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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7-1.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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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654회 작성일 15-04-1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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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인민의 세상


1. 보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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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33년 2월중순에 마로인의 안내를 받으며 왕청유격구로 향하였다. 20일동안 산전막에서 정치토론만 하며 갑갑하게 지내던 18명의 유격대원들은 행길에 나서자 신바람이 나서 걸음을 다그치였다. 겨우내 겪어온 시련의 흔적들이 채 가셔지지 않았건만 대오는 청신하고 생기발랄하였다.


지금 왕청지방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의 특징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현장의 연설이 길고 소학교의 길이가 길고 골짜기가 긴것으로 유명합지요 하는 기지있는 말로 대답하군 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롱질을 즐기는 왕청지방 해학가들이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지어낸 말인것 같다.


1933년 당시의 나에게 만일 그런 명구가 있었다면 모진 곤경을 치르고난 전우들에게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수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왕청이 어떤 고장입니까?》하는 대원들의 물음에 그저 망명자가 많은 고장이라는 대답밖에 해주지 못하였다.

망명자가 많은 고장이라는 말은 혁명가가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왕청은 간도의 여러 현들중에서도 일찍부터 반일독립운동이 가장 백열화된 지방의 하나였다. 백전로장 홍범도가 일본군《토벌대》를 대패시킨 전장도 여기에 있었고 서일, 김좌진, 리범석 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활동기지도 이곳에 있었다. 리동휘는 이 일대에서 독립군인재양성에 심혼을 바치였다.


독립군의 맹활약과 독립운동자들의 출몰은 이 지방 인민들의 민족적각성을 촉진시키였고 그들을 반일애국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독립군운동이 조락단계에 들어서고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연해주지방과 쏘만국경일대로 자취를 감춘 다음부터 왕청지방에서의 민족해방투쟁령도권은 점차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였고 투쟁의 주류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 전환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걸구어온 애국애족의 토양우에서 새 사조의 선각자들은 공산주의운동을 발전시키였다.


그러나 그 운동의 동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족운동의 주체로 등장했던 사람들가운데서 압도적다수는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공산주의운동대렬내에는 처음부터 공산주의길을 걸은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신봉하다가 사상개조과정을 거쳐 점차 공산주의자로 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런 주의에도 관계하지 않은 말쑥한 새 사람들만을 가지고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발전에서 우리가 지침으로 삼고있는 계승과 혁신의 원리이다. 공산주의사상이 인류사상사에서 최고봉의 사상이고 공산주의운동이 모든 형태의 혁명운동가운데서 최고단계의 혁명운동이라고 하여 이 운동이 아무것도 없는 빈터에서 발생발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어쨌든 왕청은 반일투쟁력사가 깊고 군중토대가 좋으며 정치적지반도 튼튼한곳이였다. 조국의 륙읍지구와의 거리도 가깝고 간도지방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중심지인 연길, 룡정 지구와도 이웃하고있어 이모저모로 좋았다.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는 말도 있지만 이런 고장에 혁명가들이 많이 집결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고학을 하려면 일본으로 가고 흘레브를 먹으려면 쏘련으로 가고 혁명을 하려면 간도로 가라는 류행어는 동만을 광복운동의 최전방으로 보고 그곳을 끝없이 동경하던 당시 조선청년들의 심정을 잘 반영하고있다.


간도로 가는것은 화구앞으로 가는것과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을 더 본때있게 하기 위하여 그 화구앞으로 주저없이 돌진하였다.

유격구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이 그렇게도 경쾌했던것은 거기에 기름진 음식이나 푹신한 잠자리가 기다리고있어서가 아니였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생사를 같이할 동지들이 있고 인민이 있고 우리가 자유롭게 디디고다닐 땅이 있으며 일본천황의 칙령이나 총독제령으로써도 뒤집어버릴수 없는 우리 식의 참세상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우리가 마로인을 앞세우고 전각루로 향하던 1933년 2월은 동만각지에서 유격근거지창설사업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여 그 생활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뒤였다.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그에 기초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리는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미 겨울명월구회의에서 그 사상을 제시하고 방침으로 채택했던 중심과업의 하나였다. 우리는 그때 무력항쟁을 하자면 진지를 꾸려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진지란 유격근거지를 의미하는 우리 식의 소박한 표현이였다.


