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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7.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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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712회 작성일 15-03-0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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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 산


팔도구시절에 우리 집으로 자주 찾아오던 황씨는 우리 아버지의 생애에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이였다. 후창에서 일경들의 손으로부터 아버지를 탈환해낸 사람이 바로 황씨였다.

아버지는 국내조직들과의 련계를 지으려고 포평에 건너갔다가 비밀아지트로 리용하던 국수집근방에서 매복경관들에게 붙잡히였다. 적들에게 아버지를 밀고한것은 우리 뒤집에서 객주업을 하던 손세심이였다. 이자가 사흘이 멀다하게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아버지의 곁에 딱 붙어앉아 《김선생》, 《김선생》하면서 알랑거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손세심이 밀정이라는것을 모르고 지냈다.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지하조직을 들춰내기 위하여 아버지를 체포한데 대해서 극비에 붙이고 평안북도경찰부에 고위급관리들을 급파하여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하게 하였다. 포평경찰관주재소 순사부장 아끼시마와 다른 순사 한명이 부랴부랴 후창경찰서를 거쳐 신의주 도경찰부까지 아버지를 호송해가게 되였다. 적들이 아버지를 체포하자마자 신의주로 호송하게 된것은 압록강연안에서 활동하는 독립군들이 아버지를 탈환해갈 우려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아버지가 포평경찰관주재소 류치장에 갇혀있는동안은 놈들이 가족을 주재소에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신의주로 호송되게 된것도 알지 못하고있었다.

황씨가 달려와서 그 소식을 알려주었다.

《성주 어머니, 내가 집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변호사를 대고 재판받는것까지 보고 오겠으니 너무 걱정마시우다. 집에 술이 있으면 몇병 주시오.》

그는 독한 술 몇병에다 마른명태 한코를 망태기에 넣어가지고 슬금슬금 아버지를 따라갔다.

순사놈들은 아침 일찌기 길을 떠났는데 연포리주막집에 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다되였다. 그자들은 배가 출출하다고 하면서 그 주막집에 밥을 시키였다. 그때 일행을 뒤따라 연포리까지 온 황씨가 그 집에 들어와 동정을 살피다가 망태기에서 술병을 꺼내들고 순사놈들에게 술을 권하였다.

놈들은 처음에 죄인호송중이여서 안된다고 하다가 황씨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이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잔두잔 받아마시기 시작하였다. 황씨는 잡혀가는 사람에게도 밥을 먹여야 할게 아니냐고 하면서 경찰들을 구슬려가지고 아버지의 한쪽손에서 수갑을 벗기게 하였다. 황씨도 술을 많이 마셨으나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원래 술고래였다.

아끼시마는 자기의 수하졸병인 조선인순사와 함께 마침내 그자리에 꼬꾸라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아버지는 황씨의 도움으로 수갑을 풀고 그와 함께 주막집에서 뛰쳐나와 맞은켠에 있는 뾰족봉으로 올랐다. 산꼭대기에 거의 올라섰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술에서 깨여난 순사들은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헛총질을 하면서 아버지를 추격하였다. 놈들이 총질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그때 뾰족봉에서 황씨와 헤여졌다. 그후로는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내가 해방후 이 황씨를 찾느라고 여러곳에 줄을 놓았다. 곤난할 때 그렇게도 목숨을 내대고 서슴없이 아버지를 도와주던 사람이 웬일인지 좋은 세상을 만나니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황씨는 우리 아버지를 대신하여 단두대에라도 올라설수 있는 진실한 벗이며 동지였다.

황씨와 같은 성실한 동지의 방조가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그런 역경속에서 위기를 모면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아버지를 보고 동무복을 타고났다고 말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버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또 많은 독립운동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다보니 주위에는 군중이 많았고 혁명동지들과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후퇴시기 리극로선생한테서도 아버지의 탈출과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이 일어난 그해 초가을에 공화국정부에서는 지방들에서의 현물세납부사업을 추진시킬 목적밑에 여러명의 내각성원들을 전권대표로 파견하였다. 그때 무임소상을 하던 리극로선생도 평안북도에 파견되였다.

