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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6-4. 합작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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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473회 작성일 15-04-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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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합작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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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와 통화를 련결하는 반일인민유격대의 행군로정에는 우리 나라의 북부국경지대에서나 볼수 있는 험준한 산악들과 계곡들이 많았다. 안도에서 무송까지는 장백산줄기가 뻗어있었고 무송에서 통화까지는 삼차자령이나 삼도로야령과 같은 험한령들로 이어진 룡강산줄기가 첩첩히 가로놓여있었다.


이런 산줄기들을 타고 부대는 한달가까이 힘에 겨운 행군을 계속하였다. 낮에는 적들의 경계가 미칠수 있는 대도로를 피해 산악행군을 하고 밤에는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부락들에 들어 끊임없는 정치공작과 전투훈련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혁명조직들과의 사업을 하기 위하여 무송에서도 며칠동안 체류하였다. 거기서 그때 장울화도 만나보았다.

장울화는 우리의 체류기일이 짧은데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면서 학창시절의 자기와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무송에 이틀이나 사흘쯤 더 있다가 가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도 그 요청에 응하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무송은 나와 수십수백갈래의 사연으로 얽혀져있는 의미깊은 고장이였다.


그러나 나는 예정대로 사흘인가 닷새만에 부대를 출발시키였다. 지난날에 대한 추억이 아무리 소중하고 발목을 잡아당기는 인정이 아무리 눈물겨운것이라 하더라도 량세봉사령과의 해후를 위해서는 섭섭한대로 장울화와도 헤여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무송에서 통화까지는 500리가량 된다고 하였다. 가면갈수록 심산이라는 말과 같이 산세는 점점 더 사나와지고 행군도 힘들어졌다. 생소한 메봉우리들과 골짜기를 타고 수백리 산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사이에 대원들은 모두 녹초가 되였다. 부대내에서는 환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계속되는 행군으로 어지간히 지친 몸이 되였다.


원정대가 통화근방까지 갔을 때 차광수가 문뜩 나한테로 달려와 이도강에서 하루나 이틀쯤 숨을 돌리다가 통화로 들어가자고 제의하였다.

《무송에서도 더 있고싶은것을 꾹 참고 500리를 내처 달려왔는데 통화를 코앞에 두고 휴식이라니 웬말이요? 차광수답지 않구만.》

나는 차광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그 주장에 동조할수가 없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차광수는 대답에 앞서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주장을 완강하게 고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보여주는 특이한 습관이였다.

《사람들이 모두 지칠대로 지쳤소. 대장동무자신도 극한점에 도달했구. 아니라고 변명하겠지만 내눈은 속이지 못하오. 환자들이 생겨 겨드랑이에 끼고 행군하는 형편인데 이 꼴로 가서야 량세봉사령한테 어떻게 명함을 들이대겠소.》

《량세봉선생은 그만한 사정도 통찰하지 못할 옹졸한 사람이 아니요.》

《사령은 안목이 높아서 그렇다치고 수백명이나 된다는 부하들의 눈은 어떻게 하겠소. 우리를 보구 오합지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 야단이 아니요. 천리를 행군해온 공이 나무아미타불이 될 가봐 겁나오.》

이쯤되면 차광수의 고집을 누구도 휘여낼수 없었다.


나는 차광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꾀죄죄한 몰골로 통화에 나타나면 독립군들이 우리를 시답지 않게 볼수 있는 우려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이 만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얕보게 되면 모처럼 계획했던 합작도 우리의 의도대로 성사시킬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광수가 제기한대로 이도강에서 하루나 이틀쯤 숨을 돌리다가 원기를 회복한 다음 질서정연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통화시내로 행진해들어가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나는 전부대가 행군을 정지하고 이동강에서 숙영할것을 명령한 다음 량사령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여 독립군과의 합작을 위해 반일인민유격대가 안도를 떠나 통화근방에 도착하여 휴식중이라는것을 통지하였다.

우리는 통화에 간 련락원을 기다리며 이도강마을에서 로독을 풀었다.

지휘부는 물레방아간 집에 자리를 잡았다.

물레방아간집 늙은이들은 성의를 다하여 나를 돌보아주었다.


내가 독립군과의 사업에 필요한 행동조례를 해설해주기 위해 지휘부에 대원들을 여라문명 불러다가 정치상학을 하는것을 보고 그 집 령감은 백성의 성의를 몰라준다고 하면서 나를 몹시 나무리였다.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사람이 말을 많이 하면 기를 상하고 지나치게 기뻐하면 감정을 상하고 성내는 일이 많으면 의지를 상한다고 했네.