우리가 겨울명월구회의에서 론의된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창설에 관한 문제를 독립적인 의제로 내세우고 그 실현방도를 다시금 진지하게 모색한것은 1932년 봄의 소사하회의에서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우리는 간도 여러 지방들에 유능한 지도핵심들을 파견하여 농촌혁명화를 다그치였다. 이것은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이였다.


혁명화된 농촌지역은 유격구가 꾸려질 때까지 반일인민유격대가 발을 붙이고 활동할수 있는 림시거점으로 되였으며 유격근거지가 탄생할수 있는 바탕으로 되였다.

겨울명월구회의에서 리상적인 후보지로 선정되였던 안도, 연길, 왕청, 화룡, 훈춘의 산악지대들인 우복동, 왕우구, 해란구, 석인구, 삼도만, 소왕청, 가야허, 요영구, 어랑촌, 대황구, 연통라자를 비롯한 여러 고장들에 유격근거지가 속속 건설되였다.


간도의 산악지대들에 건설된 유격구역들에는 적들과의 첨예한 대결속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바친 견인불발의 노력과 그들이 겪은 피어린 진통이 깃들어있다.

두만강연안의 유격근거지들을 꾸리는데서 량성룡, 리광, 장룡산, 최춘국, 주진, 박동근, 박길, 김일환, 차룡덕, 강석환, 안길, 리국진, 리봉수를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바친 선혈과 로고는 력사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그 당시 국내와 해외에서 한다 하는 인물들은 앞을 다투어 간도지방의 유격근거지들에 집결하였다. 왕청지구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백룡, 조동욱, 최성숙, 전문진을 비롯한 북만의 공산주의자들도 소왕청으로 찾아왔다.


소왕청의 새 주민들가운데는 연해주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운동자들도 있었고 적구에서 다년간 지하활동을 해오다가 정체가 탄로되여 투쟁무대를 바꾼 사람들도 있었으며 조선혁명의 중심이 간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월경탈출한 국내의 애국인사들과 맑스주의신봉자들도 있었다.


동만의 유격근거지들로는 이처럼 혁명에 참가할 각오가 되여있거나 실천투쟁속에서 직접적으로 단련된 풍부한 투쟁경험을 가진 정수분자들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주민구성도 대왕청하의 청수처럼 깨끗하였다. 그 기개와 담력으로 말하면 전부가 일당백이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책원지가 마련된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항일근거지들에서 유격대오를 늘이고 당, 공청을 비롯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아동단, 적위대, 소년선봉대와 같은 계층별 조직들과 반군사조직들을 내옴으로써 전민항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우리의 선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참다운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를 인민에게 주고 인민의 리익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대변하는 혁명정권이 유격구역마다에서 태여나 인민의 보금자리를 꾸리기 시작했다. 혁명정권은 사람들에게 땅을 주고 로동의 권리를 주고 누구나 무상으로 공부하며 치료받을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며 력사상 처음으로 만민평등의 리념이 실현된 사회, 서로 돕고 이끌어주고 위해주며 받들어주는 고상한 륜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였다. 유격구에는 개화장을 짚고 거들먹거리는 부자도 없었고 빚과 세금에 짓눌려 세상을 한탄하며 통곡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격근거지들에는 그 어떤 수난이나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나래치는 희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온갖 사회악과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여 자주적인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인민들의 랑만이였다. 인민혁명정부가 나누어준 분여지에 말뚝을 박아놓고 꽹과리를 울리며 춤을 추는 농민들의 모습은 간도의 불모지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해낼수 있었던 세기적인 화폭이며 천지개벽이였다. 끝없는 류혈과 희생을 동반하는 시련에 찬 생활이였으나 사람들에게는 래일에 대한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으며 노래가 있었다.


적들의 그 어떤 도발이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동방일각에 거연히 솟아 민족해방의 장엄한 새 력사를 개척해가는 간도지방의 유격근거지들은 조국인민들의 찬탄과 동경을 자아내는 락원으로, 지상천국으로 되였다. 조선민족은 그 거주지와 리념에 관계없이 공산주의자들이 피로써 쌓아올린 이 성새를 조국해방의 유일한 등대로 바라보며 충심으로 지지성원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유격구는 사람들이 랑만과 희열과 희망에 넘쳐 사람답게 살수 있는곳이였으며 수천년을 두고 꿈꾸어온 인민의 숙망을 꽃피워 준 리상향이였다.