선생이 과업을 다 수행하였을 때는 전략적후퇴가 시작되여 우리가 강계지방에 가있을 때였다. 하루는 그 선생이 내각에 사업보고를 하겠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왔다가 연포리주막집에 대한 화제를 느닷없이 꺼냈다. 자기가 후창군에서 일을 끝내고 강계로 나올 때 그 군 내무서장을 데리고 연포리라는데 가서 우리 아버지가 탈출한 주막집을 직접 돌아보았는데 그 집이 그냥 남아있더라는것이였다. 강계와 후창은 그전에는 다같이 평안북도에 속해있던 고장들이였다.

한생을 남조선과 해외에서 보내다가 해방후 건국을 앞두고 북반부에 들어온 리극로선생한테서 연포리주막집이야기를 듣는다는것은 참으로 놀랍고 희한한 일이였다. 지금처럼 우리 아버지의 사적이 널리 공개된 때라면 몰라도 연포리주막집이 무슨 집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때에 그런 말을 들으니 나로서는 신기한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리극로선생에게 물었다.

《리선생이 어떻게 되여 우리 부친의 력사를 다 아십니까?》

《나는 벌써 20년전에 김형직선생님 명성을 들었습니다. 길림에서 어떤 고마운분이 장군님일가에 대해서 자상하게 이야기해주지 않겠습니까. 이 전쟁만 끝나면 춘부장님에 대한 전기를 쓰고싶습니다. 그런데 붓끝이 무뎌서 망설이고있습니다.》

평상시 그처럼 과묵하고 조용하던 리극로선생이 이날은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많은 말을 하였다.

우리는 내각이 자리잡고있는 번잡한 방을 떠나 인적이 드문 독로강(장자강)기슭을 거닐면서 한시간 남짓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극로선생에게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황귀헌의 아버지 황백하였다. 그 당시 리극로선생은 신간회대표단 성원으로 만주지방에 들어가있었다. 그 대표단의 사명은 5.30폭동과 8.1폭동에서 피해를 입은 조선동포들에 대한 구제사업을 하는것이였다. 폭동피해자들이 속출하자 신간회지도부는 만주지방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그들에 대한 원호사업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리극로선생은 심양에서 최일천을 만났다. 길림에 가면 황백하를 만나보라고 선생에게 권고한 사람이 바로 최일천이였다.


리극로선생은 그의 말대로 길림에 가자 황백하를 만나 그에게서 구제사업을 위한 도움도 받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때부터 연포리가 후창군에 있고 후창군이 우리 아버지의 주요한 활동연고지임을 알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신간회가 선생을 대표로 만주지방에 파견한것은 그가 이 일대에서 다년간 교육활동에 종사한 경력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선생은 내도산의 독립군부대에서 한동안 훈련도감으로도 있었고 무송의 백산학교와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그런것만큼 선생이 만주에 갔다가 거기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것은 십분 있음직한 일이였다.

《군내무서장이라는 사람은 주막집내막을 잘 모르고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창군의 수치라고 비판을 좀 했습니다. 그리구 내무서장이 책임지고 주막집을 잘 보존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리극로선생은 후대들이 선렬들의 투쟁력사를 모르면 후레자식이 되는 법인데 일군들이 전통교양을 잘하는것 같지 않다고 걱정하였다.

창건된지 두해밖에 안되는 청소한 공화국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서있던 준엄한 시련의 시기에 혁명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선생의 말을 듣고보니 나도 얼마나 고마운 생각이 드는지 몰랐다. 이 땅을 찾기 위해 싸우다가 희생된 선렬들의 령혼이 우리의 눈앞에 한꺼번에 날아와 싸워서 이기라고, 조국을 끝까지 수호하라고 절규하는것 같아서 뜨거운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조선이 다 망했다고 떠들던 때에 연포리에 대한 리극로선생의 이야기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

황씨와 헤여진 아버지는 하루종일 산에서 헤매다가 연포리주막집에서 그닥 멀지 않은 가둑령이라는곳에서 오막살이땅굴막을 하나 발견하고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서로 통성을 하는 과정에 아버지는 주인이 전주 김씨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땅굴막주인은 가둑령과 같은 심심산골에서 동성동본의 혁명가를 만난것은 경사라고 하면서 호감을 가지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김로인은 땅굴막근처에 있는 조낟가리속에 아버지를 숨겨주었다. 그때 발도 얼고 무릎도 얼고 아버지의 하반신이 다 얼었다. 사지를 가드라뜨린채 운신도 못하고 며칠동안 찬바람이 스며드는 낟가리속에 숨어있으면서 그만 난치의 병을 얻었다.

