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5-1. 수난당한 대지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5-1. 수난당한 대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17회 작성일 15-04-04 22:21

본문

제 5장 무장한 인민


1. 수난당한 대지


5520C5DD5007DA0036





5.30폭동과 8.1폭동을 계기로 시작된 백색테로의 회오리바람은 1931년에 들어서면서 더 심하게 만주대지를 휩쓸었다. 적들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여러해동안 품을 들여 키워온 혁명력량을 뿌리채 뽑아던지려고 도처에서 피비린내나는 폭압소동을 벌리였다.


동만에 나와보니 남만이나 중부만주일대보다 공기가 더 팽팽했다. 폭동의 후과도 더 참혹하고 파괴적이였다. 돈화남문에서 장대기에 걸려있는 폭동자의 머리를 보고 나는 혁명세력에 대한 적의 공세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하였다.


교조주의와 소부르죠아영웅주의에 인이 박힌 종파사대주의자들은 5.30폭동과 8.1폭동을 치른후에도 국치일, 10월혁명기념일, 광주폭동기념일을 비롯한 여러 기념일들을 계기로 기념폭동, 수확폭동, 공포폭동의 명목밑에 련속적인 폭동을 일으켰는데 그 회수는 실로 연 수백회에 달하였다. 적들의 테로선풍이 해를 넘기면서 계속된것은 그때문이였다.


그 과정에 간도의 혁명조직들은 거의다 파괴되였다. 전렬에서 싸우던 핵심들은 말할것도 없고 폭동대렬을 따라다니며 밥을 날라주던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잡혀가거나 처형되였다. 한해전에 우리가 두만강연안으로 나가면서 복구해놓았던 조직들도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하였다.


폭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중 일부는 적들에게 자수하거나 혁명조직에서 떨어져나갔다.

지하로 들어간 조직선을 찾으려고 마을에 가면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면서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녹았다.》, 《공산당의 망동때문에 온 간도천지가 피바다, 불바다로 되였다.》, 《공산당장단에 춤을 추다가는 일가멸족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자의 간판을 가진 사람이면 소속과 계렬에 관계없이 덮어놓고 외면하거나 경원시하였다.


내가 명월구에 갔을 때 옹구당위원회 위원 리청산은 폭동후 자기가 겪어온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이런 하소연을 하였다.

《상급에서는 자꾸 군중속에 들어가 조직을 복구확대하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볼 재미도 없고 용기도 나지 않소. 나를 혁명가라고 존대하던 사람들도 그렇고 지난날 내 보증으로 조직에 흡수된 사람들까지도 몇달째 나만 보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있으니 이거야 어디 서러워서 혁명을 하겠소. 폭동바람이 몇번 불어대더니 간도의 민심이 아주 고약해졌단 말이요. 이렇게 랭대를 받으면서 살아갈바엔 차라리 혁명을 그만두고 어디 가서 밥벌이나 하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일어날 때도 있소. 그러나 말이 쉽지 혁명가가 피를 물고 품었던 초지를 어떻게 그처럼 헐하게야 내던지겠소. 아무튼 무슨 방책이 있어야겠는데 나로서는 궁리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으니 소란스러운 시국만 원망할뿐이요.》


이것은 리청산의 고충인 동시에 나의 고충이기도 하였다. 간도의 모든 혁명가들이 1930년과 1931년 당시에는 이런 고충을 겪었다. 오죽이나 사태가 험악하고 암담했으면 리청산과 같이 성실하고 과묵한 로혁명가가 이런 고백을 했겠는가.

물론 리청산은 혁명을 중도반단하지 않았다.


나는 그후 안도에 가서 리청산을 다시 만났다. 내가 두만강연안의 여러 현들을 돌아다니는 사이 그는 안도구당에 조동되였다고 하였다. 옹성라자에 있을 때보다는 신수가 별로 멀끔해보였다.

리청산은 새 부임지에서의 일이 잘되여간다고 하면서 몹시 만족해하였다.

