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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5.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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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43회 작성일 15-03-1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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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무송에 돌아와보니 이전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이 많지 않았다.

밤낮으로 인적이 그치지 않던 지난날의 집안풍경에 대비하면 너무나도 적막하고 쓸쓸하였다.


내가 무송에서 받은 인상들가운데서 지워지지 않는것은 리관린의 모습이였다. 리관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서 지내고었었다. 오동진이 그를 우리 집에 보내면서 관린은 김선생덕을 많이 입었는데 그 연고를 생각해서라도 무송에 가서 성주 어머니를 잘 도와드리라고 당부하였다는것이다. 리관린은 남만녀자교육련합회 사업을 하면서 우리 어머니를 동무해주고있었다.


원래 리관린은 성격이 담차면서도 락천적인 녀자였다. 문무를 겸비한 녀자로서 리관린만큼 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도도하고 대담무쌍한 녀걸은 당시 조선에 없었을것이다.

봉건이 심해서 녀자들이 바깥출입을 해도 얼굴마저 가리우고 다니던 그때 남복차림으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리관린을 보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딴세상 사람이라도 구경하듯이 희한해서 쳐다보았다.


그런데 며칠 지내면서 보니 리관린은 이전보다 별로 생기가 덜한것 같았다.

내가 화성의숙을 그만두었다는것을 알게 되자 그는 몹시 놀라는것이였다. 생각이 있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해 다들 안달아하는 군관학교를 단념해버렸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숙을 중퇴하게 된 리유와 전말을 듣고서는 용단을 잘 내렸다고 하면서 길림으로 가려는 나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민족주의계렬의 학교를 부정하고 사상적으로 결별해버린 나의 행동이 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리관린은 분명 그때 내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목격하면서 독립군의 말로, 민족주의말로를 더 심각하게 느낀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아도 그는 이전보다 많이 달라졌는데 요새는 더욱더 말수더구가 적어지고 조용해졌다는것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 나이의 미혼녀성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일종의 고민이 아니겠는가고도 생각하였다. 리관린의 그때 나이가 28살이였다. 14살이나 15살만 되여도 머리를 쪽지고 시집을 보내는 조혼의 시대였으므로 28살이라고 하면 다들 쇠서 못쓰겠다고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리관린과 같이 혼기를 놓쳐버린 로처녀들이 일생문제때문에 고민하는것은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되므로 나는 어느날 그에게 그사이 왜 그렇게 얼굴이 축가고 우울해졌는가고 물었다.

리관린은 한숨을 쉬면서 자꾸 나이는 드는데 만사가 신통치 않아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다. 성주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하루에 100리, 200리를 걸으면서도 힘든줄을 몰랐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무슨 일을 하나 해도 성수가 나지 않고 몸에 차고 다니는 권총에도 녹이 쓸 지경이니 어데다 마음을 의탁할데가 없고 야단이 아니냐, 독립군이 아무래도 대사를 치르지 못할것 같애, 지금 독립군의 형세가 말이 아니야, 꼭대기에 있는 령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틀만 차리면서 상발(출근)도 하지 않고 싸움깨나 할만 한 장정들은 집살림에 재미를 붙이고 총각들은 녀자들의 분내나 맡으면서 돌아가고있지,… 며칠전에는 날파람있던 싸움군총각이 장가를 들어가지고 독립군에서 나와 간도쪽으로 떠나가버렸구나, 모두들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씩 꼬리를 사리는 판이야,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는거야 어떻게 하겠나, 그렇지만 장가를 간다고 총까지 벗어던지면 조선독립은 누가 한단 말이야,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체면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였다.


나는 비로소 그의 고민이 리해되고 울분이 리해되였다. 처녀의 몸으로 시집도 안가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를 쓰는데 멀쩡한 사내라는것들이 총을 벗어던지고 안식처를 찾아 달아나는 판이니 그가 분개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글공부를 했다는 처녀들이 개화바람이 나서 신녀성행세를 하며 돌아갈 때 리관린은 륙혈포를 차고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왜놈군경들과 격전을 벌리였다.