생각을 적게 하고 걱정을 적게 하고 일을 적게 하고 말을 적게 하고 웃음을 적게 웃으라는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섭생의 본도고 리치란 말일세. 그런데 대장처럼 말을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해서야 기는 어떻게 보존하며 병은 어떻게 털어버린단 말인가. 항차 자네들이야 조선을 독립시킬 군사들이 아닌가.》


로인이 머리에 새겨두기조차 힘든 수십가지의 양생법을 진지하게 설명해주면서 대사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것도 아닌데 장래를 생각해서 몸을 잘 돌봐야 하지 않는가고 거듭 력설하는 바람에 나는 부득불 정치상학에서 손을 떼고 그것을 차광수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는 로인의 말을 듣고 그가 허준의 숭배자라는것과 로인이 우리들에게 장시간 해설해준것이 바로 《동의보감》에 있는 섭생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디서 어떻게 섭렵한 지식인지는 알수 없었으나 로인은 보양법에 대한 조예가 상당한 정도로 깊었다.


우리가 이도강을 떠날 때 로인은 참지에 싸두었던 련밥과 꿀에 반죽했다가 말린 구기자환 여러봉지를 차광수에게 맡기면서 많지 않은 약이지만 대장의 몸을 보양하는데 써주면 고맙게 생각하겠다고 하였다.

로인이 자신의 섭생을 위해 모처럼 지어둔 보약을 가볍게 받을수가 없어 나는 그 약을 조심스레 사양하였다.

《로인님,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그 약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우리 젊은것들이야 기가 허하거나 혈이 모자라서 못살겠습니까. 한평생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락을 보지 못한 로인님께서나 이 약을 쓰시고 조선이 독립되는 날까지 장수하십시오.》


로인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성을 내면서 우리한테 막무가내로 약을 밀어보내였다.

《우리야 다된 인생인데 보약을 쓰면 뭘하고 안쓰면 뭘하겠나. 그렇지만 자네들이야 조선을 독립시킬 선봉대가 아닌가. 우리가 썩박드덜기라면 자네들은 청송록죽이란 말일세.》


우리는 통화에 갔던 련락원이 되돌아와 량사령이 나의 서신을 받고 반일인민유격대의 통화입성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는것과 그가 부하들에게 유격대환영준비를 잘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바쁘게 이도강을 떠났다. 이도강체류기간에 리발을 하고 바지에 주름까지 세운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은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정보행진도 하고 때로는 혁명가요도 부르면서 통화시가를 향해 위풍당당하게 행진해갔다.


나는 행길에 나서자 김일룡에게 대렬을 맡기고 차광수와 함께 량세봉과의 담판계획을 다시금 상세하게 토의하였다. 나의 모든 사색과 상념은 미구에 맞다들게 될 독립군과의 사업에 집중되고있었다. 물레방아간집 로인이 생각도 걱정도 일도 말도 다 적게 하고 지어 웃음까지 적게 웃는것이 섭생의 본도라고 귀에 못박히게 강조하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처럼 구속이 심한 섭생법을 지켜낼수가 없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고 사람들이 아직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해가는 독특한 창조과정이였으므로 누구보다도 사색을 많이 하고 걱정을 많이 하고 의논을 많이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가장 관심한것은 반일인민유격대와의 교섭에서 량세봉이 어떤 태도로 나오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이 교섭의 결과에 대하여 차광수는 처음부터 미심쩍은 태도를 취하였지만 나는 시종일관 락관적인 예측을 하였다.


통화시가의 전경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내 머리에는 량세봉에 대한 유쾌한 일화가 불쑥 떠올랐다. 그것은 아버지가 병환에 계실 때 뜻을 같이 나눈 동지들을 한사람한사람 회상하면서 나와 어머니에게 여담으로 들려준 일화였다.


3.1운동전야에 량사령의 향촌에서는 빈농민들을 망라한 계가 중심이 되여 밭을 논으로 푸는 개답공사를 벌리였다. 량사령의 집도 이 계에 망라되여있었다. 소출을 많이 내는데서는 논이 밭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것을 상식으로 알고있던 그는 이 개답공사를 적극 환영하였다. 그런데 계의 상층을 차지하고있던 로장파들이 논농사가 파악이 없다는 구실을 내걸고 개답공사를 완강하게 반대해나섰다. 로장파와 소장파사이에는 봄씨붙임을 앞두고 련일 계가 생긴이래 처음보는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소장파 젊은이들은 당나귀발통 같은 로장파 늙은이들의 고집을 도저히 휘여낼수 없었다. 계에서는 그해에도 파종기가 오자 젊은이들이 논으로 풀지 못해 안달아하는 밭에 조와 보리를 심었다. 늙은이들은 계의 농사가 젊은것들에게 롱락당하지 않고 예전대로 순조롭게 되여가는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소장파의 우두머리였던 량세봉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할 기회를 노리였다. 모내기철이 되여 사방에서 개구리가 울던 어느날 밤 소를 끌고 들에 나간 그는 조와 보리싹이 한창 푸름푸름 자라는 여러 뙈기의 밭을 쥐도 새도 모르게 다 논으로 갈아버리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와 보리가 무럭무럭 자라던 밭이 하루밤사이에 논으로 변하여 물까지 출렁거리는것을 본 늙은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생벼락을 맞을놈, 계의 농사는 네가 다 망쳐놓는구나. 금년농사를 망치면 네놈두 거지가 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나 보리를 심으면 아홉섬밖에 나지 않던 그 뙈기밭들에서 량세봉은 그해 가을 스물넉섬의 소출을 냈다.