《악몽같은 시절은 지나갔소.》

그는 이 한마디 말로 자기의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간단히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속을 잘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던 때의 그 비참하고 침울한 표정은 그의 얼굴에서 도저히 찾아볼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옹성라자에서 리청산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만주지방의 혁명가들은 백색테로의 쓴맛을 보면서 인민들이 곁을 주지 않아 고민하고있었다.

나도 역시 그런 고민을 안고 모대기였다. 내가 희멀건 강낭죽에 갓김치를 먹으면서 밤이면 찬바람이 스며드는 남의 집 웃방에 목침을 베고 드러누워 시장기와 싸우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그 당시 우리를 가장 괴롭히던 고통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이 시장기였다. 실로 우리는 그때 간도에 나가서 추운 고생, 배고픈 고생을 많이 하였다.


나는 솜옷도 없이 양복차림으로 겨울을 나군하였기때문에 남들보다 늘 춥게 지냈다. 덮을것이 없는 집에 갔을 때에는 밤에 양복을 벗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워 잠을 청하군하였다. 리청산의 집에 가니 그 집에도 이불과 베개가 없었다. 그래서 양복차림으로 하루밤을 잤는데 너무 추워 잠을 자지 못하였다.


어떻게나 혼났던지 후날 안도에 가서도 그날밤에 겪은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사이에 달구지군들이 입고다니는 저고리같은 솜저고리를 하나 큼직하게 지어주었다. 나는 그 솜저고리를 입고 다니다가 이불이 없는 집에서 잠을 잘 때마다 목침에 손수건을 감아베고 솜저고리를 덮고 새우잠을 자군하였다.


그러나 그런 고초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해 봄 나는 간도로 나가서 어느 하루도 발편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춥고 배고파서 잠이 잘 오지 않는데다가 학살당한 동지들에 대한 생각과 파괴된 조직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진정시킬수 없었다.

인민들의 랭대를 받는데서 오는 절망과 고독감이 또한 나를 괴롭히였다. 곁을 잘 주지 않는 군중을 보고 돌아와 찬방에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사람들의 불신을 당하던 광경이 떠올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간도지방에 큰 기대를 걸어왔었다. 연길에는 종파가 많이 들어갔지만 그밖의 간도지방들에는 종파의 물이 그닥 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지방들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 새로운 방식으로 혁명을 전개해나갈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우리 동무들은 여러해동안의 꾸준한 노력과 고심으로 이 일대에서 항일혁명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승화시키기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해왔다.


그런데 두차례의 폭동바람에 모처럼 쌓아올린 공든 탑이 크게 손상되였다. 좌경은 초혁명적인 언사와 구호로 대중을 일시적으로 현혹시키지만 그 해독성은 이처럼 유해롭고 파괴적인것이였다. 좌경을 뒤집어놓은 우경이라고 표현하는것도 무리한 규정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가 만사를 제껴놓고 그토록 총총히 간도로 나온것은 바로 이 좌경으로 인하여 생긴 손실을 메꾸고 무장투쟁에로 한시바삐 이행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다그치자는데 있었다.

큰 기대를 걸고 찾아온 간도의 파괴상이 이처럼 예상외로 참혹한데다가 인민이 또한 혁명가들을 불신하고 멀리하는 사태까지 목격하게 되니 괴로와서 견딜수 없었다.

인민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이 자기를 낳아준 인민에게서 버림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 하루라도 인민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 혁명가의 생명은 산 목숨이라고 말할수 없는것이다.


대중이 계렬을 가리지 않고 혁명가일반을 랭대할 때 우리가 그토록 가슴아프게 생각한것은 폭동을 계기로 하여 공산주의자들의 권위가 훼손된데 대한 안타까움, 군중이 자기 지도자들을 믿지 않고 조직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데 대한 안타까움때문이였으며 조중인민들사이에 불신과 오해의 벽이 생긴데 대한 안타까움때문이였다.

