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1-4. 오중흡과 7련대
페이지 정보
본문
4. 오중흡과 7련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어느해인가 장편소설 《준엄한 전구》를 읽으시다가 오중흡이 희생되는 장면에서 너무도 가슴이 아파 더 읽지 못하고 오래전에 자신의 곁을 떠나간 그를 생각하며 밤을 밝히시였다고 한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대부대선회작전의 1단계를 빛나게 장식한 돈화현 륙과송전투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오중흡의 최후를 회상하시였으며 오중흡의 영웅적생애를 돌이켜보실 때마다 항일혁명의 나날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한 7련대의 결사옹위정신과 투쟁업적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회상하시였다.
우리가 오중흡을 잃은것은 륙과송전투에서였습니다. 그 전투에서 중대장 최일현과 기관총소대장 강흥석이도 잃었습니다. 3명 다 내가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던 지휘관들이였는데 분하게도 한날한시에 다 잃었습니다. 항일전쟁을 하는 과정에 많은 전우들을 잃었는데 오중흡을 잃은것이 제일 분하고 가슴아팠습니다.
오중흡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리는 작지만 그림자가 큰 사람이라고 표현할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크다는것은 발자취가 크고 이루어놓은 업적이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 부대의 지휘관들중에 최춘국이나 오중흡이만큼 소리를 작게 내는 지휘관도 아마 없었을것입니다. 소리를 작게 낸다는것은 자기를 잘 나타내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할수 있고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수 있을것입니다. 오중흡은 군사지휘관으로서는 드물다고 할만치 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이였으며 소리는 작게 내면서도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하고 소박한 일군이였습니다.
최춘국을 가리켜 새색시같은 사람이라고들 했는데 오중흡은 그보다 더 얌전한 사람이였습니다. 부족점을 찾아내자고 하면 어느것이라고 딱 찍어 말할수 없는 그런 류형의 인물이였습니다.
오중흡은 일상생활에서는 조용하고 얌전한것 같지만 혁명실천에 들어가서는 매우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리고 일단 결심만 서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호랑이같은 사나이였습니다. 어지간한 난관 같은것은 탁탁 퉁겨버리면서 무슨 일이든지 끝장을 보고야말았으며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전에는 잠도 휴식도 몰랐습니다.
오중흡은 정의를 옹호하는 정신이 강한 반면에 부정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보다 일찍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된것은 정의에 대한 강한 옹호의 정신과 부정의에 대한 비타협성때문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해인가 오중흡이네는 가물이 들어 농사를 망친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중흡의 아버지는 농사형편이 여사여사하니 금년만은 좀 사정을 보아달라고 지주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린색하고 포악한 지주는 동정은 고사하고 도적놈이라는 당치않은 감투를 씌우며 오중흡의 아버지를 단장으로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있던 오중흡은 참다 못해 단장을 휘두르는 지주를 도리깨로 후려갈기였습니다. 그 당시 오중흡의 나이가 14살인가 15살이였다고 하니 그가 어린시절부터 정의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수 있을것입니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은 계급적으로도 빨리 각성되고 혁명에도 빨리 뛰여듭니다. 그리고 대오의 선봉에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싸워나가는 훌륭한 투사로 성장합니다.
오태희로인의 말에 의하면 어린시절에 그는 독립군놀이를 몹시 즐겼다고 합니다. 그가 살던 동네는 김좌진이 청총말을 타고 왔다갔다하던곳이였습니다. 그러니 독립군물을 먹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촌형 오중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 공산주의물을 먹었습니다. 그가 일찍부터 혁명에 눈을 뜬것은 나라를 강탈한자들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심이 강했기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오중흡이만큼 담차고 용감한 지휘관은 드물었습니다.
예로부터 명장들은 무인의 도를 닦는데서 지, 인과 함께 담과 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배양하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자기 새끼를 벼랑에서 굴리는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오중흡은 강무당에도 간적이 없고 도사도 만난적이 없지만 항일의 불길속에서 혁명가가 지녀야 할 담력과 용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1939년 추석을 앞두고 화룡현 3도구부근에 있는 금광을 습격할 때 전쟁터에서 보기 드문 일화를 창조하였습니다.
그 싸움을 지휘할 때 적탄이 오중흡의 이마에 와맞았습니다. 그런데 좀 빗맞은탓인지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가 이마에 적탄을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전투지휘를 계속한것은 기적이였습니다.
사람의 얄팍한 두개골이 아무리 빗맞는다 해도 탄알을 막는다는것은 믿을수 없는 일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였습니다. 나도 전령병이 붕대를 감아주었다는 그 상처를 보았습니다.