계의 늙은이들은 깜짝 놀라서 《저 세봉이가 하여튼 난놈은 난놈이웨다.》하고 혀를 찼다. 그후부터 량사령의 향촌과 그 린근 마을에서는 논농사를 하는 집들이 대폭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계를 쥐락펴락하던 상투쟁이령감들도 량세봉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다 들었다.

통화를 지척에 둔 로상에서 이런 일화가 내 머리에 떠오른것은 무엇때문이였을가. 아마도 그것은 량사령과의 담판이 성공적으로 끝날것이라는 자기의 예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내자신이 사색을 집중하였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량사령은 3.1운동전야에 고향(철산)을 떠나 남만의 흥경현으로 들어갔다. 우리 아버지가 량세봉을 맨 처음으로 만난곳이 바로 이 흥경땅이였다.

그 당시 그는 통의부에서 검무관으로 활동하였다. 정의부가 나온 다음에는 중대장으로 임명되여 일약 오동진사령의 총애를 받는 중견간부가 되였다. 그의 중대주둔지가 바로 무송이였다. 그래서 나도 량세봉을 만나볼수 있었다.


우리가 팔도구에서 무송으로 이사한지 얼마 안되여 량세봉은 다시 흥경현으로 소환되여가고 그대신 장철호가 그의 후임으로 무송에 왔다. 3부의 통합으로 국민부가 태여났을 때 독립군의 지도간부들은 성품이 바르고 실행력이 강하며 민중의 촉망이 높은 량세봉에게 군통수권을 맡기였다. 량세봉은 군부에서뿐만아니라 3부의 원로중신들이 모인 조선혁명당안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량사령은 늘 자기와 김형직은 결의형제라고 하면서 나를 친구의 자식으로 극진하게 사랑해주었다. 오동진, 손정도, 장철호, 리웅, 김사헌, 현묵관과 함께 길림에서 나를 경제적으로 제일 잘 후원해준 사람이 바로 량세봉이였다.


왕청문사건이 있은후 국민부상층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몹시 나빠지고 또 그 반동화된 단체의 군부수뇌인 량세봉과도 오래동안 상면의 기회를 가지기 못하였지만 나는 나에 대한 량사령의 사랑과 믿음이 변치 않았을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모든것은 어느것이나 다 인간 량세봉, 애국자 량사령에 대한 호감을 주는 회상들이였다. 우리의 합작활동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질수 있는 그런 과거에 대하여서는 구태여 추억하지도 않았다. 나는 될수록 우리의 담판전망을 락관적으로 조명해줄수 있는 그런것들만을 회고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담판의 전도를 어둡게 할수 있는 불리한 증거들로 자기자신을 심리적으로 학대하지 않으려는 방어본능의 심리작용이였는지도 모른다.


통화를 비롯한 동변도의 20개 현은 모두 동변도 진수사 우지산의 관할하에 있었다. 그는 한때 장작림으로부터 제30군 군장으로 임명받은바도 있는 장령이였으나 1930년 6월의 대도회의 반란진압에서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여 장학량의 신용을 잃었다. 우지산은 동변도 주요지점들에 1개 려단규모의 성방위군을 배치하고 이 일대의 최고통치자로서 군림하였는데 9.18사변후에는 동변도보안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사령이 되였으며 관동군수뇌들과 련계를 가지면서 봉천성의 괴뢰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관동군은 우지산의 협력을 담보로 이 지구에 대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 경찰에 이 일대의 치안유지를 맡기였다. 관동군의 대부분력량은 당시 북만에 쏠리고있었다.


이런 기회를 타서 당취오의 료녕민중자위군이 량세봉휘하의 조선혁명군부대와 함께 통화현성을 포위하였다. 오끼쯔 요시로주임을 비롯한 일본령사관 통화분관의 일본인직원들과 가족들은 모두 이 포위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구조를 기다리게 되였다.

관동군사령부는 통화현성이 포위되여 현지의 일본인들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모든 병력이 북만일대에 총 출동중이였으므로 다만 100명정도의 경찰관들을 구원대로 파견하고 우지산군의 방조를 기다리였다. 우지산군은 두 대로 나뉘여 북쪽과 봉성방면에서부터 량, 당의 련합군을 압박하였다.