이런것들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고민하고 괴로와하고 모대기기만 한것은 아니였다. 혁명가의 투쟁행로에 난관이 없다면 그것은 사실상 혁명이라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혁명가는 이런 때일수록 의지를 가다듬고 신심에 넘쳐 완강하게 시련을 타개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1931년에도 간도일대에서 5.30폭동의 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근기있게 해나갔다. 카륜회의방침을 관철하는데서 첫째가는 장애가 바로 이 폭동의 후유증이였다. 이 장애를 시급히 제거하고 혁명대오를 재정비하지 않는다면 위기에 처한 혁명을 건질수도 없었고 심화발전시킬수도 없었다.


오가자회의를 끝낸후 동만으로 나가면서 나는 내자신과 동지들앞에 두가지 과제를 내세웠다.

하나의 과제는 5.30폭동의 후과를 총화하는것이였다. 폭동을 설계하고 지휘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이 폭동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과학적으로 정확히 분석총화할 필요를 느끼였다.

폭동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동만에는 아직도 광신적인 테로주의자들과 리립삼로선의 신봉자들이 남아 무모한 폭력투쟁에로 대중을 부추기고있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혁명승리의 가능성에 대한 레닌의 명제를 교조적으로 적용한 《한개 성 또는 수개 성에서의 우선적승리》라는 리립삼의 로선은 대중을 폭동에로 떠미는 강력한 자극제의 역할을 하였다.


중국당의 실권을 장악하고있던 사람이 내놓은 로선이고 또 그것이 조직선을 통해 하달된것만큼 사람들은 리립삼이 당직에서 물러나고 그의 주장이 좌경모험주의라고 락인될 때까지 오래동안 그 로선을 추종하였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의 쓴맛을 보면서도 리립삼이 펼쳐보인 그 달콤한 몽상에서 좀처럼 깨여나지 못하고있었다.

5.30폭동을 총화하게 되면 사람들이 이런 몽상에서 깨여날수 있었다.

우리는 5.30폭동총화를 통하여 종파사대주의자들의 출세주의와 공명주의, 소부르죠아적영웅주의에 경종을 울리기로 결심하였다.


폭동의 총화는 또한 만주지방의 혁명가들에게 과학적인 전략전술과 대중령도방법을 체득할수 있게 하는 하나의 력사적인 전환점으로 될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다른 하나의 과제는 광범한 군중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묶어세울수 있는 옳바른 조직로선을 제기하고 그 로선으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무장시키는것이였다.


간도지방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파괴된 조직들을 복구정비하고 그것을 확대강화해나가는데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똑똑한 조직로선이 없었다.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대중을 조직화하는 사업에서도 혹심한 좌경적오유를 범하고있었다. 그들은 《계급혁명론》을 부르짖으면서 빈고농들과 로동자들만을 조직에 받아들이였다. 그밖의 계층에 대해서는 다 혁명과는 인연이 없는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조직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공산주의란 바로 저런 물건짝이구나, 쌀에 뉘만큼한 홑잠뱅이들만 모여서 쑥덕거리고 나머지는 다 따돌리는것이 공산주의로구나 하는 말을 돌리며 분개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페쇄적경향을 타파하고 각계각층의 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우자면 고전의 명제나 다른 나라의 경험에만 매달리려는 사대주의, 교조주의적경향을 극복하고 그 모든 애국력량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포섭하고 수용할수 있는 옳바른 조직로선을 찾아내고 그것을 한시바삐 관철해야 하였다.


나는 이러한 과제를 간도로정의 첫단계사업목표로 정하고 동만으로 가는 걸음을 다그쳤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고유수에서 대중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고 류봉화, 최득영과 함께 장춘쪽으로 나가다가 밀정의 고발로 반동군벌당국에 체포되였다. 그 당시 군벌당국은 우리의 활동을 예리하게 주시하고있었다. 그들도 일본경찰에 짝지지 않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무장투쟁준비를 하기 위하여 동만으로 나간다는것까지 다 알고있었다.


고유수가 중부 만주지방에서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주요한 활동기지라는것을 간파한 군벌당국은 이통현 현공서를 발동시켜 이 마을에 독찰원을 파견하고 우리의 일거일동을 검질기게 감시하였다.


