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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7-4. 국제당 파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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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042회 작성일 15-04-2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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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제당파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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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격근거지에서 좌경과의 투쟁을 한창 벌리고있던 1933년 4월경에 동장영은 다부산자차림을 한 중년손님 한사람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차림새와 행동거지가 퍼그나 점잖고 세련된 중년의 그 사나이는 나를 보자 멀리서부터 미소를 짓고 인사의 표식으로 머리우에 한쪽손을 들어올렸다 내리였다. 내가 알고있는 구면손님일것이라고 잘못 판단할만큼 다가오는 그 사나이의 눈동자는 반가움으로 가득차있었다.


악수를 나누고보니 구면은 아니였다. 이상한 일은 난생 처음 보는 그 알지 못할 손님이 어째서인지 구면처럼 자꾸 느껴지는것이였다. 그래서 나도 웃으면서 그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손님이 바로 국제당파견원(순시원)반성위였다. 반이란 성이고 성위는 이름이 아니라 만주성당위원이란 직책을 이르는 략어였다. 위증민을 로위라고 부르듯이 사람들은 대체로 그를 로판이라고 불렀다. 《판》은 《반》의 중국식발음이다. 중국사람들은 나이가 많거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들의 성앞에 《로》자를 붙이는 좋은 례절을 가지고 있었다. 반성위를 본명대로 리기동이라고 부르거나 반경유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성위는 만주지방의 공산주의자들속에 널리 알려진 이름난 혁명가였고 당활동가였다.

나에게 반성위에 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해준것은 왕윤성이였다.

9.18사변후 반성위가 녕안현당 서기로 공작할 때 왕윤성은 그 밑에서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자기가 녕안현당에서 선전위원의 직을 가지고 일할수 있은것도 반성위의 요구에 의한것이였다고 하면서 그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반성위는 황포군관학교졸업생으로서 중국의 무창폭동과 북벌전쟁에도 참가하였고 쏘련에 가서 공부도 한바 있는 능력있는 로간부라는것이였다. 한때는 수녕중심현위 서기로도 활약하였는데 자기자신은 반성위의 인간미와 예리한 통찰력에 매혹된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성위에 대한 왕윤성의 존경심은 보통 정도가 아니였다.


나는 그때 그의 말을 듣고 우리의 린접에서 반성위와 같은 우수한 혁명가들이 활동하고있는데 대하여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후에는 최성숙,조동욱이 북만에서 나와 또 반성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최성숙은 자기를 왕청에 가라고 추동한 사람이 반성위였다고 하면서 그의 지도밑에 녕안시가에서 5.1절시위를 하던 때의 일을 재미나게 말해주었다.


이런 전제가 있어서인지 우리는 자연히 왕윤성과 최성숙에 대한 이야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바치게 되였다.

《녕안에서 온 최성숙동무가 잘 있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반성위의 이런 물음으로 시작되였다.

아래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반성위의 특출한 장점이라고 하던 최성숙의 말이 되살아오르며 새삼스럽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건강합니다. 북만에서 오자마자 대왕청쏘베트대표로 선출되였더랬습니다. 지금은 소왕청구 부녀부위원으로 선거되여 부녀회사업을 하느라고 바삐 보내고있습니다.》

《그 동무가 여기 와서도 말을 탑니까?》

《탄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혁명군에 들어가서 기병이 되겠다는 결심을 품고 승마기술을 배운 동무입니다. 아주 담차고 이악한 처녀이지요.》

《그러고보면 우리 왕청사람들이 호박을 잡은셈이구만요. 북만에서 놔준것이 후회되지 않습니까?》

《후회는 무슨 후회입니까. 그의 가족들이 북만에 있지만 나는 그를 보고 동만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만주지방 혁명투쟁의 중심이야 간도가 아닙니까. 그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혁명을 더 본때있게 하고싶거든 왕청에 가라,거기엔 인민의 세상으로 된 근거지가 있다,나는 간도에 큰 기대를 걸고있다,나도 거기에 가서 일하고싶다고말입니다.》


나는 반성위가 동만지방을 조선혁명의 기본적인 책원지라고 평가하는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유격구들에서 벌어지고있는 좌경망동적인 사태를 목격하게 되면 그가 간도에서의 혁명투쟁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반성위의 정치적리념이나 정책적립장 같은것은 아직 미지수나 다름없었다. 반성위가 정치적시야가 넓고 투쟁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무조건 좌경을 반대하는 립장에 선다는 법은 있을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반성위에 대한 왕윤성과 최성숙의 평가를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반성위가 아래사람들을 대하는데서 절대로 편견을 앞세우지 않는다는것과 주견을 가지고 매사를 공정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는 로숙한 일군이라는데 대하여 여러번 강조하였다. 반성위에 대한 나의 첫 인상도 무척 좋았다. 그날은 그런 정도로 풋인사나 하고 그치였다. 우리는 후날 다시 만나서 본격적인 담화를 나누기로 하고 서로 헤여졌다.


국제당손님은 시간을 잘못 선택한셈이였으니 나는 부대를 데리고 파도식으로 달려드는 수천명의 《토벌군》무력을 격퇴하기 위하여 전투장으로 당장 나가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였던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부대를 따라 전투장에 나가겠습니다. 나에게 허줄한 총이나 한자루 주시오.》

반성위는 동만에 왔다가 싸움구경도 못하고 돌아가면 국제당파견원으로서의 체면도 서지 않고 일생 후회를 가지고 살게 될것이니 하루동안의 참군이야 허락하지 못하겠는가고 하면서 그냥 대렬을 따라오려고 하였다.

