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11-4. 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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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
우리가 남호두회의를 끝내고 백두산지구로 나가기 위해 소자지하를 떠나던 아침은 바람소리가 유난히도 소연하였다.
신들메를 매고 남행길에 오를 때 내 머리에 맨 처음으로 떠오른것이 바로 천리길도 한걸음으로 시작된다는 우리 나라 격언이였다. 소자지하의 귀틀집마당을 떠난 우리는 방금 내린 함박눈우에 행군의 첫 자욱을 찍었다.
일행중에는 왕덕태, 위증민과 같은 중국인군정간부들도 끼여있었다.
심장병이 도져서 쏘련병원의 신세까지 지고 돌아온 위증민조차도 그날은 왕덕태와 함께 걸죽한 롱질을 해가며 명랑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차고 사나운 날씨였으나 행군은 시원스럽게 자리가 났다.
그런데 남호두회의의 결정에 따르는 백두산지구진출의 시발점에서 우리는 응당 소자지하로부터 로야령-이청배-명월구-안도를 거쳐 백두산으로 가는 직선행로를 타고 남행길을 걸어야 했으나 소자지하에서 액목현 청구자-관지-안도-무송현을 거쳐 백두산지구로 들어서는 우회로를 타고 액목방향으로 북상행군을 하고있었다. 이 우회로는 직선행군로에 비해 거의 두배에 달하는 먼 로정이였다.
우리가 우회로를 타고 북상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은 우리와 함께 2차 북만원정에 참가했던 동무들이 새로 개척한 액목현 청구자밀영에서 남호두회의 소식을 기다리고있었기때문이였다. 동만에서 우리를 찾아온 유격대원들과 로약자, 병상자,부모잃은 어린이들도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민생단》문제와 관련하여 간도의 유격구들에서 발생되였던 모든 극좌적망동들에 조종을 울리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할수 있는 자주적권리를 만천하에 선포한 남호두회의의 결정은 청구자밀영에서도 격정에 끓는 환호를 불러일으킬것이였다.
동북만의 광활한 대지에서 여러해동안 혈전의 길을 걸으면서 그들이 오매불망 그려온것은 조국이였고 조국으로 진군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관지일대와 청구자밀영의 전우들중 대부분은 우리와 함께 조국진군의 남행길을 걷지 못하고 오히려 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곳에서 북만부대동무들과 공동투쟁을 해야 했다.
남호두회의를 결절점으로 하여 조선혁명의 전환기가 마련된 그때부터 백두산을 타고앉아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려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일차적념원으로 되였다. 하지만 중국인민들과의 공동투쟁을 항일혁명의 중요한 전략적과제로 내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경주해온 우리로서는 그 공동투쟁의 경륜을 중도에서 집어던지고 모두 백두산으로만 갈수는 없었다. 만일 우리가 자기 나라 혁명만을 생각하고 조선인유격대원들을 다 이끌고 백두산으로만 나간다면 동북지방의 유격투쟁은 심각한 난국에 봉착할수 있었다.
군정간부들과 핵심군인들의 부족을 절박하게 느끼고있던 북만부대들에서는 동만의 부대들에 공동투쟁을 무시로 요구해왔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이 바로 두차례에 걸치는 북만원정이였다. 소자지하에서 남호두회의가 소집되던 그 무렵에도 북만의 각 군들에서는 우리에게 인적지원을 요청해왔다. 이와 같은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남호두회의에서 북만주지방의 항일련군부대들에 대한 전투적지원문제를 하나의 부수적인 의제로 상정하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한 실무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바로 이런 리유로 하여 나는 백두산지구진출을 단행하게 된 사변적인 시각에 여러해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과 헤여질 작정으로 북행길부터 걷게 된것이다. 백두산지구진출의 력사적장거는 우리로 하여금 피치못하게도 오래동안 심력을 다하여 애지중지 키워온 전우들과의 기약없는 리별의 고통부터 맛보게 하였다.
우리를 따라 백두산지구로 가지 못하고 오히려 조국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북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그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것인가.
나는 소자지하를 떠날 때부터 그 문제로 해서 생각이 번거로왔다.
돌이켜보면 혁명투쟁을 시작한 때로부터 나는 이와 같은 리별의 고통을 수없이 겪었다. 14살 어린 나이에 만경대고향사람들과 리별을 해야 했고 화전에 가서도 《ㅌ.ㄷ》를 내오기 바쁘게 방금 정을 나누기 시작한 동무들과 리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리별은 미구에 가슴이 으스러지는것 같은 포옹과 악수를 동반하는 상봉으로 이어지였다. 화전에서 헤여졌던 《ㅌ.ㄷ》의 첫아들들이 길림에서 다시 만나 《타도제국주의》의 기발밑에 청년학생들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그 기발밑으로 모여온 청년들이란 물과 불속에라도 뛰여들수 있는 대장부들이였다. 그 하나하나의 동지들은 실로 혈육에도 비길수 없고 천금에도 대비할수 없는 보배로운 존재들이였다.
그러나 나는 감옥에서 나오자 투쟁무대를 중부만주에서 동부만주에로 옮겨야 했고 따라서 리별이라는 쓴약을 또다시 맛보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이게 되였었다. 삼삼오오 패를 지어 밀려다니던 나의 전우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떠메고 중만, 남만,북만의 망망대해로 뿔뿔이 떠나가버리였다. 화전에서의 리별과는 달리 그때의 리별은 어느때에 다시 만나게 된다고 기약할수 없는 참으로 심각하고 뼈아픈것이였다.
최창걸, 김원우,계영춘,강병선,박소심,최일천,고재봉,박일파와의 리별과 마찬가지로 나의 길동무가 되여 할빈까지 동행했던 한영애와의 리별도 그런것이였다.