관동군에서는 이다가끼 참모장을 내세워 《통화에 있는 일본인 여러분, 봉천에서 급히 지원부대가 래일아침 도착하므로 잠시 완강히 견지하여주시오.》하는 방송을 하게 하였다.

이처럼 9.18사변후 국제련맹조사단의 만주파견과 때를 같이하여 봉천성일대의 반만항일군은 도처에서 일본침략군대와 만주국괴뢰군대를 위협하였다. 이런 때여서 통화현성을 장악하고있는 조선혁명군과 자위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반일인민유격대가 통화현성에 입성한것은 6월 29일 저녁이였다.

독립군들은 시내곳곳에 《반일인민유격대를 환영한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을 독립시키자!》등의 구호를 써붙이고 우리 일행을 성대하게 환영하였다. 수백명의 독립군병사들과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면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량세봉은 반일인민유격대의 통화입성을 독립운동을 확대발전시키는데서 하나의 전환적계기로 삼으려고 했던것 같다.


안도에서 온 우리 일행은 즉시에 두패로 나뉘여 류본초가 데리고 온 구국군병사들은 자위군사령부 대표의 안내를 받아 중국사람들의 집으로 가고 내가 인솔하고있는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은 조선사람들이 사는 집들에 분숙하였다.


독립군대원들은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을 숙소에 안내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우리와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우리 부대에 대한 그들의 반영이 예상외로 대단히 좋았다. 그들은 안도에서 유격대가 온다는 련락을 받고 날창이나 화승대를 멘 촌바우들을 상상했는데 만나고 보니 멀쑥한 신사군대라고 하면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날밤 나는 량세봉사령의 집을 방문하였다.

량사령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먼저 량사령부부의 안부를 묻고 어머니가 보내는 인사를 전하였다.

《어머니는 안도에 가신 다음에도 선생님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량사령선생이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르어주고 너를 화성의숙에도 추천해보냈는데 그 은공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량사령은 그 말을 듣자 사양의 뜻으로 손을 가로 흔들었다.

《나하구 자네 아버지야 의형제간인데 은공이구 뭐구 할게 있나. 성주 아버지한테서 받아온 편달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신세야말로 백골난망이라고 할수 있지. 자네 어머니는 좀 어떤가? 안도에 이사한 다음 속탈로 고생을 많이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네, 병이 퍼그나 깊어진것 같습니다. 요새는 일하는 날보다 누워계시는 날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이처럼 범상한 문안인사로부터 시작되였다.


나는 통화시내에 들어설 때 받은 인상을 피력했다.

《사령님의 부하들이 수백명이나 거리에 떨쳐나와 박수를 쳐주면서 환영을 해줄 때 우리는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독립군의 얼굴색이 밝은것을 보니 우리의 마음도 가벼웠습니다.》

《우리 부하들이 싸움은 변변히 하지 못해도 손님접대만은 소홀히 하지 않네.》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안도를 떠나기전에 사령님의 부대가 당취오의 료녕민중자위군과 합세하여 통화현성을 포위하고 손쉽게 차지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건 뭐 그리 자랑할 전과가 못돼. 자위군이 수만명이나 되는데 성시 하나도 공략하지 못하면야 무슨 명분으로 밥을 먹겠나.》


량세봉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통화현성포위전의 전 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날은 그런 정도로 대화를 나누고 량세봉의 집에서 하루밤 잤다. 나도 찾아온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량사령도 그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량세봉이 우리의 원정목적을 묻지 않는것이 좀 불안스럽기도 하였지만 나는 나를 환대해주는 그의 진심에 넘치는 행동을 보고 담판이 잘 돼갈것이라는 당초의 확신을 더욱 두터이하였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식사후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꼭지를 먼저 뗀것은 량사령이였다. 그가 그때 나에게 한 첫말은 이런것이였다.

《대장도 알다싶이 지금 만주땅은 벌둥지가 됐네. 숱한 벌들이 일본이라는 불청객을 쏘겠다고 독을 물고 일어났네. 당취오, 리춘윤, 서원원, 손수암, 왕봉각, 등철매, 왕동헌… 이건 다 동변도의 벌들이구 동만과 북만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벌들이 일어났나. 이런 때에 우리두 합세해서 잘 싸우면 이길수가 있다고 보는데 대장생각은 어떤가?》

그가 한 말은 우리의 원정목적과도 일치하는것이였다. 량사령이 스스로 합작에 대해서 모색하고 그것을 주동적으로 우리에게 제기한다는것은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였다.


나는 독립운동전반을 대국적견지에서 부감하는 량사령의 높은 안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그의 제의를 흔연히 받아들이였다.

