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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2-4. 새로운 활무대를 그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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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77회 작성일 15-03-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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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운 활무대를 그리는 마음


화성의숙에서는 학교운영자금의 부족때문에 많은 곤난을 겪고있었다.

의숙의 학생수가 100명도 채 되지 못했으나 당시의 독립군 형편에서 그만한 학생들을 먹여살린다는것도 헐한 일은 아니였다.

정의부가 주인이였지만 돈을 넉넉히 대주지 못하였다. 백성들한테서 한푼두푼 모은 군자금으로 행정, 군사, 민사의 세가지 틀거리를 다 갖추고 한개 국가와 맞먹는 허울을 가까스로 유지해나가는 정의부로서는 돈을 크게 대줄 처지가 못되였다.


화성의숙당국은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학교운영자금모연공작에 주기적으로 동원시키였다. 학생들은 20명이 한조가 되여 자기의 출신중대에 돌아가 무기를 받아가지고는 두달동안씩 정의부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면서 자금을 모으다가 기한이 되면 다른 조와 교대하군 하였다.

그렇게 돈을 모았대야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인차 바닥이 나군 하였다. 그러면 또 길림에 올라가서 정의부에 손을 내밀었다.


한번은 최동오숙장이 겨울나이준비를 위한 자금을 해결하려고 정의부본부에 숙감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숙감은 빈손으로 학교에 돌아와 3중대장을 나쁜놈이라고 욕하였다. 화성의숙에 주려고 내놓았던 돈을 3중대장이 먼저 가로채가지고 가서 자기의 결혼식비용으로 몽땅 써버렸다는것이였다. 어찌나도 돈을 물쓰듯 했던지 며칠을 불궈두고 온 동네를 다 먹이고도 음식이 남아 이웃동리 사람들까지 불러다 먹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분격을 금할수 없었다.

정의부금고에 있는 돈이라고 하여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것은 아니였다. 그 돈은 백성들이 죽을 먹고 끼니를 건느면서도 나라를 찾아달라고 푼전을 모아 군자금으로 바친 돈이였다. 돈이 없으면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군자금을 내고서야 마음을 놓는 우리 인민이였다.

3중대장한테는 그런것도 안중에 없는 모양이였다. 사리사욕에 얼마나 눈이 어두우면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너절한 사취행위를 하였겠는가.

총을 잡고 적과 혈전을 벌려야 할 사명을 지니고있는 지휘관이 그러한 탐오행위를 꺼리낌없이 하였다는것은 독립군의 상층이 변질되여가고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을사조약》후 최익현이 지휘한 순창의병의 패보를 듣고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도일대에서 맹활약을 하던 한 의병장은 자기의 부하가 백성의 재물을 략탈한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탄식하던 끝에 부대를 해산하고 산속에 숨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의병장이 백성에 대한 침해를 얼마나 큰 수치로, 죄악으로 받아들였는가를 가늠할수 있다.

3중대장의 비행은 결국 인민에 대한 침해라고 할수 있었다.


나는 림강에서 살 때 독립군의 몇몇 대원이 조선에 건너가서 농민들의 소를 강제로 빼앗아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는것을 보았다. 그 대원들이 소속된 부대의 지휘관이 우리 집에 왔다가 아버지한테서 호된 추궁을 받고 돌아갔다.


그 당시 독립군이 군자금을 거두려고 관할구역의 조선인거주지역들에 나타나면 지역을 책임진 사람들이 아무 집에서는 돈 얼마, 아무집에서는 쌀 몇말 하는 식으로 문서를 만들어 부락에 돌리였다. 주민들은 그 문서에 적혀있는 량만큼 돈이나 식량을 군자금으로 바쳐야 하였다. 가난한 농사군들한테는 이것이 큰 부담이였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그런 사정은 외면하고 어떻게 하나 더 많은 돈을 받아내려고 애를 썼으며 저마끔씩 관할구역을 정해놓고 승벽내기로 그 울타리를 넓히였다. 어떤 독립군들은 다른 무장단성원들이 모연해오는 자금을 중간에서 협박하여 빼앗아가지고 달아나기도 하였다.


크고작은 무장단성원들이 저마끔씩 인민들한테서 경쟁적으로 돈을 긁어들이였다. 그들은 백성들을 순전한 납세자, 돈을 대주고 쌀을 대주고 잠자리를 대주는 시중군들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비행은 지난날 봉건사회의 관료배들이 하던 행위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었다.