《반동지,총알은 국제당파견원을 가리지 않습니다. 싸움구경을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테니 오늘은 로독이나 푸시지요.》


나는 반성위를 설복시키고나서 싸움터로 나갔다.

적들은 소왕청유격구를 삼면으로 포위하고 련 3일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우리는 완강한 방어전으로 그 공격을 견제하고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적들은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토벌군》은 그때 관문라자(돌문안)방향과 뾰족산방향에서 봄안개를 리용하여 은밀히 유격구로 기여들었다가 자기편끼리 맞불질을 하는 희비극까지 연출하였다. 이 망원전투가 한동안 소왕청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반성위도 그 소식을 듣고는 폭소를 터뜨리였다고 하였다.

반성위의 출현은 왕청사람들에게서 각이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였다.


쏘베트좌경로선을 국제당의 시정방침으로 보고 국제당의 명령일하에 재채기도 하고 하품도 하는 사람들은 로판이 자기들의 립장을 지지해줄것이며 따라서 그의 출현은 인민혁명정부로선을 제창하는 사람들에게 우경의 딱지를 붙이고 그들이 다시는 정권형태문제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제재를 가하는 좋은 계기가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쏘베트로선을 좌경이라고 비난하면서 인민혁명정부로선에 의한 새 형태의 정권수립을 부단히 추구해온 사람들은 쏘베트를 반대해온 자기들의 립장이 로판에 의해 거부될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들에게 국제당의 명의로 되는 처벌까지 가해질수 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반성위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주시하였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반성위의 출현이 쏘베트로선으로부터 방금 해탈하기 시작한 유격구의 정세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계기로 될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전자가 미리부터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있었다면 후자는 마음속으로 패배의 비가를 부르고있었다. 그들이 이런 립장을 취하게 된것은 량자가 다같이 국제당의 권위와 권한을 절대시한데 있었다. 한 당의 파산을 선포할수도 있고 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할수도 있는 국제당은 그들에게 있어서 국제적인 《대법원》과 같이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그들은 국제당이 한 혁명가의 운명을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다고 간주하였다.


반성위의 출현은 유격구를 긴장시키였다. 나도 역시 팽팽하게 긴장된 그 공기를 매 순간마다 감촉했다.

국제당의 의사와 맞지 않는 인민혁명정부로선을 쏘베트로선에 대치시키고 쏘베트의 시책을 좌경망동이라고 한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반성위가 어떤 립장을 취하겠는가 하는것은 자못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나는 좌경의 전횡밑에서 인민이 울고있는 동만땅에 국제당이 파견원을 보내준것은 혁명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쏘베트로선과 인민혁명정부로선이 서로 대치되여 제가끔 자기의 정당성을 론증하는 시점에서 반성위의 출현은 그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하게 될 결정적인 국면을 열어놓게 될것이기때문이였다.


국제당이 우리의 립장을 지지해줄것이라는 담보는 아직 그 누구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국제당과 만주성위를 비롯한 여러 조직들에서 유격근거지의 실정에 맞지 않는 지령들을 련발하는데 대하여 그에게 항의를 들이댈 결심도 서있었고 그와 함께 쏘베트로선집행과 반《민생단》투쟁과정에서 발로되고있는 극좌적인 경향을 바로잡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리론투쟁까지 하리라는 각오도 가지고있었다. 처벌이나 그 무슨 제재조치에 대한 우려 같은것은 념두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나는 결판을 낼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 불평을 가진 일부 동무들이 동만의 사태를 수습해달라는 신소편지를 써서 국제당에 보낸것 같았다. 국제당에서 그 편지들을 검토하고 동만지방은 조선사람들이 집결되여있는곳이니 조선사람인 반성위가 나가서 일을 수습하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후날 반성위자신도 국제당에 그런 신소청원이 제기된것이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소왕청방어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다음 반성위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첫 상봉의 날보다는 얼굴빛이 밝지 못하였다. 겉으로는 미소를 띠고있었으나 속으로는 무거운 시름거리를 안고 그것을 묵새기기 위해 애쓰는듯한 파견원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마침내 정치철학이 복잡하게 교차되는 준엄한 현실생활의 십자로에 들어섰다는것을 간파하였다. 보매 그는 동장영과 무슨 로선상 문제를 가지고 충돌한것 같았다.


나는 마촌에서 제일 큰 리치백로인네 집에 반성위의 숙소를 정해주고 그집 웃방에서 열흘 남짓하게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성위는 중국말을 아주 잘하였다. 그가 처음부터 중어로 말하는바람에 나도 자연히 중어로 그와 대화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화는 주로 밤과 새벽 시간에 나누었다. 낮에는 내가 부대를 지휘해야 하므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반성위도 낮이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유격구의 실태료해를 하느라 바삐 보냈다.


객지생활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남의 집 웃방살이라는것이 비록 불편스러운 점은 있지만 손님들사이를 얼마나 친밀하게 해주는지 그리고 그처럼 친밀한 관계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구수하고 흥미진진한것인지 잘 알것이다. 나와 반성위도 그 열흘사이에 서로 생살이라도 떼줄만치 친근한 사이가 되였다.