고유수에는 현공서에서 파괴된 독찰원과 련계를 가지고 우리의 활동을 은밀히 내탐하던 리출류라는 중국인지주가 있었다.

우리가 고유수를 떠나 장춘방향으로 간다는것을 독찰원들에게 밀고한자가 바로 이 리가였다. 우리는 다난툰이라는곳에서 독찰원의 련락을 받고 긴급출동한 보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현공서 감방에서 며칠동안 심문을 받다가 장춘으로 호송되여 거기서 20일가량 감옥생활을 하였다. 내 생애에서의 세번째 감옥살이였다.


그때 장춘에는 길림육문중학교의 리광한교장선생과 하선생이 와있었다. 그들은 내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벌당국에 찾아가 《김성주는 길림감옥에서도 무죄로 석방된 사람인데 왜 또 잡아가두는가? 김성주는 우리가 보증한다.》고 하면서 강력한 항의를 들이댔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다행히 감옥에서 풀려나올수 있었다.

두 은사가 다 공산주의를 리해하는 련공인사들이였기때문에 어려운 대목에서 주저하지 않고 나를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지난날과 다름없이 나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보호해주며 우리의 위업을 변함없이 리해해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평생을 두고 지울수 없는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동만에 나와서 우리가 벌려놓은 첫 사업은 조선혁명군 대원들과 혁명조직핵심성원들을 위한 돈화강습이였다.


이 강습에서는 무장투쟁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치기 위한 과업과 그 실천방도, 기층당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지도를 보장하는데서 나서는 원칙적문제들과 분산된 혁명군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 문제들을 취급하였다. 이해 12월에 열린 겨울명월구회의의 예비작업이라고도 할수 있는 강습이였다.


이 강습이 있은 다음에는 안도, 연길, 화룡, 왕청, 종성, 온성일대 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였다.

간도와 두만강연안 륙읍일대의 실태를 충분히 파악한데 기초하여 우리는 1931년 5월중순 옹성라자에 있는 리청산의 집에서 당 및 공청간부회의를 열었다. 력사에서는 이 회의를 《봄명월구회의》라고도 한다.


옹성라자란 옹기소리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일본이 만주를 강점하기전까지는 명월구를 옹성라자라고도 불렀다. 일본사람들이 만주를 먹은 다음 철도역을 내오면서 옹성라자를 명월구라고 표기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고착되여 후세사람들도 옹성라자를 명월구라고 부르게 되였다.

지금은 명월구가 안도현 소재지로 되였지만 우리가 회의를 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그 고장은 연길현에 속해있었다.


《봄명월구회의》에는 당, 공청, 간부들과 조선혁명군 성원들, 지하공작원들이 수십명 참가하였다. 간도지방의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중에서 백창헌을 비롯하여 한다하는 혁명가들은 이 회의에 거의다 참가했다고 생각된다.

《좌경모험주의로선을 배격하고 혁명적조직로선을 관철하자》는 회의에서 내가 한 연설을 정리한것이다. 이 연설에는 내가 동만으로 나오면서 세워놓았던 두가지 과제가 다 포함되여 있었다.


이미 계획했던대로 우리는 이 회의에서 5.30폭동의 본질을 심각하게 분석총화하였으며 기본군중을 튼튼히 결속하고 그 주의에 각계각층 반일력량을 굳게 단결시켜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단합시킬데 대한 혁명적조직로선을 제기하였다.

회의에서는 이런 조직로선을 관철하기 위한 과업으로 지도핵심을 튼튼히 꾸리고 그들의 자립적역할을 높일데 대한 문제, 파괴된 대중단체들을 복구정비하고 거기에 각계각층의 군중을 받아들일데 대한 문제, 실천투쟁속에서 대중을 단련시킬데 대한 문제, 조중인민들사이의 공동투쟁과 친선단결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가 론의되고 작은 규모의 투쟁으로부터 큰 규모의 투쟁에로, 경제투쟁으로부터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나가며 합법적투쟁과 비합법적투쟁을 능숙하게 련결시켜나갈데 대한 전술적원칙들을 규정하면서 좌경모험주의적경향을 철저히 극복할데 대한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1931년 5월의 《봄명월구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대중전취를 위한 회합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대중을 전취하는데서 제일 큰 장애물이 바로 좌경모험주의로선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용단을 내려 그 로선을 때리였다.