동무들이 오중흡더러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느님》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말해주자 그는 일본놈들의 눈먼총알이 겁쟁이의 이마는 뚫을수 있을는지 모르나 공산주의자의 이마는 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마에 적탄을 맞고도 전투를 계속 지휘하고있을 때 이번에는 적들이 던진 수류탄이 성벽을 넘어와서 대원들의 발밑에 떨어졌습니다. 위험한 순간이였습니다. 오중흡은 발밑에 와떨어진 수류탄을 잽싸게 집어서 성벽너머로 힘껏 던지였습니다.
적들은 자기네가 던진 수류탄이 되넘어오자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오중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대원들을 돌격에로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또하나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수류탄이란 투척시간부터 폭발시간까지 불과 2~3초의 여유밖에 없는 근거리살상무기입니다. 폭발직전의 수류탄을 손에 집어든다는것자체가 벌써 하나의 모험입니다. 오중흡은 바로 그런 위태위태한 모험을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해낸 사람입니다.
이 두 일화를 통해서도 동무들은 오중흡의 인간상을 파악할수 있을것입니다.
오중흡은 싸움을 아주 재치있게 하는 군사지휘관이였습니다.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장점은 우선 정황판단과 결심이 빠르고 전투조직이 치밀한것이였습니다. 그는 일단 결심이 선 다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결단성있게 밀고나가는 특기를 가지고 마치 씨름을 잘하는 사람이 묘한 수를 써서 힘이 센 적수를 넘어뜨리듯이 아무리 우세한 적과 맞다들어도 그에 알맞는 전술을 적용하여 실수없이 소탕해버리군하였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최현이나 최춘국에 못지 않은 세련된 싸움군이였습니다. 그런데 노상 사령부와 같이 다니다보니 그에 대한 소문이 적게 났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혁명을 해오면서 오중흡만큼 조직성이 강하고 규률성이 강한 사람을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조직성이 강하고 규률성이 강한 투사라는것은 무엇보다도 상급의 명령, 지시에 대한 절대성, 무조건성으로 표현되였습니다. 임무를 받을 때에는 《예!》하고 무조건 접수하였으며 무슨 일에서든지 변명할줄을 몰랐습니다.
오중흡은 우리가 주는 명령과 지시를 1분1초도 어기지 않고 무조건 철저히 수행하군하였습니다. 어디 가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언제까지 어느 련락장소에 도착하라고 하면 꼭꼭 어김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제시간에 도착하였으며 간혹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기게 되면 소부대를 남겨두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자기자신은 기본부대를 데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약속한 날자에 돌아오군하였습니다. 그럴때마다 그는 우리가 제때에 돌아가지 못하면 사령관동지가 근심한다고 하면서 대원들을 교양하고 고무하였습니다.
오중흡련대장은 부대를 관리하며 대원들을 교육교양하는데서도 반드시 우리가 하라는대로만 하는 모범적인 지휘관이였습니다. 그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그는 정규군에서처럼 부대관리를 알뜰하고 깐지게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7련대에는 꿰진 신을 신거나 찢어진 바지를 입고다니는 대원들이 없었습니다. 오중흡은 행군하다가도 옷이 꿰진것을 보면 도중휴식시간에 옷을 다 기워입게 하였습니다. 그가 부대관리를 잘하였기때문에 그의 수하에서는 한건의 사건사고도 나지 않았습니다.
오중흡동무는 내 입에서 무심결에 흘러나오는 혼자소리도 다 사령관의 요구나 명령으로 받아들이였습니다.
1939년 추석을 앞둔 어느날 나는 올기강밀영에서 오백룡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지나가는 소리로 추석이 가까와오는데… 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어느새 오중흡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나의 의도나 지향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포착하고 받아들일줄 아는 오중흡은 그 말을 그저 스쳐보내지 않고 사령관동지가 왜 추석이 가까와온다고 했겠는가, 혹시 신입대원들이 추석을 맞으면서 고향생각을 하게 되리라는것을 미리부터 내다보고 명절준비가 걱정되여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자기나름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며칠후 추석준비를 위한 전투를 조직해서 많은 식량과 식료품을 로획해가지고왔는데 월병까지 있었습니다. 내가 오중흡의 요청으로 7련대 대원들과 사령부성원들에게 월병의 유래를 이야기해준것이 바로 그해 추석입니다.
오중흡은 내가 내는 총소리까지도 귀신처럼 알아맞추는 충신이였습니다. 고난의 행군도중에 우리는 집단행군을 하다가 얼마동안 분산행동에로 넘어간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오중흡이와 헤여지면서 봄에 삼수골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사람들은 13도구골짜기를 삼수골이라고 불렀습니다.