반성위는 나보다 나이가 20여살이나 더 든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로숙한 혁명가였지만 틀을 차리거나 년령의 격차로부터 오는 거리감을 조금도 두지 않고 나와 동지대 동지로서 허심탄회하게 열정적으로 담화를 하였다.


처음에는 혁명실천과 관련되는 공식적인 화제를 떠나서 각자의 자서전이 소개되였다. 내가 자기를 소개하고나면 반성위가 자기 경력을 련달아 공개하였다. 그다음은 엇바꾸어가며 그 일생기를 보충하든가 감상을 발표하였는데 밤이 지새는줄도 몰랐다.


반성위는 내가 20살도 되기전에 네번이나 붙잡혔으며 감옥생활도 했다는 말을 듣고 사뭇 신기해하였다.

《그러니 감옥살이를 하는데서는 김동무가 나보다 선배인셈이구만.》

그는 자기도 할빈에서 감옥밥을 좀 먹었는데 5.1절대시위를 조직한것으로 하여 녕안현당은 풍지박산이 되였다고 하였다. 만주국 관헌들의 무자비한 탄압과 일본군의 《토벌》에 조직들은 다 파괴되고 당원들과 핵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반성위는 그것을 당대렬이 급격히 확대되고 그 활동이 적극화되는 과정에 자기네 머리를 병들게 한 현훈증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대신 5.1절시위의 교훈이 김해산,리광림을 대장으로 하는 녕안유격대창건의 정치적동기로 되였다는것만은 그도 인정하고있었다.


《사람들은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좀 맞고서야 우리 시위가 서투르게 조직된 철늦은 시위였다는걸 깨닫게 되였소. 조직들을 더 깊이 지하에 들여보내고 무장투쟁을 해야 할 때 글쎄 현성거리에서 당원들까지 내세워 시위를 조직하다니…》

반성위는 그 시위에 대한 말을 꺼낼 때마다 자기자신에게 화를 내군하였다. 그리고나서는 우리가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조직했던 시위투쟁을 연방 격찬하였다. 그는 남들의 업적앞에서 공정하고 대범한 반면에 자기자신이 해놓은 일에 대하여서는 과소평가하든가 지나치게 허무적으로 대하는 그런 류형의 사나이였다.


《며칠전에 생일 스물한돐을 맞이했다면 내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데 감옥생활에서도 선배라고 해야겠지만 총적인 인생에서도 김동무는 내 선배라고 해야겠소.》

반성위가 내 경력을 다 듣고나서 하는 말이였다.

나는 그가 선배라는 말을 자꾸 하는바람에 쑥스러운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반동지,그렇게 자꾸 추어올리는 말씀만 하다가 젊은 사람을 아예 병신으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반성위는 로씨야사람들식으로 두팔을 쩍 벌리고 어깨를 으쓱해보이였다.

《김동무를 평가하는 그 리면에는 사실상 내자신의 일생에 대한 불만이 깔려있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지 못한 사람이요. 나이 43살이면 좋은 시절을 다 보냈다고 말할수 있는데 남들에게 선을 보일만한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으니 야단이 아니요.》

《너무 겸손한 말씀입니다. 반동지의 생애에는 남방의 폭양도 있고 북방의 폭설도 있습니다. 웃음도 있고 고민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자기를 허무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40이 지났다고 해서 어떻게 좋은 시절이 다 갔다고 할수 있습니까?》


내가 이런 비판을 해도 반성위는 그것을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한다고 생각하였다. 중국 남방에서의 활동은 제껴놓고라도 북만에서 녕안현위와 수녕중심현위의 서기직을 력임하고 녕안유격대 조직의 산파역까지 감당해온 그의 공적은 결코 무시할수 없는것이였다. 수녕중심현위란 목릉,녕안,동녕,밀산 등의 현위들을 통합하여 내온 규모가 상당히 큰 현위였다. 한때는 반성위가 국제당과 만주성위사이에서 중간련락기관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동국의 지도간부로 영전된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 소문이 비록 실천적으로 결실을 보았는지 어떻게 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국제당이 그를 소환하여 동만지방사업을 지도검열하는 파견원으로 보낸것만 보아도 그가 신망있는 일군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우리의 담화는 자기 소개의 경지로부터 호상관심사로 되는 현행정치문제에 대한 실정의 통보와 의견교환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첫번째로 론의한것은 국제당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 관한 문제였다. 국제당 련락소일군들과의 련계를 가지면서도 그들과 함께 솔직하고 심도있는 담화를 해보지못했던 나에게 있어서 그 론의는 매우 유익한것이였다.


나는 반성위에게 국제당의 결정을 리행하기 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노력에 대하여 소개한 다음 국제당 로선과 지시에 대한 우리의 립장과 태도를 밝히였다.

《우리는 국제당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참모부적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있다고 간주합니다. 국제당은 지난 기간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국제적인 련합에 집결하여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평화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거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코민테른이 공산주의운동에서 중앙집권적기능을 수행하는 국제적중심이라는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지난 시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국제당 규약과 로선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반동지,이거 버릇없는 태도라고 나무라겠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국제당의 처사를 두고 좀 할 말도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말은 반성위의 얼굴표정을 순간에 긴장시키였다.

