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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4-2. 준엄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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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16회 작성일 15-03-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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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준엄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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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상에서 뜻밖에도 차광수를 만났다. 《덜렁광창》의 눈은 도수높은 근시경밑에서 기쁨으로 반짝거리고있었다. 나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멀리서부터 환성을 질렀다.

차광수는 나의 소식을 알고싶어 손정도목사네 집으로 가던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두팔로 안아들고 몇바퀴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는 혁명을 하느라고 뛰여다니던 사람들이 다 잡혀가니 고독해서 미칠것 같더라고 하면서 한참동안 길림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성주, 조선의 로동운동은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고있소. 투쟁구호, 투쟁방법, 투쟁양상… 모든게 새롭고 생신하거든. 30년대의 민족해방운동은 특히 투쟁양상에서 큰 변화를 보일것 같은데 어떻소? 이제는 급변하는 환경에 맞게 우리 혁명이 새로운 기치를 들고 전진해야 하지 않을가?》

그는 피발이 선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혁명가의 리상은 고사하고 일신의 목숨조차 보존하기 어려웠던 살벌한 시기에 적의 공세에 위축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고 오히려 변복을 해가면서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공산주의자로서의 모색을 계속하고있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서 나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우리 혁명이 새로운 기치를 들고 전진해야 하리라는 광수동무의 견해에는 나도 동감이요. 그런데 그 기치란 무엇이겠소?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옥중에서 많은 생각을 해봤는데 이제는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새형의 당을 창건해야겠다는것과 무장투쟁에로 이행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소. 무장투쟁만이 나라를 구원할수 있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수 있소. 조선인민이 벌리는 모든 투쟁은 당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여 온 민족이 총동원되는 거족적인 항전으로 발전해야 하오.》

나는 옥중에서 내가 생각한것들을 그대로 토로하였다.


차광수는 내 말에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신안툰에 가서 김혁, 박소심 동무들과도 토론해보았는데 그들도 동감이라고 하였다. 무장을 잡지 않고서는 조선을 구원할수 없고 새로운 로선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혁명을 전진시킬수 없다는것은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였다.


무장투쟁은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제기되는 성숙된 요구였다. 일제의 파쑈적인 강권통치는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조선민족의 무권리와 빈궁은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1929년부터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경제공황의 파도가 일본에도 미치였다. 일제는 대공황으로부터의 출로를 아세아대륙에 대한 침략에서 찾고 전쟁준비를 다그치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지적폭압과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가 조선민족에 대한 수탈과 억압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찾았다면 우리 민족은 일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데서 민족재생의 길을 찾았다. 경제투쟁일면으로 치우치던 로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점차 폭동적인 성격을 띠고 발전하기 시작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나는 그때 신흥탄광로동자들의 파업을 흥미있게 주시하였는데 그 파업도 종국적으로는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수백여명의 로동자들은 파업단의 지도밑에 탄광검탄소와 사무소, 기계실, 발전실, 공장장사택을 습격파괴하고 탄광구내의 전선을 모조리 절단하였으며 인양기와 뽐프를 비롯한 생산설비들을 닥치는대로 짓부셔버리였다. 탄광을 운영하던 일본사람들이 두달이 걸려야 탄광의 복구가 가능하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파업로동자들은 회사측에 심대한 손실을 주었다.

폭동은 무장경관대의 개입으로 백수십명에 달하는 피검자를 내는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양상을 보이면서 전국을 뒤흔들어놓았다.


이 폭동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기때문에 나는 후날 무장투쟁을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신흥지구에 들어가 로동운동지도자들을 만나보았다.

조선로동계급의 투쟁은 조직력과 단결력, 지구성, 련대성의 측면에서도 종전의 운동에 비해 질적인 발전을 보이고있었다.

원산로동련합회에 망라된 2,000여명의 로동자들은 로련의 지도밑에 1만여명의 가족들과 함께 여러달이나 완강하게 파업을 단행하였다.