조선의 봉건통치배들은 궁궐에 옥관자를 쓰고 앉아 인민의 피땀을 짜낼 새로운 세금법만 만들어내면서 백성들의 주머니를 끊임없이 털어갔다.

한때 봉건정부는 경복궁을 짓는데 막대한 돈을 써버리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문세(통행세)라는것까지 생각해냈다. 그렇게 긁어간 돈으로 대학이라도 하나 세우고 공장이라도 지어놓았다면 후손들한테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었을것이다.


화성의숙의 진보적청년들은 중대장이라는 사람이 그 지경으로 타락하였으니 독립군도 이제는 망해가는 모양이라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그저 비난하고 개탄할뿐이였다. 지금과 같이 밝은 세상이면 군민이 여론을 모아가지고 법에 제기한다든가 동지재판 같은것을 하여 버릇을 떼주겠지만 법도 없고 군률도 무른 당시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정의부에 민사를 담당한 기구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간판뿐으로서 군자금을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백성들이나 데려다가 볼기를 치는 정도이고 중대장과 같은 사람들의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주었다. 그들의 법에는 상층만이 통하는 개구멍이 따로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과 모든 독립운동자들에게 단단히 경종을 울려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경종을 울리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최창걸은 당장 학생대표들을 선출해서 1중대부터 6중대까지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항의를 들이대자고 하였다.

어떤 동무들은 정의부가 발간하는 《대동민보》같은 출판물에 글을 써서 독립군의 관료행동을 폭로하자고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3중대장과 별반 차이없는 정의부본부나 다른 중대장들, 출판물의 편집성원들이 그런 내용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확신성없는 방법을 가지고 날자를 질질 끌것이 아니라 독립군 각 중대들에 성토문을 보내자고 하였다. 동무들도 그 방안을 지지하면서 나더러 성토문을 쓰라고 하였다.

그 성토문은 《ㅌ. ㄷ》를 조직한 후 우리가 민족주의자들에게 가한 첫 비판이였다.

처음 써보는 성토문이여서 무엇인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한것 같았으나 동무들이 좋다고 하기에 김시우에게 주어 정의부 통신원이 오면 전하도록 하였다. 그후 성토문은 통신원의 손을 거쳐 인차 각 중대들에 전해졌다.


반응도 어지간히 일어났다. 군자금을 결혼식비용으로 써버린 당사자는 물론이고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정의부를 비난하는데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오동진까지도 그 성토문에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였다.

이듬해초에 내가 길림에 가서 공부할 때 그는 내앞에서 그 성토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6중대에 내려갔다가 거기에 모인 중대장, 소대장들과 함께 성토문을 보았다고 한다.

《그 성토문을 보고 나는 3중대장을 되게 문책하였네. 중대장자리에서 떼던지려고까지 생각했지. 그런 물건짝들이 독립군망신을 다 시키거든.》

오동진은 독립군상층이 변질되여가고있다는것을 허심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수습할길 없어 분해하고 안타까와하였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독립군의 타락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수수방관할 때 오동진이 그 불같은 성미를 어떻게 다잡았는지.

나는 오동진의 말을 듣고 독립군의 부패가 우리와 같은 젊은 세대들의 고민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량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의 고민으로도 된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장의 성토문으로써 독립군의 정치도덕적타락을 막는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독립군은 점점 더 헤여나올수 없는 조락의 길을 걷고있었다.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며 대변하는 민족주의군대로서의 독립군의 운명이 다르게는 될수 없었다.

인민들을 거칠게 대하고 그들에게 지나친 경제적부담을 들씌우는데서는 화성의숙의 학생들도 독립군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모연공작에 동원되면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경쟁적으로 재물과 량식을 걷어들이였다.