로인은 낟가리속에 밥덩어리도 넣어주고 구운 감자도 넣어주면서 아버지를 보호해주었다.


아버지를 놓쳐버린 아끼시마는 상급으로부터 호된 추궁을 받았다. 평안북도경찰부에서는 후창에서부터 죽전리에 이르는 압록강류역에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펴고 며칠동안 수색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가둑령의 조낟가리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그때 정황판단도 잘하고 은신처도 잘 선택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김로인은 압록강변에 나가서 강물이 얼었는가 얼지 않았는가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아버지에게 장대기를 가지고 강을 건느는 방법까지 대주었다. 아직 얼음이 두텁게 얼지 않은 때여서 서뿔리 강을 건너갈수 없었다.


아버지는 김로인이 시켜준대로 얼음우에 장대기를 놓고 두손으로 그것을 밀면서 배밀이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갔다. 장대기만 들고있으면 물에 빠져도 목숨을 잃을 념려가 없었다. 아주 기발한 도강방법이였으나 그 도강과정에 아버지는 재차 동상을 입었다. 그때의 그 동상이 1년후 무송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또하나의 화근으로 되였다.


천신만고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압록강을 무사히 건는 아버지는 며칠동안 토로즈마을에서 치료를 받다가 공영과 박진영의 안내로 무송으로 떠나갔다. 공영과 박진영은 장철호가 지휘하는 정의부소속의 무송주둔 독립군대원들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오동진의 소개로 공영이란 인물을 알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말하였다. 공영은 벽동군출신으로 벽동독립청년단시절과 벽파별영에서 무장대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오던 진실한 청년이였다. 아버지하고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우리 집에 오면 늘쌍 《성주》, 《성주》하면서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도 후날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여 우리의 동지로, 전우로 되기 전까지는 그냥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공영은 말리허에 있으면서 한주일에 한번정도씩 쌀과 나무를 마련해가지고 우리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군 하였다. 그의 부인도 산나물을 한임씩 해이고 남편을 따라 우리 집에 오군 하였다. 공영은 우리 아버지를 잊지 못해 한동안 몽상을 벗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두사람과 함께 무송으로 들어가다가 만강 경내에서 마적들에게 붙잡혀 또 봉변을 당하였다. 사방에 토비들이 우글거리던 때였다. 군벌들이 도처에서 칼을 빼들고 세력다툼을 하던 혼란되고 불안정한 당시의 환경이 토비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살길이 막힌 최하층의 인간들중에도 이 길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반일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비적단들에 침투하여 그 상층을 조종하거나 따로 토비들을 길러냈다. 토비들은 무리를 지어다니면서 주민지구의 가옥들을 털기도 하였고 행인들을 붙들어놓고 돈이나 물건 같은것을 빼앗아내기도 하였다. 수가 틀리면 사람들의 귀를 베거나 목을 자르는 잔인한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것만큼 아버지를 호위해가는 두사람도 여간 긴장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가 의사라고 신분을 밝혔으나 무지막지한 마적들은 의사라면 돈이 많지 않겠는가고 하면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의사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병을 봐주고 겨우 밥벌이나 하는데 그러지 말고 당신들가운데 병난 사람이 있으면 고쳐줄수 있다, 돌아가서 관헌들한테 당신들을 고발하지도 않을테니 놓아달라고 하면서 여러가지로 구슬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이 이쯤 되자 공영은 저녁식사후 그들이 약담배를 빨고 해이해진 틈을 타서 등잔불을 끄고 아버지와 박진영을 먼저 탈출시킨 다음 여라문명 되는 마적들을 격술로 모조리 쓰러뜨리고 토비굴을 뛰쳐나갔다. 참으로 일종의 활극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장면이였다.

이 탈출에서 공영이 발휘한 희생적인 노력을 두고 아버지는 인상깊은 회상을 자주 하였다. 공영은 동지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적인 투사였다.


며칠후 아버지는 무송에서 장철호를 만났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측량을 하던 사람이 그때는 군인이 되여 독립군의 한개 중대를 지휘하고있었다. 그는 병색이 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몹시 상심해하며 몸이 추설 때까지 자기들이 주선해놓은 거처에서 쉬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권하였다.


