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14-1. 서간도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4-1. 서간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814회 작성일 15-07-07 01:50

본문

제 14장.  장백사람들


1. 서간도



559B92394C57EB0031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백두산동부에 위치하고있는 두만강북쪽의 여러 현들을 가리켜 간도 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백두산서부의 압록강이북지역은 서간도라는 이름으로 통하고있다.


서간도는 1930년대 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과 직결되여있는 유서깊은 지역이다. 우리가 말하는 백두산근거지란 다름아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와 국내의 넓은 지역을 의미한다. 서간도의 광대한 령역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건설한 백두밀영과 더불어 백두산근거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두산근거지는 중국쪽만 념두에 둔다면 서간도근거지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어떤 사람들은 백두산근거지를 가리켜 장백근거지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적중한 표현이라고 볼수 없다. 자칫하면 백두산근거지의 령역상 의미를 장백지방을 비롯한 서간도일대에 한정시켜 리해하는것과 같은 혼란을 빚어낼수 있다. 백두산근거지는 장백지방에 국한된 근거지가 아니라 백두산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송화강상류와 압록강북쪽연안에 전개되여있는 서간도 여러 현들과 국내의 광활한 령역을 포괄하는 대근거지이다.


1930년대 후반기는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력사에서 금문자로 아로새겨진 특출한 번성기이다. 우리는 백두산지구에 수십개의 밀영들을 건설한후 서간도를 활무대로 하여 남호두회의에서 토의결정된 새로운 전략적과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때부터 서간도는 교전회수가 가장 많고 총포성이 가장 높은 전장으로 되였다.


나는 서간도가 좋은 고장이라는데 대하여 한두번만 말하지 않았다. 고장이 좋다고 하면 산천경개가 좋다는 의미도 포함되여있겠지만 기본으로 되는것은 사람이 좋다는 의미일것이다. 산천경개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고약하면 그런 고장을 좋은 고장이라고 할수 없다. 이와 반대로 초목이 무성하지 못하는 불모의 땅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씨가 고우면 좋은 고장이라고들 한다.


서간도에는 그 당시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 화전농사를 지어 감자음식으로 구차하게 끼니를 굼때가는 가난한 우리 동포 이주민들은 서간도의 척박한 등판과 계곡들에 이전날 조국에 있을 때 자기네가 살던 고장의 이름을 붙여 풍산덕이요, 갑산덕이요, 길주덕이요, 명천덕이요 하는 마을들을 만들어놓고 광솔불밑에서 단군시조나 《온달전》이야기를 해가며 인생의 비탈길을 힘겹게 톺아가고있었다.


지주들의 대부분은 중국사람들이였다. 간혹 조선인지주들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 수는 그닥 많지 않았고 또 토지소유량으로 보면 부농이나 다름없는 소지주들이였다.

서간도에서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은 대체로 살길이 막히여 조국을 하직한 류랑민들과 일제가 우리 나라를 병탄한 다음 망국의 수치를 씻으려고 반일독립운동의 길에 오른 애국지사들이였다.


서간도의 화전민부락들에 가면 그전날 독립군운동에 투신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던 사람들을 어디서나 만날수 있었다. 내가 앞에서도 이미 말한바 있지만 독립군의 로장인 강진건도 장백현에 와 살았고 홍범도, 오동진과 리극로도 관전, 무송, 안도 지방을 거쳐 여기에 자주 다니였다. 나의 외삼촌 강진석도 림강에서 백산무사단을 뭇고 활동하였다.


서간도에는 국내 여러 지방에서 농조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다음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장백의 거의 모든 마을들에 야학방을 꾸려놓고 민중계몽사업을 벌리였다. 리제순, 최경화, 정동철, 강돈, 김세옥 등 장백지방의 이름난 혁명가들은 대부분 야학선생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였다. 장백지방에는 국내에서 건너온 망명자들과 애국적인 유지들이 설립해놓은 조선인사립학교들도 많았다.


이 사립학교들이 학생들에게 애국주의교양을 많이 하였다. 야학을 통한 군중계몽과 학교를 통한 청소년교양은 서간도의 조선사람들속에서 수많은 애국자들을 배출케 하였다.