원산총파업소식에 접한 전국의 로동자, 농민들은 곳곳에서 격전, 격문, 동정금을 보냈으며 대표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투쟁에 지지와 련대성을 표시하였다.


홍원, 회령을 비롯한 국내의 로조단체들은 말할것도 없고 원산에서 수천리 떨어진 길림에서도 우리가 조직한 반일로동조합산하의 한성회성원들이 원산로동련합회에 동정금을 모아 보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 우리 나라 로동계급의 의식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


원산총파업은 1920년대 우리 나라 로동운동의 정점을 이룬 사변으로서 세계로동운동사상에 조선로동계급의 전투력과 혁명성을 뚜렷이 부각해놓았다.

나는 옥중에 있을 때 원산총파업의 전과정을 심중하게 주시하면서 그 투쟁이 우리 나라 로동운동력사에 특기할만한 투쟁이며 그들의 투쟁경험이 조선의 사회운동자들이 다같이 참고하고 따라배울만한 가치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그때 갱신된 로동련합회지도부가 취업지시를 내리지 않고 끝까지 파업을 밀고나갔거나 전국의 로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이 파업에 호응하여 본격적인 실력투쟁을 벌리였더라면 원산로동계급의 투쟁은 승리로 결속되였을것이다.

나는 원산총파업의 실패를 통해서도 조선에 로동계급의 투쟁을 승리적으로 조직하고 령도할수 있는 맑스ㅡ레닌주의당을 한시바삐 내와야 할 필요성을 다시한번 절감하였으며 무장투쟁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축을 이루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중투쟁도 그 배경밑에서 더 치렬하게 벌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적이 철권을 가지고 민족해방운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조건에서 조선인민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폭력화의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을수 없었다. 혁명적폭력이야말로 발톱까지 무장한 적의 반혁명적폭력을 타승할수 있는 가장 승산있는 투쟁수단이였다. 적이 총칼을 휘두르는 조건에서 조선민족도 자신을 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맞서야 하였다.


교육, 문화, 경제의 진흥을 통한 순수한 《실력양성운동》이나 로농대중의 쟁의나 외교공작의 방법으로써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었다. 원산총파업과 신흥탄광탄부들의 폭동을 통하여 조선의 로동계급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비할바없이 두터워졌으며 그 과정에 나는 우리 나라 로동계급이 훌륭한 로동계급이며 우리 민족이 참으로 전투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느끼였다.


문제는 로선이고 지도였다. 시대의 추이에 맞는 옳은 로선이 있고 옳바른 지도만 있으면 어떤 강적과도 싸워이길수 있다는 확고한 신심이 생기였다. 파괴된 조직들을 시급히 복구정비하고 대중에 대한 의식화, 조직화사업을 끊임없이 벌려 그들을 일본제국주의와의 결전에 하루속히 준비시켜야겠다는 조바심때문에 내 마음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이러는 사이에 흩어졌던 동무들이 내가 감옥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나한데 모여들었다.

나는 길림지구 공청과 반제청년동맹, 반일로동조합, 농민동맹핵심들과 마주앉아 적들의 백색테로가 강화되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조직을 빨리 복구정비하고 군중을 묶어세우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차광수를 흥분시켰던 무장이라는 한마디의 말은 여기서도 청년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지지가 나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우리는 간도와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에서 공청사업을 강화하며 이 지역을 신속히 혁명화하기 위한 대책과 함께 당창건준비사업을 실속있게 벌릴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당면하게 해결하여야 할 몇가지 과업을 토의한 다음 그 집행을 위하여 각지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였다.

나도 신안툰에서 하루밤 자고 인차 돈화를 향해 떠났다.

내가 돈화를 공작지로 정한것은 거기가 동만 각 현들과 련계를 짓기에 편리한 고장이고 또 그곳에 나를 도와줄만한 친지들이 여러사람 있었기때문이였다. 거기에 얼마동안 머무르면서 폭동이 세차게 번져가고있는 동만의 사태에 대처할 조직들의 활동방향을 제시해주고 옥중에서 무르익혀온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안을 세울 작정이였다.