《합세해서 싸우자는 사령님의 말씀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저희들도 사실 이 문제를 의논해보려고 사령님을 찾아왔습니다. 조선의 무장부대들이 서로 합세하고 중국의 무장부대들도 서로 합세해서 조중 두 나라 애국자들과 인민들이 한덩어리가 되여 싸우면 능히 일제를 타승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량세봉은 그 말을 듣자 미소를 지었다.

《대장이 동감이라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서로 진지하게 의논해보세.》

《그런데 사령님, 시국은 단결을 요구하는데 우리 민족내부는 유감스럽게도 단결을 이루지 못하고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내부도 단결이 안되고 민족주의자들의 내부도 단결이 안되고 또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호상간에도 단결이 안되고있으니 이렇게 해가지고서야 일본이라는 강적과 싸울수 있겠습니까?》

《그건 다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야. 대장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때문에 인심을 다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군들을 폭군으로 만들구,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구… 이렇게 하니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소닭보듯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해온 온갖 폭력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만이 할수 있는 그런 말이였다. 나는 그가 로동자, 농민들을 적대시하고 지주나 자산가들을 동정하는데로부터 그런 말을 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량세봉자신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기전까지는 지독한 령세농민으로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였다. 그는 섣달그믐께부터 매번 지주의 빚독촉때문에 지긋지긋하게 단련을 받아오군한 채무노예에 가까운 소작농이였으며 무우시래기에 피쌀을 섞어서 쑨 죽으로 기아의 해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해온 빈농민의 후예였다.


나는 또한 그가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폭력투쟁을 비난하는것은 공산주의리념자체를 반대하기때문도 아니며 또 그 반대의 리념인 자본주의사상을 옹호하기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조소하고 비판하는것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식이나 투쟁방법이였지 공산주의리념 그자체는 아니였다. 그러나 방법에 대한 립장과 태도는 곧 리념에 대한 인식과 관점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오유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넋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량세봉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대중투쟁과정에 범한 좌경망동적과오를 시인하였다. 그러면서도 대중투쟁일반을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는 해독행위로 묘사하는 량세봉의 편견에 대해서는 바로잡아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령님의 말씀과 같이 조선공산당출신의 지도인물들이 계급투쟁을 하는데서 지나친 탈선을 한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좌경망동바람에 사실은 우리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조선사람이 일본놈의 앞잡이라는 인식까지 낳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사령님, 농민이 지주를 반대해서 들고일어나는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령님도 농사를 많이 지어보아서 아시겠지만 가을에 가서 지주에게 차례지는것이 얼마인데 농민들에게 차례지는것은 얼마나 됩니까. 죽도록 일해서 농사지은것은 다 빼앗기고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우니 농민들도 살아보겠다고 소작쟁의를 하는것인데 그것을 덮어놓고 열닷냥금으로 다 나쁘다고 할수야 없지 않습니까.》


량사령은 내가 대중투쟁의 불가피성을 변론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변론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였는지 아무 응대도 하지 않았다.

그날 독립군부대에서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독립군대원들속에는 류하와 흥경에 있을 때부터 우리가 파견한 《ㅌ.ㄷ》성원들과 정치공작원들에 의하여 공산주의적인 영향을 받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런 청년들이 중심이 되여 조직한 환영회인것만큼 대단히 성대하고 열광적이였다. 그 환영회에는 통화현성에 살고있는 조선인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차례를 엇바꾸어가면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환영회의 모든 공정에서 반일인민유격대와 독립군의 개성상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립군대원들은 반일인민유격대원들의 소탈하고 겸손하고 락관적인 품성과 절제가 있고 기백이 있고 질서정연한 대오의 면모에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이 제일 부러워한것은 우리 대원들이 부르는 혁명가요와 38식 보총이였다.


어떤 독립군대원들은 《저런 끌끌한 군대가 소문도 없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났는가.》고 하면서 어리둥절해하였고 어떤 독립군대원들은 《당신네와의 합작이 성사됐으면 좋겠다. 량사령과의 담판은 어떻게 되였는가?》고 묻기도 하였다.


량사령은 그날 성주가 데리고온 군대를 보자고 하면서 반일인민유격대를 방문하였다. 우리 대원들은 박수도 치고 거수경례도 붙이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환영을 잘하였다. 그런데 그만 량사령이 반공연설을 하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되였던 환영분위기는 적대적분위기로 바뀌여졌다.

《조선독립을 성사시키려면 우선 리적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공산당은 지금 리적행위를 하고있다. 공장에 가서는 자본가와 로동자가 싸우게 하고 농촌에 가서는 지주와 농민들이 싸우게 하고 가정에서는 남녀평등이라 하여 안해와 남편이 싸우게 한다. 쩍하면 수탈이요, 타도요 하면서 동족간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이민족사이에도 불신의 벽을 쌓는다.》


우리 동무들은 모두 그의 연설을 듣고 분개하였다. 차광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량사령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기만 하였다.