사실 그때의 아버지로서는 몸조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육신을 지탱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아버지자신도 그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때가 겨울치고도 제일 추운 때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든 몸에 찜질 한번 해볼 경황도 없이 인차 북행길에 올랐다.


장철호중대장이 직접 아버지를 목적지까지 안내하였다.

그때 다녀온곳이 바로 화전과 길림이다. 아버지가 몸에 생긴 동상을 무릅쓰고 그토록 총총히 이 지방들에 간것은 독립운동단체들의 단일전선에로의 통합과 반일애국세력의 단결을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는 독립운동자들속에서도 당을 내오는 문제가 일정에 오르고있었다.


사상이 발전하고 혁명의 리념화가 심화됨에 따라 정당정치는 시대적추세로 되여 세계의 정치계에 급속히 일반화되여갔다. 부르죠아정객들도 공산주의자들도 다같이 정당정치를 지향하였다. 10월혁명을 분기점으로 하여 아세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공산당들이 련이어 창건되였다. 새 사조의 보급과 함께 동방도 정당정치의 시대를 맞이한것이였다. 1921년에는 우리의 린방인 중국에서도 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조선의 선각자들도 민족해방투쟁을 정치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을 힘있게 다그치였다.


정당정치는 그 지침으로 되고 기초로 될수 있는 사상과 리념의 창시와 그 발전을 전제로 하며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할수 있다.


부르죠아민족주의는 우리 나라 근대력사에서 하나의 사조로 등장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왔으나 자기의 정당을 가지지 못한채 조락되고있었다. 민족해방투쟁무대에서는 부르죠아민족주의를 대신하여 새로운 공산주의사조가 대두하였다. 부르죠아민족주의가 더는 민족해방투쟁의 기치로 될수 없다는것을 절감한 새 세대의 선각자들속에서 공산주의신봉자대렬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민족주의진영에서도 많은 선진분자들이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바꾸었다.


관전회의에서 제시된 방향전환의 방침은 선언으로 그친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내부에서 선각자들에 의해 실천단계에 들어서고있었다. 관전회의방침을 맨처음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사람은 오동진이였다. 오동진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에서는 관전회의가 있은 후부터 맑스ㅡ레닌주의사조에 공감해나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는 이 시기에 대두한 새 세력을 《제3세력》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었다.


일경의 포박에서 탈출한 아버지가 무송을 거쳐 길림에 간 1920년대중기는 민족운동내부에서 방향전환을 지향하는 혁신파와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파의 분해과정이 촉진되던 때였다.

아버지는 이런 대세를 통찰한데 기초하여 방향전환의 리념을 실현할수 있는 정치조직의 탄생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만주지방에서의 조선사람들의 민족운동은 그때까지 국권회복의 리념밑에 주로 직접적인 무장활동과 교육, 민생문제를 기본으로 하는 자치활동의 형태를 띠고 전개되여왔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령도할수 있는 조직이 없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아버지는 길림일대에서 활동하던 혁신계렬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만주지방에 산재하는 모든 군사단체들과 자치조직들에 대한 정치적령도를 보장할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첫 사업이 바로 아버지의 제의로 길림의 우마항에서 소집된 모임이였다. 모임은 1925년초 길림시 북산밑에 있는 박기백(박일파의 아버지)의 집에서 열리였다. 이 회합에는 량기탁, 현하죽, 오동진, 장철호, 김사헌, 고원암, 곽종대 등 독립운동의 원로들과 중견인사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령솔할수 있는 정치단체의 필요성을 한결같이 인정하고 가까운 장래에 모종의 유일당을 내올데 대한 결정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모임에서는 창당과 관련된 여러가지 원칙적문제들도 협의하였다.

리관린의 회상에 의하면 회의과정에 제일 많이 론의된것은 당의 명칭에 대한 문제였다고 한다. 당명을 조선혁명당이라고 하는것이 좋겠는가, 고려혁명당이라고 하는것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결국 명칭도 중요하지만 활동목적에 부합되게 당의 임무와 강령을 정확히 설정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데로부터 명칭은 고려혁명당으로 락착짓고 강령토의에 넘어갔다는것이다.


우마항회의에 참가했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은 1년후 국내에서 온 천도교혁신파대표와 형평사대표, 연해주에서 온 대표들과 함께 련석회의를 열고 《현금의 사유재산제도를 소멸하고 현존한 국가조직을 철페하여 공산제도에 의한 세계 단일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병중에 있은 아버지는 그때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북산과 강남공원을 참관하고 신안툰의 청년단체 간부들까지 만나본 다음 무송에 돌아와 우리에게 전화로 림강을 떠나도록 분부하였다.