서간도사람들이 민족성이 강하고 반일감정이 높았던것은 그들의 불행한 생활처지가 가져다준 응당한 귀결이기도 하지만 애국적인 사상가와 선각자들에 의하여 진행된 부단한 계몽사업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서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사람들이 민족성이 특별히 강하고 반일정신이 높았기때문에 이 일대에 공작원을 한사람만 파견하여도 쉽게 핵심을 장악하고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조직에 묶어세울수 있었다.


1930년대초에 우리는 벌써 조선혁명군출신의 공작원들을 서간도일대에 파견하여 《길림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공작원들에 의하여 이 일대에는 우리의 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다. 남호두와 동강에서 새로운 형태의 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문제가 론의된후 우리는 김주현을 책임자로 하는 소부대를 서간도일대에 내보냈다. 소부대성원들은 장백현을 중심으로 하는 백두산주변의 여러 마을들을 다니면서 이고장의 혁명운동실태도 료해하고 핵심도 장악하고 군중교양도 하면서 장차 주력부대의 정치군사활동에 도움이 될 기초준비를 하였다. 그들의 노력에 의하여 서간도일대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을 지원하며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광범하게 전개해나갈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서간도일대를 빠른 속도로 쉽게 혁명화할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좋은 군중적지반을 가지고있는 고장에 준비된 공작원들이 들어가서 의식화활동을 할 때 군중의 조직화, 혁명화 과정이 비상히 빠른 속도로 추진된다는것은 우리가 서간도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할 때 얻은 또하나의 귀중한 경험이였다.


우리가 서간도를 료해하면서 하나의 특징으로 본것은 이곳에 만주국의 통치가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것이였다. 서간도일대는 감자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지대여서 세금을 받아들일만한 대상도 얼마 없었다. 장백현 같은곳을 보면 현장외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몇명 정도 있을뿐이였다.


무송에 몇달동안 머무르면서 보니 그고장 통치당국에는 토지 조사나 등록 같은것을 제대로 할만한 인물들도 얼마 없었다. 그러다보니 임자없는 땅을 허가없이 부쳐먹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관리들이 개탄할 지경이였다.


무송지방 경찰업무의 특색은 혈연이나 지연관계에 의하여 간신히 유지된다는것이였다. 게다가 이곳 경찰들중에는 포수출신들이 많았다. 사격솜씨만 보고 사람들을 고르다나니 그 경찰들은 하나같이 무식하였고 사람단속도 똑바로 하지 못하였다. 그런즉 통치행정이 자연히 무맥해지지 않을수밖에 없었다.


장백에 와보니 그고장 실태도 무송과 어슷비슷하였다. 이런 특성은 이 일대에서 군중을 비교적 쉽게 의식화하고 조직화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되였다.


서간도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박해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의 기치를 들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데 대해서 비난하거나 제동을 거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한다고 업신여기거나 차별시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압록강연안과 국내깊이에서 아무런 구속이나 제약도 받지 않고 우리의 신념과 결심에 따라 항일혁명을 상승시키기 위한 정치군사활동을 자유자재로 벌릴수 있는 또하나의 유리한 조건으로 되였다.


우리는 자체의 당조직을 꾸리는데서도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서간도쪽에서나 조선쪽에서나 독자적인 당조직건설사업을 우리의 구상대로 통이 크게 전개해나갈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서간도일대에는 우리의 뒤다리를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성시공격을 하고싶으면 성시공격을 하고 당조직을 꾸리고싶으면 당조직을 꾸리고 대부대를 이끌고 국내에 나가고싶으면 국내에 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북간도의 유격근거지들에서 투쟁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그때는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가서 국내인민들을 잠간 만나고 돌아와도 민족주의를 한다고 시비하였다. 우리가 인민혁명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할 때 동만특위와 현당지도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중앙의 로선이라고 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세우라고 내리먹이였다.