모연에 잘 응하지 않는 집에 대해서는 애국심이 없다고 트집을 걸든가 독립군도 몰라본다는 식으로 까박을 붙이면서 하다못해 돼지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은 학교에서 조밥만 자꾸 해준다느니, 부식물이 어떻다느니 하면서 밥타발까지 하였다. 한번은 어떤 학생이 기숙사식당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조밥에 시래기국만 주니 식사질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면서 트집을 걸던 끝에 식당사감을 하는 황세일과 다투기까지 하였다. 황세일은 사감의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였다. 그런데 식사질이 조금만 떨어져도 학생들은 사감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해방직후 의주에서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는 황세일을 만나 그와 함께 화성의숙시절을 회상한적이 있다. 그때 황세일은 웃으면서 자기는 화성의숙시절의 교훈을 생각하여 리에 내려가도 절대로 밥타발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화성의숙에서 조밥을 타발하는 사람들은 졸업후 독립군에 돌아가서도 밥타발을 계속할것이며 그런 사람들의 종말은 필연코 돈이나 권세밖에 모르는 추악한 인간으로 전락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2년후에 군관으로 독립군의 중대와 소대들을 지휘하게 된다는데 있었다. 굶어죽을 각오는 커녕 조밥을 먹을 각오조차 되여있지 못한 군대한테서 과연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독립군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운동일반에 대한 실망과 함께 화성의숙의 교육에 대한 환멸은 날이 갈수록 내 마음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올랐다. 화성의숙은 나의 기대에 만족을 주지 못하였고 나는 화성의숙의 기대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화성의숙이 내가 바라는 그런 학교로 될수 없는것처럼 나도 화성의숙이 바라는 그런 학생으로 될수 없었다. 화성의숙에 대한 나의 불만과 나에 대한 화성의숙의 불만은 서로 정비례하였다.


나는 맑스ㅡ레닌주의선진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갔고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헤여나올수 없는 고민의 세계에 빠지였다. 내가 의숙으로부터 멀어지는것이 나를 거기에 보내준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는것으로 되고 그들에게 나의 장래를 부탁한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장례에 참가하려고 수백리를 달려와 나를 위로해주고 로자를 찔러주며 의숙으로 등을 떠밀어주던 오동진과 의숙에 왔다고 나에게 술까지 부어주던 김시우며, 최동오며, 강제하선생들의 생각을 하면 참으로 죄송스럽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자면 내가 불만이 있더라도 화성의숙의 교육에 재미를 붙여야 하였다. 눈을 꾹 감고 2년동안 공부하다가 배치해주는 중대에 가서 곰상곰상 독립군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앞에서 체면도 세울수 있었다. 독립군생활을 한다고 하여 새 사조에 대한 연구를 못하거나 《ㅌ. ㄷ》의 터전을 넓히는 작업을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체면때문에 자기가 보수적이라고 규정한 교육과 외교를 하면서 적당히 지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낡은 교육과 타협하고싶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 집에 돌아가서 삼촌대신 약방일이나 맡아가지고 가정살림을 돌볼것인가, 아니면 심양이나 할빈이나 길림과 같은 도회지에 가서 다른 상급학교에 진학할것인가.


이런 복잡한 심리적곡절끝에 나는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내가 화전대신 길림을 내 운명의 다음정거장으로 선택한것은 이 도시가 만주지방에서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요한 정치적중심지였기때문이다. 이런 리유로 하여 길림은 《제2상해》라고 불리우기까지 하였다. 중국관내에서는 상해가 조선혁명가들의 집결처였다.


나는 화전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터치고 보다 광활한 무대에로 나가 《ㅌ. ㄷ》의 결성으로 첫 걸음을 뗀 공산주의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벌려보고싶었다. 이것이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게 된 기본리유였다.


내가 화성의숙을 다니다가 반년만에 중퇴하고 길림으로 간것은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였다. 두번째 용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호두회의후 새 사단을 조직하면서 《민생단》보따리를 불살라버린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길림에 가서 청년학생들속에 들어갈 용단을 내린것이 정당한 처신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화성의숙을 제때에 떠나지 않고 그 울타리속에서 맴돌았더라면 그이후 조선혁명을 급속한 앙양에로 승화시킨 모든 공정들이 그만큼 지연되였을것이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길림으로 가겠다고 하자 《ㅌ. ㄷ》성원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 그들에게 《ㅌ. ㄷ》를 내온것만큼 이제는 그 조직과 리념을 사방에 펼쳐가야 한다, 화성의숙에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할것 같다, 이런 학교를 다녔대야 큰 보람도 있을것 같지 않다, 내가 간 다음 동무들도 기회를 보아 독립군부대나 적당한 고장에 자리를 든든히 잡고 《ㅌ. ㄷ》의 줄을 뻗치면서 대중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무들은 다 조직의 성원들인것만큼 어디에서 일하든지 조직의 통일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몇몇 동무들과는 후날 길림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다.


