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3-7.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과 함께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3-7.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과 함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713회 작성일 16-07-29 01:03

본문

7.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과 함께



579B0CD4422A650007



국제련합군시절에 나는 주보중, 장수전, 채세영, 풍중운을 비롯한 동북항일련군의 많은 전우들과 함께 한대오안에서 깊은 련계를 가지고 생활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일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들중에서 나와의 련계가 제일 많았던 사람은 주보중이였습니다. 그와의 친교가 시작된것은 1930년대 전반기 간도에서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사업을 할 때부터였습니다. 주보중과는 반일병사위원회에도 함께 참가하고 라자구전투도 같이하였습니다. 왕청에 있을 때 북만원정을 두차례 하였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주보중이네를 만나 련합작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기에 활동무대를 백두산지구와 서간도로 옮긴후부터는 한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길은 여러 갈래지만 대문은 하나다.》이것은 주보중이 나와 헤여질 때마다 격언처럼 한 말이였습니다. 활동무대가 다르고 투쟁로정도 각이하지만 공동항일을 하는 이상 어느때든지 다시 만나게 된다는 뜻이였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 직전에 나를 만났을 때에도 주보중은 《그것보시오. 김사령,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길은 여러 갈래지만 대문은 하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몇해만에 이루어진 해후여서 그때의 상봉은 참으로 가슴을 후덥게 해주었습니다.

《양사령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나는 노상 남만동지들의 신변을 걱정했습니다. 일제가 김사령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려운 고비들을 용케 이겨냈습니다. 동남만이 얼마나 위험한 전장인가 하는거야 내가 잘 알지 않습니까.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하바롭스크에 온 김사령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김사령이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주보중은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퍼그나 늙어보였습니다. 얼굴에는 림해설원에서 살아온 풍상고초가 력력히 어려있었습니다.

주보중은 고생이 많았겠다는 나의 말에 오히려 우리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만동무들이 겪은 고생에야 어떻게 비기겠는가, 그런 고생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련전련승했다니 우리로서는 그저 경탄할뿐이다, 국제당일군들과 쏘련군지휘관들의 찬사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바롭스크에서 주보중을 만난것은 국제당이 동북의 유격대지휘관들과 쏘련 원동군대표들의 회의를 시작하려고 서두르던 때였습니다. 그러니만치 나와 주보중도 담화의 많은 몫을 이 회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돌리였습니다.

주보중의 고충은 혁명의 민족적임무와 국제적임무, 혁명투쟁에서의 독자성과 국제적련대문제를 어떻게 결합시켜나가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그는 중공중앙과의 련계를 몹시 갈망하고있었는데 그것을 성사시키지 못해 초조해하였습니다. 중국공산당원인 주보중이 당중앙의 지도밑에 동북혁명을 발전시키려고 여러해동안 모대긴것은 응당한 일이였습니다.

주보중은 언제나 중공중앙과의 련계를 앞세우면서 쏘련과의 련대를 이루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은 동북지방에서 싸우고있던 중국동지들의 일반적인 태도이기도 하였습니다.

국제당과 쏘련군사당국이 한때 동북항일련군을 쏘련의 지휘권안에 포함시키려고 했던적도 있었던것만큼 주보중이 그런 현상이 재발되지 않겠는가 하고 우려한것은 리해할만한 일이였습니다.

그날 나와 주보중은 조성된 정세의 요구로 보아 쏘련과의 군사정치적 협동과 협조는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 협동과 협조의 구체적 형식과 방법은 매개 나라 민족혁명의 리익과 국제혁명의 리익을 옳게 결합시키는 방향에서 해결되여야 한다, 다시말하여 동북항일련군이나 조선인민혁명군의 독자성을 보존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주보중은 담화를 마치면서 《이번 협상에서는 남만대표동지들의 발언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김일성동지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반일병사위원회시절에도 김사령의 발언은 매번 우리의 화제를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새로운 정황에 맞게 서로 손잡고 일해나갑시다.》라고 뜨겁게 말하는것이였습니다.

나에 대한 주보중의 믿음은 진실한것이였습니다.