녀자가 남복에 권총을 차고 직업적인 군인이 되여 외적과의 싸움에 나선 실례는 우리 나라 력사에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에서 제목을 특별히 따로 설정하여 리관린의 생애를 더듬어보는것도 이 점을 중시한데 있다. 남존녀비의 인습이 뿌리깊이 남아있던 우리 나라에서 녀자들이 권총을 차고 싸움마당에 나선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외적에 대한 우리 나라 녀성들의 지난날의 저항방법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띠고있는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수 있다. 그것은 그 저항들이 많은 경우 봉건유교적인 정절관에 기초한 소극적인 형태로 표현되였다는 점이다.

외적이 침노하여 이 나라 인민들을 도륙하고 괴롭힐 때마다 녀성들은 몸을 더럽히는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깊은 산중이나 절간 같은데로 피신해 버리군 하였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녀성들은 자결로써 놈들에게 항거하였다. 임진왜란때 나라에 등록된 렬녀의 수가 충신의 수보다 30배이상이나 더 많았다고 하니 이 나라 녀성들의 절개가 얼마나 강했는가 하는것은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최익현이 대마도에 가서 단식으로 순국했을 때 그의 부인은 3년상을 마치고 자결로써 남편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인륜의 도리로 볼 때에는 그것을 나라에는 충성하고 남편을 위해서는 절개를 지키는 최대의 도리라고 응당하게 평가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모두가 죽음만을 택한다면 원쑤는 누가 치고 이 나라는 누가 지켜주겠는가 하는것이다.


나라가 근대화되면서 우리 녀성들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피신, 자결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적들에게 저항하던 이 나라의 녀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군경들의 총검앞에 가슴을 내대고 반일시위에 떨쳐나섰으며 적의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였다.

그러나 손에 총을 잡고 녀성독립군으로 이국땅에서 10년유여의 세월을 무력항쟁에 참가한 녀자는 리관린밖에 없을것이다.


리관린은 원래 인물이 잘나서 어데 가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을 떼버리느라고 애를 먹던 녀자였다. 용모나 학식이나 가정환경을 보면 학교에 가서 교원도 할수 있고 좋은 남편을 만나 남부럽지 않게 호강할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한몸을 초개와 같이 독립운동에 바치였다.

그의 아버지는 삭주에서 여러 정보의 땅과 산림과 초가이기는 하나 10칸이나 되는 집을 가지고 자작농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중산층이였다. 그는 리관린이 12살 나던 해에 상처를 하여 2년후에 재취를 한다는것이 16살 되는 처녀를 데려왔다.


리관린은 자기보다 겨우 2살밖에 더 먹지 않은 녀자를 어머니라고 부를수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봉건이 심하여 딸이 15살이 되도록 학교에 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적당한 혼처를 물색하여 시집보낼 궁리만 하고있었다.

남들이 학교에 다니는것이 부러워 늘 공부를 시켜달라고 떼를 쓰던 리관린은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느끼고 15살때에 집을 뛰쳐나왔다.


그는 아버지가 어디로 간 사이에 슬그머니 압록강가에 나가 얼음구멍앞에 옷과 신발을 벗어놓고 그길로 의주에 갔다. 거기서 그는 먼 친척벌되는 사람의 도움으로 양실학교에 입학하였다. 반년쯤 배포유하게 공부를 하다가 가을이 다된 때에야 그는 아버지에게 학비를 보내라는 편지를 부치였다.


딸이 강물에 빠져죽은줄로만 알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그의 아버지는 편지를 받고 너무도 기뻐 곧 의주땅으로 달려갔다. 그는 딸에게 이제는 네가 공부하는것을 막지 않겠으니 요구되는것이 있으면 아무때나 편지하라고 하였다.

리관린은 그때부터 학비걱정을 모르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성적도 우수하였으므로 학교에서는 그를 평양녀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추천하였다.