국제당련락소와의 접촉을 끝내고 내가 할빈에서 떠날 때 한영애는 나를 찾아와 동만으로 같이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이왕 혁명을 하는바에는 길림시절에 그랬던것처럼 한별동무의 지도를 직접 받으면서 혁명을 하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니 그 소원을 막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때의 그는 이미 나에게서 우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채 미결로 남겨두고 가는 두가지의 일거리를 넘겨받은 몸이였다. 우리는 그에게 할빈에 그냥 남아서 파괴된 조직선들을 이어달라는것과 만주성당 순시원과의 사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는 한영애와 함께 동만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면서도 사업을 위해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을수 없는 모순속에서 할빈을 떠났다. 길동공청책임비서의 사업을 하느라면 적어도 두석달이내에 만나게 될수 있을것이라는 락관적인 타산을 하면서 그와 헤여졌다.
내가 한영애의 소망과는 관계없이 그를 할빈지구의 특파원으로 떼두고 온것은 조직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경중을 가리지 않고 매양 착실하게 수행하군 하는 그의 높은 책임성을 믿었기때문이며 그 책임성이 할빈일대의 혁명사업을 추진시키는데 절실히 필요하였기때문이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처럼 매번 측근의 전우들을 그들이 있고싶어하지 않는곳에 떨구어두거나 먼곳으로 보내군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남으로 오고 한영애는 북에 남았다. 그때의 그 리별은 참으로 쓸쓸한것이였다. 자기 몫으로 차례지는 지짐마저 매번 절반을 갈라 내앞으로 밀어놓군하던 그 성실한 전우를 북만주 한끝에 떼여 두고 잘 있으라는 손짓 한번으로 작별을 굼때던 그때의 내 심정도 결코 평온치는 않았다.
그러고보면 혁명앞에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다 리별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닌셈이였다. 우리가 온갖 공을 다하여 가꾼 혁명조직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공고히 해나가자면 어차피 투쟁속에서 길러낸 사람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우리는 새 고장에 가서 새 사람들을 키워내는 기초작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새로운 처녀지들을 련속 개척하는 기경작업을 하였다면 전우들은 우리가 개척한 처녀지들을 기름진 과원과 옥답으로 만들었다.
바로 이러한 혁명적요구가 우리들의 리별을 피할수 없는것으로 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죽으라면 죽을수도 있는 성실한 동무들이 혁명이 요구하는 리별앞에서는 자주 불복하고 말썽을 부리였다.
내가 동만으로 활동무대를 옮길 때 우리를 따라가겠다고 어린애들처럼 생떼를 쓴것은 비단 한영애뿐이 아니였다.
하기는 3∼4년간이나 피와 정을 나누며 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사이의 리별이 출장길에서 잠간 만났다가 헤여지는 사람들사이의 작별처럼 그렇게 범상할수는 없었다. 알아들을만큼 해설도 하고 꾸짖고 나무람도 해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나를 잘 리해해주어야 할 차광수가 오히려 《이렇게 헤여지자고 우리 생사를 같이해왔는가? 헤여지지 않고 혁명할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 보자.》고 열을 올리며 20리길까지 나를 따라와서 애를 먹이였다. 우리와의 작별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문조양은 녀자들처럼 소리를 내여 울었다.
우리는 그때 혁명이란 이렇게 모진것인가, 차광수의 말대로 과연 헤여지지 않고 혁명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하고 몇번이나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동무들에게 우리는 오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된다, 리별이란 일시적인것이다, 상봉의 그날을 생각하며 리별의 슬픔을 참아내자,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헤여지자고 설복하였다. 리별이 백이라면 상봉이 백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나의 예언을 종종 배신하군하였으니 그후 살아서 다시 나를 만난 동무들은 몇사람 되지 않는다. 그 몇사람마저 우리의 곁을 떠나 영별의 길로 총총히 가군하였다.
생활이란 리별과 해후의 끊임없는 순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헤여지면 다시 만나지 못하는 리별이 아주 많았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런 리유로 하여 리별을 고하는 마당에서 은근히 불안을 느끼고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청구자밀영에 가서 수년간이나 동만땅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들과 기약없는 리별을 해야만 하였으니 그것은 백두산지구로 나가게 된 우리의 기쁨속에 숨어있는 슬픔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백두산지구진출을 앞두고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나의 표정에서 침울한 기분을 읽게 된 위증민은 무슨 근심이라도 있지 않는가고 물었다.
나는 가슴속에 서려있는 만단사연을 한마디로 론할수 없었거니와 그런 심정을 남들에게 내비칠 의향도 없어 별다른 근심이 없다고 하였다.
《참, 김일성동진 작년에 희생된 철주동생 소식을 근일에 와서야 알게 되였다지요? 어찌겠소.마음을 굳게 가지고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나의 기분이 침울해진 까닭을 위증민은 제나름대로 짐작하고있었다.
하기는 그 상실의 고통도 참기 어려운것이였다.
그때 나는 산설은 만주땅에 일점혈육으로 남은 어린 영주동생의 생사안위도 잘 모르고있었다.
이런 슬픔우에 동지들과의 리별이 겹쳐서 내 얼굴에 더욱 어두운 그늘이 덮이게 되였는지도 모른다.
위증민은 나의 기분을 밝게 해주려고 롱을 하였다.
《김일성동지, 속이 상할 때 제일 좋은 약으로 되는것은 해학입니다. 김동지를 위해서 옛날 우리 부부가 사랑싸움하던 이야기나 해주리다.
김일성동지도 부부생활의 다반사에 대해서는 참고로 들어두는게 좋습니다. 늘 독신으로만 살순 없으니까.》
《그렇구말구요. 남아 스물다섯이면 때를 놓친셈이지요, 혹시 알겠소. 지금 김사령이 련인과의 리별을 앞두고 상심해있는지…》
왕덕태도 어떻게 하나 나의 기분을 돌려보려고 위증민의 롱담에 동을 달았다.
위증민은 성수가 났다.