반공으로 일관된 량세봉의 연설에 대해서는 나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그가 왜 그런 연설을 하는지 리해할수 없었다.

《사령님, 우리는 그런 리적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며 근로민중의 리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을 독립하자면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로력자대중이 중심이 되여 투쟁해야지 그저 옛날식으로 몇몇 렬사나 영웅호걸들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우리 동무들은 입을 모아 국민부를 공격하였다. 국민부가 왕청문에서 애국청년 여섯명을 리유없이 살해한것은 리적행위가 아닌가, 민족앞에 그런 대죄를 짓고서도 국민부집단은 감히 그 무슨 리적행위를 운운하면서 우리를 구박할수 있는가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그러자 량사령은 노염을 타면서 우리들에게 욕을 막 퍼부었다.

그 노여움이 도수가 지나치고 례의에 어긋나는것이였기때문에 나도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리성을 잃고 우리를 질책하는것이 어쩐지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우리의 몇마디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것이나 아닌가, 아니면 합작을 달가와하지 않는 어떤 인물이 량사령에게 우리를 걸고 나쁜 말을 한것이나 아닌가, 어쨌든 그가 노여움을 타는데는 무슨 곡절이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인내성있게 그를 설복하였다.


《선생님, 그렇게 노하실것까지야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그건 좀 더 지내봐야 알게 아닙니까.

상대를 호상 리해하기 위해서는 사령님부대와 우리 유격대가 자주 접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는 령사령도 별로 응대가 없었다.

나는 량사령의 반공자세가 요지부동이긴 하지만 꾸준히 설복하면 그를 돌려세울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한가닥의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남을 믿지 않는것을 일종의 배타주의적표현이라고 할수 있다면 남을 믿는것은 최선의 인도주의라고 말할수 있다. 국토침탈의 비운을 당한 나라의 애국자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인도주의란 민족단합을 이룩하는것이며 단합된 민족의 력량으로 부모형제동포자매들을 해방하는것이라고 나는 간주하였다.


내가 태여난지 한달밖에 안되는 부대를 이끌고 천리밖에 있는 량세봉을 찾아온것도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회담이 결렬된 그날 통화시내에 있는 우리의 조직원이 독립군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정보를 보내주었다.

량사령이 그런 음모를 꾸민다는것은 도저히 믿을수 없는 일이였지만 우리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통화에서 벼락같이 철수하였다. 그렇게 되여 류본초선생과도 갈라졌다.


반일합작의 절박한 과제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독립군과의 충돌을 피해 통화를 떠난 반일인민유격대의 대오에는 음침한 기분이 떠돌고있었다. 차광수는 그 대오의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가 가야 할 로정도가 그려진 목책을 들여다보며 덤덤히 발걸음을 옮기였다.

《광수동무, 오늘은 왜 그렇게 성난 사람처럼 뿌루퉁해 있소?》

나는 그의 기분을 짐작하고 일부러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차광수는 때를 만났다는듯이 주머니에 목책을 집어넣으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그럼 이런 판국에 웃어야 하겠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울화가 치밀어 못견디겠소. 피를 흘리며 천리를 달려온 로고가 허사로 돌아가지 않았소.》

《왜 참모장동무는 독립군과의 담판을 실패작으로만 보려고 하오?》

《그럼 실패작이 아니고 성공작이란 말이요? 어쨌든 량사령은 합작이 아니라 무장해제음모를 꾸미지 않았소.》

《참모장동무는 상층의 표정만 보았지 하층의 얼굴은 보지 못했구만. 독립군대원들이 우리 유격대를 보고 얼마나 감탄하고 부러워하였소. 나는 무장해제설보다 그걸 더 중시하고싶단말이요.

중요한것은 상층의 표정이 아니라 하층의 태도요. 나는 거기서 합작의 장래를 보고있소.》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에게도 합작의 장래에 대한 확고한 승산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나는 그저 예감을 말했을뿐이고 념원을 표시했을뿐이다.

나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고민하고있었다. 그때 나를 지배하고있던 고민이란 국적이 서로 다른 량사령과 당취오와의 합작도 성사되고 우리와 우사령과의 합작도 성사되는데 동족끼리인 반일인민유격대와 독립군과의 합작은 왜 그토록 이루어지기 힘든가, 과연 량세봉사령과의 합작은 불가능한가 하는것이였다.