우리가 서간도일대 인민들의 혁명화를 빨리 다그치고 또 서간도인민들이 우리의 자주적인 투쟁로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설수 있게 된 또 하나의 유리한 조건은 이 지방 사람들속에 로씨야에 대한 사대주의가 없은것과도 관련된다. 서간도사람들은 사회주의를 동경하였으나 로씨야의 물을 얼마 먹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을 사이에 두고 원동지방과 한지맥으로 잇닿아있는 북간도지방에는 로씨야의 영향이 적지 않게 미치였다. 이 지방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어가운데는 로씨야식말투가 많았다. 지금 함경북도지방의 늙은이들이 성냥을 《비지깨》라고 하는것처럼 북간도사람들도 그 당시에는 로씨야식말투를 본따서 성냥을 《비지깨》라고 하였다. 왕청, 훈춘, 연길, 화룡 일대의 사람들은 《소년단》이니, 《집단농장》이니, 《세포》니 하는 말보다 《삐오네르》니, 《꼴호즈》니, 《야체이까》니 하는 로씨야어휘들을 입에 더 많이 올리였다. 유식을 뽐내느라고 일부러 로씨야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로씨야식말투를 쓰는것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과 세계에서 맨처음으로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한 쏘련인민들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로씨야식말투의 사용은 공산주의리념에 대한 소박한 공명의 표현으로도 된다고 볼수 있었다.


북간도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로씨야노래를 한두곡쯤은 다 흥얼거릴줄 알았다. 그들은 로씨야식단스도 잘하였다. 유격구의 공연무대들에는 두손으로 장딴지를 번갈아 두드리며 앉았다일어섰다하는 춤을 비롯하여 오늘날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무대에서나 볼수 있는 그런 로씨야춤이 많이 올랐다.


훈춘이나 왕청 같은곳에 가면 로씨야사람들이 입는것과 꼭같은 루바슈까를 지어입고 다니면서 세계혁명의 승리나 프로레타리아독재 만세를 부르짖는 행세식공산주의자들도 드문히 만나볼수 있었다.


로씨야식말투를 쓰고 로씨야노래를 부르고 로씨야춤을 추고 로씨야식옷을 입고 생활하며 지구상의 첫 사회주의나라인 로씨야를 동경하는 과정에 북간도사람들속에서는 세계에서 로씨야가 제일이고 로씨야사람들이 제일이라는 로씨야에 대한 사대주의가 은연중 생겨나게 되였다.


북간도사람들속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도 얼마간 있었다. 그고장 사람들중에는 중국혁명이 승리해야 조선혁명이 승리할수 있고 중국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 조선혁명도 성사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로씨야식말투만 많이 쓴것이 아니라 중국식말투도 많이 사용하였다. 그 지방 사람들은 삽을 삽이라 하지 않고 《강차위》라고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간도사람들은 중국식말투나 로씨야식말투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고국에서 살 때와 다름없이 순수한 함경도말이나 평안도말을 하였다. 생활풍습과 례의범절, 식생활, 언어구사 등 모든 면에서 이 고장에 살고있던 조선사람들은 고유한 민족성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우리는 백두산에 나온후 서간도를 한바퀴 돌면서 자연지리와 주민동향을 료해하는 과정에 이 일대가 유격활동을 하는데서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있다는것을 간파하게 되였다. 백두산지구에 혁명의 본거지를 꾸려놓고 무장투쟁을 본때있게 내밀어보려는 우리의 결심은 서간도사람들과 접촉하고 서간도의 풍토에 몸을 잠그는 과정을 통하여 보다 더 확고하고 변함없는것으로 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서간도진출은 우리의 력사가들과 인민들이 항일혁명의 전성기라고 표현하는 위대한 시대를 열어놓은 장거였다. 그것은 칠칠암야와 같은 민족의 수난사에 눈부신 광망을 던져준 력사적인 사변이였다. 애국애족의 리념에 충실한 조선의 아들딸들은 칠성판에 오른 민족의 운명을 부둥켜안고 비탄에만 잠겨있지 않았다. 그들은 도탄에 빠진 겨레를 구원하기 위하여 발을 탕탕 구르며 백두산으로 나왔다. 이제는 때가 되였으니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을 내보자는 배심이였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ㅌ.ㄷ》를 무은 때로부터 장장 10년동안이나 백두산행을 준비한셈이였다. 때가 되면 백두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독립성전을 벌리리라던 화전시절의 결심,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까지에는 실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우리가 걸어온 수천수만리의 길에는 직선통로가 하나도 없었다. 그 모든 길들은 하나같이 경사가 급하고 구배가 심하였다.


