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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력사소설 《숙적》 제1부 (제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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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구자
댓글 0건 조회 2,152회 작성일 23-12-0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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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6

(1)


이날 밤이였다.

《상감마마 듭시오.》

조상궁이 아뢰는 뜻밖의 소리에 서탁앞에 앉아 책을 보던 명성황후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합문이 열리더니 참말로 나라의 임금이며 자기의 남편인 고종이 방으로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왕비로 간택되여 궁성에 들어온 후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명성황후는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기가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은 명성황후는 머리를 돌리고 소매속의 손수건으로 얼른 눈굽을 훔쳤다. 그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웠다.

그것은 정녕 감출길 없고 누를길 없는 마음속 기쁨의 분출이였고 환희의 발산이였다.

명성황후의 그 웃음과 아름다움에 접한 고종은 한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 웃음은 매혹적이라기보다 고혹적이였다. 아니, 뇌살시키는듯한 웃음이였다. 그리고 룡트림무늬가 새겨져있는 긴 와룡초대의 밝은 불빛아래 손을 맞잡고 서있는 명성황후의 황홀하게 아릿다운 자태, 성숙된 녀성의 미는 청춘기를 맞이한 고종의 눈을 현혹시켰고 마음을 산란케 했다.

환관의 손짓에 따라 궁녀들이 뒤걸음질로 방에서 나갔고 조상궁도 기쁨의 물기가 어린 눈굽을 찍으며 자리를 떴다.

합문이 닫기자 방안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만이 남았다.

고종이 거북상스런 기색으로 서탁우에 쌓여있는 책들을 만져보았다.

《중전, 앉으오. 밤마다 이렇게 공부를 하시오?》

명성황후는 자리에 단정히 앉았다.

공부랄게 없습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보던 책을 뒤적이며 물었다.

《이 〈춘추좌전〉은 문장을 해득하기가 어렵다 하던데…》

명성황후는 밝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척했다.

상감마마께서도 이 책을 보십시오. 과히 어렵지 않은줄로 아옵니다.》

《참, 중전께 한가지 물어볼게 있어 들렸소.》

명성황후는 수집게 대꾸했다.

신첩이 아는게 없사옵니다.》

그래두 세상대세에 밝던데…》

《무슨…》

《미국에 대해서랑 말이요.》

《그건 청국에 드나드는 역관들을 통해 세상형편을 물어 알기도 하고 또 그들이 가져오는 책을 보기도 하기에 더러…》

《음, 듣자니 일본에서 〈명치유신〉 했다던데 중전은 그에 대해서도 아시오?》

명성황후는 미소를 머금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 〈명치유신〉이라는 말은 지금 일본천황인 명치시대에 단행된 혁파개혁이란 뜻인데 〈명치유신〉전에는 도꾸가와막부가 나라의 권세를 틀어쥐고있었나이다. 그런데 〈천황제〉 주장하는 존왕파들이 막부의 통치를 옹호하는 좌막파를 타도하고 천황의 왕권을 되살리고 서양식개화문명을 받아들인데로부터 막부시대와 구분하여 지금 천황의 년호를 붙여 〈명치유신〉이라 일컫는다고 하옵니다. 〈명치유신〉이 일어난 올해에 명치천왕의 나이가 14살이였다나봅니다. 그리고 명치천왕의 원래이름은 무쯔히또라고 한답니다.》

명성황후의 해박한 지식에 저으기 놀란듯 고종은 감동에 겨운 어조로 말했다.

《중전, 내 부인을 너무나도 몰랐소! 날 용서하오. 오늘은 참 심정이 흡족하오. 수뢰포의 폭파로 기쁘고 부인을 새롭게 알게 되여 기쁘고…》

《왕비가 뭇궁녀들과 다른것은 상감마마와 동고동락할뿐아니라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첩은 다만 왕비된자의 중임을 잊지 않으려 했을따름이옵니다.》

감격과 감동으로 고종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눈굽에선 물기가 번들거렸다.

《중전!…》

고종은 안해 명성황후의 손을 뜨겁게 잡으며 목멘 소리로 부르짖었다.

《상감마마!…》

남편인 고종의 품에 안긴 명성황후의 눈에서도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이날이 오기를, 국왕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얼마나 고대했던 명성황후였던가.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관계는 가까와지고 그들간에는 정애가 흘렀으나 집정관이며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관계는 어쩐셈인지 뒤틀리기만 하였다. 날이 갈수록 대원군의 고집은 더 세지고 모든 일을 자기의 주관과 독단으로 처리해나갔다.