우리가 좌경을 치고 광폭적인 조직로선을 내놓자 회의참가자들은 그것을 전폭적으로 환영하였다.

그 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설하였는데 연설들이 다 혁명적이였다. 연설자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는것은 시간문제인것만큼 준비를 잘했다가 때가 되면 결사전을 벌리자고 부르짖었다. 로숙한 혁명가들이 많이 모인 회합이니 들을소리도 많고 참고할것도 많았다.

나는 이 회의를 통하여 많은것을 배웠다.

회의가 끝난다음 간도 전지역과 국내로 공작원들이 련이어 떠나갔다.


나는 명월구에서 얼마동안 이 일대의 당조직과 대중단체들에 대한 사업을 지도하다가 안도로 향하였다. 안도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당분간 간도와 국내의 혁명사업을 추켜세우자는것이였다.


안도는 철도와 대도로, 도시들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대여서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고 주변에 온통 험한 산악과 밀림으로 에워싸여있어 연길, 화룡, 왕청, 훈춘지구와 무송, 돈화, 화전지구는 물론 륙읍일대를 비롯한 국내의 조직들과도 련계를 가지기 유리하였고 유격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당조직건설사업을 추진시켜나가는데서도 매우 편리한 고장이였다. 주민구성도 대단히 좋았다.


더우기 조종의 산 백두산이 가까이에 있으므로 조국을 한시도 잊은적 없는 우리로서는 그 숭엄하고 장중한 모습에서 크나큰 정신적위안과 고무를 받지 않을수 없었다. 화창하게 개인날이면 멀리 서남쪽하늘가에 백두령봉의 은회색파도가 바라보이였는데 그 은은한 원경이 시야에 안겨올때면 무장을 들고 조국을 한시바삐 찾고싶은 충동으로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군 하였다. 비록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하지만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항일의 총성을 울리고싶은것은 우리들의 공통된 심정이였다.


나는 돈화강습을 끝내고 4월에 이미 안도에 가서 대중단체들의 사업을 지도한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신병으로 시름시름 앓고있었다. 의술이 락후한 때여서 무슨 병이라는 진단도 못 받고 그저 《적》이 요동치는것 같다고 말씀만 하면서 탕약을 끓여잡숫군 하였다.

자신의 병이 얼마나 위중한가 하는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푼전 한잎없이 늘 객지로 떠돌아다니는 나를 걱정하면서 부녀회사업에 있는 심혈을 다 바치였다.


두달만에 안도로 다시 찾아가는 내 심중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에 도착한 나는 예상보다 몹시 밝은 어머니의 얼굴빛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집생각은 하지 말고 나라를 찾는 일에 전념하라고 노상 타이르면서도 내가 나타나면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얼굴의 병색마저 감추는 어머니였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경대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나와 나를 얼싸안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그해에 만주로 온 할머니는 그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내 무송에서 어머니와 함께 조반석죽의 가난한 가계를 연명해왔다. 우리 일가가 무송에서 안도로 자리를 옮길 때 할머니도 어머니를 따라 안도에 왔었다. 안도에 와서는 흥륭촌에 있는 영실이네 외가에 거처를 잡고 사돈집과 우리 집에서 엇갈아가며 침식을 하였다.


영실이란 형권삼촌의 외동딸이다.

형권삼촌이 감옥에 잡혀간 다음부터 우리 숙모(채연옥)는 심한 우울증에 걸리였다. 금방 시집을 와서 첫 아이를 낳고 살만한 때에 남편이 불행하게도 감옥행을 하였으니 신경이 약해질만도 하였다.