이렇게 한해두해 공부하는 과정에 그는 세상리치도 깨닫게 되고 우리 아버지의 보증으로 조선국민회에도 들게 되였는데 그때부터는 당당한 혁명조직의 성원으로 지하활동에 참가하였다. 그가 우리 아버지한테서 《지원》의 뜻을 배운것이 바로 이때였다. 리관린은 평양녀자고보와 숭실중학교, 숭의녀학교, 광성고보의 학생들속에서 동지들을 흡수하기 위한 공작을 은밀히 하였다.


어떤 날은 그가 원족삼아 만경대에도 놀러 왔다. 우리 집에 와서는 아버지와 사업토의도 하고 어머니의 일손도 도와주었다.

교통조건이 불리한 때였지만 경치가 좋다고 봄이면 숭실중학교나 광성고보 같은데서 많은 학생들이 점심밥을 싸가지고 만경대로 놀러 오군하였다.


평양에서 3.1인민봉기가 폭발하자 그는 시위대렬의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시위가 좌절되면 기숙사에 들어가 잠간씩 숨을 돌리고는 다시 만세를 부르면서 학우들을 고무하였다. 봉기가 실패하고 시위주모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나자 그는 고향에 돌아가 직업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망국의 운명을 끝장내기 전에는 학창에서 공부나 하고 앉아있을수 없다는 결심이 선것이다. 초기에는 오동진이 조직한 광제청년단에서 총무로 활동하였다.


리관린은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벌써 고향에서 일본경관 두놈을 권총으로 쏴죽이고 압록강얼음구멍에 처넣어 세상을 놀래운적도 있었다.

독립군에 입대한 후 그가 국내에 자금모연공작을 나왔다가 경찰에게 걸려들어 조사를 당한적이 있었다. 리관린이 이고 가는 보퉁이속에 권총이 들어있었으므로 정황은 아주 위급하였다.


경찰은 그 보따리를 자꾸 풀라고 하였다. 리관린은 보다리를 푸는척하다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경찰을 수림속에 끌고들어가서 처단해버렸다.

국내에 모연공작을 자주 다니다나니 그는 로상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언제인가 그는 오동진이 주는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일대에 나가 모연공작을 한 일이 있었다. 모연을 마치고 국내조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본영으로 돌아오던 그는 삼도만에서 하루밤 류숙하던중 근방에 있는 다른 무장단성원들의 협박을 받았다. 그때 두사람의 수중에는 몇백원에 달하는 돈이 있었다. 그자들은 권총을 꺼내들고 공포를 쏘아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두사람을 위협하였다. 동행하던 남자는 그 위협에 겁을 먹고 간수하고있던 돈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그러나 리관린은 한푼의 돈도 내놓지 않고 오히려 호령질로 그들을 쫓아버리였다.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에는 유격대에 녀장군들이 많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녀성이 조선에는 없었다. 고보시절에 수놓이나 재봉 같은것만 배우던 책상물림의 녀자인데 그처럼 용감하고 담력이 있었다. 한때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같은 신문들이 리관린을 두고 굉장히 떠들었다.


리관린은 또한 절개가 굳고 대가 강한 녀자였다.

3.1인민봉기후 남만에서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사업이 활발히 벌어지고있었다. 그런데 모든 단체들이 저마다 다른 파를 무시하고 자기 파를 내세우면서 본위주의를 하기때문에 통합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통합을 위한 론의는 매번 무의미한 입씨름과 마찰로 공회전을 하였다.


아버지는 통합운동이 직면하고있는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 사업에 독립운동의 원로들을 인입하려고 결심하였는데 그 첫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이 량기탁이였다. 적의 감시속에 있는 량기탁을 서울로부터 남만주까지 안내해온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심중히 생각해보던 끝에 그 적임자로 리관린을 선정하고 량기탁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어 그를 서울로 파견하였다.


량기탁은 민족주의자들속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평양 한학자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일찍부터 애국적인 신문활동과 교육운동으로 대중속에 반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였다. 량기탁이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되는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일본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한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105인사건》으로 감옥살이도 여러해 하였으며 신민회와 상해림시정부(국무위원), 고려혁명당(위원장)조직에도 관계하였다. 이 사람이 오동진과 함께 정의부도 조직하였다.