1939년 3월 초순에 나는 삼수골의 어느 한 부락을 습격하는 전투를 조직하였습니다. 오중흡은 그때 우리가 내는 총소리를 듣고 《이것은 사령관동지께서 울린 총소리요. 불과 1개 중대의 력량밖에 안되는 사령부가 로출되여 적들의 포위에 들수 있소. 동무들, 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해야 하오!》라고 하면서 앞장에서 우리가 있는곳을 향해 달리였다고 합니다.
오중흡은 사람이 워낙 진국이였습니다.
그가 왕청현 원가점이라는곳에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유격대에 갓 입대했을 때의 이야기를 한가지 하겠습니다.
그 당시 왕청유격대에는 총이 부족하였습니다. 유격대에 입대한 사람도 많고 입대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총이 없는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총이 없는 대원들은 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에 나오는것처럼 칼을 차고다니거나 창을 메고다니였습니다.
오중흡도 역시 처음에는 야장간에서 만들어낸 칼을 차고다니였습니다.
왕청유격대에서는 총이 없는 대원들을 늘 대렬의 맨뒤에 세우군하였습니다.
오중흡은 보초를 설 때마다 다른 대원들의 총을 빌려가지고 나가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조금도 창피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중흡이 몇달동안 칼만 차고다니기때문에 동무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늘 놀려주군하였습니다.
어느날 나는 오중흡에게 중흡동무, 동문 밤낮 칼을 차고 남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데 그래도 섭섭하지 않은가고 정색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오중흡은 이 칼도 큰것으로 생각합니다, 총이 어떻게 다 차례지겠습니까, 총이야 싸움을 하면 아무때건 생기게 되겠지요 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총을 메고다닐 때 칼과 작탄을 차고 남들의 뒤를 따라다니자니 사실이야 얼마나 거북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칼을 차고다니였습니다.
우리는 창이나 칼을 가지고다니는 유격대원들에게 총을 해결해주기 위하여 전투를 조직하였습니다. 총을 얻자면 전투를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문에서 삼차구를 거쳐 목단강으로 들어가는 철도공사장을 습격하였습니다.
오중흡동무는 이 전투에서 보총을 여러 자루나 빼앗아냈습니다. 그는 적장교가 차고있던 권총까지 빼앗아왔습니다.
로획한 무기를 누구에게 수여하는가 하는것은 전투총화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용감성을 발휘하고 규률을 잘 지키는 대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총을 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철도공사장습격전투와 관련된 총화모임에는 나도 참가하였습니다. 이 모임에서 오중흡은 비로소 무기를 수여받았습니다.
그후 오중흡은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등의 군직을 차례차례 밟아가며 련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는 혁명군대지휘관의 표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오중흡의 장점을 들자면 그밖에도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오중흡은 얌전한 사람이지만 일상생활에서 쾌활하고 락천적이였으며 붙임성이 좋고 향학열도 높았습니다. 그는 허튼소리를 잘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품행이 단정하였고 동지들이 어떤 비판을 주든지 그것을 다 접수하고 성실하게 고쳐나갔습니다. 또한 부대의 살림살이를 알뜰하고 깐지게 하였으며 자력갱생, 간고분투하는 정신도 남보다 높았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서의 오중흡의 성장은 그대로 7련대의 성장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7련대의 전신은 독립련대였습니다. 독립련대는 왕청, 연길,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각 현들에서 1개 중대씩 선발하여 편성한 련대입니다.
왕청현에서는 7중대가 독립련대에 망라되였습니다. 왕청 7중대라는것은 왕청 1중대에서 세간난 중대인데 독립련대에 들어가서는 2중대로 되였습니다. 오중흡은 독립련대 2중대에서 청년간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독립련대는 1935년에 독립1사 제2련대로 되였다가 남호두회의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사단이 새로 편성될 때 사단의 7련대로 되였습니다. 7련대는 새 사단의 핵심부대였습니다.
오중흡, 오백룡, 강증룡 등은 이러한 변천과정을 걸어온 7련대의 력사와 함께 체계적으로 발전하여 련대장으로도 되고 중대장으로 되고 소대장으로 되였습니다.
7련대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우리는 왕청시절부터 오중흡을 체계적으로 키워온것처럼 7련대도 력량을 집중하고 다른 단위보다 지도를 심화시켜 새 사단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모범련대로 꾸리였습니다. 우선 소대장, 정치지도원, 중대장을 비롯하여 련대의 지휘간부들을 좋은 사람들로 꾸리고 그들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시키기 위한 교육교양사업을 전망성있게 진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련대의 지휘관들에게 유격전에 필요한 각종 교범은 물론, 숙영법, 작식법, 행군법, 방위판정법, 가설무대를 만드는 방법과 연예공연종목을 작성하고 소개문을 쓰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다 배워주었습니다.