주보중은 쏘련을 옹호하고 쏘련에 수립된 사회주의제도를 항상 지지하면서도 그 나라 사람들의 언행이나 처사에서 대국주의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매우 못마땅해하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원칙적립장을 강하게 지키면서 아량을 가지고 동지적협조정신을 잘 보여주면 대방의 그릇된 태도도 능히 바로잡을수 있고 맺혔던 고리도 조만간 풀수 있게 될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주보중은 머리를 끄덕이며 《아무튼 김사령은 로숙하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로숙해서가 아니라 주사령에게 한가지 경험이 없어서 그런다, 우리처럼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해본 경험이야 없지 않는가고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그렇지, 조선동지들이야 동만에서 《민생단》문제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지요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주보중은 길동에서 활동할 때 이미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된데 대해 까밝히고 그 잘못이 동만특위의 사업상 착오로부터 초래된것이였다고 비판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간도시절부터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에 대해 비교적 공명정대한 립장을 취하고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국광복회를 조직했을 때 주보중이 자기가 지휘하고있던 동북항일련군부대안에 꾸려진 그 지부의 활동을 적극 떠밀어준 사실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도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게 어느때 일인가 하면 1936년 12월에 있은 일입니다.

주보중의 이 처사는 조선혁명에 대한 국제주의적인 지지와 련대의 표시였습니다.

주보중이 조선혁명에 대해 그처럼 호의적인 립장을 취한것은 우리가 유격운동의 초창기부터 그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여러차례의 련합작전을 통하여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것과도 관련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1차 북만원정때에는 원정대의 성원중 과반수를 뚝 떼서 주보중이네한테 넘겨주는것으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때 북만동무들과 함께 련합작전도 많이 했습니다.

2차 북만원정때에는 2군과 5군의 합동총지휘부까지 구성해놓고 큼직큼직하게 련합작전을 하였습니다. 주보중이 지휘를 맡고 내가 정치위원으로 되였으며 평남양(리형박)이 부지휘를 담당하였습니다. 총부산하의 6개 부대가 활동지역을 분담하였는데 서부의 안도부대는 주보중이, 위하부대는 내가 맡았습니다.

우리는 서선지휘부, 중선지휘부 … 하는 식으로 지역별 지휘부를 내오고 그 산하에 여러 부대들을 갈라서 배속시켜 무송으로부터 목릉일대를 오가며 련합작전을 하였습니다.

나와 주보중과의 인연은 이처럼 뿌리가 깊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인지 주보중은 국제련합군시절에도 크고작은 모든 문제를 나하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때 쏘련사람들과 협의할 문제가 제기되여도 주보중은 먼저 내 견해를 들어보았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하는가고 물으면 그는 간도시절부터 김사령의 조언에 습관된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의 주보중은 그 어떤 형식상 위계에 구애되지 않고 나를 언제나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으로, 조선혁명의 지도자로, 련합군내의 조선측대표로 인정하고 존대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게 되는 어떤 단체의 공동위원장처럼 서로 지지하고 협조하면서 공동으로 사업하였습니다. 그것은 쌍방이 서로 상대를 존중해주었기때문입니다. 나와 주보중과의 관계는 깊은 존경과 신뢰에 기초한 동지적, 형제적 관계였습니다.

내가 주보중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는 주요한 리유의 하나는 그가 동북혁명의 개척과 발전에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인민의 업적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한 사람이라는데 있었습니다.

언제인가 주보중은 자기는 두가지의 잊지 못할 사실을 기억하고있다고 하면서 그중 하나는 항일유격투쟁에서 조선사람들이 선봉적역할을 한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혁명에 대한 주보중의 립장은 명백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는것을 응당한것이라고 평가하였으며 동북혁명은 조선사람들을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는것을 언제나 주장하였습니다.

주보중은 동북항일련군 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였다고 하면서 공동투쟁로정에서 력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중항일무력의 련합을 늘 격찬하였습니다.

주보중은 동북혁명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논 선봉적역할에 대하여 지적하면서 1932년도에 건립된 억센 동만유격대와 1933년에 건립된 반석유격대, 주하유격대, 밀산유격대, 탕원유격대, 요하유격대는 모두 조선동지와 혁명적인 조선군중들에 의해 창건되였다, 후에 항일련군 제1, 2, 3, 4, 6, 7군으로 발전하였다, 제5군에도 적지 않은 우수한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항일련군 각 군내의 군장, 정치부주임으로부터 소대장, 지도원, 각급 군정령도간부는 모두 조선동지들이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주보중이 왕신림에게 보낸 아래의 서한내용들은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높이 평가했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김일성은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 조선인동지들중에서 가장 우수한 일군이다. 그는 만주남부와 압록강동부, 조선북부지대에서 매우 중요한 활동을 할수 있다.》[주체30(1941)년 7월 1일 왕신림에게 보낸 주보중의 서한]