만일 우리가 《ㅌ.ㄷ》를 무은 다음 화전에서 서간도로 직행하였더라면 늦어도 5∼6일안에는 백두산에 도착하였을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백두산으로 곧추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길림과 그 주변지역들에서 혁명력량을 꾸리는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활동무대를 동만으로 옮긴 다음에도 그 작업은 계속되였다.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백두산으로 데리고 갈 군사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 군사를 물심량면으로 지지성원하여줄 인민의 바다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안도에서 유격대를 갓 조직하였을 때에도 나는 부대를 이끌고 백두산에 오르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안도에서 백두산은 지척이였다. 하지만 오르고싶어도 마음대로 오를수 없는곳이 백두산이였다. 백두의 장엄무쌍한 위용에 비해볼 때 우리의 대오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단출하였다. 우리는 아직 갓 태여난 수리개에 불과하였다. 머리우에 창창한 대공이 펼쳐져있었으나 우리에게는 그 대공으로 날아오를만한 억센 날개가 없었다. 백두산을 타고앉자면 대오를 늘이고 힘을 축적해야 하였다.


백두산은 결코 마음만 내키면 아무때건 갈수 있는곳이 아니였다. 가고싶어도 마음대로 갈수 없다는 여기에 백두산이 가지는 참의미가 있었고 가지 못할수록 더 가고싶어진다는 여기에 바로 백두산이 가지는 참매력이 있었다.


백두산은 일본의 정예사단들과 군단들을 타승할수 있는 혁명군의 강철부대들과 강철전사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유격구를 건설하고 사수하는 나날들에 일당백의 힘을 가진 강철부대들이 마련되였고 수십수백번을 헤아리는 교전과정에 불사조와 같은 강철전사들이 자라났다. 카륜과 명월구, 다홍왜와 요영구, 남호두와 동강에서 천명된 진로를 따라 노도와 같이 달려오는 로정에서 조선혁명은 백두산으로 진출할수 있는 힘을 충분하게 축적하였다. 우리는 이 힘을 가지고 서간도로 나왔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항일혁명의 력사는 망국의 치욕을 안고 모래알처럼 흩어졌던 동포형제자매들에게 기치를 주고 무장을 주어 백두산으로 이끌어오는 과정이였고 백두산에서 일제를 쳐이긴 과정이였다.


그 결정적계기는 남호두와 동강의 수림속에서 열린 회의들을 통하여 마련되였다. 이 두 회의가 있은 때로부터 우리의 모든 화제는 백두산으로만 쏠리였다.


…조국이 우리를 부른다. 백두산이 우리를 기다린다. 어서 빨리 백두산을 타고앉아 당건설준비도 힘있게 내밀고 조국광복회망도 통이 크게 펼쳐가지고 결사적인 전민항전으로 일제침략자들을 쓸어버리자!

조종의 산 백두산에서 민족재생의 종을 울려 조선사람 모두가 애국에 눈을 뜨고 구국에 몸을 바치게 하자. 신념을 잃고 주저앉은 인민에게 우리가 용기를 주어 일으켜세우자! 민족리산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단결하여 조국에 들어가는 력사를 우리가 앞장서서 창조하자!…

이것이 백두산으로 진출할 때 우리가 지니고있었던 의지였고 신념이였다.


우리는 조상들처럼 백두산마루를 하늘로 통하는 길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대신 그것을 조국의 대문으로 보았으며 조국의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 교두보라고 보았다. 백두산은 서간도와 국내와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거점이였다.


백두산을 타고앉는다는것은 곧 국내인민들과 서간도의 애국지사들, 북간도의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뉴대로 이어준다는것을 의미하였으며 국내혁명운동과 서간도의 독립운동, 북간도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에서 일원화를 보장하게 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백두산을 차지하면 조국땅을 발판으로 하여 일본과도 련계를 가질수 있었고 산해관너머 중국본토 항일운동과의 련대도 이룩할수 있었으며 북간도를 거쳐 북부만주와 쏘련연해주지방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과의 합작도 실현할수 있었다.