《그 말은 어떤 뜻으로 리해해야 할가? 혹시 무슨 의견이라도 가지고있는게 아니요?》

《글쎄요. 의견이랄지 불만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오래전부터 국제당을 향해 말하고싶은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좋으니 여기서 속시원히 다 말해봅시다.》

반성위는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주시하였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국제당을 향하여 우리가 하고싶었던 말을 꺼리낌없이 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종파를 두둔하자는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국제당이 지난날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한데 대하여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종파야 조선공산주의자들속에만 있는것도 아니고 감자도장놀음을 하는거야 인도지나공산당이나 그밖의 당들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말을 끝냈을 때 반성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것은 긴장이 아니라 놀라움 같은것이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반성위에게도 나의 그 말은 예상밖의 급습으로 된것 같았다.


《나는 국제당파견원으로서가 아니라 김동무와 다름없는 조선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공산당 해산을 수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선포한 국제당의 처사를 섭섭하게 생각하고있는데 대하여 동감을 표시하는바이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소. 조선공산당은 해산됐는데 인도지나공산당이 해산되지 않고 건재하는건 무슨 리유때문인가 하는것이요. 그건 호지명과 같은 뛰여난 인물이 국제당에 인도지나대표로 틀고앉아있었기때문이였소. 그런데 그 당시 조선공산주의운동대렬에는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만한 출중한 인물이 없었고 령도핵심이 없었던것이요.》


당이 해산되게 된 기본적인 리유의 하나를 지도자와 령도핵심이 없는데서 찾는 반성위의 말은 당해산의 1차적원인을 파쟁에서만 찾아보는데 습관된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국제당의 인정을 받을만한 세계적인 지도자의 결핍,그것으로 하여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저지시킬수 없었다고 하는것은 사리에 맞는 반성위식의 분석이고 발견이였다.


우리는 국제당문제와 함께 조선혁명에서 제기되는 실천상문제를 가지고서도 가치있는 토론을 하였다.

반성위는 특히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당이 자기 존재를 끝마치고 대다수의 당원들이 해외에 망명하여 남의 나라 당에서 곁방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좌절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당을 새롭게 창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조선혁명가이기때문에 이야기하는것은 아니지만 조선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공산당을 창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조선공산당이 해체선언을 받았다고 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당재건의 가능성을 영영 박탈당한것으로 그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것이요. 조선사람이 자기의 당을 가지는것은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정정당당한 권리요. 곁방살이도 한두해이지 한정없이 남의 집에 그냥 얹혀 살수야 없지 않소.》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당을 재건해야 한다는 반성위의 주장은 카륜에서 채택되였던 우리의 당창건방침과 완전히 일치하는것이였다.

나는 반성위의 그 말에 힘을 얻었다.

《옳습니다. 조선사람이 자기 당을 재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것은 조선혁명을 포기하는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곁방에서 눈치놀음이나 하며 껄렁껄렁 세월을 보내는 그런 인간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립장을 가지고 우리는 세해전에 이미 기층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상향식방법으로 당을 창건할데 대한 새로운 방침을 내놓고 건설동지사란 명칭을 가진 당조직을 내왔습니다.》


나는 첫 당조직을 내오게 된 력사적경위와 그것을 결성하고 확대하는 도상에서 직접 체험했던 가지가지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반성위는 나의 말을 주의깊이 들어주었다.

《내가 공상가라면 김동무는 철저한 실천가라고 할수 있겠구만. 어쨌든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시오. 조선공산주의운동선상에는 파벌이 너무 많아서 야단이요. 그러니 파벌을 하는 놈팽이들은 인정하지 말고 반드시 젊은 사람들끼리 새 출발을 해야 하오. 종파를 그냥 두어가지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소. 적지 않은 종파군들이 왜놈의 개가 되였소.

개가 안된 놈팽이들가운데도 종파습성이 골수에 사무쳐서 혁명을 하려고는 생각지 않고 헤게모니쟁탈에만 열중하고있는자들이 적지 않소. 파벌과 싸우려면 우리가 반일투쟁을 잘해야 합니다. 투쟁과정에 대렬이 강화되고 핵심이 묶어지면 그것이 곧 당을 창건하는 밑천으로 되는것이요.》


반성위의 이 말은 나를 몹시 흥분시키였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소리는 아니였다. 종파에 오염되지 않은 새 세대 청년들로 당을 창건해야 한다는것은 우리가 이미부터 주장해온 기본방침이였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조선사람들로 핵심을 꾸리고 그들을 묶어세워 당도 창건하고 조국해방의 대사도 이루고야말리라는 결심을 더욱 굳게 다지였다.

반성위와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문제와 국제당문제, 조선에서의 당건설문제를 론의하고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우리의 화제는 간도의 민심이 집중되고있는 쏘베트문제에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인민이 등을 돌려대고 침을 뱉으며 경원시하는 쏘베트정권에 대한 반성위의 견해가 어떤지 속시원히 듣고싶었던것이 당시의 나의 솔직한 심정이였다.

내가 《로판,간도행이 처음이라는데 유격구를 돌아본 감상이 어떻습니까?》하고 여담삼아 묻자 반성위는 대답대신 단추들을 와락와락 벗기고 옷자락을 활짝 열어제끼였다. 그리고는 목청을 갑작스레 높여 유격구에 대한 소감을 터놓았다.


《나는 우선 이 불모의 땅에 유격구와 같은 별천지를 건설한 간도인민들과 혁명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싶소. 간도사람들이 참으로 일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하였소. 그런데 이 훌륭한 별천지에 환영할수 없는 유령이 배회하고있는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소.》

나는 반성위의 격한 음성을 듣고 그가 몹시 흥분하고있다는것을 감촉하였다.