림강을 떠나 얼마간 갔을 때 우리는 장철호중대장이 보낸 두명의 베감투를 쓴 독립군대원을 만났다. 그들이 베감투를 쓰고 온것은 특무들의 의심을 덜 받기 위한 위장이였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온 말파리를 타고 무송으로 향하였다.


아버지는 무송시가에서 40리가량 떨어진 대영에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다. 얼굴에 비록 병색은 짙었으나 환히 웃고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만가지 시름이 다 풀리는것 같았다. 나는 동생들의 손을 이끌고 앞으로 달음박질해갔다.


동생들은 내가 미처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아버지한테 매여달려 두달동안이나 품어두고있었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놓았다.


아버지는 그들의 응석을 일일이 다 받아주면서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조국의 물이 좋기는 좋구나! 내가 너를 조선에 내보내고 잠을 못잤는데 네가 어느새 이렇게 숙성했구나!》하며 아버지는 기뻐하였다.


그날밤 우리는 가족끼리 모여앉아 밤을 밝히며 회포를 풀었다. 내가 아버지의 탈출을 도와준 황씨와 전주 김씨로인, 만강토비굴에서의 공영의 용감한 미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것이 바로 그날밤이였다.

나는 조국에서 보고 느낀것을 이야기하다가 아버지에게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두번다시 압록강을 건느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씀드리였다. 아버지는 대견스럽게 나를 살펴보더니 조선의 아들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긍정해주면서 조선을 알기 위한 공부가 창덕학교에서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니 새 고장에 와서도 조국을 알고 민족을 알기 위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의미심장하게 당부하였다.


며칠후 나는 무송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에서 나와 제일 친한 학생은 장울화라는 중국소년이였다. 그는 무송에서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손꼽히는 부자집 아들이였다. 장울화네 집에는 가병만 해도 수십명이나 있었다. 무송현 동강에 있는 인삼포는 거의나 장울화네것이였다. 장울화네는 해마다 가을이면 인삼을 캐여 말이나 노새에 싣고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팔았다. 그 집에서 인삼을 팔러 갈 때에는 가병들이 10리씩이나 늘어서군 하였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부자였지만 제국주의를 미워하고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량심적인 인간이였다. 장울화역시 그랬다.

나는 후날 혁명활동을 하면서 그들의 덕으로 어려운 고비를 여러번 모면하였다.


조선학생들중에서는 고재봉, 고재룡, 고재림, 고재수 등이 나와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가 무송을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려나가던 당시는 중국반동군벌들이 친일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조선애국자들의 활동을 각방으로 방해하고있었기때문에 정세가 매우 불리하였다. 그런데다가 평양과 포평에서 받은 두차례의 심한 고문과 동상의 후과로 하여 아버지의 건강도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혁명투쟁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소남문거리의 우리 집에는 《무림의원》이라는 새 간판이 나붙었다. 사실 아버지는 남을 치료할 형편이 못되였다. 오히려 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인차 또 길을 떠났다.

그때는 다들 못떠난다고 말리였다. 장철호, 공영, 박진영을 비롯하여 무송에서 왔다갔다하는 독립운동자들은 누구나 다 만류하였다. 나나 형권삼촌도 말리고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지지하고 말없이 받쳐드리던 어머니도 이번만은 가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만류하였다.


아버지는 결심을 굽히지 않고 기어이 무송을 떠났다.

내도산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상층이 행동통일을 보지 못하고 몇개의 패로 갈라져 서로 세력다툼을 하기때문에 부대가 와해될 위험에 처해있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몹시 불안해하였다.

장철호의 지령을 받은 사람이 안도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그는 두사람분의 길량식으로 좁쌀 대여섯되박과 된장 한단지를 배낭속에 넣은 다음 도끼와 권총 한자루를 몸에 지니고 무송을 떠났다. 목적지까지는 수백리나 되는 무인지경이였다. 그 무인지경을 가느라고 퍼그나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밤에는 한지에다 우등불을 피우고 덮개도 없이 통나무무지에 기대여앉아 쪽잠을 청하군 하였는데 아버지의 기침이 심하여 그 사람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안도에 갔다와서도 그냥 심하게 기침을 하였다. 며칠후부터는 그런 몸으로 백산학교의 인가를 얻느라고 또 여기저기를 뛰여다니였다.