7련대를 모범련대로 꾸리기 위해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사단간부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습니다. 그들은 련대에 자주 내려가서 지휘관들을 정치군사적으로 계몽시키고 걸린 고리들을 제때에 풀어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7련대는 모범련대로 되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자랑으로 되였습니다.
우리는 7련대에서 단련된 동무들을 다른 부대들에 지휘관으로 많이 파견하였습니다. 위증민도 우리에게 군정간부들을 달라고 제기할 때에는 7련대의 지휘관들을 많이 요구하였습니다. 7련대에서 단련된 지휘관들이 다른 부대들에 가면 그들이 또 많은 지휘관들과 모범전투원들을 길러냈습니다. 7련대는 그야말로 군정간부들을 키워내는 원종장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리동학인가 박수만이 지휘하던 경위중대도 후에 모범중대로 되였습니다. 이 중대에 7련대출신들이 많이 망라되여있었습니다.
혁명군에 정치군사간부들을 양성하는 상설적인 교육기관들이 없는 조건에서 7련대를 통해 계통적으로 육성한 간부들을 다른 부대들에 끊임없이 파견하는 방법으로 간부들에 대한 수요를 충당한것은 우리가 항일혁명을 하는 과정에 축적한 또하나의 좋은 경험이였습니다. 시범을 창조하고 그것을 전국에 일반화하는 우리 당의 전통적인 사업방법은 이처럼 항일혁명과정에 창조된 경험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중에는 7련대에서 배출된 지휘관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오중흡, 김주현, 리동학, 리동걸, 오백룡, 김택환, 최일현, 오일남, 손태춘, 강흥석, 강증룡 등은 7련대출신들입니다. 7련대의 중대정치지도원들가운데는 처처벌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은 최씨였던것 같습니다. 이름은 무엇이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눈언저리가 늘 젖어있는것 같다고 하여 처처벌이라고 불렀는데 잘 싸우다가 소탕하전투에서 김산호와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최일현은 북선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할 때 대장감으로 지목해두었던 사람입니다. 김택환중대장도 똑똑한 사람입니다.
지휘관이 쇠소리가 나는 사람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쇠소리가 나는 사람들로 되는것 같습니다. 중대장은 련대장을 닮고 소대장은 중대장을 닮으며 대원들은 소대장이나 분대장을 닮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휘간부들의 인품과 성미를 닮게 됩니다. 7련대는 통털어 오중흡을 닮아서 강철같은 련대가 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다른 부대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오중흡이네 7련대를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백두산근거지에 있을 때 1군 조국안사장이 우리 부대와 함께 얼마동안 생활해보더니 똑똑한 사람을 하나 골라달라고 하면서 기관총을 잘 다루는 사람을 주었으면 했습니다. 조국안이 욕심낸 사람이 바로 7련대의 이름난 소대장이며 기관총수인 강증룡이였습니다. 강증룡은 박록금의 남편입니다.
강증룡에게 1군 2사에 갈 의향이 없는가고 물으니 그는 대번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박록금이와 헤여지기 싫어서 그러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안해와 갈라지는것은 그래도 참을수 있는데 장군님슬하를 떠나기가 싫고 오중흡이 있는 7련대를 떠나는것이 아쉽다는것이였습니다. 그는 오중흡에게 정이 푹 든 사람이였습니다. 오중흡과 강증룡은 왕청시절의 죽마고우였고 왕청1중대시절부터 줄곧 한중대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이였습니다.
오백룡이도 8련대의 기관총수로 가게 되였을 때 오중흡이 지휘하는 7련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가지 사실만 놓고보더라도 오중흡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수 있을것입니다. 7련대 대원들이 자기 부대에 대한 애정과 단결력이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과오를 범했거나 정치군사적실무가 약한 사람들도 7련대에 보내여 단련시켰습니다.
1938년 림강현 신태자부근의 한 밀영에서 기관총소대를 책임진 사람이 과오를 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무능력도 어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림시로 7련대 4중대에 파견하였습니다.
나는 그 기관총소대장을 오중흡이네한테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간부로서 자기가 데리고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질줄 모르면 벌써 자격이 없는것이다. 자기 한사람의 잘못으로 숱한 대원들이 고생한다는것을 진심으로 느낄줄 알아야만 간부구실을 할수 있다. 동무는 7련대에 가서 좀더 배우고 단련하는것이 좋겠다.