《유령이라니요. 그건 무얼 념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반성위는 리치백로인이 내준 담배통에서 독한 써레기를 듬뿍 집어 굵직하게 말기 시작했다.

《그건 쏘베트좌경로선을 념두에 두는거요. 이 좌경이 간도사람들이 그처럼 공을 들여쌓은 탑을 무너뜨리고있단말이요. 난 도저히 리해할수가 없소. 만주혁명을 선봉에서 개척해온 간도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리성을 잃어버릴수 있을가.》

《나도 사실 그 좌경때문에 머리가 셀 지경입니다.》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암둔해졌는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은 로씨야의 쏘베트정권에 대해서도 완전한 문외한들이더란 말이요. 동장영동무는 투쟁경험도 많고 성미도 부드러운 사람인데…


참 실수도 류만부동이지,국제당에 신소편지들이 날아왔던게 우연치 않거든.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겠소.》

나를 바라보는 반성위의 눈빛에는 심심한 련민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나 하나의 마음고생이야 아무리 큰들 뭐랍니까. 나는 좌경의 전횡밑에서 인민이 기를 펴지 못하고있는것이 가슴아플뿐입니다.》

반성위는 그 무슨 화풀이라도 하듯이 담배연기를 연방 신경질적으로 뿜어내치였다.

《내가 불행중 다행이라고 본것은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이 좌경의 쑥대밭에서 혁명을 위기에서 건져줄수 있는 인민혁명정부로선이 탄생하여 유격구인민들의 지지를 받고있는것이였소. 김동무가 아주 신통한 정식화를 했다고 나도 방금전에 동장영동무에게 실토했더랬소.》

《그러면 반동지도 인민혁명정부로선을 지지한단말입니까?》

《지지하지 않는다면 내가 동장영동무에게 왜 그런 말을 했겠소. 인민혁명정부로선에 대해서는 동장영동무도 지지하였소. 그 동무는 인민이 좋다면 좋은것이라고 한 김동무의 말에서 큰 감명을 받은것 같더구만. 우리 마음을 푹 놓고 일을 더 잘해봅시다.》

반성위는 느닷없이 내 손을 의미있게 꽉 잡았다가 놓았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인민혁명정부로선에 대한 국제당의 지지를 확인할수 있었다.


반성위는 계속하여 우리가 별동대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유격대를 합법화하고 구국군과의 관계를 개척한것은 특기해야 할 업적이라고 하면서 동만혁명가들은 앞으로 이 업적을 계속 고수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반성위는 우리의 인민혁명정부로선이 중국당에서 내놓고있는 민중혁명정권로선과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고 하면서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로선전환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만주문제의 전략을 밝힌것으로서 형식상으로는 중국당중앙의 명의로 되여있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국제당이 작성한것이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국제당의 의사였다고 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끈것은 농촌정권기관으로서의 농민위원회를 조직할데 대한 사상이였는데 농민위원회는 농민과 유격대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평상시 유격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무장자위대를 조직하며 당은 전력을 다하여 고농과 빈농을 농민위원회의 지도력량으로 되게 하고 그 주위에 중농대중을 묶어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런즉 이것은 국제당이 정권분야에서 좌경적인 쏘베트로선의 불합리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새로운 정권형태로 교체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것으로 되며 동시에 우리가 주장하는 인민혁명정부로선의 정당성을 실증한것으로 된다.


그러나 반성위는 농민위원회라는 그 명칭때문에 무척 신경을 썼다. 그는 농민위원회가 쏘베트보다 만주지방실정에 더 적합한 형태인것은 사실이나 고농,빈농의 본위로 나간다면 자기 주위에 광범한 대중을 묶어세울수 없을것이라고 하면서 그에 비해서는 로동자,농민,학생,지식인 등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계층을 다 망라하는 통일전선적인 인민혁명정부형태가 더 좋고 발전적인것만큼 정권형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편지로 써서 국제당과 만주성위에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까짓 명칭이야 농민위원회건 인민혁명정부건 뭐랍니까. 시책을 인민의 요구에 맞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민혁명정부를 내올수 있는데는 인민혁명정부라 하고 농민위원회를 내올데는 농민위원회라는 간판을 내걸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런 말로 반성위를 안심시켰지만 그는 종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총체적으로는 옳은 말이요. 그러나 정권기관의 명칭은 인민의 마음에 들어야 하오. 아무래도 국제당에 이 문제를 상정시켜야 하겠소.》

그후 반성위가 결심대로 국제당에 편지를 보냈는지 그것은 나는 모른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서 쏘베트는 인민혁명정부나 농민위원회로 교체되였고 공농유격대는 반일인민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개편되였다.


반성위의 출현은 유격구의 낡은 질서를 뒤흔들어놓은 회오리바람으로 되였다. 우리가 길림시절부터 일관하게 견지해온 혁명에 대한 주체적립장은 국제적인 지지와 고무를 받을수 있었으며 우리가 내놓은 모든 로선과 방침들은 그 정당성을 다시한번 확고히 검증받게 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국제당이 하는 일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덮어놓고 다 좋다고 하거나 그 지령에 맹목적으로 추종한것은 아니였다.

나는 국제당의 처사에 대하여 존중시하면서도 조선혁명과 세계혁명의 리익의 견지에서 그것을 주체성있게 대하였다.