《옳소. 그럴수도 있겠소. 이왕 리별이야기가 나온바에는 부부싸움이야기가 아니라 리별과 더불어 전하여오는 〈절류〉라는 우리 나라 고사를 소개해야겠구만.》
위증민은 《절류》라는 제명으로 전해지는 그 중국고사의 방법대로 하면 행운이 찾아든다고 하였다.
《절류》라는 말은 버드나무가지를 꺾는다는 뜻으로서 그 고사는 한나라때부터 전해온것이라고 한다. 한나라의 도읍이 있던곳 가까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한나라사람들은 친우와 리별할 때에는 언제나 그 다리에 나와 앞날의 행운을 축원하는 의미에서 버드나무가지를 꺾어주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리별마당에서 버드나무가지를 꺾어주는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였는데 위증민의 고향에서도 그 례식이 그대로 전승되고있다고 하였다. 위증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리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주면 틀림없이 행운이 찾아올것이니 나더러 그렇게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 고사속의 버들은 아마도 고향을 상징하고있었던것 같다. 갈라지더라도 푸른 버들가지를 보며 자기를 낳아준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아마도 그런 고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하는 짐작이 든다.
북만의 강추위가 위세를 휘두르던 그때 리별하는 동지들에게 버들가지를 하나씩 꺾어주자면 한지게도 넘어야 할텐데 어디서 그 많은 버들가지를 꺾으며 설사 꺾어준들 나의 시름이 가셔질수가 있겠는가. 그야 어쨌든 나의 무거운 마음을 다소라도 가볍게 해주려고 《절류》를 이야기해준 위증민의 심정만은 여간 고맙지 않았다.
언제인가 최창걸은 리별을 앞두고 고유수의 버들방천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긴적이 있다.
《이 최창걸은 남강과 단재의 리별처럼 격식도 없고 송별연도 없이 소리없이 사라지겠소.》
최창걸이 말한 남강은 리승훈이며 단재는 신채호이다. 이미 이야기한바와 같이 남강 리승훈은 우리 나라 굴지의 자산가로서 일찍부터 애국적인 교육운동과 자선사업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정주의 오산학교가 남강이 세운 학교라는것은 후대들도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리승훈은 거기서 해외로 떠나는 독립지사들의 뒤바라지를 하는 과정에 단재 신채호와도 깊은 친교를 맺었다.
신채호는 남강의 강권으로 한때 오산학교에서 국사와 서양사를 가르치는 교사로 되였는데 그가 력사강의를 어찌나 잘하였던지 그 소문이 해외에까지 널리 퍼져서 단재의 존재는 길림바닥에서도 학생들의 열변을 토하는 최상급의 화제거리로 되군했었다.
단재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된 경술년 전야의 겨울을 오산에서 보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남강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무래도 이곳을 떠나야겠소.》
그러자 남강은 저으기 놀라며 만류하였다.
《아니, 갑작스레 이 추위에 어디로 간다고 그러슈. 떠나도 해토나 되거든 천천히 가시지.》
《해토고 뭐고 일본놈 꼴보기 싫어 가야겠소이다.》
이렇게 고집을 부린 단재는 이튿날 홀연 정주땅을 떠나 기약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신채호는 중국을 거쳐 로씨야로 갔다고 한다.
남강은 단재가 떠나간것을 못내 서운해하면서 혼자소리로 원망하였다.
《원 사람두, 로자나 좀 보태가지고 가지 않구 간다온다 소리도 없이…》
독립운동자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푸짐한 송별연을 차리고 로자를 푼푼히 마련해주던 남강이고보면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헤여진 단재와의 리별이 그에게 있어서 그처럼 아쉽고 섭섭한 리별로 될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최창걸이 류하로 떠나가면서 말한 남강과 단재의 리별이란 이런것이였다.
김혁은 남강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간 단재의 처신이 너무 매정하다고 나무랐다. 그러자 최창걸은 신채호의 인간됨을 알지 못하거든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단재야말로 누구보다도 남강을 아낀 뜨거운 인간이였다고 언명하였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신채호가 인사도 없이 정주땅을 총망히 떠난것은 독립지사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고 리별석에서 당하게 될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는것이다.
최창걸의 말이 옳았다. 단재는 불처럼 뜨거운 사람이였고 남강을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였다.
단재와 남강의 리별을 본따고저 한 최창걸은 말할것도 없고 김원우, 계영춘을 비롯한 다른 전우들도 모두 임무를 받고 떠나갈 때면 신채호처럼 내곁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군하였다.
나의 전우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였다.
나는 그후 동만에서 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우리가 키운 유능한 군정간부들과 귀여운 전령병들 그리고 금싸래기같은 대원들을 군사력량이 부족한 남북만의 여러 부대들에 보내주었다. 그때마다 흘리게 되는 석별의 눈물은 그대로 가슴속에 점점이 떨어져 살을 저며내였다. 더구나 그런 동무들이 아무때 어느 전투에서 어떻게 해서 죽었다는 비보를 받으면 그것은 영원히 우리의 심신을 괴롭히는 종신상처로 되여버리는것이였다.
나는 이러한 리별을 통해 혁명동지간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였고 혁명가의 일생에서 동지가 차지하는 몫이 얼마나 큰가를 절절히 깨닫게 되였다.
해방후 사회주의건설을 하면서 내가 일군들에게 늘 이 세상에는 부모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 별의별 사랑들이 다 있지만 그중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것이 혁명동지들간의 사랑이라고 말해주군하는것도 바로 이런 체험에 기초하고있다.
진실한 동지적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맛볼수 없으며 총탄이 우박치는 전투장에서 생사를 같이해보지 않고서는 터득할수 없는 사랑이다.