길림을 떠나면서 내가 제일 허전하게 생각한것은 어떻게 하나 중학만이라도 마치라고 한 아버지의 유지를 지키지 못하는것이였다.

박일파는 나에게 자기가 아버지를 내세워 육문중학교 당국과 복교교섭을 할터이니 중학교를 마저 다니라고 권고하였다.

그는 길림에서《동우》라는 잡지를 발간하고있던 민족주의자 박기백의 아들이다. 박우천은 그의 필명이다.

내가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박일파는 길림법정대학을 다니면서 류길학우회의 사업을 도와주었다. 그의 꿈은 법조계에 진출하는것이였다. 그 당시 그는 로어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백계로씨야장교를 따라다니였다. 그가 백파장교와 접촉하는것을 신생로씨야에 대한 일종의 배신행위처럼 여기고있던 우리 동무들은 나에게 그와의 거래를 끊으라고 권고하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외국어도 배워두면 혁명을 위해 큰 밑천이 될수 있으니 그가 백파장교를 따라다닌다고 배척하는것은 너무 편협한 처사가 아닌가.》고 하였다. 해방후 박일파가 아. 똘쓰또이의 《고난의 길》과 같은 명작들을 많이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할수 있은것은 학창시절에 로어공부를 꾸준히 한 결과라고 말할수 있다.


박일파와 마찬가지로 김혁과 박소심도 복교가 가능하다면 한해 공부를 더하여 중학과정을 어떻게 하나 끝내라고 권고하였다.

리광한교장이 공산주의를 리해하는 사람이니 김성주가 한해 공부를 더하겠다고 청원하면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것이였다.

나는 공부는 자습으로도 얼마든지 할수 있다, 인민이 우리를 기다리고 파괴된 조직들이 우리를 기다리는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 혁명을 외면하고 학창으로 되돌아갈수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권고에 응하지 않았다.


중학공부를 단념하고 막상 길림을 떠나자고 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아버지가 생전에 조국에 나가 공부하라고 하면서 엄동설한에 나를 홀몸으로 고향에 내보내던 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앞에 앉혀놓고 조선력사와 조선지리를 가르쳐주던 일, 림종을 앞두고 어머니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성주만은 중학까지 보내려고 했는데 당신이 내 뜻을 이어 하루세끼 풀을 뜯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성주를 중학교에 꼭 보내라고 유언하던 일들이 떠올라 내 마음을 착잡하게 하였다.


졸업을 한해 앞두고 내가 학교를 중도반단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삼년동안 손끝이 모지라지도록 삯빨래와 삯바느질을 하여 다달이 학비를 보내주시던 어머니는 얼마나 실망하시며 동생들은 얼마나 허전해하겠는가.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며 학비를 보태주던 아버지의 친구들과 나의 학우들은 또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그러나 어머니만은 나를 리해해줄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아버지가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할 때에도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직업적인 혁명의 길에 나서려는 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따르고 지지하였다. 그러니 아들이 설사 중학이 아니라 대학을 다니다가 중도반단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혁명을 위하고 내 나라를 위한 처사라면 반대하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다.


육문중학교를 중퇴하고 인민들속으로 들어간것은 나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수 있다. 이때로부터 나의 지하활동이 시작되였고 직업적인 혁명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였다.

감옥에서 나온후 집에 문안편지 한장 전하지도 못하고 돈화로 가는 내 마음은 산란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혁명에 전념할 때라고 하여도 한두줄의 인사야 전할수 있지 않겠는가고 스스로 자기를 꾸짖어도 보았지만 웬일인지 편지를 쓸수 없었다.