국제당의 전략이나 처사가운데서 우리가 제일 석연치 않은 문제로 보았던것은 세계혁명의 한 고리로서의 조선의 존재와 조선혁명에 대한 그들의 견해와 취급방법이였다.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하고 사회주의가 리상으로부터 현실로 되였을 때 만국의 공산주의자들앞에는 10월의 전취물을 고수하고 그 성과를 세계적판도에로 확대해나가야 할 성스러운 과업이 제기되였다.


이런 시대적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레닌은 1919년에 제3국제당을 조직하였다. 국제당의 력사적사명은 제국주의의 억압과 자본의 철쇄를 끊어버리기 위한 전세계 로동계급과 피압박민족들의 해방투쟁을 국제적범위에서 조직하고 발전시키는것이였다. 그것은 제1,제2 국제당들이 지니고있던 사명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합되는 전투적사명이였다.


국제당의 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당면한 투쟁과업의 하나는 쏘련을 옹호하고 고수하는것이였다. 승리한 사회주의진지를 지키는것은 사회주의위업의 확대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고 또 그것을 떠나서는 10월혁명의 성과를 세계적범위에로 확대발전시킬수도 없었다. 쏘련을 옹호하자는것이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구호로 되고 그 구호를 관철하는것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중요한 내용으로 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그러나 력사적으로 불가피하였고 또 절실히 필요하였던 이러한 관계는 국제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각국 공산당들을 《쏘련의 앞잡이》로 보거나 민족의 리익을 저버린 배족적인 무리로 치부하는 반공분자들과 부르죠아반동리론가들의 물방아에 물을 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개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고 자기들앞에 지워진 국제주의적임무와 민족적임무를 옳게 결합시켜나가야 하였다. 국제당도 역시 이 점을 응당 중시해야 하였다. 국제당이 자기의 사명을 원만히 감당하려면 승리한 사회주의진지를 지키는데 모를 박으면서도 다른 나라들의 공산주의운동,특히 제국주의의 억압속에서 신음하는 식민지약소국가 인민들의 리익을 옹호하고 그들의 혁명투쟁을 진심으로 도와주어야 하였다.


그러나 국제당은 이 요구에 낯을 잘 돌리지 않았다. 국제당의 일부 일군들은 큰 나라들의 혁명운동에 대해서는 요란하게 떠들면서도 작은 나라들의 혁명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보거나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쏘련을 옹호하는 국제적인 성새를 쌓아나가는데서 어떤 나라가 얼마만큼한 몫을 차지할수 있는가에 따라 매개 나라의 혁명을 대하는 그들의 립장과 태도에서는 너무나도 차별이 많았던것 같다.

국제당의 요직을 차지하고있던 일부 일군들과 리론가들은 큰 나라에서의 혁명운동이 승리하면 그와 린접한 작은 나라의 혁명투쟁이나 독립운동도 스스로 승리하게 된다는 견해를 류포시키였다. 비유해말하면 팽두이숙과 같은 리치를 담고있는 견해라고나 할가. 팽두이숙이란 머리가 익으면 귀도 저절로 익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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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이런 견해는 작은 나라 공산주의자들속에서 혁명의 주체는 자기자신의 힘이며 자기 나라 인민의 힘이라는 자주적립장을 떠나 큰 나라들을 쳐다보는 사대주의적경향을 낳게 하였으며 큰 나라 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작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자주적활동을 억제하는 대국본위주의적경향을 낳게 하였다.

사회주의국가의 탄생과 국제공산당창건이라는 거대한 사변에서 큰 힘을 얻고 그것을 리상으로,등대로 바라보며 투쟁의 불길속을 헤쳐가던 각국혁명가들의 국제당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신뢰와 순정에 때가 끼기 시작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하고 국제공산당이 창건된후 공산주의사조에 대한 축복과 동경의 파도는 걷잡을수 없는 힘으로 온 세계를 휩쓸었다.
세계 각국의 이름있는 인사들속에서 공산주의신봉자대렬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공산주의를 인류의 유일무이한 미래라고 본 시대의 선각자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소속과 신앙에 관계없이 신생쏘베트공화국이나 국제당과 련계를 가지고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우리 나라의 민족주의자들속에도 그 신봉자,지지자,동정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신봉자,지지자,동정자의 대렬속에는 기독교,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권위있는 인사들도 있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조선예수교대표회의 명의로 서울 정동감리교 교회 3대 담임목사였던 현순이 참가했던 사실은 하나의 실례로 된다.

현순은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목사로서 상해림시정부가 조직될 때 그 성원으로 선출되였던 사람들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 동무들이 몇해전에 쏘련의 국제당문서고에 가서 얻어온 자료에 의하면 그는 3.1독립선언서작성자의 한사람이였던 김병조를 비롯하여 조상섭,손정도,김인전,송병조 등 목사들의 인장이 찍힌 위임장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현순은 로씨야공산당 고려부가 작성한 조사표에 쓰기를 자기가 상해공산당에도 관계하였고 1919년 9월에 벌써 로씨야에 와서 석주일동안 체류한 사실이 있다는것을 밝히고있었다. 《목적과 희망》이 무엇인가 하는 조사표의 물음에 그가 자필로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실시함을 희망함》이라고 명기한 문서가 우리 동무들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였다.
물론 그가 공산주의라는 새 사조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리해하고 사상적으로 공감했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국제당이라는 존재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있었던것 같다.