그는 온갖 반대와 항거를 무릅쓰고 내정계획을 과감히 추진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어느날 인정전마당을 지나가던 명성황후는 놀라운 광경에 부딪치게 되였다.

환관들과 궁녀들이 인정전마당에 주단이며 시계, 천리경, 거울, 그림액틀과 책과 같은 서양물건들을 산더미처럼 쌓고있었다. 그속에는 보총이며 사냥총과 같은 서양무기도 있었다.

이 모든것을 마루우에 뒤짐을 지고 두다리를 떡 벌리고 선 대원군이 지릅뜬 눈찌로 지켜보고있었다.

이윽고 환관들의 우두머리가 대원군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일을 다 끝냈다고 아뢰였다.

대원군은 마당가녁에 시르죽은 상을 하고 서있는 중신들이며 환관, 궁녀들을 쭉 일별하고나서 지엄하게 분부했다.

《대궐에 이렇듯 오랑캐들의 요사스러운 물건이 많이 침습했으니 어찌 나라가 병들지 않을수 있겠느냐? 모조리 깨버리고 불질러버려라!》

환관이 서양물건더미에 석유를 뿌리고 성냥을 그어댔는데 실상 그가 들고있는 석유통과 성냥도 물건너온 서양제였다.

탁상시계며 책, 보총들이 탕탕 소리를 내며 타번지기 시작했다.

인정전마당은 삽시에 검은 연기로 자욱해졌다.

우의정 박규수가 대원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당대의 이름있는 실학자이며 작가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데 늘 나라의 개화문명을 주장하는 사람이였다.

대원위합하, 우리도 발전된 서양문명을 배워야 하고 더우기 외국에서 신식무기들과 함선들을 사다가 나라의 방비를 강화해야 할 형편이온데 이렇게 청국에서 들여온 신식총들까지 불질러버리면 어찌하옵니까?》

그를 찌글서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대원군이 꿰진 소리를 했다.

《그래, 대감은 평안감사로 있을 때 저런 신식총으로 미국강도배 〈셔먼〉호를 불태워버렸소?》

그거야 화공전술로 그러했지요마는 진작 우리에게 신식대포와 총이 있었더라면 〈셔먼〉호가 평양에까지 기여들지 못했을거외다.》

《어쨌든 안되오, 안되구말구오랑캐물건을 만지면 오랑캐를 넘보게 되는 법이요.》

박규수는 억이 막힌듯 입도 벌리지 못했다.

쇄국양이(서양배척)정책을 실시하면서 밀무역을 엄격히 금지시킨 대원군은 자본주의상품은 나라를 좀먹는 물건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를 위반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강한 제재를 가하였다.

중신들한테로 스적스적 다가간 대원군은 서느러운 눈길로 그들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조정의 중신들은 마치도 호랑이한테 쫓기는 메짐승들마냥 비실비실 뒤걸음질쳤다.

《경들은 일국의 재상들인데 차림새를 보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서양의 사치품들만 걸치고 다니고 집에 가보아도 큰것에서부터 좀스러운것에 이르기까지 전부 오랑캐물건들뿐이니 이래야 옳겠소?》

대원군의 가시눈길을 피해 중신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고있었다.

대원군의 시선이 안경을 낀 한 대신에게 가 멎었다.

《대감, 안면에 걸친 그 요망스러운 물건은 어데서 생긴것이요?》

대신은 흠칫하며 어망결에 눈에 건 안경을 만졌다.

《저 청국에 드나드는 장사치한테서…》

《대감부터 벗어놓소.》

그러자 안경쟁이대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소신은 이걸 벗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대원군은 용서가 없었다.

《그게 없을 땐 어떻게 살았소. 벗소.… 그리고 다들 오랑캐물건을 지닌게 있으면 다 내놓소!》

대원군은 이어 민승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대감의 관복은 우리 비단으로 지은것 같질 않구려.》

《예, 저 청국비단…》

《벗어놓소!》

대원군이 단호하게 언명하였다.

중신들은 어쩔수없이 안경이며 회중시계, 성냥, 물주리, 손수건, 지어 외국비단으로 지은 겉옷까지 벗어놓았다.

고의적삼바람으로 비맞은 장닭마냥 풀이 죽어 서있는 민승호의 몰골을 보고 궁녀들이 입을 싸쥐고 웃었다.

먼발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명성황후는 마치도 자기가 모욕을 당한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그도 그럴것이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양오라비일뿐아니라 민씨일족의 웃두리노릇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던것이다.

그러니 그가 모욕을 당하는것은 국모인 명성황후 자기가 모멸을 당하는것과 같으며 나아가서 민씨가문이 멸시를 당하는것과 같다고 명성황후는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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