나는 형권삼촌이 징역 15년의 형을 지고 감옥살이를 시작한 후 숙모에게 아이는 다른데 주어서 키우게 하고 재가하라는 권고의 편지를 써보냈다. 숙모는 그런 편지를 받고도 재가하지 않았다. 남편이 없는 형님도 재가하지 않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세 자식을 키우고 있는데 남편이 퍼렇게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시집을 다시 간단말인가, 내가 재가하면 영실이 아버지가 감옥에서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상심하겠는가, 설사 영실이를 남들에게 주고 다른 남자를 만나 새 살림을 시작한들 내가 발편잠을 자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겠는가고 하면서 그런 말은 두번다시 입밖에 내지 말라고 하였다. 그 숙모가 아주 현숙하고 대가 있는 분이였다.


어머니는 안도에 오신후 기분전환이라도 하라고 하면서 같이 데리고있던 숙모를 흥륭촌에 있던 친정집으로 보내였다.

우리 할머니가 영실이네 외가에 가계시면서 며느리의 뒤시중도 하고 말동무도 해주었다. 그러다가도 병중에 있는 맏며느리의 생각이 나면 우리 어머니한테로 뛰여와 탕약도 끓이고 동자질도 하였다. 병약한 두 며느리를 돌보느라고 할머니가 그때 말없는 속을 많이 태웠다.

할머니가 고향으로 쉬이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에서 몇해를 보낸것은 외로운 처지에 빠진 두 며느리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애틋하고 다심한 시어머니의 사랑이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안도에 도착한 그날 밤 할머니는 내곁에서 주무시였다.


깊은 밤중에 잠을 깨여보니 내 머리가 할머니의 팔에 안겨있었다. 내가 잠든 다음 할머니가 베개를 슬그머니 밀어내고 내 머리를 안고계신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심정이 가슴에 마쳐와 차마 머리를 베개에 옮겨놓지 못하였다.

할머니는 쉬지 않고있다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고향생각이랑 잊은게 아니냐?》

《할머니, 그럴리가 있습니까. 나는 한시도 만경대를 잊은적이 없습니다. 고향에 계시는 일가친척들이 정말 보고싶습니다.》


《나는 사실 여기 식솔들을 다 데려가자구 만주에 왔댔다. 너는 못데려가두 너희 어머니랑, 동생들이랑은 다 데려가자구 생각했댔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가 통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나라를 찾기전에는 다시 압록강을 건느지 않기로 맹세하고 떠난 걸음인데 성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번 내친 걸음을 어떻게 흘쩍 되돌려세우겠는가구 하면서 말이다. 어찌나 모질게 마음을 먹었는지 무송을 떠날 때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 그래서 고향으로 가자는 말을 더 붙이지 못했다.

여기서 사는게 조선독립에 더 리롭다면 나는 너희들을 더 잡아끌지 않고 혼자서 만경대로 돌아가겠다. 고향생각이 나구,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구싶거든 이따금씩 편지나 해다구. 그러면 너희들을 본듯이 생각하겠다. 나야 여기로 자주 다닐수 없지 않니.》


그후 나는 할머니의 이 부탁을 한번도 리행하지 못하였다.

조국의 신문들에 자주 실리는 내 이름과 항일유격대의 전과보도가 내 소식을 대신해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구태여 편지를 쓰지 않았다.

할머니는 네가 일을 많이 하자면 너희 어머니가 앓지 말아야겠는데 병이 점점 심해지는데다가 일에 너무도 극성이니 야단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그 말을 들으니 어머니에 대한 걱정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가정살림을 떠메고나가야 할 맏아들로서, 만경대가문의 장손으로서 생각되는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 당시 우리와 같이 혁명을 한 청년들속에서는 싸움의 길에 나선 남아대장부라면 마땅히 가정쯤은 잊어야 한다는 심리가 상당한 정도로 류행되고있었다. 가정을 생각하는 사람은 대사를 치르지 못한다는것이 청년혁명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나는 일찍부터 그런 경향을 비판하면서 가정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조국도 혁명도 참되게 사랑할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나자신은 자기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살폈던가. 혁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신하는것이야말로 가정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라는것이 그 당시 내가 일상적으로 품고있던 효성관이였다. 나는 혁명과 분리된 순수한 효성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가정의 운명과 조국의 운명은 서로 뗄래야 뗄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기때문이였다. 나라가 편안해야 가정도 편안할수 있다는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나라의 비운은 곧 그것을 이루는 수백만 가정들에도 어김없이 미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자면 나라를 지켜야 하고 나라를 지키자면 각자가 자기앞에 부과된 공민적의무를 책임적으로 리행해야 하는것이다.