우리는 동만에서 유격구를 건설하고 사수할 때 얻은 여러가지 교훈을 충분히 참작하여 서간도를 북간도에서와 같이 완전유격구로 꾸리지 않고 반유격구로 만들어놓았다. 이미 이야기한바와 같이 반유격구란 낮에는 적의 세상이지만 밤이면 우리의 세상이 되는곳을 말한다. 서간도일대의 십가장, 구장, 면장 자리들은 거의다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헌들의 심부름을 해주는척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하고 혁명군에 보낼 후방물자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갔다.


리제순, 리주익, 리훈, 최병락, 정동철, 리용술, 렴인환 등은 반유격구의 실상을 그대로 체현하고있는 대표적인물들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전날 동만당조직의 지도자들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만 만들어놓고 유격구밖의 사람들은 쓴외보듯하였다. 지어 적통치구역의 인민들에 대해서는 《백색군중》이라고 하면서 적대시하였고 중간지대의 인민들에 대해서는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경원시하였다. 군중을 《적》, 《백》으로 갈라놓은것은 큰 실책이였다. 이 조치는 유격구에 대한 적들의 봉쇄를 오히려 더 용이하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는 혁명력량을 더 굳게 묶어세우며 통일전선을 실현하는 사업을 방해하였다.


이런 뼈저린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서간도전체를 반유격구로 만들고 이 일대의 모든 군중을 《적》, 《백》의 차별이 없는 우리 사람들로 만들게 하였다.

집단부락의 경비를 담당하고있는 자위단원들속에도 우리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언제인가 우리는 팔도강이라는 집단부락에 식량공작을 간 일이 있었다. 팔도강의 자위단에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있었다. 우리 소부대는 이 공작원의 련락을 받고 혁명가요를 부르며 곤두총을 쏘면서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공작원이 미리 마련해놓은 식량만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가 철수한 다음 공작원은 일본인경찰을 찾아가 유격대가 마을을 들이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포대만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포대때문에 자위단이 살아났다고 하면서 놈들을 속여넘기였다.

서간도사람들이 이처럼 유격대원들에게는 속을 주면서도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헌들에게는 속을 주지 않았기때문에 우리는 만사를 우리의 뜻대로 원만하게 풀어나갈수가 있었다.


서간도는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진출한 그때로부터 대부대선회작전에로 이행하던 시기까지 3∼4년동안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동적으로 개척하고 장악한 기본적인 활동무대였다. 고난의 행군 이후시기 우리의 주되는 활동무대는 다시금 동만으로 옮겨졌다. 소할바령회의후 우리는 백두산근거지와 함께 쏘련경내에 또 하나의 근거지를 가지고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총괄적으로 고찰할 때 항일혁명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중심은 첫째는 북간도였고 둘째는 서간도, 셋째는 두만강연안의 장고봉일대였다. 이 지대들은 항일혁명의 승리를 보장한 중요한 활동거점이였다.


동만지구에서 활동할 때에도 체험한바이지만 우리는 서간도에 와서도 적의 공세가 더 강화되고 악랄해질수록 반유격구가 여러 면에서 매우 유리하다는것을 다시한번 절실히 체험하였다. 서간도를 반유격구로 꾸리고 그 고장을 우리의 세상으로 만든것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진출한후 여러가지 방면에서 거둘수 있었던 성과의 비결이였고 승리의 요인이였다.


우리는 서간도를 반유격구로 꾸려놓은 다음부터 군사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한 20명안팎의 적은 인원으로 이루어진 무장부대들이 서간도일대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매일같이 적들을 답새기였다. 우리는 국내에도 소부대를 많이 내보냈다.


우리가 대부대로 활동하지 않고 작은 규모의 무장부대들로 분산하여 활동한 리유의 하나는 감자와 귀밀 같은것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연명해가는 인민들에게 부담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500∼600명이상의 대부대는 말할것도 없고 벌써 200명 정도를 단위로 하여 움직이기만해도 먹는 문제가 걸리게 되여있었다.