유격근거지의 존재는 도꾜 대본영의 우두머리들에게 있어서 만성적인 우환거리로 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북부지대와 잇닿아있는 이 지대를 그들은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였다. 간도일대를 《반만항일의 심장부이며 북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일본으로 향하는 공산당의 동맥이기도 하다.》고 한 다까기 다께오의 표현은 적중한것이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동만의 유격근거지를 가리켜 《동양평화의 암》이라고 불렀다. 이 말속에는 유격근거지에 대한 일본군국주의집단의 공포심리가 정확히 반영되여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을 《동양평화의 암》이라고 본것은 이 일대의 령역이 특별히 넓거나 이 지방에 관동군을 제압할만한 공산주의자들의 대무력이 진을 치고있어서가 아니였다. 간도에서 던진 작탄이 도꾜의 궁성이나 대본영의 지붕우에 날아가 떨어지는것도 아니였다.

그들이 간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위험시한것은 무엇보다도 이 지역주민의 절대다수가 반일감정이 극렬한 조선사람들이고 그 조선사람의 대부분이 일본의 지배를 반대하는 일이라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내던질수 있는 혁명성이 강한 주민들이라는데 있었다.


간도지방 공산당원들과 공청원들의 9할이상이 조선사람이였다는 사실을 념두에 둔다면 일본지배층이 이 지대의 유격구역들을 만주통치에서의 최대의 두통거리로 여기게 된 까닭을 쉽사리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병》을 반대하여 국내와 만주광야에서 십년유여의 항쟁을 계속해온 의병시대의 용장들과 독립군 잔류세력의 대부분도 이곳에 남아 화승대로 일본군경들을 겨누고있었다.


조중량국공산주의자들의 형제적우정과 혈연적뉴대의 본보기도 여기에서 창조되여 만주전토와 전중국적인 판도에로 확대되고있었다.

간도의 유격근거지들은 《동양평화의 암》이 아니라 동양평화의 꽃이며 등대였다.


유격근거지를 꾸리기 위한 우리 혁명의 전략적과업은 항일무장투쟁을 그 요람기에 말살하려고 미쳐날뛰던 일본군국주의세력의 무차별적인 《토벌》에 의하여 엄중한 시련에 부딪치였다. 그러나 적의 초토화작전은 오히려 간도땅에서 유격근거지의 창설과정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을뿐이다.


1932년 봄 관동군과 조선군(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처리방책이라는것을 협의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소속의 림시파견대를 투입하여 간도지방의 혁명운동을 탄압하려는 흉악한 모의였다. 이 모의에 따라 라남사단소속의 일본군 련대를 기간으로 하고 경원수비대, 기병, 야포병, 한개의 비행중대까지 포함한 간도림시파견대는 추수, 춘황 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던 동만 4개 현의 모든 촌락들과 시가지들을 과녁으로 삼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위해 궐기한 모든 생명들과 그들의 보금자리들에 사정없는 포화를 들씌웠다.


1932년 4월초의 대감자습격을 시발점으로 하여 왕청의 산과 들도 피바다에 잠기였다. 대감자는 한때 리광이 리웅걸, 김용범 등과 함께 추수투쟁을 지휘하던곳이고 김철, 량성룡, 김은식, 리응만, 리원섭 등 투사들이 공안국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던 부락이다. 대포와 기관총, 비행기로 무장한 라남 19사단의 대병력이 물밀듯이 쓸어들어오자 이 부락에 주둔하고있던 왕덕림휘하의 구국군부대는 마반산을 넘어 서대파로 황급히 철수하였으며 마을의 보위대도 저항을 포기하고 《토벌군》에 투항하였다.


대감자를 점령한 일본군은 련이어 비행기로 왕청시가를 들부시고 주민가옥들에 달려들어 살인, 방화, 략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왕청시내에서 제일 큰 지주이고 부호인 리항종의 집도 점령군에 의해 불타버리였다.

그다음은 덕원리와 상경리가 불바다로 변하였다.

이 《토벌》이 얼마나 잔학무도하고 광란적인것이였던지 왕청사람들은 그때 이런 노래까지 지어불렀다.