지난날 우리 동무들은 며칠씩 맹물로 끼니를 에우며 혈전을 벌리는 최악의 역경속에서도 어찌다 얼어떨어진 산열매 한알이라도 눈속에서 얻어내면 그것을 먼저 동지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견우와 직녀의 슬픈 전설이 보여주고있는바와 같이 사랑이 지극할수록 리별의 슬픔도 커지기마련이다. 그래서 혁명동지들간의 리별도 그처럼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가져오는것이다.
그러나 리별이 아무리 슬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이는 혁명을 할수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이제 령만 내리면 동서남북으로 각각 흩어져가게 될 한사람한사람의 전우들을 놓고 천사만념을 굴려가는 내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재를 날리며 타고있었다.
어린 전령병들인 오대성과 최금산은 나의 속내도 잘 모르고 조국에 가게 된다고 기뻐하면서 들뜬 기분으로 나를 따라왔지만 그들중 한사람도 북만부대로 보내야 했다.
우리가 먼 행군끝에 청구자밀영에 도착한것은 한낮이 기울어진 때였다.
밀림속 귀틀집에서 숱한 사람들이 밀려나와 우리를 에워싸고 반가와하며 법석 떠들었다. 그들이 북만에 떨어져야 할 왕청과 훈춘에서 온 동무들이였고 그밖에 쏘련으로 보내게 될 병상자들과 로약자들이였다.
나어린 소녀 하나가 나를 부르며 총알같이 달려와서 팔에 매달렸다.
《이게 누구냐? 너도 여기 와있었구나.》
나는 소녀를 품에 안아올린 다음 그 애의 조그마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왕청유격근거지에서 량친을 다 잃고 할머니까지 여읜 량성룡의 딸 량귀동녀였다.
《장군님께서 여기루 오신다구 해서 왔어요. 장군님, 이제 백두산으로 가신다지요?》
《아니 네가 어떻게 벌써 그걸 아느냐?》
《저 리응만아저씨가 그랬어요. 우리 다같이 장군님을 따라 조선으로 꼭 나가게 된다고 했어요.》
소녀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니 리응만이 쌍지팽이를 짚고 대원들속에 서서 벙글벙글 웃고있었다.
나는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가 왕청유격대 중대장이였다는것은 앞에서도 이미 소개하였다. 자질이나 능력으로 보면 대대나 련대도 이끌수 있는 큼직한 지휘관이였는데 그만 한쪽다리를 자르는 바람에 군직을 내놓고 2선에 물러섰다.
그는 채 아물지도 않은 다리를 가지고 병기창에서 무기를 수리하면서 락천적으로 살았다.
《장군님, 제 말이 틀림없습지요? 전 여기 앉아서두 그쪽에서 하는 소리들을 다 들었습니다.》
리응만은 한참 너스레를 떨고나서 남호두회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성급하게 졸라댔다.
나는 려장을 풀어놓은 다음 밀영안의 모든 군민을 한자리에 모여놓고 남호두회의결정을 전달하였다.
귀틀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두손을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불렀다. 국제당이 지난날 간도에서 벌어진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이였다는것을 인정하였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것이 그 누구도 훼방할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고 선포하였다는 말까지 듣고는 이제야 내 나라, 내 고향을 밟게 되고 태를 묻은 조국땅에서 일제와의 결전을 하게 되였다고 다같이 눈물을 흘리였다. 이국태생들도 한시바삐 조국에 가보고싶다고 하면서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누구인가는 만장판에서 백두산에 대한 자랑을 터놓았다.
자기가 북만땅에 떨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것 같았다. 사람들이 감격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수 없는 처지에 있는 나로서는 점점 더 난처한 립장에 빠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가슴아픈대로 리별에 대해서 실토정해야 하였다.
《동무들, 돌이켜보라!
무장투쟁의 변증법적과정으로 새로운 정세가 조성될 때마다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리별이 찾아왔다.
남호두회의를 계기로 조선혁명의 전환기가 마련된 오늘에 와서도 이것은 례외로 될수 없으니 모두가 그러한 리별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의 군부파쑈집단은 〈2.26사건〉을 도발한후 북방침략을 더욱 본격화하고있다. 일제가 치치할과 북부중국을 장악하고 쏘련침공의 구실을 찾기 위해 쏘만국경에서 끊임없는 도발을 하고있다는것은 동무들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북만의 유격부대들은 이에 대처하여 항일력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그런데 그들은 핵심의 부족으로 큰 곤난을 겪고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지원을 요구하였다.
동무들,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모두 백두산쪽으로만 나가게 되면 어떤 후과가 빚어지겠는가.》
나는 청중이 내 말을 음미할수 있는 여유를 주느라고 잠간동안 장내를 둘러보았다. 군중들속에서는 불안스러운 속삭임소리가 들려왔다. 한쪽구석에서만 조용조용 울리던 그 속삭임소리는 한사람한사람의 청중을 파도처럼 휩쓸며 사정없이 번져가다가 마침내 온 장내를 벌둥지처럼 소연스럽게 만들어놓았다. 예상했던바 그대로의 격렬한 반사작용이였지만 나는 그런 반응앞에서 얼마간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전우들과의 리별이 엄혹한 난관에 봉착할수 있다는 예감때문에 나는 다음 말을 가볍게 이어갈수 없었다.
그러나 군중은 어느새 사담을 그치고 나를 주시하였다.
리별을 선포할 순간이 되였다고 판단한 나는 남호두를 떠난 순간부터 머리속에서 수십번도 더 굴리고 굴린 인사변동계획을 거침없이 발표하였다.
《이제부터 왕청련대는 최용건동무가 활동하는 구역으로 가야 하며 훈춘련대는 3군의 활동지역으로 가야 한다. 그 3군에 바로 김책동무가 있다. 왕청련대와 훈춘련대에서 일부 력량은 주보중휘하의 5군과 함께 녕안, 목릉,위하 일대에서 공동작전을 하게 된다. 부상자들과 로약자들은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고 빨리 몸을 추세워야 한다.