《김일성은 남만 제1로군에서 현재 유일하게 중요한 간부이다. 양정우, 위증민 두 동지가 희생된 이후 오직 김일성이 남만유격운동의 령도와 남만전체와 관련된 문제들을 계속 책임지고있다.》[주체30(1941)년 9월 15일 왕신림에게 보낸 주보중의 서한]

 

내가 주보중의 인간상에서 좋다고 보는 다른 하나는 그가 혁명투쟁에 대한 원칙적립장과 자기 나라 혁명에 대한 열렬한 옹호정신을 늘 간직하고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보중은 중국혁명을 쏘련혁명에 복종시키든가 쏘련혁명의 부속물로 만들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에 기초한 쏘련혁명과의 련대, 쏘련옹호를 주장하면서도 항상 중국혁명의 독자성과 독자적발전을 견지하였습니다.

혁명에 대한 주보중의 이런 원칙적립장은 우리의 주장과 통하는것이였습니다. 혁명가의 금새란 혁명에 대한 자주적립장의 확고성에 정비례한다는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자주적립장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혁명가의 권위는 높아지고 자주성이 투철하면 투철할수록 혁명은 백전백승하는 법입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도 주보중은 변함없이 나를 김사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해방후 평양에 와서는 나를 한번도 김사령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보중은 자기를 이전날처럼 허물없이 주사령으로 불러달라고 하면서도 나를 꼭꼭 수상동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이 나를 부르는것이 어딘가 귀에 설고 또 우리 사이에 불필요한 간격을 두는것만 같아 그전처럼 김사령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럴적마다 주보중은 정색해서 그래서는 안되지요 하고 말하군했습니다.

나와 주보중은 가끔 론쟁도 벌렸습니다. 주보중이 한번 주장하면 요지부동이여서 양보를 얻어내기가 조련치 않았습니다. 나도 좀처럼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종당에 가서는 량자의 주장이 조절보충되여 견해의 일치점에 도달하군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사이의 우의는 더 두터워지고 리해도 더 깊어졌습니다.

나와 주보중은 드문히 사담도 나누었습니다. 주보중의 사담에서 기본을 이루는것은 가족과 동지들에 대한것이였습니다. 그에게는 주위라고 부르는 어린 딸애가 있었습니다. 마흔고개에 본 자식이다보니 그 애에 대한 사랑이 이만저만 아니였습니다. 그 애의 재롱이 한가지라도 늘면 주보중은 내앞에서 그것을 곧잘 자랑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에 행복한 아버지의 미소가 느슨하게 피여오르군하였습니다.

주보중과 그의 부인 왕일지는 오래동안 한부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만의 밀림속에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주보중이 안해와 딸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정기가 돌았습니다. 그는 사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부대주변에서 사는 나나이족사람들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가 하면 하바롭스크거리의 하숙집 로씨야인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는데 그 관찰력과 묘사솜씨가 그럴듯했습니다.

한번은 주보중이 운남성의 자기 고향마을에서 성대하게 쇠군한다는 닭싸움명절을 소개한적도 있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음력 2월 8일만 되면 새옷단장을 하고 나와 제 집 수탉의 목에 붉은 띠를 매여놓고 닭싸움을 시킨다고 하였습니다. 닭은 그 지방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되고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지방의 선조들은 닭을 기르면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닭을 믿고 가정을 추세운다는 말까지 전해온다고 하였습니다.

주보중은 국난을 타개하는데서는 닭따위를 믿을수 없겠지만 수탉처럼 적수를 물리치는데서는 용감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주보중은 과묵하고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사나이였으나 인정미가 있고 의리에 충실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덕은 덕으로 갚고 정에는 정으로 대답할줄 아는 사람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후반생이 잘 말해주고있습니다.

주보중은 여러해동안 국제련합군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중국혁명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면서도 국제주의적의무에 항상 충실하였습니다. 주보중이 만일 제것만 제것이라고 하면서 국제혁명임무를 외면하였거나 세계혁명만세만 부르면서 자기 나라 혁명을 방관시하였더라면 그는 시간을 내여 회고할만한 인물로 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나는 주보중이 동북지방에 소부대들을 끊임없이 파견하여 유격운동의 명맥을 줄기차게 이어가도록 할 때마다 그가 중국인민의 참된 아들이라는것을 느꼈으며 주보중이 련합군안의 각 민족부대들의 친선단결과 쏘련옹호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참된 국제주의전사라는것을 느꼈습니다.