적들은 1938년경까지 동만과 남만지방에서 집단부락건설을 완료하였다. 집단부락화가 끝난 때로부터 혁명군의 식량을 해결하는것은 더 어려운 문제로 되였다. 먹을것을 얻자면 큰 전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동지들의 피와 식량을 바꾸는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부대활동을 많이 벌려 식량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나는 우리가 좀 굶는 한이 있더라도 동지들이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의 직접적인 영향밑에 서간도일대에서는 인민들의 반일투쟁정신이 고조되고 혁명적진출이 강화되였다.

서간도에 나와 로인들과 담화를 해보니 장백사람들은 벌써 1932~1933년경부터 우리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1936년초에 리제순과 리주익은 아편밀수업자로 가장하고 서간도에 나온 유격대정치공작원 권영벽, 김정필 등을 만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소식을 입수하였다. 그때 그들은 유격대재편성사업이 진행되고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부대가 장백지방에 나올수 있다는것을 암시받았다고 한다. 그 소식은 곧 장백현 도처에 전파되였고 국내의 갑산공작위원회 성원들에게까지 날아갔다.


천상수에서 살고있던 십가장 리용술은 벌써 1932년경부터 동료들에게 우리에 대한 선전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 김일성장군이 북간도에서 유격투쟁을 하고있는데 아무때건 부대를 데리고 백두산에 나올게고 조선을 독립시킬것이니 먹은 마음 변치 말고 계속 반일애국사업을 하라고 호소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소식에 고무된 장백지방의 청년들은 일찍부터 유격대에 입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를 하였다. 대덕수마을에서 청년사업을 하던 강현민은 자기 친구들에게 《나는 김장군을 더는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겠다. 직접 찾아가서 입대하려고 하는데 내가 떠나간 다음 당신들이 우리 집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후 무송쪽에 들어와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우리가 장백으로 나온 다음에는 서간도전체가 참군열의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리를 만나기만 하면 많은 청년들이 사령부에 찾아와 연줄연줄 입대를 청원하였다. 우리는 그런 청년들가운데서 일부만 받아들이고 대부분은 보류하였다. 지하활동을 강화하자면 부득불 많은 청년들을 적통치구역에 남겨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집단부락이 생긴 다음에는 입대지망자들을 빠짐없이 부대에 받아들이였다. 토성안에 청년들이 갇혀있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적들이 조직하는 강제부역에만 끌려다닐수 있었다.

우리가 장백에 진출하여 대덕수에서 첫 총성을 울린 때로부터 서간도인민들의 반일기세는 충천하였다.


대덕수와 소덕수에서 일본군이 우리한테 무리로 녹아나는것을 본 16도구의 로인들은 자고로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놈치고 망하지 않은 례가 없으니 일본놈들이라고 해서 무사할수가 있나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야, 조선이 영영 망한줄 알았더니 다 죽지 않았구나, 심장이 뛰는구나 하며 환성을 올리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서간도일대에서 무장활동을 활발히 벌리게 되자 압록강좌우량안의 인민들은 우리에 대한 전설을 연거퍼 만들어냈다. 천도교에 망라된 일부 로인들은 우리 부대의 위력을 선전하느라고 김일성대장이 축지법을 써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일제놈들을 족친다고 하였다. 그들은 어느 경관이 주재소에서 전화를 걸 때 유격대가 나타나 총을 한방 쏘았더니 귀가 떨어져나가고 그놈이 달아나려고 할 때 또 한방 쏘았더니 다리가 떨어져나가더라는 그럴듯한 민화까지 만들어냈다.


서간도사람들이 만들어낸 민화들은 압록강을 넘어 국내깊이에까지 전파되였다. 압록강변에 나가 장백쪽에서 《혁명군이 지난밤 반절구를 쳤소!》 하고 소리지르면 그 소리를 강건너편에 있는 삼수사람들이 다 들을수 있었다.

우리는 서간도에서 활동할 때 인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간도사람들이 인민혁명군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후원했는가 하는것은 지금 우리 당 문서고에 보관되여있는 수많은 회상자료들이 잘 말해주고있다.