동무들, 용서하라. 보는바와 같이 나는 동무들을 데리고 백두산으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사람들은 정적속에서 몇초동안 나를 뚫어지게 주시하였다. 불복의 뜻을 담은 목소리들로 혼잡을 이루리라고 예측했던 장내에 믿기 어려운 정적이 찾아들고 그 숨막힐듯한 무언속에서 사람들이 침착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것은 자못 신기한 일이였다. 나는 수천수만마디의 항변을 대신하고있는 그 무언이 더 두려웠다.
그렇지만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이상스러운 정적을 대신하여 흐느낌소리가 구석구석에서 일어났다.
나는 리별선언으로 하여 기가 죽은 대원들앞에 망연히 서있었다.
그래도 내 수하에서 정치일군으로 몇해동안 일해온 최춘국이 도량은 있었다. 그는 《장군님, 우리가 다 수습할테니 걱정말구 들어가서 로독이나 좀 푸십시오.》 하고 나를 위로하였다.
사실은 그도 우리와 헤여져 독립려단을 꾸려가지고 활동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북만에 떨어지게 될 사람들과의 사업을 최춘국에게 맡긴 나는 쏘련으로 들어갈 부상자들과 로약자들을 따로 만나보았다. 수년간의 유격투쟁과정에 우리의 대오에서는 많은 부상병들과 허약자들이 생겨났다. 유격구가 존재할 때에는 근거지병원에서 전적으로 그들의 치료를 감당해왔지만 유격구가 해산된 다음부터는 부상자처리가 커다란 난문제로 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상병들과 로약자들은 사하장과 경박호부근으로 보내여 림시치료를 받게 하다가 후에 청구자밀영을 꾸려놓고 거기에 그들을 모두 집결시키였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안전책이라고는 할수 없었다.
다행히도 위증민이 국제당 해당조직과의 교섭을 통하여 우리가 가장 큰 골치거리로 여기고있던 부상자와 허약자의 치료문제를 우리의 요구대로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그 교섭에 의하여 인민혁명군 부상병들과 허약자들은 당분간 쏘련령내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을수 있게 되였다. 위증민은 국제당과의 협의하에 쏘련령내에 들어가는 부상병들의 인계인수와 관련된 실무적절차까지 약속해놓고 돌아왔다. 위증민의 노력에 의하여 국제당산하학교들에 류학생들을 보내는 문제도 성과적으로 타결되였다. 이제 왕청련대와 훈춘련대 동무들이 북만부대로 떠날 때에는 류학생들의 그루빠도 부상자집단과 함께 쏘련으로 갈것이였다.
먼저 우리 부대의 부상병, 로약자,무의무탁 어린이들로 두개 조의 대렬을 편성하고 한개 조씩 두차례에 걸쳐 쏘련에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국경까지의 부상자호위는 왕윤성이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하게 되여있었다.
우리는 이 문제도 남호두에서 이미 내정을 짓고 왔으므로 청구자에 있는 부상병들은 그것을 모르고있었다.
내가 부상병들이 있는곳으로 찾아가고있을 때 어느새 리응만이 쌍지팽이를 짚고 나타나서 내앞을 막아나섰다.
《장군님,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 리응만이도 쏘련으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첫마디부터 소리가 높았고 과도한 흥분으로 볼편까지 실룩거리였다.
《응만동무, 그러지 말고 여기 좀 앉소.》
나는 수림속에 누워있는 진대나무에 그를 부축하여 앉히였다.
리응만은 나의 팔을 붙들고 애원하였다.
《장군님, 제발 저를 장군님곁에서 혁명을 하다가 죽게 해주십시오. 제 비록 외다리이지만 총을 쏠수 있고 무기수리도 할수 있습니다. 입이 있으니 혁명을 선동하는 연설도 할수 있습니다. 그래 이 리응만이가 동지들이 피를 흘리며 악전고투할 때 쏘련에 가서 호강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나는 성미가 불같은 왕년의 유격대중대장이 이렇게 나오리라는것을 미리 다 짐작하고있었다. 사실 리응만은 혁명을 하기 위해 다리를 자른 사람이 아닌가.
나는 리응만의 손을 잡고 사정하였다.
동무가 이러면 다른 부상병들도 더 떼를 쓰게 된다. 나도 항일무장투쟁대오에서 떨어지게 되는 동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동무들은 육체적조건때문에 늘 생활에서 구속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아닌가. 유격구가 있을 때는 불편한대로 그럭저럭 견뎌낼수 있었지만 울타리를 터치고 홍길동이처럼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해야 하는 새로운 투쟁환경에서 그 몸으로 어떻게 부대를 따라다니겠는가.
나는 한시간나마 그를 설복하였으나 마이동풍이였다.
《장군님, 저는 혁명이 승리한 나라에 가서 남들의 빵이나 축내며 편안하게 지낼 생각이 없습니다. 혁명도 하지 않고 호강을 할것 같으면 제 무엇때문에 집재산을 다 털어서 부로닝권총 한상자를 사가지고 유격대에 들어왔겠습니까. 부탁입니다. 저를 장군님곁에 남게 해주십시오. 저는 락오자가 되고싶지 않습니다.》
리응만은 혁명대렬에서의 락오 그자체를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것으로 생각하는 진짜배기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고방식가운데는 너무도 극단적인데가 있었다. 쏘련에 들어간다고 하여 혁명을 포기하거나 호강하라는것은 아니였다. 우리는 리응만이 안전한곳에서 여유있게 치료를 받고 의족이라도 하고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수 있었다.
나는 리응만의 호소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유격구를 지키던 왕청시절을 감개무량하게 돌이켜보며 묵묵히 밀영의 눈무지우를 거닐었다. 그런데 고통속에서 무겁게 흘러가는 끝없는 그 침묵이 오히려 리응만의 마음을 움직여놓았다.