주보중은 국제련합군의 대오관리와 살림살이도 잘하였습니다. 각이한 민족부대의 집합체인 국제련합군의 생활에서는 복잡한 문제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훈련강령의 작성과 훈련지도, 인사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구락부건설을 비롯한 생활문제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하지 않은 일이란 별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도주자가 생겨 그를 괴롭힌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자동차사고가 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여다닌적도 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이 조직된 초기에는 일부 쏘련군관들과 보조가 잘 맞지 않아 주보중이 좀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쏘련군사당국의 엄한 요구가 쏘련군관들의 생활기풍을 일변시켰습니다.

주보중은 언제나 말보다 실천적모범으로 대원들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북야영에서 락하산훈련을 할 때였습니다. 주보중은 훈련 첫날부터 대원들과 함께 락하훈련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뛰여내렸으나 락하산이 펴지지 않아 보조산을 펴고서야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어깨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중국동무들은 언제인가 나보고 주보중이 다시는 락하산을 타지 않도록 권고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보중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습니다. 권고했대야 이가 들지 않는다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입니다.

1951년 봄에 운남성부녀련합회 주임을 하던 왕일지가 위문단으로 평양에 왔다가 최고사령부로 나를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어려운 전쟁의 중하를 짊어지고있으면서도 건강한것을 보니 기쁘다고 하면서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가 그때 나에게 《보중의 부탁입니다. 절대로 위험한 전선길을 걷지 말고 신변안전에 최대로 주의해달라는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이 그런 부탁을 한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일지에게 《돌아가면 주사령에게 나의 인사를 전해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왕일지는 《이건 보중의 부탁이자 내 부탁이지요. 우리 중국사람들이 지금 수상동지의 신변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주보중은 국제련합군시절에도 소부대활동을 나간 내가 예정된 날자에 돌아오지 않으면 온밤 자리에 눕지 못하고 문밖을 들락날락하면서 걱정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국경과 국적을 초월한 우정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이 승리하고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청산된 새로운 력사적전환기에 주보중과 헤여지시였다. 그러나 우리 수령님과 주보중사이에는 그 이후에도 전투적우의에 찬 교제와 왕래가 계속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해방후 주보중과의 친분관계가 어떻게 이어졌는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고하시였다.

 

해방후 나는 주보중을 몇번 만났습니다. 두번은 우리 나라에서 만났고 마지막번은 베이징에서 만났습니다.

주보중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온것은 1946년 초봄이였습니다. 그를 남양에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때 주보중은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원 겸 길료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국민당반동들과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에 달려드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려들어갔습니다. 주보중은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력량대비와 군사정치정세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만주땅은 얼마동안 정치적공백지대로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습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습니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륙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통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련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주보중이 나를 만나려고 한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여 우리의 지원을 청한것도 그무렵이였습니다.

나는 주보중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죄다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우리 나라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조건 같은것은 아예 념두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것은 허용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있었습니다.

왕일지도 동북해방작전과 관련된 주보중의 부탁을 가지고 여러번 우리 나라에 왔습니다. 그가 처음 온것이 1946년 여름이 아니면 가을이였을것입니다. 그 당시 소화가 이끄는 료동군구의 무력이 안산, 해성에 대한 공격을 했습니다. 그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안산, 해성 지구에 주둔하고있던 국민당군대의 한 부대가 반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변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한 장개석은 반변을 철회하지 않으면 소멸해치우겠다고 하면서 맹렬한 공세를 들이댔습니다. 반란부대는 그 공격에 밀려 조중국경연안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런데 압록강이 막혀 더 갈데가 없게 되였습니다.

주보중은 반변부대를 구원할 방도를 협의하기 위해 대표들을 연방 우리 나라에 보냈습니다. 왕일지도 그 대표의 한사람으로 라남에 왔다갔습니다. 그후 우리는 반변부대가 우리 나라 령토를 거쳐 동부만주로 들어갈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왕일지를 만난것은 1947년초였습니다.

왕일지는 주보중을 대신하여 동북해방작전을 여러모로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인사부터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에 2만여명의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 2만여톤의 전략물자를 안전한곳으로 소개시키자면 아무래도 또 조선땅을 빌려야 할것 같은데 김장군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자리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즉시 해당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왕일지는 전체 동북민중이 김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을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사의를 표하였습니다.

그날 나는 왕일지에게 우리가 원동에서 헤여질 때 림춘추가 기념으로 준 시계를 그냥 가지고있는가고 물었습니다.

왕일지는 웃으면서 쏘련사람에게 주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조중친선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늙어서 허리가 꼬부라질 때까지 차고다니겠다고 하던 그 시계를 어떻게 되여 쏘련사람에게 주었는지는 모를 일이였습니다.