독립군이 그때 진실로 무장해제음모를 꾸몄는가 안꾸몄는가 하는것은 오래동안 미지수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 정보가 조직원들이 수집한것이기때문에 틀림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근거없는 정보이기를 바랬다. 설사 그것이 과학성이 있는 정보라고 하더라도 나는 량사령을 탓하고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의 사상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며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시간과 체험이 소모되는 법이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그때 통화를 떠나면서도 독립군과의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량사령이 언제인가는 꼭 우리의 진심을 리해하고 합작의 대문에 들어설 때가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였다. 애국은 련공의 바다에로 가는 강물이나 시내물과 같은것이다.


여러해가 지난후 부대를 이끌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병변하여온 독립군의 사령 최윤구는 나와 함께 1932년의 여름을 감회깊이 회고하였다. 최사령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할 음모를 꾸민것은 량사령이 아니라 량사령의 수하에 있는 참모였다는것이였다. 원래 량사령은 반일인민유격대와의 합작을 성사시키려고 하였는데 그 참모가 막후에서 반공마이크를 들고 우리를 쏠았으며 나중에는 자기의 심복부하들과 함께 우리 부대의 무장을 해제할 모의까지 하였다는것이였다.


최윤구의 그 말이 량세봉사령에 대한 우리의 의혹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량사령이 우리와의 거래가 결렬된것을 두고두고 가슴아프게 생각하였으며 그가 우리를 반대하는 무장해제음모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안도감을 느끼였다. 그가 비록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애국앞에서 결백하고 의리앞에서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인간임을 다시한번 확증할수 있게 된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하였다. 자기가 흘륭하다고 본 인간이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계속 훌륭한 인간으로 남아있으며 그 인간에 대한 깨끗한 인상에 때가 끼지 않고 얼룩이 지지 않을 때 그보다 더 즐겁고 흐뭇한 일은 없다.


량사령의 과실은 적의 간계를 보지 못한것이였다. 그는 대바르고 강직한 사람이였지만 자기의 턱밑에서 참모가 우리와의 합작을 류산시키려고 작간질을 하는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자가 공산주의자들을 악랄하게 헐뜯을 때에도 그의 본심을 꿰뚫어보지 못하였다. 량사령이 억울하게 최후를 마친것도 적의 간계에 속아넘어갔기때문이였다.


량세봉사령이 반공으로부터 련공에로 방향전환을 한것은 림종전야였다. 그 당시 독립군내부는 매우 복잡하였다. 밀정들과 그에 매수된 앞잡이들의 해독행위가 우심해지는가 하면 부대를 떠나가는 락오자들과 탈주자들이 속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울려나왔다.


량사령도 공산주의자들을 더는 무시할수 없게 되였다. 그는 조중 두 나라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세력으로 등장하여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새로운 격동기가 도래하였다는것을 인정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기의 립장을 랭철하게 검토하였으며 그 과정에 련공까지 결심하게 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몰리해와 본의아닌 적대감에 포로되여 우리와의 합작마저 결심하지 못했던 량사령이 련공에로 방향전환을 한것은 그자신의 생애는 물론, 독립군의 투쟁력사에서 하나의 특기할 사변이였다. 그가 반공을 배격하고 련공의 길을 택하였다는것은 양정우와의 공동행동을 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는 우리와도 합작할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량세봉의 부대가 우리와 손을 잡는것을 제일 두려워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독립군이 합작을 이룩한다는것은 곧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에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정치군사적통일이 실현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적들에게 큰 위협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의 헌병, 경찰기관들과 특무조직들은 량세봉을 살해하고 독립군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를 계획적으로 추진시켰다. 이 음모에는 봉천헌병대도 가담하고 조선총독부 후꾸시마기관도 망라되였다. 《일본관동군 특무기관 동변도유격대》도 량사령을 감시하고 미행하였다.


량세봉을 살해하기 위한 작전기밀비로 10여만원의 돈이 투하되였다는 말도 있다. 박창해를 비롯한 흥경의 밀정들도 이 작전에 동원되였다.


적들은 량세봉사령을 유인할 계책을 꾸미던 끝에 평소부터 그와 관계를 가지고 독립군을 협조해주던 배신자 왕가를 파견하였다. 어느날 왕가는 량세봉을 찾아와 중국항일군이 독립군을 원조하기 위하여 사령을 만나려고 한다고 회유하였다. 량세봉은 중국항일군이 원조를 약속한다는 말에 그만 앞뒤를 분별하지 못하고 왕가를 따라 항일군이 기다리고있다는 대립자로 향하였다.


왕가는 로상에서 문득 권총을 뽑아들고 《나는 이전날의 왕명번이 아니다. 목숨이 아깝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하였다.