그는 내 표정을 한참 살펴보더니 별안간 나의 어깨에 얼굴을 틀어박고 《저때문에 장군님께서 속을 썩이시누만요. 제 그럼 쏘련으로 가겠습니다. 거기 가서 백두산쪽을 향해 장군님의 승전을 매일 빌겠습니다.》하고 오열을 터뜨리였다.
리응만과의 작별에 못지 않게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것은 량귀동녀와의 리별이였다. 그 어린것도 쏘련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줄곧 울었다.
그래서 나는 청구자밀영에 있는 동안은 내내 그 애를 데리고다니며 밥도 같이 먹고 잠도 한자리에서 잤다.
우리가 청구자밀영을 떠나기 전날밤에는 어린것이 모포밑에서 자지 않고 계속 조잘거리였다.
《장군님, 쏘련은 여기보다두 더 춥다지요?》
그 애는 아마도 어른들에게서 쏘련이란 나라에 무시무시하게 추운 동토대가 있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였다.
《일없다. 네가 가는곳은 그저 여기만큼 춥다.》
귀틀집밖에서 설레이는 북만의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런 대답을 하느라니 가슴이 찢어지는듯했다. 부모도 없는 그 어린것을 타향에서 또 다른 타향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그 애의 인식속에 눈보라와 찬바람이라는 두가지의 표상만으로 새겨진 그 풍토사나운 땅은 왜놈들도 없고 착취도 없고 압제의 채찍도 없는 사회주의나라였다.
이제 그 애는 거기에 가서 착한 사람들을 구박하고 학대하는 저주스러운 세상과 결별하고 종달새처럼 명랑하게, 수리개처럼 자유롭게, 비둘기처럼 행복하게 살아갈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우리 대오에 돌아와 혁명을 하게 될것이다.
우리가 량귀동녀와 같은 불쌍한 아이들을 쏘련으로 보내게 된데는 이런 위안과 희망이 있었다.
《응만아저씨가 그러는데 장군님은 백두산에서 싸우면서도 한달에 한번씩은 꼭꼭 나를 찾아오신댔어요. 정말인가요?》
그 애가 쏘련으로 안가겠다고 하도 조르니 리응만이 그런 거짓말을 한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애의 티없이 맑은 눈동자만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질문앞에서 내가 이처럼 난처한 립장에 처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어린것이 스스로 나를 구원해주었다.
《장군님이 백두산을 비우구 우리한테 오시면 그새 왜놈들이 또 조선사람을 죽이겠는데 그럼 어떡하나요? 장군님, 나한테 오시지 말구 내내 백두산에 계시라요.》
《용타, 네가 정말 용쿠나! 네 부탁대로 백두산을 떠나지 않겠다. 그리고 거기서 너의 아버지, 어머니의 원쑤를 갚아줄테다.》
나는 부지중 그 애를 그러안았다.
량귀동녀는 어린 새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며 이상하게 몸을 떨었다.
아버지, 어머니들의 참혹한 죽음을 수없이 목격해온 소녀의 눈앞에 치떨리는 과거의 영상들이 한꺼번에 비껴와서 그처럼 몸을 떠는지도 몰랐다.
백두산을 비우지 말라는 어린이의 그 말속에 온 조선사람들의 념원과 부탁이 담겨져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한참만에 량귀동녀는 다시 나를 불렀다.
《장군님! 백두산은 너무 높아서 나 같은 애들은 올라가지 못한다지요? 그래서 나는 백두산으로 못가구 응만아저씨를 따라 쏘련으로 간답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어린애의 머리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이였다. (귀동녀야, 이제 때가 되면 너도 백두산으로 찾아오거라. 그때면 우리 조선도 쏘련처럼 살기 좋은 나라로 될게다.)
나는 그날밤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날이 새면 벌어지게 될 눈물겨운 석별의 광경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면서 나를 괴롭히였다. 어떻게 그들과 헤여질것인가? 정말 《절류》식으로 여기에 있는 나무가지들을 하나씩 꺾어주고 갈것인가. 아니면 단재처럼 슬그머니 사라질것인가.
날이 밝아올무렵에 최춘국이 나를 찾아왔다.
《장군님,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일찌감치 조반이나 먹고 떠나야지. 관지에 있는 중대동무들이 나를 눈이 까매서 기다릴거요. 그래 어떻소? 여기 동무들이 마음을 좀 안착했는지… 동무들도 곧 북상행군을 해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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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여기 동무들이 마음을 좀 안착했는지… 동무들도 곧 북상행군을 해야겠는데.》
온밤 내곁에서 자지 않고 조잘거리던 량귀동녀는 리별의 날이 밝아온줄도 모르고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있었다.
《장군님, 우리 동무들에 대해선 념려마십시오. 북만에서 잘 싸울테니 안심하고 떠나십시오.》
《좋은 동무들이지. 그래서 나도 헤여지기가 괴롭소. 그러니 이젠 춘국이와도…》
나는 말끝을 채 마무리지 못하고 최춘국을 바라보았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꽉 거머쥐였다.
《춘국동무와는 이렇게 서로 말이라도 해보고 헤여지니 괜찮소. 한흥권동무하군 만나보지도 못하고 가게 됐으니 더욱 속이 좋지 않소. 후에 북만부대에 가서 만나거든 보지 못하고 가는 내 심정을 전해주오.》
우리는 그날 간소한 아침식사로 리별연을 대신하고 헤여졌다.
최춘국의 말대로 청구자동무들은 관지쪽으로 떠나는 나를 웃음으로 바래주었다.
다만 량귀동녀가 서럽게 울었을뿐이다.
떨어지지 않겠다는 9살 소녀의 손목을 리응만에게 넘겨주고 천근같은 발걸음으로 청구자밀영을 떠나가던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아파난다.