나는 화성의숙을 중퇴하는 문제를 두고 이미 김시우와도 의논하였다.

《집에 가서도 의논해보겠지만 이거 뭐 화성의숙에 와서 공부해보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돈은 없지만 길림에 가서 중학교에라도 다니고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이런 고백을 했더니 총관은 몹시 섭섭해하였다. 그러면서도 의숙을 그만두겠다는데 대하여서는 막지 않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이 있으면 내 친구들과 의논하여 주선해주겠네. 사람마다 다 자기의 마음에 맞는 달구지가 있는 법이야. 화성의숙의 달구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네의 달구지를 타고 가게나.》


내가 화성의숙에 오는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환영해준 김시우가 그처럼 대범하게 리해하여주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총관은 최동오숙장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중퇴하더라도 인사나 잘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만나고 길림으로 갈 때에는 꼭 자기한테 들리라고 하였다.

김시우를 납득시키는 일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되였다.


그러나 최동오숙장과의 작별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동반하였다. 처음에는 선생이 노여움을 타면서 한참동안 나에게 섭섭한 말을 하였다. 사내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그만이지 중퇴를 하다니 될말인가, 의숙의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퇴하겠다는데 이 어수선한 세월에 만사람의 구미를 다 맞출수 있는 그런 학교가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막 야단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를 등지고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선생은 그 창가에서 눈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성주와 같은 수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학교라면 나도 이 의숙에서 물러가겠네.》

선생이 폭탄처럼 내던지는 말에 나는 몸둘바를 모르고 함구무언으로 서있었다. 학교의 교육이 어떻다고 정면에서 운운한 내자신의 처사가 숙장선생을 위해서 너무 가혹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후 최동오선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옆에 가까이 다가와 어깨우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 아무튼 꼭 성공하게.》

선생은 운동장에 나와서도 퍼그나 오랜 시간 나의 생활에 교훈으로 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었다. 선생의 머리와 어깨우에는 눈이 내려와 자꾸 쌓이였다.


나는 그후 폭설속에서 나를 바래주던 숙장선생의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그날 선생의 어깨우에 쌓인 눈을 털어드리지 못한 실수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나와 최동오선생은 평양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나는 수상이고 선생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간부였지만 그 상봉은 역시 어쩔수 없는 스승과 제자의 상봉이였다. 화전에서 추켜들었던 《ㅌ. ㄷ》의 리념은 전쟁의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한 이 땅에서 사회주의로 개화하고있었다.

《결국 그때 성주수상이 정당했습니다!》

선생이 웃으면서 나의 아명을 부르는 바람에 나의 추억은 수십년의 세월을 거슬러 눈내리던 화성의숙의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곡절많은 정치생활의 파동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로스승은 아무런 설명도 주해도 붙어있지 않는 이 짤막한 말로 30년전에 있었던 나와의 대화를 결속지었다.


내가 화성의숙을 중퇴한데 대해서는 우리 어머니도 지지해주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심각해지였다. 그러나 내가 중퇴사유를 솔직하게 말씀드리자 마음을 놓는것이였다.

《네가 학비때문에 자꾸 걱정을 하는데 사람이 돈때문에 주접이 들면 아무 일도 못한다. 학비는 어떻게 해서든지 댈테니 너는 그저 품었던 뜻을 꼭 이루어라. 이왕 새 길을 가려고 결심한바에는 걸음을 걸어도 큼직하게 걸어라.》

어머니의 말씀은 새로운 포부를 품고 무송에 돌아온 나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무송에 와보니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있던 많은 동무들이 살림이 구차하여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고 가정에 파묻혀 갈길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그들을 깨우쳐 혁명의 길로 이끌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ㅌ. ㄷ》를 방금 조직하고 그 뿌리를 사방에 뻗쳐가려고 결심한 뒤여서 나도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고서는 못견딜 심정이였다.


나는 소년들을 선진사상으로 교양하고 혁명의 길로 이끌기 위하여 무송시내와 그 일대의 애국적인 소년들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때가 1926년 12월 15일이였다. 새날소년동맹은 말그대로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할 새날을 위하여, 낡은 사회를 짓부시고 새 사회를 건설할 광명한 새날을 위하여 투쟁하는 공산주의적소년조직이였다.