1932년 4월 6일

대감자에서 반일전쟁 개막되였다

대포알은 앞뒤산에 들들 울리고

기관총과 류산탄은 비발같도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탄을 던져

무산대중 학살을 능사로 한다

대두천에 화염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재터뿐이다

무죄량민 주검은 들에 널리고

왕청들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만주땅에 살고있는 무산대중아

일치단결 일어나 싸워나가자

우리들은 끓는 피로 전쟁장에서

승리의 기발을 휘날리리라


소왕청과 대왕청 골안으로는 야수들의 《토벌》에 집을 잃고 혈육을 잃은 피난민들의 분류가 그칠새없이 흘러들었다. 일본의 비행기들은 일반 주민들밖에 없는 그 인파를 향해서도 폭탄을 마구 던지였다.

수정같이 맑은 왕청의 강물은 삽시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어떤 날은 그 강물로 학살된 사람들의 창자가 떠내려가기도 하였다.


마로인이 우리를 데려다준 전각루도 간도림시파견대 살인마들의 행패가 심했던 고장이였다. 이 고장에 달려든 적들은 수십명의 청장년들과 부녀자들, 어린이들을 불붙는 집에 걷어넣고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마을은 순식간에 재더미가 되였다. 동만의 여러 현들에서 《전각루참안에 제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 배포되여 돌아간것만 보아도 이 《토벌》의 규모와 야만성을 능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간도혁명의 중요한 발원지들의 하나인 소왕청과 라자구 가까이에 위치하고있는 전각루는 일찍부터 항일투쟁의 세례를 많이 받아온 고장이였다.

수천명의 농민들과 떼목군들, 채벌로동자들이 한데 뒤섞여 와글와글하는 이 골안에는 당, 공청을 비롯한 전위조직과 함께 계층별로 되는 혁명조직들이 다 들어가 있었다. 이 조직들이 군중을 동원하여 춘황투쟁때에는 마을에 둥지를 틀고있는 보위단을 들부시기까지 하였다.


군중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보위단원들은 그때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도 못하고 토비가 되고말았다.

투쟁은 승리하였으나 혁명군중은 13명의 희생자를 내였다.

이런 투쟁의 와중에서 전각루는 우수한 혁명가들을 배출하는 온상으로 되였다. 왕청유격대 3중대장이였던 장룡산도 전각루에서 삼차구까지 다니는 떼목군으로 일하던 사람이였다. 리광이 백호장의 간판을 가지고 활동하던 하마탕은 이 마을로부터 수십리밖에 되지 않는곳에 있었다.


적들은 공산당원 한명만 있어도 그 부락주민들을 전멸시키였다. 공산당원 1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100명의 군중을 죽여도 좋다는것이 일본군경들이 제창한 구호였다. 중일전쟁때 화북주둔 일본군사령관인 오까무라 야스지가 화북지방의 해방구들을 공격할 때 적용했다는 3광정책(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략탈하는 정책)은 사실상 1920년대의 간도《토벌》에서 벌써 감행되였고 193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유격구역들을 초토화하는 본격적인 실천행동으로 그 진면모를 적라라하게 드러내놓았다.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일제가 제창한 3광정책과 이른바 《비민분리》를 목적했던 집단부락정책은 알제리의 항쟁세력을 탄압하는 군사작전에서 프랑스식민주의자들에 의하여 적용되였고 윁남땅에서 미군에 의해 더욱 완성되였다.


삼도만, 해란구, 룡정, 봉림동을 비롯한 연길현의 이름있는 혁명촌들도 모두 주검으로 덮이였다. 훈춘현의 삼한리일대에서는 1, 600여호의 집들이 불에 타버리였다. 연길 한개 현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무려 1만여명에 달하였으니 간도림시파견대의 죄행을 무슨 말로 다 고발할수 있겠는가.


일본군은 간도인민들의 생명재산은 말할것도 없고 초보적인 생존수단인 화식도구까지도 모조리 파괴하였다. 밥도 못해먹게 가마를 깨뜨리는가 하면 노전을 들어내고 구들장을 파헤치였다. 나중에는 집을 허물고 달구지들을 끌고와 재목들을 대두천시내로 실어갔다. 사람들은 풀막에서 잠을 자고 가마대신 자갈돌을 달구어 밥을 지어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산으로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감자나 대두천과 같은 시가지로 내려가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토벌군》의 강압적인 퇴거령은 지주들에게도 례외가 되지 않았다. 항일무장부대들이 소비하는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적지 않은 몫이 지주나 자산가들을 통해서 흘러나온다는것은 사실상 비밀이 아니였다. 적들은 이 원천마저 봉쇄함으로써 식량과 피복의 부족을 상시적으로 느끼고있는 혁명군을 완전히 질식시키려는것이였다.