이런 경력으로 독립운동자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그를 존경하였다.


리관린은 서울에 나갔다가 형사들에게 붙잡혀 종로경찰서 구류장에 갇히였다. 적들은 그에게 매일같이 악착한 고문을 들이댔다. 코에 고추가루물을 부어넣기도 하고 참대침으로 손톱눈을 찌르기도 하고 두팔을 뒤로 제껴 천정에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어떤 날에는 그를 마루바닥에 눕혀놓고 얼굴에 널판자를 올려놓은 다음 그것을 디디고 서서 발을 탕탕 구르기도 하였는데 고문할 때마다 중국에서 왔는가, 로씨야에서 왔는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가 하면서 차고 때리고 짓밟고 하였다. 나중에는 두다리에 매운 재떡을 붙이고 석유를 친 다음 불을 달아놓으면서 태워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도 리관린은 굴복하지 않고 나는 직업이 없어서 다니는 녀자다, 어느 부자집 침모나 보모를 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붙잡아다놓구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고 대들었다.

리관린이 하도 뻗대자 한달만에 놈들은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운신조차 할수 없는 몸이였으나 기어이 량기탁을 데리고 흥경으로 들어갔다.

그때에 받은 그 고문의 후탈로 리관린은 흥경에 도착하자마자 병상에 매인 몸이 되였다. 동료들이 그를 간호하다 못해 차도가 보이지 않아 한 늙은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을 시키였다. 그런데 맥을 짚어본 의사는 태맥이라고 엉터리없는 진단을 내리였다. 이름난 미인한테 수작을 걸어보고싶었던 늙은 의사의 실없는 야유였는지도 모른다.

리관린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들자 의사는 임신을 했다고 하였다.


의사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리관린은 베고있던 목침을 들어 그에게 냅다 던지면서 이렇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자식, 너 젊은 녀자가 시집도 안가구 독립운동을 하자고 나서서 총잡고 싸우는데 무엇이 배가 아파서 조롱하느냐, 나를 헐뜯어서 얻어먹을게 무엇이냐, 다시한번 말해봐라.》

혼쌀이 난 의사는 신발도 신지 못하고 달아나버리였다.


리관린이 이런 기개를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우리 아버지도 그에게 중요한 과업을 많이 주군 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리관린은 무엇이든지 다하였다. 평양에 가라면 평양에 가고 서울에 다녀오라면 서울에 다녀왔다. 급한 련락을 가라면 련락을 가고 녀성계몽을 하라면 녀성계몽을 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국내공작을 할 때면 리관린은 그 수행원으로 따라다니면서 아버지의 신변호위도 하고 사업도 보좌해주었다. 그가 다닌 로정은 실로 수만리에 달한다. 의주, 삭주, 초산, 강계, 벽동, 회령 같은 북부국경일대와 간도지방은 물론, 순안, 강동, 은률, 재령, 해주를 비롯한 서선지구와 멀리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곳이란 거의 없었다.


리관린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처녀의 몸으로 백두산을 넘나든 첫 녀성이였다.

일생에서 가장 열렬한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그 황금같은 청춘시절에 그는 이처럼 타향의 이슬비를 맞으면서 녀자로서는 힘에 부친 군인생활을 하였다.

애국의 일념밑에 몸에 권총을 두개씩 차고 소란스러운 세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활약하던 그가 기울어져가는 독립운동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아팠다.


내가 길림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도 나처럼 장차 길림에 가서 무엇인가 좀 해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리관린은 그후 그 결심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나는 길림에 가서 공부할 때 손정도네 집에서 두세번 그를 만나보았다. 그때 리관린이 시국이야기를 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우리 나라 혁명의 전도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하는 식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정의부 지붕밑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있었다. 리관린은 공산주의를 좋다고 하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민족주의좌파였다.