상해림시정부의 초대국무총리였던 리동휘도 공산주의운동에 관계한 사람이였다. 그가 고려공산당련합대표회의 결과를 국제당에 보고하기 위하여 모스크바에 대표로 파견되였던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있다.

천도교계통의 혁신세력도 국제당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천도교 1세 교주 최제우의 손자벌이며 2세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는 천도교 혁신세력의 대표인물로서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 외무위원장의 직함을 가지고 직접 로령 울라지보스또크에 머물러있으면서 국제당과의 교섭을 성사시켜보려고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국제당에서 동양부사업을 보고있던 가다야마 센과 인젤손을 비롯한 여러 활동가들에게 편지를 내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주고 필요한 지원을 해줄것을 요청하면서 《빈천민중의 충복인 천도교》와 《로동계급의 전위인 국제당》간의 적극적련락은 동양혁명의 기성을 전적으로 담보한다고 언명하였다.

지어 최동희는 당시 쏘련의 외무인민위원이였던 치체린에게 편지를 써서 15개 혼성려단으로 고려국민혁명군을 조직할수 있도록 총포,폭발물,탄약,기병장비,운수수단 등을 2년안으로 보장해줄것을 청원하였다. 천도교혁신세력이 수구파의 증오와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새로운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일으켜나가려고 했던것은 전민족의 찬양을 받을만한 일이였다. 그러나 쏘련도 국제당도 천도교 혁신세력의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몽양 려운형도 1919년에 모스크바에 찾아가서 레닌과 함께 조선독립문제를 의논한적이 있었다.
리승만과 같은 반공분자가 한때 쏘베트로씨야를 지지한적이 있었다고하면 아마 세상사람들은 잘 믿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인것 같다. 언제인가 그가 모스크바에 가서 엄청난 재정원조를 요구했는데 그 요구가 묵살당하게 되자 쏘련과 국제공산계에 등을 돌려대고 극단적인 친미일변도로 나갔다는 자료도 있다고 한다.

쏘련령토의 100분의 1밖에 안되는 땅덩어리우에 초가마가리들이 올망졸망하고 여윈 하늘소들이 왔다갔다하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제당일군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너무나도 초라하고 작은 존재였던것 같다. 우리가 만주지방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그 시기에 와서도 조선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섭섭하게 생각했던것은 바로 이와 같이 국제당이 작은 나라 인민들의 운명과 작은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하여 무심하게 대하는것이였다. 그들의 이런 푸대접과 랭담성이 물론 우리로 하여금 혁명에서 주체의 대를 튼튼히 세우고 자력으로 민족해방을 이루고야말리라는 결심을 불변의것으로 만들어준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국제당의 처사와 립장을 시답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반대하거나 바로잡을수 있는 힘이 아직은 없었던것,국제당의 사업조직과 고질로 된 사무실적인 사업작풍이 조선혁명을 희생시킬수도 있고 조선혁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데서 하나의 걸림돌로 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으면서도 그것을 저지시킬수 없었던것,이것이 내가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고있었던 문제였다.

우리들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간절하게 열망한것은 국제당이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품고있던 이런 고충을 리해하고 혁명을 주체적으로 해나가려는 우리의 지향과 확고부동한 결심에 보조를 맞추어주었으면 하는것이였다.

이처럼 우리가 혁명실천상에서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복잡한 문제거리들을 안고 모대길 때 반성위가 동만에 나타난것은 반가운 일이였다. 어쨌든 반성위를 만난것은 분명 내 생애에서 의의있는 사변이였다. 국제당에 우리를 리해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것은 좋은 일이였다. 종파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로 핵심을 양성하여 조선공산주의운동대렬을 다시 꾸리고 조선사람의 당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특히 잊을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그가 우리에게 준 조언들은 나로 하여금 사고와 실천에서 주체적인 대를 더욱 튼튼히 견지하게 하였다. 그때 반성위가 준 영향과 동지적고무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반《민생단》투쟁이 스산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조선민족과 우리 혁명의 주체를 옹호고수하여 그처럼 결사적인 투쟁을 하지 못하였을것이다.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고 《홍루몽》을 배워준 스승이 상월선생이라면 반성위는 조선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준 진실한 지지자,고무자,동정자였다.

나의 항일혁명사에 반성위를 만났을 때처럼 조선혁명의 운명과 로선문제를 두고 그렇듯 진지하고 열렬하고 심각한 론의를 한적은 없었을것이다. 반성위는 혁명에 대한 자기식의 일가견을 가진 흔치 않은 리론가였다. 1930년대 후반기 우리가 대부대를 인솔하고 백두산일대에 진출했을 때 반성위가 살아서 우리와 함께 활동했더라면 그는 조선혁명이 직면하고있는 난문제들을 해결하는데서 리론실천적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을것이다.

나는 반성위를 만난 다음부터 혁명투쟁을 하는데서는 실천가도 중요하지만 그 실천을 선도하고 조종해줄수 있는 리론가도 있어야 한다는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였다.

소왕청에서의 잊지 못할 담화를 계기로 반성위는 나의 둘도 없는 벗이 되였고 동지가 되였다. 20살이상의 격차를 가진 우리가 열흘 남짓한 사이에 십년지기 못지 않은 벗으로 되고 동지로 된것은 그 어떤 물질의 힘이나 리해타산의 마력에 의해서가 아니였다. 우리가 태양의 열광같이 열렬한 우정을 지닐수 있은것은 조선의 해방과 자유를 일일천추로 고대하는 념원이 같았고 세상만사를
주견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풀어나가려는 주체적인 사고방식과 지향이 같았기때문이였다.