그러나 혁명을 한다고 가정을 망각할수는 없다. 가정에 대한 사랑은 곧 혁명가를 투쟁에로 추동하는 하나의 원동력이다. 가정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면 혁명가의 투쟁열도도 동시에 식어진다.

나는 가정과 혁명사이의 이런 상호관계를 원리적으로는 알고있었지만 일신을 혁명에 바친 혁명가의 경우에 가정을 사랑한다는것이 어떻게 사랑하는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아직 명백한 일가견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아침에 깨여나 집안팎을 둘러보니 남자의 손이 가야 할 구석이 여러군데 있었다. 땔나무도 예비가 별로 없었다.

나는 이번 걸음에 어머니를 도와 틈틈이 가정일에도 손을 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은 만사를 젖혀놓고 철주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땔나무를 해오려는것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낌새를 챘는지 우물터에 갔던 어머니가 또아리와 낫을 들고 우리를 따라왔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일손이나 덜자구 너희들을 따라가는게 아니다. 산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구 그런다. 어제야 할머니가 장밤 너를 붙들구 말을 시키지 않았니.》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며 밝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어머니의 심정이 리해되였다. 집에서는 사실 할머니가 나를 독차지하군하였다. 할머니가 물러앉으면 동생들이 나를 붙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무를 하는 동안 노상 내곁에 있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주야, 너 최동화라는 사람을 알겠니?》

《알지요. 최동화야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사람이 며칠전에 우리 집에 들렸더라. 네가 언제쯤 안도로 올것 같은가, 오면 알려달라구 하면서 너하구 한바탕 입씨름을 해보구 싶다지 않겠니.》

《그래요? 그 사람이 왜 나하구 입씨름을 할 생각을 했답니까?》

《네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5.30폭동이 잘못된 폭동이라구 선전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다더라. 상급에서도 다 지지하고 밀어준 폭동인데 성주와 같이 지각있는 사람이 왜 그걸 그렇게 나무라는지 모르겠다구 하면서 머리를 흔들더구나. 네가 혹시 사람들의 눈에 나는게 아니냐?》

《눈에 날수도 있겠지요. 내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것 같습디다.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야 뭐 세상물정을 아니. 그저 사람들이 무리로 죽고 잡혀가니 야단이라구 생각했다. 알맹이들이 다 없어지면 혁명은 누가 한다더냐.》


나는 소박하면서도 단순명료한 어머니의 지론이 퍼그나 마음에 들었다. 인민의 눈은 언제나 정확하였다. 인민이 판단하지 못할 사회현상이란 있을수 없는 법이다.

《어머니가 옳게 생각했습니다. 그 최동화라는 사람보다는 어머니가 공명정대하게 문제를 보았습니다. 지금도 혁명은 폭동의 피해를 계속 입고있지 않습니까. 그 피해를 수습해보려고 나는 이번에 안도에 왔습니다.》

《네가 그럼 또 지난봄처럼 바삐 뛰여다녀야겠구나. 오늘처럼 다시는 집살림에 마음을 쓰지 말고 네 할 일을 직심스레 하거라.》


어머니가 나에게 하고싶었던 말씀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말씀을 하려고 그날 어머니는 내앞에서 최동화의 이야기도 꺼냈을것이다.

나는 그후부터 어머니의 념원대로 조직을 꾸리는 일에 전념하였다.

안도도 5.30폭동의 피해를 많이 입은 고장이였다. 그런데다가 이 지구에서는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사업이 원만히 진행되지 못하고있었다. 안도를 혁명화하자면 무엇보다도 이 일대에서 당조직을 확대하고 당대렬을 늘이며 당조직지도체계를 똑똑히 세워놓아야 하였다.