나는 감옥에 잡혀들어간 다음에도 어머니가 걱정할가봐 내 신상에서 일어난 일을 집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1929년 겨울방학을 우리 집에 가서 보낸 동무들이 그만 내가 감옥에 간 전말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도 길림에 오지 않았다. 자식이 감옥에 들어갔다면 천리밖에 있다가도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와서 간수들에게 면회를 시켜달라고 애걸하는것이 어머니들인데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는 상당한 참을성을 발휘한셈이였다. 아버지가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를 때에는 나까지 데리고 몇번씩 면회를 가던 어머니가 10년후 아들이 옥중생활을 할 때에 단 한번도 감옥을 찾지 않았다면 이상하게 생각할수도 있을것이다.

후날 안도에서 나를 만났을 때에도 어머니는 감옥에 찾아오지 않은 리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감옥을 찾아오지 않은 거기에 바로 어머니의 참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철창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오히려 성주가 괴로와할수 있다, 내가 면회를 간대야 그 애에게 무슨 큰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겠는가, 앞에는 넘어야 할 고개도 많은데 첫 걸음에서부터 인정에 끌리면 그 애가 장차 걸음을 똑바로 걷겠는가, 옥중에서 고독을 느끼더라도 차라리 면회를 가지 않는것이 그 애를 위해서는 리로울것이다.

어머니는 아마 이런 심정으로부터 면회를 단념할 결단을 내린것 같았다.

나는 이 사실에서 순수한 보통녀성으로부터 혁명가로 성장한 강직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넓은 세상에 나서고보니 이제는 학교에 매인 몸도 아닌데 집에 가서 다문 며칠만이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돈화땅으로 결연히 발걸음을 옮기였다.

돈화에서 서남쪽으로 60리쯤 가면 사도황구라는 산간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가 담당한 공작지였다.


내가 감옥에 갇힌후 길림에서 일어난 검거의 선풍이 무송에까지 미쳐오는것을 예방하려고 공청, 백산청년동맹, 부녀회조직들에 망라되여 활동하던 여러 세대의 집들이 안도와 돈화방면으로 이주하였다. 어머니자신도 추운 겨울날 형권삼촌과 함께 동생들을 데리고 안도땅으로 이사하였다.

그 당시 동만으로 이주한 수십세대의 집들중 여섯세대가 사도황구에 자리를 잡았다. 그 여섯세대가운데는 고재봉이네 일가도 포함되여 있었다.


정의부 급비생으로 무송사범학교를 졸업한 고재봉은 백산학교에서 교편도 잡고 독립군에 입대하여 무송지구별동대 지휘관으로도 복무하였다. 그는 반일군중단체의 핵심이였다.

그의 손아래동생 고재룡은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동창생이였다. 후날 그는 양정우부대에 참군하였다가 몽강인가 림강에서 전사하였다.

고재봉의 막내동생 고재림은 백산학교를 졸업한 다음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니면서 나와 함께 공청활동을 한 사람이였는데 1930년 봄부터는 만철의학전문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있었다. 그가 길림에 있을 때 나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고씨문중사람들은 원래 무송에 있을 때부터 우리 집과 각별히 가깝게 지냈다. 그 사람들이 우리 부모들을 돕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객주업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었다.

소남문거리의 우리 집으로는 그때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자들이 무시로 수없이 찾아왔다. 그들중에는 우리 집에서 침식을 해가며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시중을 하느라고 손에서 쌀함박과 물동이를 놓을새가 없었다.

이것이 군벌의 주의를 끌지 않을수 없었다.


경찰이 우리 아버지를 감시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재봉의 어머니(송계심)는 어느날 우리 집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김선생님, 댁에서는 이제부터 손님들을 치르지 말아주시우다. 지금처럼 댁에 사람들이 끓게 되면 김선생신상에 불길한 일이 생길수 있수다. 무송에 오는 독립군손님들을 우리가 다 받아들이겠으니〈무림의원〉댁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우리 집으로 보내주시우다.》

이 일로 해서 우리 아버지는 고재봉의 어머니를 크게 신임하게 되였으며 나도 고재봉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였다.