량사령이 왕가에게 벽력같은 호령질을 하면서 무기를 꺼내들자 수수밭에 매복하고있던 적들은 선손을 써서 일제사격으로 그를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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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최일천이 묘사한것처럼 《〈계림(조선)의 벌은 받아도 왜왕의 작록은 먹지 않는다.〉는 박제상의 충언》이 그대로 사령의 혼이 되여 원쑤들을 질겁케 하였던것이다.
량사령이 만일 좀더 일찌기 련공의 길에 나섰더라면 그의 운명이 달리 될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다. 물론 그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한가닥의 미련일것이다.
《나는 죽어서 항일을 할수 없지만 너희들은 살아서 김일성사령을 찾아가라. 살길은 그 길밖에 없다!》
량사령은 부하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것은 유언이라기보다도 반공의 벽을 부시고 뛰쳐나온 한 애국자의 죽음으로 탄생된 련공선언이였다.

이 선언을 따라 4년후에는 통화거리에서 우리를 환영하던 300여명의 독립군대원들이 최윤구사령을 앞세우고 조선인민혁명군에 합세하기 위해 백두산으로 찾아왔다. 그때 나는 화전에서 그들을 만났다.

환인현의 조선사람들은 적들에게 량사령의 시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마을뒤산에 그의 유해를 평토장으로 안장하였다. 평토장이란 지평면과 무덤의 높이가 동일한 봉분을 쌓지 않은 평평한 묘를 말한다.
일본군경들은 그 묘마저 파헤치고 고인의 머리를 베여 통화시가에 걸어놓았다.
량사령의 유가족들도 모진 학대를 받았다. 그들은 일만군경들의 박해에 시달리다 못해 량가성을 김가로 고치고 철도에서 천여리나 떨어진 환인현의 심산벽촌에 들어가 두더지같은 생활을 하였다.

나는 해방후 남만에 일군들을 파견하여 량사령의 유가족들을 조국에 데려오게 하였다. 그 일군을 따라 사령의 부인(윤재순)과 아들 딸, 사위가 조국으로 나왔다.
《아주머니, 그동안 사령님을 잃고 일본군경들에게 내내 쫓겨사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내가 첫인사로 이런 말을 하자 윤재순녀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동안 어깨를 떨었다.
《장군님, 장군님의 얼굴을 보니 쌓였던 설음이 다 녹아서 없어지는것 같습니다. 쫓겨다니는거야 무슨 큰 고생이겠습니까. 장군님께서 왜놈들을 쫓아내시느라고 고생이 막심하셨겠습니다.》
《싸움을 하느라고 바삐 보내다나니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해 죄종스러웠습니다.》
《장군님, 오히려 저희들이 죄종스럽습니다. 우리는 그 산중에서도 장군님의 소식을 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장군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국의 원혼이 된 령감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군 했습니다.》
《그렇지만 량사령은 마지막힘을 다할 때까지 굴하지 않고 잘 싸웠습니다.》

그후 우리는 량사령의 아들 량의준을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시키였다.
4월남북련석회의때 이 학원을 참관한 김구선생은 거기서 량사령의 아들을 만나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나는 북조선당국이 빨찌산투사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이런 학원에서 독립군사령의 자제까지 공부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학원에서는 빨찌산의 자녀들뿐아니라 국내에서 로조, 농조활동을 하다가 희생된 애국자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애국자라면 그가 어떤 계렬이든지 우리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김구는 감격하여 《이 학원은 민족단합의 상징입니다!》하고 말했다.

학원을 졸업하고 공군부대의 정치일군이 된 량의준은 전후에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몹시 락망하였다. 량사령의 혈통이 끊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였다.
다행히도 량의준은 아들 하나를 남기고 돌아갔다. 그 아이의 이름을 량철수라고 하였다. 그런데 철수는 소아마비의 후과로 불구의 몸이 되였다.

당에서는 그를 인민학교에도 보내고 고등중학교에도 보내고 대학에도 보내여 14년동안 건강한 아이들과 꼭같은 교육과정을 마치게 하였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는 4년동안 그의 동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밀차에 태워가지고 다니며 17층에 있는 교실까지 오르내리였다. 애국선렬들에 대한 우리의 2세, 3세들의 존경심은 불구의 유자녀에 대한 따뜻한 애정으로 표현되였다. 지금 량철수는 공화국의 당당한 현역작가가 되여 침상에서 문학작품을 써내고있다.

량철수에게는 2남, 1녀의 자녀들이 있다. 혈통을 따지면 량세봉의 증손자, 증손녀들이다. 추석명절이 오면 그 애들도 부모를 따라 애국렬사릉에 있는 증조할아버지의 묘를 찾아가군 한다. 그들은 아직 자기네 증조할아버지의 생애를 얽어매고있던 고뇌와 불행이 무엇이였던지를 알지 못한다.
그 천진한것들의 어깨우에 다시는 반공이냐 련공이냐 하는 무거운 짐이 실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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