우정의 심도를 결정하는것은 시간도 아니고 말수더구도 아니다. 오래 사귄다고 하여 우정이 깊어지는것도 아니며 짧게 사귄다고 하여 얄팍한 우정이 생기는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을 대하고 인간의 운명을 대하는데서,자기 민족과 민족의 운명을 대하는데서 어떤 립장과 태도를 가지는가 하는것이다. 이런 립장과 태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우정을 배가할수도 있고 파탄시킬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인민에 대한 사랑,조국에 대한 사랑,이것은 우정을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나는 반성위가 소왕청을 떠날 때 말을 타고 훈춘경계까지 가서 그를 전송하였다. 반성위가 다리를 조금씩 절며 다니기때문에 나는 그에게 말을 알선해주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십리평에 이틀 묵는동안에도 국제공산주의운동문제와 중국당과의 관계문제,특히 조선혁명의 당면문제와 장래문제까지 포괄하는 많은 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을 하였으며 굳은 맹약도 다지였다.

그때의 소재는 장편소설이라도 엮을수 있는것이였다. 그 십리평이 바로 리범석의 사관학교가 있던 동네였고 오중화네 가문이 피난을 와서 거처하는 동네였다.
반성위는 나중에 가정생활의 비밀까지도 털어놓았다. 그에게는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되는 젊은 안해가 있었다. 그 녀자의 이름을 오영옥이라고 하였던지 오붕옥이라고 하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반성위에게 40살이 넘어서야 가정을 이룬 까닭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허허,까닭은 무슨 까닭이겠소. 내가 착실한 신랑감이 못되니 녀자들이 다 내곁을 지나가버린것이지. 어느 누가 이런 절름발이에게 감히 정을 주겠소. 우리 오씨부인이 아니였더면 난 장가도 못들고 허리가 꼬부라질번 했소.》
반성위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였다. 어쨌든 그는 자기를 경멸하려고 세상에 태여난 사람 같았다.

나는 반성위의 철늦은 사랑에 심심한 동정을 느끼였다.
《그 오씨부인이 사람을 보기야 면바로 보았지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굉장한 미인이라는데 늦사랑에 깨가 쏟아지겠습니다.》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요. 그런데 신기한것은 내가 먼저 그에게 구혼을 한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해왔다는거요. 하여튼 늦사랑이라는게 별맛은 별맛이야.》
《북만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김동무는 제발 남성세계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나같은 지각생이 되지 말아주오.》
《글쎄요. 나도 지각생이 될지 모르지요.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입니까.》

우리는 십리평풀밭에서 이런 여담까지 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는 과정에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반성위는 그동안 왕청에 정이 들었다고 하면서 나와 헤여지는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왕청을 떠나서 반성위가 다음으로 가야 할곳은 훈춘과 화룡이였다.
《김동무의 인상이 일생동안 내 머리속에 남아있을것 같소. 왕청에 와서 김일성동지를 사귄게 참 기쁩니다.》
훈춘-왕청경계를 넘을 때 반성위가 정색해서 내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서 하는 말이였다.
《나도 역시 같은 심정입니다. 반동지를 만난것은 나의 행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헤여지고싶지 않습니다.》
《낸들 왜 헤여지고싶겠소. 이번 행각이나 끝나면 나도 처를 데리고 동만땅에 와서 김동무와 같이 손을 맞잡고 일하고싶소. 우린 어딘가 낡았소. 때묻었거든… 조선의 〈호지명〉이 되시오.》

반성위는 이런 말을 남기고 왕청땅을 떠났다. 그는 얼마쯤 걸어가다가 뒤로 돌아서서 머리우에 손을 쳐들었다. 첫상면때 보던것과 꼭같은 손동작을 보는 내 마음속에서는 어째서인지 그동안 퍼그나 많은 세월이 흘러간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얼굴의 매 세부와 인상들은 내가 수십년전부터 눈에 익혀온듯한 느낌조차 들었다.

사귄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 사람을 바래주면서 왜 이다지도 마음이 외로와지고 구슬퍼질가 하는것이 그가 나를 돌아볼 때 내 가슴을 짜릿하게 해주던 석별의 감정이였다. 반성위는 웃고있었으나 그 웃음은 어쩐지 서글퍼보였다. 나는 그 미소가 종시 마음에 걸리였다. 차라리 그가 웃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은 더 가벼웠을는지 모른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나와 헤여진 반성위는 훈춘땅에 가서 불귀의 객이 되여 쓰러졌다.

그를 살해한것은 훈춘유격대의 대대정치위원이였던 박두남이였다. 로선전환을 토의하는 훈춘현당확대회의에서 반성위로부터 가장 엄중한 비판을 받은것이 다름아닌 그 박가였다. 박가는 파벌투쟁의 우두머리라는 락인을 받고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였다. 호위임무를 지닌 병사들이 반성위가 글을 쓰고있는 숙소마당에서 전리품으로 들어온 38식보총을 구경하고있을 때 박두남이 그 총으로 국제당파견원을 쏘았다는 소문이 왕청에까지 날아 와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키였다.

그 소문을 들은 나는 반성위와 함께 혁명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던 리치백로인네 웃방에서 하루종일 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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