백산학교가 페교된후 우리 어머니가 교사로 쓸 건물을 해결하려고 사방으로 뛰여다닐 때에도 고재봉이네는 자기집웃방을 교실로 쓰라고 선뜻 내맡기였다.

고재봉은 사도황구에 온지 반년도 안되였지만 그동안 동흥의숙을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부백가장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사도황구와 그 주변마을들에 공청과 백산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계속하여 반일부녀회와 농민동맹을 조직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고재봉의 어머니는 내가 가자 너무 반가와 눈물을 흘리며 무송시절을 회상하였다. 지난해 가을부터 감옥살이를 하다가 얼마전에 석방되여 사도황구로 곧추 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며 모색은 예전과 다름 없으나 부종이 있고 병색이 짙은데 집의 어머니가 알면 얼마나 가슴아파하겠느냐고 하였다.

나는 이 집에서 한달가까이 신세를 졌다.

고재봉의 어머니가 그때 나의 몸을 추세워주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는 보리쌀에 좁쌀을 섞어 지은 밥에 산나물을 무친 찬을 정성껏 마련해가지고 내앞에 끼니마다 독상을 차려주면서도 음식이 초라해서 안됐다고 미안해하였다. 생소한 산골에 와서 객주업도 하지 못하고 첫해농사를 방금 시작한데다가 외손자들까지 와서 더부살이를 하는 그 집안형편을 생각하면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무송시절부터 나의 식성을 잘 알고있는 송계심어머니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다는 분틀을 구해다가 나에게 국수를 눌러주었고 고재봉은 돈화현성에 가서 절임한 송어까지 사다가 밥상에 놓아주었다. 고재봉의 매부는 부종에 특효가 있다는 상골을 잡으려고 새벽마다 샘터에 나갔다. 이 일가의 지성으로 내 건강은 빨리 회복되여갔다.


고재봉은 안도에까지 찾아가서 우리 어머니를 만나보고 돌아왔다. 사도황구에서 안도까지 200리가량 되였는데 그는 이 먼길을 하루동안에 가내군 하였다. 고재봉은 소설 《림꺽정》에 나오는 황천왕동이처럼 하루에 300리를 걷는다고 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와 돈화지방에 머무르고있다는 련락을 받고 그때 철주가 고재봉을 따라 사도황구에까지 왔다갔다. 철주는 어머니의 편지와 내가 입을 속옷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무송을 떠난 집식구들이 그동안 구안도(송강)서문밖에 있는 마춘욱이네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다가 흥륭촌에 이사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머니는 구안도에 계실 때 마춘욱이네 집에서 재봉기를 세내여 삯바느질을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흥륭촌에 가서도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주는 새 고장에 별로 정을 붙이지 못하고있었다. 중강, 림강, 팔도구, 무송과 같이 큰 강을 낀 시가지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벌방과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안도는 너무나도 한적한 시골이였고 새롭게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는 또 하나의 서름서름한 고장이였다.

《형님, 감옥에서 나온 다음 무송에는 들려보았나요?》

그때 철주는 나에게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였다.

《들리고싶었지만 들리지 못했다. 집에도 가보지 못하고 돈화로 곧추 온 내가 무송에 어떻게 간단 말이냐.》

《무송사람들이 형님을 몹시 보고싶어했어요. 울화형은 형님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하루에 한번씩 우리 집에 오군 했어요. 무송사람들이 참 좋았지요?》

동생의 목소리는 무송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푹 젖어있었다.

《그럼, 좋구말구.》

《무송에 두고온 동무들이 자꾸 생각나군 해요. 형님이 그쪽으로 가실 기회가 생기면 우리 동무들을 꼭 만나보라요.》

《그렇게 하자꾸나. 그래 안도에 와서도 새 동무들을 많이 사귀였니?》

《아직 많이 사귀지 못했어요. 안도에는 내 나이또래의 아이들이 많지 않아요.》


나는 철주가 새 고장에 와서도 무송시절을 계속 그리워하고있으며 그 그리움때문에 안도생활에 깊숙이 발을 잠그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지낸다는것을 감촉하였다. 애수에 잠긴듯 한 동생의 눈과 쓸쓸한 얼굴표정이 그것을 다 말해주고있었다. 그 나이의 망향소년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반감의 표시라고나 할가. 동생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는 어쩐지 내 마음까지도 어수선하게 하였다.