나는 민족주의운동의 조락을 두고 번민하는 리관린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민족주의진영에는 리관린과 같이 사생활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옳은 지도자가 없다나니 리관린처럼 담력이 크고 절개가 강한 녀자도 어떻게 할바를 모르고있었다. 《ㅌ. ㄷ》가 방금 첫걸음을 뗀 때여서 그는 우리의 운동선에도 합류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그처럼 믿어주고 사랑을 기울여 키워온 리관린이 그 어디에도 마음을 의탁하지 못하고 번민하는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에 조선의 모든 애국력량을 하나로 결속하고 이끌어줄수 있는 참다운 지도세력이 없는것을 통탄하였다.

리관린의 고민은 나로 하여금 우리 새 세대들이 혁명을 위해 더 분발해야겠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 리관린처럼 옳바른 방향타가 없어 모대기는 애국자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한시바삐 만사람을 공감시킬수 있는 새길을 개척하여 나라의 독립을 지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같이 하나의 흐름을 타고 싸워나갈수 있는 혁명의 새시대를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이런 결심을 가지고 길림으로 갈 준비를 다그쳤다.

길림에서 마지막으로 리관린을 본 후 반세기가 흐르는동안 우리는 줄곧 그를 찾았다.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대를 무어가지고 활동할 때 그 대오에는 20대의 녀자들이 많았다. 남성들과 꼭같은 기개와 투지를 가지고 민족해방사의 새 장을 펼쳐나가는 그들의 용감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독립군의 녀걸 리관린을 생각하였다.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궁금하고 안타까왔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그의 행방과 운명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조국이 해방된 후 그의 고향 삭주에도 들려 찾아보았지만 거기에도 리관린은 없었다.

우리가 그의 행방을 처음으로 알아낸것은 1970년대초였다. 우리 당력사연구소동무들이 여러모로 탐문하던 끝에 그가 중국땅에서 아들딸 남매를 키우며 살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리관린과 함께 싸우던 사람들가운데서도 공영, 박진영과 같이 《ㅌ. ㄷ》의 영향으로 공산주의물을 먹은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들은 모두 혁명가답게 최후도 값있고 장렬하게 마치였다.

그러나 리관린은 자기를 이끌어줄수 있는 옳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탓으로 하여 투쟁을 중도반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도 오동진이 살아있을 때는 관전회의에서 선포된 무산혁명방침을 실현한다고 하면서 속도 많이 태우고 걸음도 많이 걸었다. 내가 길림으로 떠난 그해(1927년) 여름에 리관린은 장철호를 비롯한 독립군대원들과 함께 내도산에 가서 풀막을 치고 감자농사를 지으면서 군중계몽도 하였다. 오동진은 아마 내도산마을을 개척하여 독립군의 활동기지로 만들려고 했던것 같다.


그러나 오동진이 붙잡힌 다음에는 이런 활동도 다 흐지부지되였다. 민족주의좌파세력가운데서 공산주의조류쪽으로 제일 크게 기울어진 사람이 오동진이였는데 이런 기둥이 잡혀가다나니 관전회의방침을 실현하겠다고 몸을 내대는 재목도 없었다. 정의부안에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인물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으나 맥을 추지 못하였다.


3부의 통합으로 국민부가 나온 후에는 민족주의상층도 급격히 반동화되여 공산주의라는 말조차 번지기 어렵게 되였다. 국민부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민족주의좌파인물들에 대하여 일제경찰에 밀고하거나 암살해버리는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다.

리관린도 국민부테로분자들의 부단한 추격과 협박을 받으며 피신처를 찾아 헤매게 되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느 중국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가정에 파묻히고말았다. 상하사불급이라는 말과 같이 가정을 이루는것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치른 만주땅에 새별처럼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며 원쑤들을 전률케 하던 《독립군의 꽃》, 《만록총중 일점홍》은 이렇게 속절없이 시들어버렸다.