《토벌대》의 검질긴 추격을 피해 혁명군중은 끼니를 번지며 산중에서 헤매였다. 그러나 산이라고 해서 다 안전한것은 아니였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도 막바지까지 가면 더 들어갈곳이 없었다. 막바지가 나지면 더 올라가지 못하고 수림속에 몸을 숨기군하였는데 이런 때에 어린애들이 울음소리라도 내면 몰살을 당하는 판이였다.


어떤 녀인은 《토벌대》가 근처에 와서 돌아칠 때 등에 업힌 갓난아이가 울음소리를 낼가봐 입에 젖꼭지를 물리고 품에 꼭 그러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의 총구앞에 놓여있는 수십수백명에 달하는 혁명군중의 신변안전을 지켜낼수가 없었다. 《토벌대》가 돌아간 다음 아이를 보니 그 어린것은 벌써 숨져있었다. 이런 비극은 간도 어느 마을, 어느 골짜기에나 다 있었던 비일비재의 일화이다.


이런 페단을 없애려고 어떤 고장에서는 애기들에게 아편을 먹이기도 하였다. 아편을 먹이면 아이들이 잠에 취해서 울지 못하였다. 어떤 녀성들은 거듭되는 적의 《토벌》에 성화를 먹다못해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에게 주기까지 하였다.

유격구의 혁명군중과 전우들을 위하여, 목숨보다 더 귀중한 항일의 위업을 위하여 이 나라 녀인들은 이처럼 비싼 대가를 치르었다.


부르죠아인도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모성애를 두고 비난할것이다. 자식들의 운명에 그처럼 무심한 녀자들이 어디 있고 자식들의 생명앞에서 그토록 무책임한 모성들이 어디 있는가고.

그러나 그 애어린 육체들에서 생명의 불꽃을 꺼버린 책임을 이 나라 녀인들에게 물어서는 안될것이다. 자기 자식의 햇솜같은 육체를 가랑잎으로 묻을 때 그리고 남의 집 대문앞에 사랑하는 자식을 떼두고 갈 때 유격구녀인들의 눈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들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패였는가를 안다면 간도땅에 살인백정의 무리들을 파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저주와 증오를 퍼붓게 될것이다.


이 나라 녀인들의 모성애에 참을수 없는 시련을 강요한 죄악은 전적으로 일본군국주의 살인마들에 의하여 빚어진것이였다.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자면 반드시 이런 죄악을 반성해보아야 한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자취를 돌아보고 잘못을 회개하는것이 물론 유쾌한 일로 될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반성이 아무리 쓰고 굴욕적인것이라 하여도 남의집 울바자밑에 자기의 살붙이를 떼두고 가든가 어린 자식의 목구멍에 아편덩이를 밀어넣을 때에 우리 어머니들과 누이들이 느끼던 그런 고통보다야 훨씬 가볍지 않겠는가.


일본지배층이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그 무슨 증거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지난날 일본군에 의해 참살된 수백만 조선사람들에 대한 가증스러운 모독으로 될것이다.


혁명군중앞에는 왜놈들의 요구대로 도시로 내려가는가, 아니면 그 요구를 거역하고 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생계를 유지하며 투쟁을 계속하는가하는 두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고향의 문전옥답을 버리고 간도땅에 온 조선사람들치고 왜군이 도사리고있는 시가지에 가겠다고 응해나설 사람이 과연 몇이겠는가.

간도주민의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지적수탈로 인하여 경제적지반을 잃고 률도국과 같은 리상향을 꿈꾸며 살길을 찾아 남부녀대의 길을 떠난 령세농민들이였다.

그들은 관헌들과 토착지주들에게 등껍질을 벗기우면서도 로야령, 할바령산줄기들의 비탈과 골짜기들에서 억척스럽게 돌을 추어내고 나무뿌리를 뽑아냈다. 화전농사는 고되고 가난은 변함없었으나 왜놈의 등쌀을 모면할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하였다. 그런데 그처럼 흉악무도한 왜군을 따라 도시로 내려가라고 하니 어느 누가 피땀으로 걸구어온 자기집 터전에서 선뜻 발길을 떼겠는가.