사실 그 시계는 림춘추가 몹시 애용하던 시계였습니다. 우리가 훈련기지를 떠나던 날 주보중과 왕일지는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 우리를 인차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림춘추가 손목에 차고있던 시계를 벗어 왕일지에게 주었습니다.

왕일지는 처음에 그 시계를 잘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귀물이였기때문입니다.

내가 받아두라고, 앞으로 그 시계가 은을 내게 될것이라고 말해서야 왕일지는 시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장춘이 해방된 다음 방송국을 장악하고 방송을 맡아하면서 무기운반에도 종종 참가했는데 그 시계덕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일지의 말에 의하면 무기운반을 할 때 쏘련군의 한 자동차운수대가 자기네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는것이였습니다. 시계는 바로 그 쏘련군운수대장에게 기념으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왕일지는 결국 그 시계는 중, 조, 쏘 세 나라 인민들의 전투적우의의 상징으로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왕일지를 동북으로 인차 돌려보내지 않고 휴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였기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에 와있는 동안 모란봉을 비롯하여 평양시의 여러곳을 참관하였습니다.

왕일지는 그후에도 전략물자운반에서 걸리고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에 왔습니다. 왕효명과 팽시로도 그무렵 평양에 와있었습니다. 세사람은 그때 국제련합군시절의 전우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습니다.

주보중이 그후 왕일지를 나에게 보낸것이 아마도 1947년 여름이였던것 같습니다. 동북민주련군이 50일동안의 전투에서 8만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42개의 성, 진을 해방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전선형편은 여전히 긴장한 때였습니다. 민주련군측 장병들은 신발의 부족으로 큰 곤난을 겪고있었습니다. 많은 장병들이 맨발로 진흙탕과 자갈밭을 행군한다고 하였습니다. 왕일지가 나를 찾아온것은 신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모든 신발공장들에서 다른 신발생산은 다 중지하고 중국의 전우들에게 보낼 신발만 생산할데 대한 긴급지령을 내렸습니다.

 

동북해방작전과 관련한 중국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주체36(1947)년의 첫 7개월동안에 우리 나라에서는 동북민주련군측을 위해 21만톤의 물자를 수송해주었고 그 이듬해 한해동안에는 30만 900톤의 물자를 수송해주었다고 한다.

조선을 통과한 인원은 주체35(1946)년 하반년에 18개 부대에 이르렀고 주체36(1947)년 9개월동안에 조선에 들어왔다가 동북근거지로 간 인원은 1만명이상이나 된다. 주체37(1948)년에 남양교두를 통과하여 근 9천명이 두만강을 건너갔고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의 적지 않은 민주당파, 무당파와 해외교포 대표들이 조선을 경유하여 할빈으로 갔다. 사업상 용무로 조선을 통과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수는 더욱 헤아릴수 없이 많다고 한다.

 

동북해방작전이 승리적으로 결속된 직후인 1948년 가을에 주보중은 왕일지와 딸 주위를 데리고 길림성정부 주석 겸 동북군구 부사령원의 자격으로 다시금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의 방문은 동북해방작전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준 우리에게 사의를 표시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주보중이 기차에 싣고온 많은 량의 밀가루는 바로 그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나는 그때 주보중부부를 금강산에 보냈습니다. 김책이 동행하면서 안내도 하고 말동무도 하게 해주었습니다. 주보중부부는 금강산에 있는 온천휴양소에서 얼마동안 휴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강산에서 돌아와 단풍경치에 감탄하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주보중부부는 평양에 돌아오자 김책과 함께 만경대도 방문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도 찾았습니다.

그후에는 내가 직접 주보중부부를 데리고 김정숙과 함께 안길의 묘도 찾고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주보중을 회고할 때면 조국해방전쟁 2계단때 있은 일을 종종 돌이켜보군합니다. 우리가 일시적후퇴를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낯모를 청년 2명이 나를 찾아와 주보중의 편지를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주보중이 동북해방작전을 지휘할 때부터 그의 부관과 운전수로 일하던 조선청년들인 현주영과 김길룡이였습니다. 주보중이 운남성 부성장으로 갈 때 데리고갔던 사람들인데 인민군대가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조선에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보냈다는것이였습니다.

주보중은 편지에서 몸은 비록 먼곳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선의 전호속에 있다고 하면서 똑똑하고 책임성이 높은 두 청년을 나에게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조국이 시련을 겪고있던 때 주보중의 그 편지가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혁명동지들사이의 우의란 바로 이런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간도와 북만에서 그리고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우리가 백설같이 순결한 감정을 가지고 나눈 전투적 우의와 우정은 변할수 없었습니다.

