하고 합성직장에 배치되여 일하였으며 책임기사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승혁을 막 대할수가 없었다.
《원 참, 직장장동지도…》 하고 고집스럽게 《직장장》이라는 말을 하던 김명수는 배구장에서 아슬아슬한 판이 벌어지자 《저런, 저런…》 하고 외마디소리를 하다가 《야 성필이, 뭘하는거야, 냅다 조기라.》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승혁이도 가슴을 조이며 구경을 하다가 마침내 합성직장팀이 한점을 올리자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인차 자기의 두툼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합성직장사람처럼 여기고있으며 합성직장에 대한 정이 변함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주아바이, 심판을 서보겠습니까?》 하고 기계화직장장이 물었다.
《기계화직장장동지, 그러지 말고 물러나라요.》 옆에서 김준선이 퉁을 먹인다.
《허, 이 사람들이 막 날 몰아내려 한다.》
기계화직장장이 물러서려는 기미를 보이자 김명수가 주승혁에게 권하였다.
《한번 서보십시오.》
《아니, 그만두겠소.》
승혁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기계화직장장이 그만하면 공정하게 심판을 서는데 뭘 그러오. 내가 심판을 선다면 틀림없이 편심을 설거요. 나야 합성직장출신이 아닌가.》
경기장에선 점점 더 열이 오르고있었다. 여기저기서 와와 하는 함성, 《힘을 내라.》, 《잘 친다.》, 《하나, 둘, 셋》 하는 응원소리들이 고조된다.
승혁은 더 구경하고싶었지만 합성직장 사람들과 한데 섞여있기가 멋적어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다. 경기장에서 와와 떠드는 소리가 어쩐지 떳떳치 못한 자신을 비웃는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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