《철주야. 부지런한 농사군에게 좋은 땅, 나쁜 땅이 따로 없듯이 훌륭한 혁명가에게는 좋은 고장, 나쁜 고장이 따로 없단다. 안도라고 왜 좋은 동무들이 없겠느냐. 동무란건 찾아낼탓이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지 않더냐. 동무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보석을 캐내듯이 찾아내야 한다구. 좋은 동무들을 많이 찾아내서 한번 안도를 멋있게 개척해보아라. 너두 이젠 공청생활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니냐.》

나는 공청에 가맹할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동생에게 거듭 강조하였다.

《알겠어요. 형한테 걱정을 끼쳐 미안해요.》

동생은 표정을 가다듬고 엄숙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후 철주는 인차 공청에 가맹하였다.


나는 사도황구에 머무르는 기간 고재봉, 고재룡 동무들을 도와 소년탐험대와 농민동맹, 반일부녀회를 무어주는 한편 동남만각지에 널려있는 혁명조직성원들과의 련계를 짓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재봉을 통해 룡정, 화룡, 길림의 련락소에 보낸 나의 편지를 받고 김혁, 차광수, 계영춘, 김준, 채수항, 김중권 등 10여명의 동무들이 사도황구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지휘성원들이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동만을 뒤흔들고있는 폭풍이 예상했던것보다 더 격렬한 단계에 이르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 폭동의 주력을 담당한것이 바로 만주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사람들이였고 그들을 폭동에로 선동하고 인도한것이 한빈, 박윤세와 같은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중국당에 전당하려면 실천투쟁에서 공로를 세워 그 당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폭동에 궐기하라고 호소하였다.


당시로 말하면 동북지방에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따라 당재건운동을 포기하고 중국당에 적을 옮기기 위한 공작을 맹렬하게 벌리고있을 때였다.

중국당에서도 실천투쟁을 통한 검열과 개별적인 심의를 거쳐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당에 들어올수 있다는 원칙밑에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하였다.

이런 때에 국제당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폭동을 선동하며 돌아다녔기때문에 중국당에 전당하려고 애쓰던 만주총국소속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야욕과 탐위적목적을 앞세우면서 인민들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몰았다.


그들은 청산하지 말아야 할 대상들까지도 청산하였고 지어는 학교와 발전소에까지 불을 질렀다.

5.30폭동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중국의 반동군벌들로 하여금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과 반일애국투쟁을 탄압할수 있는 좋은 구실을 주었다.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은 가혹한 백색테로의 대상으로 되였다.


군중들은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농촌과 산간오지로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경신년의 대《토벌》을 방불케 하는 참사가 동만각지에서 벌어졌다. 류치장과 감옥들은 모두 폭동군중으로 차고넘치였다. 수많은 폭동관계자들이 조선으로 압송되였다. 그들은 서울에 끌려가서 모두 극형과 중형을 언도받았다.


봉천군벌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간계에 넘어가 폭동군중을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일제는 조중인민들사이의 리간을 조성하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이 동만에서 폭동을 일으킨것도 만주땅을 빼앗기 위한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군벌의 우두머리들은 그 선전을 그대로 곧이 듣고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일제놈의 앞잡이기때문에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폭동군중을 닥치는대로 살해하였다. 우둔한 군벌은 공산주의자와 일제의 앞잡이를 같은 개념으로 보고있었다.


5.30폭동기간에 체포되고 살해된 사람들은 실로 수천명에 달하였는데 그 대다수가 조선사람이였다. 피검자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였다. 폭동으로 하여 우리의 혁명조직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폭동을 계기로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사이의 관계가 몹시 나빠졌다.