새날소년동맹의 결성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이 활동규모를 넓혀나가는데서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이 동맹이 내세운 구호도 대단하였다. 그때 우리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하자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선진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광범한 군중속에 널리 해설선전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당면하게 수행해야 할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나는 새날소년동맹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원칙과 사업체계, 동맹원들의 생활규범을 규정해주고 길림으로 떠날 때까지 그들의 동맹생활을 지도해주었다.

1926년 12월 26일에는 《ㅌ. ㄷ》와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한 경험에 토대하여 어머니를 도와 반일부녀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혁명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그때 어머니는 무송현성안은 물론, 멀리 주변농촌의 넓은 지역에까지 다니며 도처에 야학을 내오고 조선녀성들에게 우리 나라 글을 배워주고 그들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있었다.


무송에서 얼마쯤 머무르다가 길림으로 들어갈 때 나는 약속대로 화전에 있는 김시우를 찾아갔다.

김시우는 김사헌선생이 우리 아버지하고 친한분이라고 하면서 그의 앞으로 편지를 써주었다. 내가 가면 학교에 입학시켜달라는 소개신이였다. 그것이 김시우와의 마지막상면이였다.


김시우는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람들가운데서도 가장 인상깊은 한사람이다. 그는 말이 적은 사람이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대중계몽과 후대교육으로부터 무기구입, 자금조달, 국내공작원들의 길안내, 비밀문건과 비밀자료들의 전달, 무장단체들의 통합과 행동통일을 위한 사업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계하지 않은 분야란 거의 없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었을뿐아니라 내가 하는 일도 성심성의로 뒤받침해주었다. 우리가 《ㅌ. ㄷ》를 뭇던 날 밖에서 망을 봐주며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도 김시우였다.

김시우는 나와 헤여진 후에도 영풍정미소를 계속 운영하면서 독립군에 식량을 대주고 조선인학생들에 대한 후원을 열심히 하였다. 중국에서 국내전쟁을 할 때에는 혁명후원회 위원장으로 화전에서 일본군대와 장개석군대의 침해로부터 조선사람들의 생명재산을 지키느라고 모진 고생을 하였다.


김시우가 조국으로 돌아온것은 1958년이였다. 한평생 민족을 위해 그처럼 많은 일을 하고서도 그는 그것을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나니 나도 그의 행처를 알수가 없었다.


그는 전천에서 중병이 들어 림종의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된 때에야 비로소 자식들앞에서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나와의 연고관계를 이야기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 깊은 인연이 있으면 왜 장군님을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는가, 장군님이 아버지를 만나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장군님이 지금 우리 전천땅에 와서 현지지도를 하고계시는데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아버지가 몸을 움직일수 없는 형편이면 우리 집에 모시는것이 도리가 아닌가고 들이댔다.


그때 내가 정말 전천군에서 현지지도를 하고있었다.

김시우는 아들의 말을 듣고 도리여 그를 꾸짖었다.

《내가 죽기 전에 옛날일을 이야기하는건 너희들이 무슨 덕을 입으라고 그러는게 아니다. 우리 집 래력이 여사여사하니 너희들도 장군님을 잘 모시고 받들라는거다. 국사에 바쁘신 장군님의 걸음을 한시라도 지체시켜서야 안되지.》


그 로인성미가 원래 옛날부터 그렇게 고정하였다. 아들의 말대로 했더라면 그도 나를 만나고 나도 그를 만났을것인데 정말 아쉽게 되였다. 나로서는 평생 풀지 못할 한이다.

나는 화성의숙시절을 생각하고 《ㅌ. ㄷ》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김시우를 회고하군 한다. 김시우를 떼놓고서는 나의 화전시절에 대하여 말할수 없다. 우리가 화전에서 새 사조를 보급하고 《ㅌ. ㄷ》를 결성하던 잊지 못할 나날에 나를 도와 숨은 노력을 제일 많이 해준 사람이 바로 김시우였다.


《ㅌ. ㄷ》가 불패의 대오로 자라날수 있었던것은 김시우와 같은 성실한 인민의 지지를 많이 받고있었기때문이였다.

나는 이런 인민의 기대를 가슴깊이 새기며 커다란 포부와 결심을 안고 길림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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