백산학교는 국내에서 사립학교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있을 때 그에 보조를 맞추어 무송지방에 이주한 조선의 망명자들과 선각자들이 농민들과 함께 설립한 력사가 오랜 사립학교였다.

초기의 백산학교 규모는 아버지가 다닌 만경대의 순화서당만큼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의 농촌집 방 두개를 합친것만 하였다.


그런데 그처럼 작은 규모의 백산학교도 운영비의 부족으로 오래동안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가 무송에 이사하였을 때에는 백산학교를 복구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던 시기였다. 일제의 부추김을 받고있던 군벌당국이 학교의 인가를 해주지 않아서 아버지는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디 가서나 교육운동에 선차적인 주의를 돌리고 도처에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아버지는 개교식전야에 장철호와 함께 목공창에서 만든 새 걸상들을 마차에 싣고 백산학교로 갔다. 비록 《무림의원》간판을 달고 의원일은 중단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늘 학교에 가있었다.


아버지는 백산학교 명예교장으로서 직접 교편을 잡지 않았으나 교육내용과 후원사업을 보아주면서 학교에 나가 연설도 하고 과외활동지도도 많이 하였다.

백산학교에서 사용한 《국어독본》은 우리 아버지가 손수 쓴것이였다. 아버지는 백산학교를 세운 다음 류하현 삼원포에 갔다와서 박기백(박범조)이라는 사람과 함께 그 교과서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교재를 집필하면 뜻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삼원포에 가지고가서 인쇄해다가 만주각지에 배포하였다. 거기에 교과서를 찍어내는 정의부관할하의 인쇄소가 하나 있었다. 석판으로 인쇄물들을 뽑아냈는데 책들이 훌륭하였다. 만주에 있는 조선인 학교들에서는 여기서 찍어낸 교과서들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무송에서 교육문제를 의논하는 회의만 해도 여러 차례 열고 안도, 화전, 돈화, 장백 등지에 유능한 사람들을 파견하여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모든곳에 학교와 야학을 세우도록 하였다. 장백현 18도구 득영촌의 육영학교도 그무렵에 세운 학교였다. 후날의 조선혁명군 대원이며《ㅌ.ㄷ》성원인 리제우와 항일투사 강돈은 다 그 학교 출신들이였다.


백산학교 일이 잘되여가자 아버지는 다시금 만주각지로 다니면서 독립운동자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이 시기의 활동에서 기본은 독립운동의 통일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이였다 방향전환의 로선을 실현할수 있는 모종의 유일당창건문제가 일정에 오를 때였던것만큼 그 초석으로 되는 독립운동대렬의 단합을 이룩하는 문제는 그 누구도 외면할수 없는 초미의 시대적과제로 나서고있었다. 그것을 위해 아버지는 생애의 말년을 고스란히 바치였다.

그 당시 동북 3성에 할거하고있던 여러 갈래의 군소독립운동단체들은 3부로 통합되여 만주에는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가 존재하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런데 이 3부도 세력권확장을 위한 파쟁을 일삼아 민중의 손가락질을 받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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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세하에서 아버지는 통일단결이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력사적대과제라는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1925년 8월에 무송에서 국내외의 조선국민회 대표들, 무장단체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대렬의 통일단결을 위한 대책을 토의하고 민족단체련합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그때 아버지의 구상은 이 촉진회를 움직여서 유일당창립을 앞당기려고 하였던것 같다. 아버지는 분과 초를 다투어가면서 하루하루를 다른 때보다 몇곱절 더 서둘러 일하였다. 그때 아버지자신은 벌써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한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후 얼마 안되여 중환으로 몸져누웠다.

1926년 봄부터 아버지는 완전히 병석에 매인 몸이 되였다.

아버지가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토방우에 낯선 신발들이 대여섯컬레씩 놓여있군 하였다. 다들 몸에 좋다는 약들을 지어가지고 와서 문병을 하고 아버지를 위로하였다. 아무리 돈에 궁한 사람도 인삼 한뿌리씩은 거의 가지고 왔다. 하지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아버지의 병에는 약도 효험이 없었다. 봄은 지상만물에 기름진 생명의 즙을 주며 새 계절을 노래하고있었건만 야속하게도 만사람이 그렇게도 바라고 기다리던 아버지의 건강만은 소생시키지 못하였다.