리립삼로선은 후날 중국당내에서 《망동주의로선》, 《소부르죠아적광증》으로 평가되였다.

리립삼의 쏘베트홍군로선은 동북지방의 실정에 맞지 않는 모험주의적로선이였다.

그해 9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3차전원회의에서는 리립삼의 좌경모험주의로선을 심각히 비판하였다.

국제당에서도 《11월 16일부 서한》을 통하여 리립삼의 좌경모험주의적오유를 비판하였다.

만주성당조직에서는 성위확대회의와 련석회의를 열고 리립삼의 오유를 비판하였다.

우리도 1931년 5월의 봄명월구회의에서 리립삼로선을 비판하고 좌경모험주의적오유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리립삼의 좌경모험주의의 여독은 그후에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여러해동안 동북일대의 혁명투쟁에 영향을 주었다.


사도황구에 모여온 청년들은 《조선민족의 피가 아깝다.》고 통탄하였고 《우리 혁명이 언제까지나 이런 혼돈속을 헤매야 하겠는가.》고 가슴을 치며 안타까와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폭동의 후과가 큰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과가 크다고 한탄만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탄은 그만하고 각지에 나가서 조직을 복구하며 뒤수습을 해야겠다. 중요한것은 종파분자들의 야욕을 발가내고 군중을 그들의 영향에서 떼내는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에게 조선혁명의 진로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폭동은 비록 류혈로 끝났지만 군중은 그 과정을 통해 크게 단련되고 각성되였을것이다. 조선민족은 이번 폭동을 통해 전투력과 혁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의 그 위대하고 헌신적인 투쟁정신에서 크나큰 힘을 얻었다. 이런 인민에게 과학적인 투쟁방법과 전술을 가르쳐주고 민족이 나아갈 진로를 밝혀준다면 우리 혁명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동무들은 이런 호소를 듣고도 별로 큰 자극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한별동무의 말이 옳다. 그런데 대중을 공감시킬만한 새 진로가 어디 있는가?》 고 하면서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로선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누가 만들어서 섬겨바치는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여 만들어야 한다. 내가 옥중에서 생각해둔것이 있는데 동무들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차광수, 김혁, 박소심 등과 이미 토론한바 있는 조선혁명의 로선상 문제를 내걸고 장시간에 걸치는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도황구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도 내가 제출한 안은 동무들의 지지를 받았다.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빚어진 참혹한 류혈은 나를 다시한번 흥분시키고 각성시키였다. 나는 이 동란의 한복판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어떻게 하면 조선의 혁명군중을 피바다속에서 구원해낼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을 역경속에서 건져내고 승승장구하는 혁명에로 인도할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줄곧 하였다.

혁명은 무장을 기다리고있었다. 잘 조직되고 훈련된 혁명군대와 인민을 기다리고있었으며2천만을 승리의 길로 향도할수 있는 강령과 그 강령을 집행할수 있는 정치적참모부를 기다리고있었다


내외의 정세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성전에서 전환을 일으킬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전환이 없다면 우리 민족이 더 많은 류혈과 참화를 당할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이 전환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며 1930년 여름에 바로 이런 전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지고 머리속에 떠오르는 사색의 알맹이들을 목책에 쉬임없이 정리해두었다.

우리는 사도황구를 떠나는 조직성원들과 공작원들에게 맡은 임무를 시급히 끝낸후 6월하순에 카륜에서 다시 만날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그후 돈화에서 길동지구당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폭동에 대한 문제가 론의되였다. 파쟁분자들은 5.30폭동과 같은 폭동을 또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나는 5.30폭동은 무모한 폭동이였다는것을 비판하고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였다.

그해 봄 나는 옥중생활에 이어 5.30폭동까지 겪으면서 많은것을 체험하였다.

참으로 나의 일생에서 1930년의 봄은 잊을수 없는 성장의 봄, 시련의 봄이였다. 이 봄에 우리 혁명은 새로운 전환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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