이것은 대살륙의 참변을 겪은 왕청골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대 시련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토벌군》의 행악질에 겁을 먹은 일부 주민들은 한집두집 도시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 세상을 열렬히 동경하고 갈망하는 절대다수의 군중은 적들의 공갈을 무릅쓰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어제날까지 한동네에서 혁명을 위해 뜻을 합치고 마음을 합치면서 동고동락의 길을 걷던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각각 산과 도시로 흩어져가게 되였다.


그때 산중에 남은 사람들은 현성(백초구)으로부터 100리나 떨어진 소왕청과 대왕청의 대수림지대로 깊숙이 이동하였다. 리치백일가가 중경리에서 마촌으로 옮겨간것도 이 무렵이였다.

공산당 왕청현위를 비롯한 현급기관들은 소왕청에 본거지를 정하였다.


연길현 세린하와 태평구, 왕우구, 북동 등지로 장소를 바꿔가며 활동하던 동만특위도 1933년 봄에는 소왕청골안으로 들어와 리수구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소왕청은 간도혁명의 중심지가 되고 수도로 되였다. 우리와 중국당, 우리 혁명과 중국혁명은 이러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련결되게 되였다.


왕청유격근거지는 요영구를 포괄하는 1구와 마촌, 십리평을 포괄하는 2구를 비롯하여 5개의 혁명조직구로 이루어져있었다.

그 당시의 왕청유격대력량은 3개 중대였는데 그 대표적인 지휘관들은 리광, 량성룡, 김철, 장룡산, 최춘국, 리응만 등이였다.


이것이 내가 왕청에 대하여 알고있은 대체적인 예비지식이였다.

나에게 이런 예비지식을 넣어준 사람은 왕청유격대창건자의 한사람인 량성룡과 현당서기 리용국이였다. 1932년 가을에 내가 부대를 데리고 이 고장에 와서 유격근거지의 실태를 료해할 때 바로 그들이 나의 안내를 담당하였다.


나는 그때 왕청현안의 여러 유격구들을 돌아다니며 기층당조직들의 사업과 반일회, 반일부녀회를 비롯한 대중단체들의 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반일부대들에 파견되여 활동하는 공작원들의 사업정형도 청취하였다.


우리가 소왕청에서 동만 각 현의 병기공장성원들과 유격대지휘관들을 모여놓고 작탄강습을 진행한것도 이무렵이였다.

그 당시 왕청간부들은 식량문제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농호가 수십호밖에 되지 않던 소왕청의 좁은 골안에 1,000명도 넘는 인파가 단번에 쓸어들었는데 유격구에는 그들을 먹여살릴만한 식량예비가 전혀 없었다. 유격대가 적들을 치고 이따금씩 식량을 로획해온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거지주민들의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웠다. 유격구의 척박한 뙈기밭들에서 거두어들인 한해 수확량이란 보잘것없는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식량을 해결하기 위한 당면한 타개책으로 중간지대의 추수문제가 일정에 오르게 되였다. 중간지대란 적통치구역과 유격근거지사이에 놓여있는 무인촌들을 말한다.

소왕청과 대왕청 어귀에도 빈부락들이 여러개 생기였다. 《토벌대》가 달려들어 살판치는 바람에 사람들은 모두 유격구와 적구로 갈라지고 중간지대에는 곡식만 남게 되였다. 그런 곡식들중에는 적구로 내려간 지주들과 반동들의것도 있고 《토벌대》의 총탁에 밀려 백초구나 대두천 같은곳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농민들의것도 있었다.


중간지대의 곡식에 대해서는 적구에서도 잔뜩 눈독을 들이고있었다.

적구의 지주들과 반동들은 무장을 한 자위단의 엄호를 받으면서 마차와 달구지들을 끌고 날마다 중간지대에 나타나 낟알을 걷어갔다. 어떤 날은 그들이 탈곡장근처에까지 와서 총질을 해댔다.

우리는 그때 이런 실정을 파악한데 기초하여 모든 유격구들에서 추수대를 조직하며 근거지인민들의 총동원으로 중간지대의 가을걷이를 지체없이 끝낼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왕청사람들과 함께 그 해결책을 상론하였다.