기관총소대장은 7련대에 가서 오중흡의 도움으로 딴 사람이 되여가지고 원직으로 돌아왔습니다.
7련대는 조선인민혁명군 관하부대들중에서 전투력이 제일 강한 부대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사령부에서는 가장 긴급하고 책임적인 과업은 항상 7련대에 주었습니다. 7련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주타격수였습니다.
나는 행군때나 숙영할 때에도 전투력이 강하고 책임성이 높은 7련대를 늘 후위에 배치하군했습니다. 적들의 추격과 불의습격이 노상 뒤따르는 유격대의 생활에서는 후위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숙영을 조직할 때마다 항상 사령부로부터 행군해오던 방향으로 300~500메터쯤 되는 거리에 전투력이 강한 1개부대를 후위부대로 남겨두군했습니다. 사령부에서 후위부대까지의 거리가 1~2키로메터 정도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후위부대와 사령부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보초를 세우거나 감시성원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인민혁명군《토벌》에 동원된 적들은 전방에서 길목을 지키다가 공격해오는 전법을 별로 쓰지 않고 뒤에서 유격대의 꼬리를 물고 추격해오는 전법을 많이 썼습니다. 우리가 전투력이 강한 부대를 후위에 세운것은 그때문이였습니다.
1939년 봄에 무산지구로 진출할 때에도 우리는 청봉숙영지에서 7련대를 후위에 배치하였습니다. 7련대 대원들은 밤에 우등불도 피우지 못했습니다. 불을 피우면 적들에게 발견될수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힘들다거나 고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인민군대에서는 오중흡과 같은 사람들을 전형으로 내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오중흡을 전형으로 내세우라는것은 오중흡을 따라배우라는 뜻입니다.
김정일동무는 벌써 1960년대초에 인민군대안에서 7련대를 따라배울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중흡이 어떤 지휘관이고 7련대가 어떤 련대인가를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면 간부들과 당원들, 인민군군인들이 오중흡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7련대에서 무엇을 따라배워야 하겠습니까.
오중흡의 장점을 여러가지로 분석할수 있겠지만 나는 그 장점들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것이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이라고 봅니다.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이 어떻게 표현되였는가. 그것은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였습니다.
오중흡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상과 로선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민족해방운동과 관련된 우리의 사상과 로선을 언제나 정당한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심오히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 사령관의 사상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였으며 그 사상과 배치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맹호가 되여 투쟁했습니다.
오중흡은 우리의 사상과 사령관이 지시한 군사작전적방침들을 법으로 여기였고 지상의 명령으로 받아들이였습니다. 오중흡이한테는 잡사상이 붙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잡사상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상적으로 결백하면 구정물속에 들어가도 썩지 않습니다.
련대장의 사상이 견실하다나니 7련대는 모두가 자기 사령관과 같은 숨을 쉬였습니다.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은 또한 자기 사령관의 명령,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행정신과 그 명령, 지시 관철에서의 높은 책임감으로 표현되였습니다. 오중흡은 사령관이 주는 명령, 지시라면 한치도 드티지 않고 최상의 수준에서 무조건 집행하였습니다. 그 명령, 지시가 아무리 과한것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타발하거나 불평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령관이 준 과업을 수행한 다음에는 꼭꼭 그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명령, 지시 집행과정에서 나타난 부족점에 대하여 하나도 숨기지 않고 낱낱이 총화하였습니다.
사령관이 준 명령, 지시에 대한 오중흡의 태도에서 우리 일군들이 본받아야 할 다른 하나의 우점은 한가지 일을 해낸 다음에는 련이어 다른 일거리를 맡겨달라고 간청해나서는 점이였습니다. 오중흡은 한자리에서 맴도는것을 싫어했습니다. 한가지 일을 수행하고는 꼭꼭 다른 일거리를 붙잡군하였습니다. 지금식으로 표현하면 계속혁신, 계속전진하는 사람이였습니다. 7련대가 다른 련대들보다 고생을 특별히 많이 한것은 오중흡이 일욕심이 많은 련대장이였다는 사정과도 관련됩니다.
오중흡은 쉬운 일거리를 맡길 때보다 어려운 일을 맡길 때 더 기뻐하는 특이한 기질을 가진 군사지휘관이였습니다.
혁명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 자기 사령관에 대한 오중흡의 충실성은 사령관을 정치사상적으로뿐아니라 목숨으로 옹호보위하려는 결사옹위정신에서도 표현되였습니다. 오중흡은 사령관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련대와 함께 육탄이 되여 뛰여들었고 어떤 간고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홍두산에서 리두수중대를 데리고 수백명의 적과 어려운 싸움을 하고있을 때 멀리 떨어진곳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오중흡은 사령관동지의 신변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적의 숙영지를 불이 번쩍 나게 기습하였습니다. 후방이 기습당하게 되자 살아남은 적들은 하는수없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내가 오중흡의 덕을 단단히 보았습니다.