전우애란 생명력이 강한 사랑입니다. 전우애가 생명력이 강한 사랑으로 되는것은 그것이 초연속에서 련마된 사랑이고 동지를 대신하여 불속에도 들어갈수 있고 죽을수도 있는 사랑이기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리에 충실하는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의리로 하여 인간은 숭고한 존재로 되고 의리로 하여 인간생활은 백화만발한 화원처럼 아름다와지는것입니다.

내가 주보중을 마지막으로 만나본것은 1954년 12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주보중은 그때 고질병인 심장병이 도져 이화원 개수당에서 료양생활을 하고있었습니다. 주은래총리가 그를 베이징에 데려다 치료하도록 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보중은 나를 만나자 얼싸안고 눈굽을 적셨습니다. 그 무쇠같은 사나이가 그날은 눈물을 자꾸 흘렸습니다. 병상에 매인 몸이여서 그런지 마음마저 몹시 약해진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내 안부부터 물으면서 전쟁 3년간에 고생이 얼마나 많았겠는가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주보중은 병석에서도 쉬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여 《동북항일유격전쟁과 항일련군》이라는 큰 책도 남기였습니다. 이화원에서의 상봉이 있은 때로부터 10년이 되는 1964년 2월 주보중은 오랜 병환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령전에 조전을 보내던 날은 손에 일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집무실을 거닐며 주보중을 추억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 나는 채세영과도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나를 꽉 부둥켜안고 《로징》, 《로징》하면서 꺼칠꺼칠한 볼로 내 볼을 막 비벼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 나보다 스무살가량이나 나이가 더 많은 채세영이 손우의 사람을 찾을 때처럼 《로》자까지 붙여서 부르는 바람에 나는 이 김일성을 중늙은이로 만들 작정인가고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김사령은 자기를 공산주의자로 이끌어준 선배인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고 하였습니다.

채사령의 본명이 채조승입니다. 일본군대가 만주땅을 먹기전에는 화룡현 어디에선가 경찰서장을 했다고 합니다. 9.18사변이 터지자 그는 경찰들로 자그마한 무장대를 무어가지고 반만항일에 나섰습니다.

내가 채세영을 알게 된것은 그가 왕청지방에서 구국군의 1개 부대를 지휘하던 1933년이였습니다. 오의성부대와의 합작을 성사시킨후 채세영을 찾아갔지만 담판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채세영은 련공을 하였고 나중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여 나와 두터운 친교를 맺었습니다. 채세영이 하고는 동녕현성전투도 같이하고 라자구전투도 같이하였습니다.

그후 북만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채세영은 동북항일련군 5군 군장으로까지 되였습니다. 2차로 북만땅에 원정을 갔을 때 우리는 채세영이네 부대와 련합작전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 채세영은 중선지휘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액목과 녕안 일대에서 련합작전을 하였습니다.

채세영은 나를 혁명선배로 존대해주면서 내앞에서 늘 어깨를 낮추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숭고한 인격미를 느꼈습니다.

나와 채세영은 국제련합군이 편성된 다음에 1지대와 4지대를 각각 지휘하였습니다.

이제는 채세영도 옛사람이 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것이 어느해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채세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사상이 한 인간을 어떻게 개조시켰는가를 보여주는 생동한 화폭입니다.

채세영의 미망인 호진일이 아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그는 동북항일련군 5군에 있다가 훈련기지에 왔댔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호진일이 아들과 함께 금수산의사당 홀에 들어설 때 나는 그 백발너머로 채세영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의 중국인전우들가운데는 동북항일련군 3로군 정치위원을 하던 풍중운도 있었습니다. 풍중운은 청화대학 당지부 서기를 했으며 한때는 할빈에서 교원도 하였습니다. 혁명의 길에 들어선 다음에는 북만성위와 산하 여러 현들에서 당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는 감옥살이도 두번이나 한 사람입니다. 당사업과정에 범한 과오로 책벌을 받은적도 있고 두차례나 총상을 당한적도 있습니다.

풍중운은 동북항일유격운동과 쏘련과의 군사정치적련대문제를 풀기 위하여 1939년 가을부터 1940년 2월까지의 기간에 쏘련에 가서 활동하였습니다. 1940년대초에 열린 북만성위와 길동성위의 련석회의, 그후에 있은 쏘련당국과의 회의를 마련하는데서도 그의 노력이 컸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는 정치부 정보과장으로 있으면서 군관교육을 위한 정치과목교원도 하였습니다.