리응만이와 량귀동녀는 그후 1차인가 2차 대렬에 포함되여 쏘련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후 오래동안 우리는 그들의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우리에게 그들의 안부를 처음으로 전해준 사람은 청구자밀영에서 부대와 헤여져 쏘련으로 들어갔다가 해방후에야 귀국한 지난날의 빨찌산재봉대원 전문진이였다. 늦게나마 그들이 살아서 건재해있다는 말을 들으니 나로서는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량귀동녀의 지금 나이가 아마 70살 가까이 되였을것이다. 그 나이면 인생으로서는 석양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지금도 《민생단》모자를 쓰고 마음고생으로 시들어가던 옛 대대장의 딸 량귀동녀를 이따금씩 눈앞에 그려보군 한다. 그러나 내 눈앞에 매번 떠오르는것은 진갑을 앞둔 할머니가 아니라 9살내기 꽃망울소녀의 모습뿐이다. 나는 할머니가 된 그를 상상할수가 없다. 나의 추억속에는 언제나 나를 따라 백두산으로 가겠다고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소녀의 모습만이 남아있을뿐이다.
청구자에서는 최춘국이 북으로 들어갈 자기네 대원들을 잘 설복한덕에 별로 어렵지 않게 헤여졌으나 관지에 있는 김려중네 중대와 오진우가 속한 중대를 북만부대에 파견하는 일은 여간 힘들게 되지 않았다. 오진우가 속한 중대는 기어이 우리를 따라 백두산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우리가 거듭 설복을 하자 그들은 북만부대로 가기는 하겠는데 안도계선까지만이라도 함께 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훈춘청년의용군의 1개 소대 동무들도 덩달아서 안도행을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그 소대안에 한때 우리의 지시를 받고 훈춘에서 위만군 반변공작을 했던 황정해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주동이 되여 나의 승낙을 받아내려고 달라붙었다.
나는 북만지구의 실태를 이야기해주면서 여러시간 그들을 설복하였다.
위증민이 황정해가 속한 훈춘청년의용군 소대를 몹시 탐냈기때문에 그 1개 소대만은 그에게 떼주기로 하였다. 오진우가 속한 중대동무들은 풀이 죽어서 미혼진을 떠났다.
위증민과 함께 바람소리 처량한 미혼진의 언덕에서 눈물을 머금고 떠나가는 오진우가 속한 중대동무들을 바래줄 때 내 마음도 리별의 정으로 뜨겁게 젖어들었다.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에 개별적으로 파견되여 가는 동무들과의 리별은 그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파고드는 괴로움속에 진행되였다. 참군의 걸음마를 뗀지 얼마 되지 않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에서는 군정간부의 부족으로 많은 곤난을 겪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한흥권, 전창철, 박길송,박락권,김태준을 비롯한 간부들은 말할것도 없고 지어는 나의 전령병이였던 오대성이마저 북만에 파견하였다. 간도에서 애지중지 키운 간부들은 그때 송두리채 넘겨준셈이였다.
오대성은 오중흡의 손아래 동생이였다. 십리평에서 소년선봉대활동을 하던 그는 형들이 연줄연줄 유격대에 입대하는것을 보고 감질이 나서 시샘을 하던 끝에 자청하여 우리의 전령병으로 되였다.
내가 북만부대에 가라고 말하자 오대성은 처음에 히죽히죽 웃기만 하였다. 아마 롱담을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이 롱담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되자 울상이 되여 나한테 대들었다.
《장군님, 왜 절 보내겠다고 하십니까? 전 못가겠습니다. 나같은게 북만부대에 안간다구 혁명이 망가지겠습니까. 장군님곁에 그냥 있게 해주십시오.》
지시만 내리면 그저 곰살궂게 알았습니다 하는 한마디의 대답으로 나를 흐뭇하게 해주던 전령병이 그 마당에서 하는 처신은 실로 거칠었다.
나는 수십번의 설복을 거듭해서야 오대성을 머나먼 북만부대로 떠나보낼수 있었다.
안가겠다고 떼를 쓰던 오대성이도 역시 작별을 앞둔 마당에서는 어른스럽게 나를 위로하였다. 내 눈에 물기가 있는것을 보자 그는 《장군님, 내가 가면 저 금산이가 나처럼 장군님을 모실가요?》 하고 희떠운 롱담까지 하였다.
리별 전날밤 오대성은 온밤 나의 다른 전령병 최금산과 함께 소곤소곤 작별담을 나누었다.
나는 원래 자정이 지나야 자리에 들고 새벽 서너시면 일어나는것이 례사였지만 그날밤만은 먼길을 떠날 전령병을 생각해서 일찍 등불을 끄고 누웠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소곤거리던 두 전령병은 새벽녘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저 친구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려고 저럴가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도사리였다.
《금산아, 내가 간 다음 너 장군님을 더 잘 모셔야 해.》
오대성이 소곤거리는 소리였다. 금산이쪽에선 그저 한숨을 쉬는것 같았다.
《백두산쪽에 가면 고추장을 꼭 구해서 끼마다 장군님께 올려라.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곳이니 노력만 하면 쉽게 구할수 있을거야. 너 장군님께서 고추장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알지? 그런데 우린 아직 한번도 그런 음식을 대접 못했거든. 우린 사실 전령병자격이 없지뭐. 정작 장군님곁을 떠나자니 그런 일들이 마음에 걸리누나.》
《네 부탁대로 할테니 마음놓구 가. 이렇게 헤여지면 언제 만날수 있을가?》
최금산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글쎄 언제나 만나겠는지. …참 금산이, 거기 가면 먼저 평안도사람네 집에 꼭 들려봐라. 평안도집엔 젓갈 같은게 있을수 있다. 장군님께서 젓갈을 아주 좋아하신대. 야, 백두산에 가면 그런걸 다 구해서 장군님께 실컷 대접해드리자구 했댔는데…》
날이 밝아 오대성을 보낸 다음 나는 책갈피에서 그의 글쪽지를 보게 되였다.