만강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부대의 철수를 지휘하는 나를 육탄으로 막아나선것도 오중흡이였고 7련대 성원들이였습니다. 단두산전투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백명의 적을 꼬리에 달고 사령부가 철수하였는데 그 후위에서 7련대가 우리를 엄호하였습니다.
자기 사령관에 대한 오중흡의 남다른 충실성은 고난의 행군시기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였습니다. 오중흡은 행군의 첫 시기 갈지자전술을 쓰면서 근 보름동안이나 결사적인 후위전을 벌려 사령부를 보위하였습니다.
내가 다른 기회에도 말했지만 고난의 행군을 하는 과정에 우리는 7도구치기에서 대부대집단행동이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집단행동으로부터 분산행동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우리와 헤여진 오중흡은 자진해서 사령부로 가장하고 두달남짓이 험준한 룡강산줄기와 장백산줄기를 누비면서 적들을 유인하였습니다. 그러느라고 7련대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덕으로 사령부는 얼마동안 적들의 성화를 덜 받았습니다.
7도구치기에서 우리와 헤여질 때 오중흡이네 련대에는 식량이 한알도 없었습니다. 식량을 해결하자면 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중흡은 부대의 행군로정을 가어하, 사등방등성이, 홍두산서쪽, 쌍차두북쪽으로 하여 덕수골로 떨어지게 잡았습니다. 이 로정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백색지대입니다. 있다면 탕자막 같은것이 있을뿐이였습니다. 여기에 한번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미궁에 빠져 다시 살아나오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오중흡은 배를 곯으면서도 사령부로 쏠리는 적들을 자기네 련대에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험로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목재소를 치고 얻은 소고기나 말고기로 끼니를 에웠지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먹을것을 얻어낼수 없었습니다. 먹을것이란 눈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오중흡은 적들이 더는 자기네 련대를 따라오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대원들에게 이런 호소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령부가 아니라는것을 적들이 혹시 눈치채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헛수고를 한것이나 다름없소. 기어이 뒤쫓아가서 꽁무니에 적을 달고와야겠소. 모두 나의 뒤를 따르시오.》
그는 싸창을 빼들고 천신만고하여 톺아온 길을 수십리나 되돌아가서 적의 숙영지를 쳤습니다. 그리고는 기어이 적을 뒤에 달고왔습니다.
그후부터 7련대는 적이 따라오지 않으면 되돌아가서 한두번씩 성화를 먹이군했습니다. 그러면 적들이 코꿴 송아지처럼 졸졸 련대를 따라왔습니다.
식량이 떨어지자 련대는 왜놈군대들이 잡아먹고 버린 소가죽을 우려 나누어먹으면서 행군을 계속했습니다. 오중흡이네는 그해 음력설을 언감자로 쇠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우리는 이 산상에서 이런것이라도 먹는데 사령부는 무슨 식량으로 지내는지.》하고 우리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행군로상에서 허기증과 무력증으로 신고하는 대원들을 보고 우리가 지금 10년을 하루같이 고생을 하지만 그러나 고생끝에는 락이 오기마련이다, 이제 우리가 일제를 격멸소탕하고 해방된 조국땅을 향해 행군할 때를 생각해보라, 조선사람으로 태여나 이이상 더 보람차고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늘의 이 간고한 행군이 해방조국으로 잇닿은 걸음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은 김일성사령관의 말씀이다, 모두다 사령부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오중흡은 이런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가슴에 큼직한 불덩어리를 안고 싸워온 사람이였습니다. 무슨 불덩어리였는가 하면 혁명에 대한 열정이였습니다. 그 열정의 핵이 다름아닌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이였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언제 어떤 정황속에서나 모든 병사, 지휘관들이 한결같이 사령부의 안전부터 생각하는것이 7련대의 고유한 특성이며 사령관의 명령, 지시를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최상의 수준에서 관철하며 사령부의 의도를 그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포착할뿐아니라 그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온몸이 육탄이 되여 앞장서서 끝장을 볼 때까지 완강하게 관철해나가는것이 바로 7련대의 생활과 투쟁의 전투적인 기풍이였습니다.
나에게로 날아드는 적탄을 몸으로 막고 전사한 리권행도 7련대출신이였고 사령부의 명령, 지시를 관철하는 길에서 귀중한 생명을 바친 오일남, 손태춘, 김혁철도 7련대출신이였습니다.