나도 학교에 다닐 마음의 경황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나는 학교로 가다가 아버지가 걱정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너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 하고 엄하게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한숨만 쉬였다.

아버지는 《가거라. 사내가 그래서는 큰일을 못해.…》라고 하며 나를 기어이 학교로 보내였다.


하루는 길림에서 오동진이 장철호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왔다. 오동진은 무송회의방침에 따라 반일애국력량을 묶어세우느라고 여러모로 애를 썼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심하던중 의논도 할겸 병문안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찾아왔노라고 하면서 분렬을 일삼는 사람들의 소행을 격분에 차서 타매하였다.


성미가 과격한 장철호는 그런 옹고집쟁이들하고는 차라리 결별을 하고말아야 한다면서 분노를 다잡지 못하였다.

두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있던 아버지는 그들의 손을 하나씩 갈라잡고 《아니요. 그래서는 안되오. 힘이 들더라고 통합은 꼭 실현해야 하오. 통합을 해가지고 무장으로 적과 맞서기 전에는 독립을 성취할수가 없소.》 하고 말씀하였다.


그들이 돌아간 후 아버지는 리조시기부터 내려오는 당파싸움에 대해 말씀하면서 당쟁때문에 나라가 망했는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분오렬되여 파쟁을 일삼고있으니 야단이라고 개탄하였다. 파쟁을 근절하기 전에는 나라의 독립도 이룩할수 없고 문명개화도 이룩할수 없다, 파쟁은 국력을 쇠진케 하는 근원이고 외세를 끌어들이는 매개자이다, 외세가 들어오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너희들 대에는 반드시 파쟁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단결을 이룩해야 하고 민중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병구완을 할 때면 아버지는 나를 옆에 앉혀놓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로는 아버지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얻은 체험들이였는데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아버지의 이야기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3대각오에 대한 말씀이다. 《혁명가는 어디 가나 항상 3대각오를 가져야 한다. 아사, 타사, 동사, 다시말하여 굶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를 가지고 처음 먹은 원대한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었다.


벗과 우정에 대한 아버지의 말씀도 교훈적인것이였다.

《사람은 어려울 때 사귄 벗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대문을 나서서는 벗들에게 의지하라고들 하는데 다 뜻이 있는 말이다. 생사고락을 같이할 진정한 벗은 사실상 형제보다도 더 가깝다.》

그날 아버지는 벗과 우정에 대한 말씀을 장시간 하였다.


아버지는 동지를 얻는 일로부터 투쟁을 시작하였다, 돈이나 륙혈포를 얻는것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어데 가서나 좋은 동지들부터 물색하였다, 좋은 동지란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것도 아니다, 금이나 보석을 캐내듯이 힘을 들여 스스로 찾아내야 하며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한평생 조선과 만주벌판을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닌것이다, 너희 어머니도 그래서 한뉘 손님시중을 드느라고 배를 곯으며 고생하였다,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수 있다, 백만금을 가지고서도 얻지 못하는 우정을 단 한모금의 숭늉이나 한알의 감자를 가지고 얻는것도 다 그때문이다,

아버지는 재산가도 아니고 세력가도 아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있다, 그것을 재산이라고 할수 있다면 아버지는 재산가운데서도 제일 큰 재산을 가지고있는셈이다,

아버지는 동지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동지들도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보호해주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가지가지의 풍상고초를 이겨내며 광복운동에 헌신할수 있은것은 동지들이 아버지에게 사심없는 방조를 주었기때문이다.…


아버지는 병중에 계시면서도 제일 그리워지는것이 친구들이라고 하며 나에게 좋은 동지들을 많이 사귀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동지를 위해 죽을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수 있다.》

그때 아버지가 해준 말씀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어머니는 몇달동안 침식을 잊고 병마와의 어려운 싸움을 하는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해드리였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따를수 없고 대신할수 없는 눈물겨운 지성이였다. 그러나 그 초인간적인 지성도 아버지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1926년 6월 5일, 아버지는 고향으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이역의 자그마한 지붕밑에서 망국의 한을 풀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는 독립을 이룩하고 함께 돌아가자고 하였는데 나는 못갈것 같소. 나라가 독립되면 당신이 성주를 앞세우고 고향에 가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자니 시름이 안놓이오. 성주를 부탁하오. 내가 성주를 중학까지 공부시키자고 했는데 글러진것 같소. 당신이 할수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을 먹더라도 중학까지는 공부시켜주오. 그다음 그 아래 동생들은 성주가 할탓이요.》