우리는 1931년 6월중순 김정룡, 김일룡과 그밖의 핵심분자들로 안도현 소사하구당위원회를 조직하고 구당위원회앞에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대전자, 푸르허, 처창즈방향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기층당조직들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구당위원회를 내온 다음에는 류수하, 소사하, 대사하, 안도 등지에 공청조직을 확대하고 농민협회, 반제동맹, 혁명호제회, 소년탐험대와 같은 반일단체들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안도지방에서는 대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완료되였다. 조직이 들어가지 않은 마을은 하나도 없었다.

안도를 혁명화하는데서 제일 큰 난관은 혁명대오가 사분오렬되여있은것이였다.

안도는 강을 가운데 두고 물남과 물북으로 나뉘여져있었는데 이 마을들에 청년회조직들이 따로따로 들어가있었다. 물북의 청년조직은 정의부의 후예들이 주관하는것이였고 물남의 청년회는 심룡준과 같은 참의부의 인물들이 관할하는것이였다. 이 두 조직이 서로 눈을 흘기고 삿대질을 하며 지내는데다가 최동화가 지도하는 엠엘계의 청년조직까지 줄을 늘이고있어 청년운동내부가 매우 복잡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청년조직들을 원상복구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시키는 방향에서 청년들을 교양하고 인도해나갔다. 우리가 청년운동을 분렬시키려는 사소한 시도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비판하고 경계하였기때문에 최동화와 같이 파쟁에 인이 박힌 사람도 안도지구에 통일적인 청년조직을 내와야 한다는 우리의 견해를 심중히 대하지 않을수 없었다.


안도를 혁명화하는 과정에는 적대분자들의 방해책동이 또한 매우 심했다.

카륜이나 오가자 같은데서는 촌장들이 모두 우리 영향하에 있었지만 흥륭촌에서는 촌장이 악질지주 무한장에게 붙어 렴탐군노릇을 하였다. 그자는 마을사람들의 동향과 대중단체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내탐해가지고는 곧장 성시에 찾아가군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흥륭촌의 남녀로소 전부가 참가하는 성토모임을 열고 촌장을 마을에서 쫓아버리였다.

며칠후 무한장은 나를 찾아와서 이런 흥정을 들이댔다.

《나는 김선생이 공산주의자라는걸 미리부터 느끼고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늘 구안도에 가있고 여기에는 내 보위단만 있으니 참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저 철없는것들이 김선생의 정체를 알고 해치는 날에는 나는 전체 공산주의자들의 원쑤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지금처럼 그냥 지내기도 딱하단 말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알면 당장 내 목부터 칠텐데. 그러니 우리 서로 좋도록 합시다. 김선생이 여기를 아주 떠나주시오. 려비가 필요하다면 내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고나서 이렇게 응대했다.

《당신이 념려할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지주이기는 하지만 중국사람으로서의 량심을 가지고있을것이라고 믿으며 중국을 집어삼키려고 달려드는 일제를 미워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반대하거나 해칠 리유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다른 중국청년들인 보위단원들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졸렬한 인간이라면 이렇게 터놓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념려하는것보다 우선 당신자신이 일본놈의 개〉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무한장은 그 말을 듣자 더 길게 이야기를 끌지 않고 흥륭촌을 떠나갔다.


그후 무한장과 그의 보위단은 대체로 중립적인 립장을 취하면서 우리를 신중하게 대하였고 새로 임명되여온 촌장도 우리 눈치를 보아가며 꼭 필요한 행정임무만 조심스럽게 수행하였다.

만일 우리가 안도에서 대중을 조직화할데 대한 방침을 제때에 관철하지 않았더라면 백색테로가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간도대지에서 무한장과 같은 큰 지주를 굴복시킬수 없었을것이며 그를 감히 중립화하여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지 못하였을것이다.


조직된 대중의 힘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며 그 힘앞에서는 불가능이라는 말이 있을수 없다.

흥륭촌과 그 일대의 혁명조직들은 활기에 넘쳐 자기의 력량을 확대해나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