오중흡, 최일현, 강흥석도 바로 사령부를 옹위하는 길에서 한생을 살다가 륙과송전투에서 애석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내 그래서 륙과송전투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군합니다. 물론 싸움자체는 아주 맵시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귀중한 지휘관을 셋이나 잃었습니다.
그날밤 10시 오중흡은 7련대와 황정해네 구분대를 인솔하고 맨앞장에서 륙과송에 있는 적병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주공이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였던지 나는 그날 오중흡에게 몸을 조심하라는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한다고 몸을 아낄 오중흡은 아니였습니다. 그는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부대의 앞장에 서는 지휘관이였습니다.
나는 7련대와 황정해네 구분대를 보낸 다음 그뒤로 인차 8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8련대에는 목재소로동자들속에 들어가 정치사업을 하는 한편 적의 군수창고를 열고 식량과 군수품을 해결할 임무를 주었습니다.
오중흡은 돌파조를 이끌고 나무울타리안으로 감쪽같이 돌입하여 철조망을 끊고 대원들을 돌격에로 불러일으켰습니다. 7련대는 적이 정신을 차릴새없이 벼락같이 포대와 병실들을 점거하였습니다. 바빠맞은 적들은 병실밑에 파놓은 비밀지하도에 들어가 숨어버렸지만 오중흡은 제꺽 지하도의 입구들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습니다. 지하도입구들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하자 밑에 있던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밖으로 벌벌 기여나왔습니다.
그런데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진 때에 뜻하지 않은 일격을 당했습니다. 지하도에 숨어있던 적들이 수색작전을 지휘하던 오중흡련대장에게 치명상을 입힌것입니다. 전령병 김철만이도 부상을 당했습니다. 패잔병들이 발악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7련대의 유능한 지휘관들인 최일현과 강흥석이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오중흡이 역시 원통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생 험한 길을 헤쳐오면서 혁명을 위해 그처럼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던 그 불덩어리같은 사람이 그렇게 갔습니다.
나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우리 동무들에게 늘 그 어떤 전투에서나 마지막결속단계에서 특히 주의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사고는 흔히 그 마지막단계에서 생기기때문입니다. 륙과송전투에서도 결국은 전투를 결속하는 마지막 5분에 귀중한 세 전우를 잃었습니다.
아마 오중흡이 그때 좀 방심했던것 같습니다. 전투국면이 우리에게 유리했던데다가 적들이 솜타는 냄새에 취해서 손을 들고 나오게 되니 너무도 자신만만했던것 같습니다.
오중흡은 원래 실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생활도 깨끗이 했지만 싸움도 맵시있게 하였습니다. 경각성으로 말하면 그 어느 지휘관보다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왜 자기 발밑에 적이 있을수 있다는것을 생각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정찰조원들이 적병영내부에 대한 정찰을 꼼꼼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정찰만 잘했더라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참으로 분하게 되였습니다. 부상당한 김철만이 내앞에 나타나 왕왕 소리쳐 울면서 오중흡이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전할 때 처음 나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자 나는 거의 리성을 잃어버리고 오중흡을 죽인놈이 어디에 있는가? 오중흡을 죽인놈들은 용서할수가 없다고 소리를 치며 적병실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통을 당해도 대원들앞에서는 마음을 억제하는데 습관되여있었지만 그날은 정말 참을수 없었습니다. 하기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던 오중흡입니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그날 우리는 숱한 적을 소멸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 그게 다 귀찮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의 가슴이 그때처럼 아팠던적은 없었을것입니다.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우리 동무들은 전우들의 시체를 떠메고 륙과송을 떠났습니다. 몇백명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걸음을 옮기는데 말소리 하나 들을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슬픔속에서 추도모임을 하였습니다. 추도사를 하려고 나섰는데 눈물이 자꾸 앞을 가리고 가슴이 답답하여 말을 제대로 할수 없었습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곤난앞에서는 눈물을 흘린적이 없지만 슬픔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습니다.
륙과송전투는 의의가 큰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적들의 제2기 《토벌》작전은 혼란에 빠지게 되였고 우리 군대는 대부대선회작전 제1단계에서 승리를 이룩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였습니다. 적들이 백두산동북부 두만강연안일대에 대병력을 집중하고있을 때 우리가 돈화오지에 와서 한바탕 총성을 크게 울렸으니 놈들이 아연실색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륙과송전투에서는 역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기둥부대인 7련대가 제일 잘 싸웠습니다. 7련대는 《강철부대》라고도 할수 있는 무적의 부대였습니다. 그 부대가 일당백의 부대로 될수 있은것은 련대의 지휘를 담당한 오중흡의 공로에 속한다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그가 충신이고 명장이기때문에 7련대가 강한 부대로 될수 있었습니다.