그날 어머니에게 남긴 아버지의 유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되였다. 아버지는 늘 차고다니던 권총 두자루를 어머니에게 주면서 이렇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다음 이 총이 나지면 재미가 없으니 땅속에 묻었다가 성주가 커서 투쟁의 길에 나설 때 주도록 하오.》

그리고는 우리 삼형제를 향하여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 그러나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라와 민족의 몸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고 나라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나는 소리를 내여 목놓아울었다. 아버지의 서거는 나의 마음속에 잠재하고있던 망국의 설음을 한꺼번에 폭발시키였다.


아버지는 한생을 나라를 위해 살을 저미고 뼈를 깎다가 돌아갔다. 거듭되는 악형과 동상으로 몸에 치명상을 입었을 때에도 굴함을 모르고 민중을 찾아가고 동지들을 찾아가던 아버지였다. 힘이 진하면 지팽이를 짚고 배가 고프면 생눈을 움켜삼키면서도 뒤를 돌아보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곧장 앞으로만 걸어가던 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광복과 근로인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아버지에게는 물욕도 없었고 사리사욕도 없었다. 돈이 생기면 자식들에게 사탕을 사먹이고싶어도 꾹 참고 한푼두푼 모아서 풍금을 사다가 학교에 기부하였다. 자기를 생각하기에 앞서 겨레를 생각하고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어간 아버지였다.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


나는 아버지가 가정살림에 대해서 말씀하는것을 한번도 듣지 못하였다. 내가 사상이나 정신면에서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것이 많지만 재물이나 금전상으로 상속받은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우리 고향집에 전시해놓은 농쟁기나 가정도구들도 모두 할아버지가 남긴것이지 아버지가 물려준것은 아니다.


《지원》의 사상, 3대각오, 동지획득에 대한 사상, 두자루의 권총, 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그것은 모진 고생과 희생을 전제로 하는 유산이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유산이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였다. 장례날에는 소남문거리가 미여지게 조객들이 모여들었다. 남북만각지와 간도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평소에 아버지를 따르고 흠모하던 수많은 동지들과 친구들, 제자들, 어제날의 환자들이 꼬리를 물고 무송으로 밀려들었다. 무송현장도 금박향지묶음을 가지고 찾아와 아버지의 령전에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였다.


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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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아버지의 묘소는 소남문거리에서 10리가량 떨어진 두도송화강기슭의 양지촌에 쓰게 되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 마을로 자주 다니였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병도 봐주면서 한집안식구처럼 허물없이 지내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평소에 그처럼 살뜰하게 지내던 사람들속에 계시고싶었을것이다.
그날은 소남문거리로부터 양지촌에 이르는 10리길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였다. 독립운동자들은 상여를 메고가면서도 목놓아울었다.

무송지방의 조선녀성들은 아버지의 장례식날부터 보름동안 머리에서 흰댕기를 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고 스승을 잃고 지도자를 잃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서 생명을 준 혈육인 동시에 어린 나이때부터 나를 혁명의 길로 끊임없이 인도해준 스승이였고 지도자였다. 아버지의 희생은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타격으로 되였다. 내 가슴은 메꿀수 없는 상실로 하여 텅 비여버리였다.
어떤 때는 홀로 강가에 나가앉아 멀리 조국의 하늘을 그려보며 눈물을 짓기도 하였다.

생각하면 나에 대한 아버지의 정은 남다른것이였다. 내가 좀 자라서부터는 늘 진지하게 나라와 민족의 장래문제를 터놓고 말씀하군 하던 아버지였다. 무한히 엄하면서도 끝없이 웅심깊은것이 우리 아버지의 사랑이였다. 이제는 그런 사랑, 그런 이끄심을 더는 받을수도 없고 바랄수도 없게 되였다.
그러나 나를 비탄의 눈물속에서 일으켜세워준것은 아버지의 남다른 그 유산이였다. 《지원》, 3대각오, 동지획득, 두자루의 권총…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 막막하고 암담한 슬픔속에서도 나는 그 유산에서 힘을 얻고 내가 갈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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