《장군님!
나라를 찾고저 일년삼백예순다섯날 어느 하루도 발편잠 못주무시는 장군님께 속만 태워드리다 떠나는 전령병의 마음 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서 잘 싸울테니 근심일랑 하지 마십시오.
괴로울 때면 〈나라를 찾기 위해 이 고생을 참자.〉고 늘 하시던 장군님 말씀을 되새기겠습니다.
사랑속에서 키운 애국절개 더럽힘없이 한목숨 짚오래기처럼 던져 광복성업에 조금이나마 보태겠사오니 장군님, 걱정마시고 부디 건강하십시오.》
나어린 전령병의 글치고는 너무도 웅심깊은것이였다.
나의 전우들은 모두가 이렇게 의리가 깊고 인정이 두터운 동무들이였다.
이날 위증민은 남호두에서 청구자, 관지를 거쳐 그곳까지 오는동안 조선동지들사이에 오가는 정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절감했노라면서 눈굽을 적시였다.
《강장에게는 약병이 없다더니 김일성동지의 대원들은 하나같이 용감하고 인정이 또한 각별하니 정말 부럽습니다. 저 황정해만 보아도 얼마나 탐나는 청년입니까.》
나는 훈춘의 청년의용군소대와 함께 작식대원으로 임은하도 위증민에게 넘겨주었다.
황정해도 위증민을 따라갈 때에는 오대성이처럼 우리와의 리별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황정해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장군님부탁대로 위증민동지를 잘 돌봐드리겠으니 걱정말라고 우리를 안심시켰고 그 시각에 다진 맹세대로 최후의 순간까지 위증민을 잘 호위해주었다.
위증민의 병이 위독해질무렵에는 황정해가 그를 노상 업고 다니였고 적의 《토벌》을 당할 때마다 필사적인 혈전을 벌려 그를 구원해주었다.
하기에 위증민은 림종의 시각에 황정해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내저 세상에 가서도 정해를 잊지 않고 조선동무들의 지성을 잊지 않겠소. 부디 잘 싸우다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조국으로 개선해주오.》 하고 뜨겁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증민이 그렇게 고마와하고 잊지 못해하던 황정해도 끝내 내곁으로 오지 못하고 만주대지에서 황야의 고혼이 되였다.
나는 지금도 황정해를 생각할 때면 먼저 남호두에서부터 백두산에 이르는 수천리의 우회로-남하행군길이 떠오른다.
청구자밀영에서 나를 따라가겠다고 어린아이처럼 발을 구르던 황정해, 그는 거기서부터 미혼진까지 왔다가 위증민을 따라갔었다. 청구자밀영에서부터 백두산으로 오는 그 머나먼 남행길을 동행하는 과정에 황정해에 대한 나의 정은 더 깊어진것 같다.
남호두에서부터 백두산으로 오는 수천리남행길에서 북으로 떠나보낸 나의 전우들은 과연 얼마나 많았던가.
박길송, 한흥권,장룡산,전만송,박태화, 최인준, 오대성,오세영,김태준 등 수없이 손을 꼽아도 다 셀수 없는 그 많은 전우들이 남북만산야에 젊은 피를 뿌리고 숨지였다.
총 잘 쏘고 인정이 많던 장룡산의 희생도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나의 시중을 들어주느라고 밤낮없이 뛰여다니던 오대성이를 다시 만나지 못한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오중흡이 무척 사랑하던 동생이였다.
우리가 오대성과 헤여질 때 1사 2련대에 속하여 교하원정에 참가했던 오중흡은 자기 동생이 먼 북만땅으로 떠나는것도 보지 못했다.
나는 백두산지구에 와서 금산의 덕으로 풋강냉이에 건뎅이젓을 받쳐서 달게 먹은적이 있다. 풋강냉이에 건뎅이젓을 받치는것이 구색이 맞는 음식으로 된것도 사실이지만 그속에 오대성이의 소원과 정이 담겨져있다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내 식량에 겹도록 많이 먹었다.
형은 남에서, 동생은 북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싸웠지만 조국광복의 그날에는 그들이 반드시 무공을 자랑하며 한자리에 모이게 되리라고 나는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두 형제가 다 이국의 거친 땅에서 목숨을 잃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희생된 우리 동무들은 우리가 바라고 믿었던것처럼 남북만 각지에 가서 조선혁명가의 기개를 잃지 않고 잘 싸웠다.
청구자밀영에서 전우들과 눈물겨운 리별을 한 때로부터 최춘국이와는 1년반만에 다시 만났고 어떤 동무들과는 5년, 6년후에,또 어떤 동무들과는 해방된 조국땅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는데 그들모두가 희생된 전우들을 숙연하게 추억하였다.
살아남은 동무들도 역시 가지가지 훌륭한 무훈담들을 안고 우리곁으로 돌아왔다.
어떤 동무들은 백전불패하는 영웅지대장이 되여 이름을 떨치였고 어떤 동무들은 중대장, 려단장,사단정치위원 등의 쟁쟁한 군정간부가 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옛시절의 응석기만은 그냥 남아있어서 《장군님의 곁을 떠나니 부모의 슬하를 떠난것 같았습니다. 보고싶어 내내 울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닦는것이였다.
내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을 두고 잊지 못해하자 그들은 항일의 그날처럼 변함없이 나를 따뜻이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나라를 찾는 길에 어찌 희생이 없겠습니까. 그 동무들과는 그날의 리별이 영리별이 되였지만 그 대가로 조국을 찾았으니 그들도 자기들의 희생을 후회하지 않을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전우들의 사랑속에서 80평생을 살아왔다.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영리별을 한 그들은 나의 한생에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지만 우리의 항일혁명사와 조국의 력사를 별처럼 빛내여주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항일의 그날에 북으로, 남으로 전우들을 떠나보냈던 그 슬픈 리별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