풍중운은 원동의 훈련기지에 가있을 때 오래전에 헤여진 처자들의 생사여부를 몰라 몹시 속을 썩이였습니다. 그가 처자생각으로 잠 못들거나 우울해할 때 동무들은 그에게 생사를 모르는 처자는 십중팔구 잘못된것 같은데 이제라도 새 가정을 꾸리고 안착해서 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풍중운은 그때마다 일생을 홀아비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녀자는 보지 않겠다고 딱 잘라매군하였습니다. 다시 만날 가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번 정한 안해를 변함없이 기다리며 사랑하는 거기에도 혁명가, 인간으로서의 그의 고결하고 강직한 풍모가 비껴있었습니다.

밤에 여가가 생길 때면 산책을 하며 애인을 그리는 중국노래를 흥얼거리던 풍중운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방후 풍중운은 그렇게도 그리던 안해를 만나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주보중처럼 깊은 존경과 감사의 정을 가지고 조선인민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영웅적투쟁을 언제나 격찬하였습니다.

 

풍중운은 송강성인민정부 주석으로 있을 때 《동북항일련군 14년 고투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 담겨진 일부 내용들을 아래에 소개한다.

《항련 제2군의 전신은 동만유격대이다. … 동만항일유격대는 원래는 연길, 왕청, 화룡, 훈춘의 4개의 반일유격대대로 나뉘여져있었다. 간도지구의 주민은 조선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따라서 동만유격대는 조선사람들이 주요골간으로 되고있었다.

…저명한 조선의 민족적영웅 김일성장군의 령솔하에 안도, 림강, 장백, 압록강에 진출하여… 형제군인 항련 제1군 양정우사령과 회합하였다.

…또한 김일성장군의 령솔하에 조선조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여러차례 조선본토의 북부지역에 깊숙이 진출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여기에서 일제침략자들과 수차에 걸치는 혈전을 벌렸으며 또한 비밀리에 조선인민의 조국광복회 지하조직들을 조직하였다.

…해방후 조선국내 남녀로소 모두가 한결같이 김일성장군을 환영하였으며 민족적영웅 김일성장군 만세를 열렬히 웨치였다.》

 

송강성인민정부 주석으로 있던 풍중운은 그후 베이징도서관 관장, 수리전력부 부부장 등을 력임하였습니다. 그는 수리전력부 부부장을 할 때 조중 량국간의 발전소공동리용문제때문에 우리 나라를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1958년 9월에 풍중운이 중국수리전력부대표단 단장으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수풍발전소에서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 발전소시설들을 돌아보고 언제우에 올라가 수풍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부감하면서 압록강에 새로운 발전소를 공동으로 건설하며 수력발전분야에서 두 나라사이의 협조를 더욱 강화해나갈데 대해 의논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풍중운은 그후 문화대혁명때 우파로 몰려 고생하다가 1968년 봄에 감옥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생일 80돐때 풍중운의 부인 설문이 아들딸들을 데리고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풍중운이 그렇게도 그리던 부인이였습니다. 항일전쟁시기 만주성위 일군이였던 설문은 자그마한 키에 지성이 넘치는 용모를 가진 녀인이였습니다.

설문의 말에 의하면 풍중운은 옥사한 때로부터 근 10년이 되는 1977년말에 명예회복이 되여 베이징교외에 있는 팔보산렬사릉에 안장되였다고 합니다.

풍중운의 가족일행이 눈물을 뿌리며 내 품에 안길 때 나도 흘러간 옛일을 추억하며 뜨거운것을 삼켰습니다.

풍중운의 유가족들은 그후에도 우리 나라를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어느해인가 풍중운의 맏딸 풍억라가 평양에 와있을 때 환갑을 맞게 되였습니다. 그때 김정일동무가 그에게 환갑상을 보내주었습니다.

나와 풍중운사이에 맺어진 전투적우의와 친분관계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 의해 맥맥히 이어지고있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 정치일군으로 활동한 장수전도 내가 가깝게 지낸 중국전우들중 한사람입니다. 장수전은 북만에 있을 때 3로군 군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리조린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는 풍중운과도 막역한 사이였지만 김책과도 허물없는 사이였습니다.

그의 풍모에서 특징적인것은 겸허성과 헌신성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는 첫 대면에 벌써 친구로 되였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동지들을 내세우고 힘든 일이 나서면 제몸을 내대군하는 그에게 나는 정이 푹 들었습니다.