그는 비유해 말하면 민족주의라는 목선을 타고 먼 항행을 떠난 독립운동자였다. 고난과 시련이 끝없이 겹쳐드는 반일독립항쟁의 그 풍랑사나운 망망대해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배였다. 그런 쪽배로는 도저히 조국광복이라는 목적지에까지 갈수 없었다.


숱한 사람들이 그 배를 타고 항행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기슭에까지 가닿지 못하고 중도에서 주저앉아버리였다. 그렇게 주저앉아가지고서는 밥벌이나 하고 우국지사흉내를 내면서 편안하게 살아갈 구멍수만 찾아다니였다. 지난날 민족을 《대표》한다고 하던 상층들가운데는 백고약을 만드는 소시민이 되거나 깊은 산속에 도피하여 중이 되여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변절은 안하고 가정에 파묻히거나 생업에 몰두하는것은 그래도 좀 나은편이였다. 리관린과 함께 민족주의항로를 헤쳐나가던 독립운동자들가운데는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굴러떨어진자들도 있었다.

리관린은 우리와 헤여진 다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이역에서 보내다가 여러해전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독립군시절에 자기가 그처럼 따르던 김형직선생의 아들 성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조국에 돌아오고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고 한다. 성주가 나라를 령도한다면 만민평등의 사회건설에 대한 김형직선생의 리념이 실현될것인데 그 현실을 기어이 보고싶었다는것이였다. 찬바람부는 만주광야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눈물을 지으며 끝없이 그려보던 나서자란 그 산천에 묻히고싶었다는것이였다.


그러나 리관린이 귀국을 결심하기까지에는 여러해동안의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다.

그에게는 두 남매와 여러 손자, 손녀들이 있었다. 한번 떠나면 다시 넘어서기 어려운 만리타향에 사랑하는 자식들을 죄다 남겨두고 홀몸이 되여 조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다는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로인으로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리관린은 그 후대들과 영영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국으로 기어이 돌아가리라는 결심을 내리였다. 리관린과 같이 담력이 큰 녀성이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수 없는 대용단이였다. 그가 한창나이때 나라를 위해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런 용단을 내릴수 없었을것이다.


조국을 위해 울어도 보고 웃어도 보고 피도 흘리면서 온 넋과 육신을 다 바친 사람들만이 조국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심장으로 깨달을수 있다.

나는 리관린이 이역땅에 자식들을 다 떨궈두고 백발을 날리며 단신으로 조국에 돌아온것을 보고 그의 불같은 조국애와 고결한 인생관에 탄복하였다.

무송에서 헤여질 때 20대였던 리관린은 그때 80고령의 백발로인으로 내앞에 나타났다.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홍안의 아름다운 모습은 더는 찾아볼길이 없었다.


그렇게도 애를 태우며 찾을 때에는 소식이 감감하던 리관린이 머리에 흰서리를 무겁게 이고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반세기이상이나 우리를 갈라놓고있던 그 무정한 세월을 두고 서글픈 감회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리관린에게 평양시 중심부의 풍치좋은 곳에 살림집을 따로 마련해주고 나이를 고려하여 식모와 의사까지 붙여주었다. 그 집은 처녀시절에 그가 다니던 녀고보자리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정일동지가 리관린의 심정을 헤아려서 그런 곳에 집을 잡아주었다. 김정일동지는 그 집에 나가서 늙은이의 취미와 기호에 맞게 가구의 위치도 정해주고 조명과 난방상태까지 다 보아주었다.

리관린은 몸이 불편했지만 그 집 앞마당에 터밭을 일구고 강냉이를 심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강냉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자기 손으로 강냉이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싶다는것이였다. 반세기가 지난 때였지만 그가 내 식성까지 다 기억하고있었다. 그는 무송에 있을 때에도 여름철에 풋강냉이를 사다가 뒤뜨락에서 내 동생들에게 구워주군 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젊은 시절의 공적을 생각하여 우리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장례도 잘 치르어주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장하였다.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그 어느 곳에서 살든지 선조의 무덤이 있고 자기의 태가 묻힌 낯익은 강산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며 설사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어느 때인가는 이렇게 만나 정을 나누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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