서간도사람들은 혁명군에 대한 후원을 충실하게 하였다. 그들은 혁명군을 잘 돕는것을 량심의 표징으로 삼고있었다. 혁명군을 외면하고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안락만 추구하는것은 마음이 어지러운것으로 락인하였다.


우리가 서간도에 나온 다음부터 일제는 혁명군과 인민들과의 련계를 단절시키고 인민들의 지원이 혁명군에게 가닿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그들은 조선사람들끼리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를 하여도 공산주의물이 들었다고 주시하였다.


서간도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이웃동네에 갔다오는것도 촌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였다. 숟가락은 식구수만큼 가지고있게 되여있었다. 한가락의 여유라도 있으면 혁명군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무시로 조사를 들이대여 남아돌아가는 숟가락을 모두 빼앗아가군하였다.


적들은 포고문을 내여 혁명군의 목을 잘라오면 50원의 상금을 준다고 하였고 산 사람을 잡아오면 그보다 더 많은 상금을 준다고 선포하였다. 나에게 더 많은 상금이 걸려있었다는것은 여러 자료들에 널리 소개되여있다. 한때는 인민들을 시켜 산중에다가 귀순을 선동하는 삐라도 뿌리게 하였으며 유격대에 독약을 친 소금을 《원군물자》로 보내게도 하였다.


이것은 다 유격대와 인민과의 혈연적련계를 끊어보려는 술책들이였다. 서간도의 인민들은 이런 술책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적들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그들은 인민혁명군과의 련계를 더 강화하고 집단적인 원군운동을 더욱더 활발히 벌리였다. 적들이 유격대의 활동을 막으려고 마을마다 야경대를 조직하면 그 야경대에 망라된 사람들은 순찰을 하는척하면서 집단부락에 배겨있는 지하공작원들이나 인민혁명군들의 사업을 도와 보초까지 서주었다.


적들은 원군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마을들은 가차없이 불태워버리였으며 원군사업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이들과 늙은이들까지 다 잡아죽이였다. 지양개도 대덕수도 신창동도 그런 사품속에서 전소되였다. 대덕수마을의 어떤 교원은 유격대에 만년필을 보내준것이 《죄》가 되여 총살당하였다. 하지만 서간도의 인민들은 피를 흘리면서도 굴하지않고 원군운동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적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적공세앞에 노상 골탕을 먹으면서도 인민들앞에서는 자기네 군대가 승승장구하는것처럼 허장성세하였다. 우리가 소덕수에서 적들과 접전하였을 때 인민들은 혁명군이 패했다고 생각하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 적들이 마치 승전이라도 한것처럼 나팔을 불면서 위세를 돋구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전장에 널려있는 수십구의 일본군시체를 보고서는 인차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다.

적들은 자기편 시체를 운반하면서도 공산군의 시체를 나른다고 하였다.


우리가 12도구를 치고 철수한 직후 12도구와 그 주변에서는 유격대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바빠맞은 적들은 혁명군이 방금 돌입했다가 철수한 북문입구에 일본군장교의 머리를 높이 매달아놓고 공산군우두머리를 죽이였다고 광고하였다. 후에 그 장교의 처가 북문앞에 뛰여와서 장대기에 달린 머리를 보고 《아이고, 당신이 이 지경이 되다니 웬일이요?!》하면서 통곡을 해서야 연극이라는것이 들장나게 되였다.


이런 희비극은 한두번만 연출된것이 아니였다. 이와 비슷한 연극은 무송에서도 꾸며졌고 림강에서도 꾸며졌다.

어느때인가 정안군놈들은 일본상전들한테서 상금을 받아먹으려고 무송과 림강 시가지에 각각 어떤 알지 못할 사람의 머리와 《김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싸창을 걸어놓고 우리 부대를 완전소멸하였다는 요언을 퍼뜨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림강과 무송에서 함께 소학교를 다닌 나의 동창생들과 친지들이 현장에 가보고나서 정안군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소문을 돌리는 바람에 그 너절한 기만극도 파장이 되였다. 그것은 오히려 인민혁명군이 건재해있고 그 사령관도 살아서 여전히 항쟁을 계속하고있다는 인상만 강하게 해주었다.