나는 김혁이나 차광수를 잊을수 없듯이 오중흡을 잊을수 없습니다. 오중흡은 나에게 있어서 혁명전우이고 동지인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오중흡련대는 적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도발로부터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철통같이 호위해온 방탄벽이였고 난공불락의 성새였습니다.
오중흡이 전사한후부터 우리는 대원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개 대원들이 전투에 들어서면 시야를 최대한으로 넓혀 있을수 있는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며 처신을 신중하게 하도록 교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써도 오중흡을 잃은 손실만은 보상할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그를 훌륭한 혁명가로 길러냈다고 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중흡동무를 놓고 가정혁명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전에 왕청을 포함한 간도전역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은 애국혁명일가가 바로 오태희일가였습니다. 이 가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항일혁명에 참가하였습니다. 지하공작원이나 인민혁명군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희생된 사람들만 하여도 20명가까이 되니 나라를 위해 바친 이 가문의 애국충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입니다.
오중흡동무가 그처럼 쇠소리가 나게 혁명을 할수 있은것은 일찌기 오씨가문의 어른들로부터 좋은 교양을 받은데 그 주되는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씨네 집안에서 숱한 젊은이들이 쟁쟁한 혁명가로 성장할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그들에게 정확한 인생행로를 그어준 오태희, 오성희, 오창희, 오정희 등 4로인형제의 피어린 로고가 어려있습니다.
오씨가문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교양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그 가문에서는 도덕교양을 잘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국주의교양, 반일교양, 혁명교양을 위한 튼튼한 기초로 되였습니다. 오씨가문사람들은 살림살이가 어려웠지만 자식들의 교육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문중의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배울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였습니다.
오씨가문에 중학교졸업생이 10여명이나 되지만 관리가 되는 출세의 길이 아니라 모두가 혁명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여기에서 오중화의 역할이 컸습니다.
오중화는 가정을 혁명화하는 사업을 착실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북만원정을 마치고 왕청에 갔던 그무렵에 벌써 오씨가문의 청장년들과 부녀들은 모두 혁명조직에 망라되여있었습니다.
오중흡이네 집안은 오씨가문에서 그중 가난하게 산 집이였습니다. 그래서 혁명화도 빨리 되였습니다. 오중흡은 먼저 자신을 혁명화한 다음 동생들을 혁명화하고 온 가족을 혁명화하였습니다.
오중흡이네 3형제는 모두 련대와 대대의 군정일군으로 활동하다가 다 전사하였습니다.
나는 1941년 여름에 라자구일대에서 소부대활동을 할 때 오중흡의 아버지 오창희와 박길송의 아버지 박덕심과 련계를 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오씨일가는 라자구에서 살았습니다. 산에서 망원경으로 오씨네 집을 보면 집안식구들이 지게에 나무짐을 가득 지고 사립문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다 보였습니다. 오씨네 집안 사람들은 라자구에 와서도 혁명군대의 후방가족답게 생활을 잘하고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김일동무를 통하여 오창희, 박덕심 로인을 중심으로 하여 라자구일대의 후방가족들로 지하조직을 무어주었습니다.
소부대활동시기 백두산동북부로 진출했을 때 우리는 오창희로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로인의 도움으로 경원(새별)지구에 건너가서 혁명조직들을 꾸리였습니다.
오씨일가는 정말 력사책에 기록해둘만한 혁명일가입니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오중흡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군합니다.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 나라에 수많은 7련대들이 태여났을것입니다.
지금 김정일동무가 인민군대안에서 오중흡을 따라배우는 운동을 지도하고있는데 그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지난날 내곁에는 오중흡과 같은 충신들이 많았습니다. 오중흡과 같은 충신들을 많이 길러내여 김정일동무의 곁에 세워주어야 합니다.
김정일동무는 조선의 미래이고 조선혁명의 운명입니다. 우리 조국이 영원무궁토록 번영하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가 승승장구하자면 김정일동무가 건강해야 하며 전당, 전군이 김정일동무의 령도를 잘 받들어야 합니다. 일군들은 김정일동무를 혁명의 수뇌로 받들고 백두밀림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갈 굳은 각오를 가지고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계속 빛나는 성과를 이룩해야 하며 오중흡련대가 사령부를 보위한것처럼 조선혁명의 최고사령부인 당중앙위원회와 김정일동무를 목숨으로 옹호보위하여야 합니다.
- 이전글세기와 더불어 21-5. 평안도 사람들 16.03.04
- 다음글세기와 더불어 21-3. 수십만의 《대토벌군》과 맞서 16.02.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