국제당이 가지고있던 유격부대지휘성원들에 대한 평정서에서는 장수전을 훌륭한 조직자로, 용감하고 정력적이며 창발성이 높은 유격대지도자로 평가하고있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그가 창작한 《로영의 노래》를 북만유격대원들이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다음 장수전은 중공 송강지구위원회 서기, 송강성 부성장 등 중임을 맡아가지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다가 할빈에서 국민당특무들에게 암살되였습니다.

이제는 주보중도 장수전도 풍중운도 다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1992년 4월 국제련합군시절의 옛 전우들이 나를 찾아와 나의 생일 80돐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진뢰와 그의 안해 리민 그리고 리재덕… 그들은 다 귀빈들이였습니다.

진뢰는 원래 동북항일련군 6군 군부선전과장도 하고 3련대 정치주임도 한 사람이였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는 소대장을 하였고 해방후에는 중공 흑룡강성위 서기, 흑룡강성장 등을 하였습니다. 그가 흑룡강성친선대표단을 이끌고 우리 나라에 온것은 흑룡강성당고문위원회 주임을 할 때입니다.

진뢰는 생일 80돐을 맞는 나에게 《천추세 축 김일성동지 팔추대수》라고 쓴 족자를 선물하였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내가 일제와 미제를 반대하는 간고한 투쟁을 승리에로 이끌고 삼천리강산에 인민의 락원을 일떠세웠다고 하면서 내가 고려국과 더불어 천만년 장수하기를 축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진뢰는 서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였습니다.

리민은 항일전쟁때 부르던 가요 100곡을 묶은 혁명가요집을 선물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 그는 방송원을 하였습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친근한 린방으로 살아온 조중 두 나라 인민들과 혁명가들은 항일대전의 그날부터 장장 반세기이상이나 한전호에서 피와 살과 뼈를 나누며 함께 싸워왔습니다. 이 고귀한 투쟁전통과 형제적우의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 앞으로도 계속 아름다운 화원으로 활짝 꽃펴나게 될것입니다.
 
주체83(1994)년 7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갑자기 서거하시였다는 보도가 전파를 타고 온 세계에 퍼져갔다. 이 청천벽력같은 부음앞에서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온 세계가 눈물을 뿌리며 그이의 서거를 슬퍼하였다.
진뢰와 리민은 우리 수령님과 영결하기 위해 승용차로 할빈을 떠났다.
심양에 있는 우리 나라 총령사관으로부터 진뢰부부가 륙로로 우리 나라에 오고있다는 소식을 들으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압록강교두에서 그들을 맞아 평양으로 안내하기 위한 대책을 친히 세워주시였다. 평안북도당위원회에서 마련한 승용차가 압록강을 건너온 진뢰부부를 태우고 신안주까지 왔을 때 거기서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승용차가 그들 부부를 기다리고있었다.
할빈을 떠나 장장 2,500리를 밤낮으로 이틀동안이나 달려오면서도 진뢰부부를 잠들지 못하게 한것은 항일전쟁의 그날부터 그들의 뇌리에 깊이 찍혀진 우리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였다. 그들 부부가 위대한 수령님의 령전에 당도했을 때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있었다. 오랜 려로에서 구겨진 옷의 주름살을 펼 사이도 없이 우리 수령님의 곁으로 달려온 그들 부부는 경애하는 주석동지, 당신의 전우 진뢰와 리민이 왔습니다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뿌리였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추도대회 주석단 단상에서 진뢰부부를 만나주시였다.
주보중의 딸 주위는 위대한 수령님을 다시 만나뵙지 못한것을 일생의 한으로 애석하게 생각하고있었다.
주체84(1995)년 10월에 그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 편지와 함께 자기가 손수 편집한 화첩을 올리였다. 그 화첩에는 주보중의 한생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진자료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의 영상을 수록한 사진문헌들도 여러상 있었다.
주위가 조선방문의 소망을 이룬것은 주체85(1996)년 여름이였다. 어린시절 원동의 훈련기지에서부터 고이 간직해온 우리 수령님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안고 숨가쁘게 평양으로 달려온 주위는 려장을 풀기 바쁘게 금수산기념궁전부터 찾았다.
《김일성주석님! … 주위가 왔습니다. 한번만이라도 눈을 뜨고 이 주위를 봐주실수 없습니까. 주석님…》
그는 입속말로 이렇게 뇌이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주위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조중친선을 빛내이는 한떨기 꽃으로 더욱 싱싱하게 피여날 맹세가 불타올랐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