적들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써도 서간도인민들의 반일감정을 무마시킬수 없었으며 인민혁명군에 대한 동경심과 원군의식을 압살할수 없었다. 원군사업은 소멸된것이 아니라 탄압이 심할수록 나날이 더 강화되였다.

서간도인민들의 원군운동과 관련해서는 다음에 서술하겠기에 여기서는 몇가지의 단편적인 자료들과 인물들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가 서간도의 마을들을 지나갈 때면 인민들이 새까만 감자엿을 가지고 나와 대원들의 주머니에 넣어주군하였다.

서간도사람들은 집단부락이 건설된 다음에도 유격대를 잘 도와주었다. 일제가 인민들을 집단부락에 모조리 몰아넣고 밭면적과 수확량을 따져가며 식량에 대한 통제를 심하게 하는 형편에서 그들은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지원하였다. 그들은 감자수확철이 와도 밭에서 넝쿨만 걷어내고 감자는 캐지 않았다. 유격대가 캐다 먹게 하기 위해서였다. 강냉이는 수림속에 만들어놓은 창자에다가 오사리채로 넣어두고 유격대가 와서 가져가라고 련락을 하였다. 강냉이는 오사리채로 보관하면 썩지 않는다. 그들은 콩도 가을을 하지 않고 혁명군에 알려주어 가져가게 하였다. 그래서 어느해인가는 겨우내 비지를 해먹었다.

밭에 있는 곡식을 가을하지 않고 내쳐두었다가 가져가게 하는 방법으로 유격대에 식량을 지원하는것은 서간도에서부터 시작되였다.


함경남도 경찰부장이 혜산에 내려와서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이 일대를 시찰해보았는데 서간도에 문제가 있다, 첫째로 서간도사람들은 다 유격대와 내통하고있다는것이 분명하다, 서간도에서 활동한 유격대의 인원수는 적어도 수만명이나 되는데 그들에게 주었다는 쌀은 서말밖에 안된다, 가령 유격대가 300명이 온다고 해도 하루에 쌀을 여러말 먹겠는데 왜 서말만 주었다고 보고하는가, 이것은 서간도사람들이 유격대와 내통한다는 증거이다, 둘째로 서간도사람들이 적화되였다, 서간도사람들에게 산에서 내려온 사람 혹은 비적을 보았는가고 물어보면 그들은 아이들까지도 다 그런 사람을 못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군을 보았는가고 하면 보았다고들 한다, 이것을 보면 서간도사람들이 유격대를 자기 군대로 알고있고 적화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셋째로 서간도는 유격대의 상시적인 활동근거지로 되고있다, 서간도에 그전에는 독립군들이나 비적들이 여름이 아니면 가을 같? 때에 와있다가 겨울이 오면 다른곳으로 가군했는데 김일성부대는 여기서 겨울에도 활동하고있다, 그러니 이 일대에 집단부락을 설치하여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뉴대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생동한 반증으로 되며 인민이 혁명군을 얼마나 결사적으로 옹호하고 지원하였는가를 립증하는 산 자료로 된다.

서간도의 치안유지가 얼마나 심한 곤경에 빠졌던지 적들은 공산주의, 삼민주의는 어느것이나 민중의 진로를 비치는 등대처럼 되고있다고 하면서 《공비나 반만항일비의 영향하에서 민중을 탈취하고 그들의 비적을 붕괴시키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정치목표보다 더 뛰여난 목표와 그에 이르는 명확한 길이 명시되고 민중적정책이 실시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공비가 민중을 흡인하는것보다 더 용이하게 또한 원활하게 민중을 동원하여 만주국의 건국리상을 향하는 전진과정이 밝혀지고 그 방향을 향하여 모든 민중을 흡인하는데 충족되는 정책이 실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지도방침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사회적 국민운동의 특수한 활동분야로서의 대비적공작만이 훌륭히 정치, 사상비의 근간을 찌르고 그것을 극복할수 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공비》라는 말은 인민혁명군에 대한 비칭이며 《반만항일비》란 괴뢰만주국을 반대하고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군사력량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적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인민혁명군을 소탕하고 혁명군과 인민과의 련계를 끊어보려고 시도하였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죄다 허사로 돌아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