추수대는 소왕청어귀에서 곡식을 베면서 대두천방향으로 내려갔다. 그날 벤 곡식은 그날로 털어서 창고에 넣고 유격구주민들에게 분배하였다.


13호촌 아래부터는 적위대가 보초를 서주어야 추수를 할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5련발로 무장한 자위단의 습격을 면할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추수대가 새하얗게 달라붙어 곡식을 베고있는 포전을 사이에 두고 적위대와 자위단 사이에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줌의 낟알을 위해 야밤삼경에도 쉬지 못하고 결사적인 추수전을 벌리는 왕청인민들의 모습은 우리를 무척 감동시키였다.

비록 간고하기는 하지만 근거지에서 매사가 우리의 뜻대로 잘되여가는것을 보고 나는 그때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소왕청을 떠났었다.


나는 유격근거지로 되돌아가면서 자기앞에 두가지의 큰 과제를 내세웠다. 하나는 유격대오를 대폭 늘이자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무대를 두만강연안으로 옮기게 된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 각계각층의 애국력량을 한데 묶어세우기 위한 통일전선사업과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사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벌리자는것이였다.


마로인은 우리를 전각루까지 안내해주고 라자구로 돌아갔다. 마로인을 대신하여 우리를 안내한 성미가 걸걸한 반일회원은 왕청유격대의 소부대들이 그동안 요영구와 사수평에서 일본침략군 《토벌대》를 답새긴데 대하여 옛말처럼 구수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다음날 반일인민유격대라고 쓴 기발을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왕청1구의 소재지인 요영구유격구역에 들어섰다. 후날 내곁에서 전령병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한 최금산의 숙모 홍영화가 스무나문명 되는 아동단원들을 데리고 신작로에 뛰여나와 손을 흔들면서 우리를 열광적으로 마중해주었다. 그 녀자는 왕청 1구당위원회산하에서 부녀사업을 책임지고있었는데 유격대와 반일부대에 대한 후원을 잘하여 군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날 요영구인민들은 우리에게 기장떡도 해주고 메밀국수도 눌러주었다. 저녁에는 아동단원들을 내세워 공연도 해주었다.


《김일성부대에 대한 소문이 벌써 몇달전부터 돌았습니다. 남만에 나갔다가 북만에 들어와서 돈화와 액목을 쳤다는 소식도 다 들었습니다.

우리 고장사람들이 김대장부대를 눈이 까매서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더 든든해집니다.》

공연이 끝난 다음 군대와 인민이 한데 어울려 오락회를 하고있을 때 내곁에서 그 광경을 눈물겹게 바라보고있던 왕청 1구당위원회 조직부장 리웅걸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와 함께 오락장을 떠나 구당위원회 사무실에서 유격구사업을 장시간 론의하였다. 론의의 초점으로 된것은 전각루와 같은 고장들에서 우리의 당조직과 혁명조직들을 어떤 방법으로 확대해나가겠는가 하는것과 유격구의 전체 인민을 어떻게 무장시키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의 담화가 유격구보위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무르익어가고있을 때 적구에서 통신원 한사람이 비밀쪽지를 가지고 요영구로 찾아왔다. 그 쪽지에는 래일 대홍구에 주둔하고있는 일본수비대놈들이 유격구를 《토벌》하게 될것이라는 내용의 짤막한 글이 적혀있었다.

《지난해 섣달에 얻어맞은 분풀이를 하려고 올테지요. 저 악귀같은 놈들이 글쎄 수천리길을 걸어온 귀빈도 몰라봅니다그려. 우린 사실 김대장부대를 여기서 며칠간 푹 쉬다 가게 하려고 했는데 정말 일이 공교롭게 됐습니다.》


리웅걸은 마치 일본군이 요영구를 《토벌》하러 오게 된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라도 한것처럼 송구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 되였다는게 무슨 말입니까. 몇달동안 싸움을 하지 못해서 모두들 손이 근질거리던 판인데 마침 잘됐습니다. 대감자와 전각루, 덕원리, 삼한리 참변에서 우리 인민이 흘린 피값을 받아낼 기회가 온것 같습니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나서 리광에게 부대를 데리고 요영구에 속히 와달라는 련락을 보냈다.


리웅걸도 등이 달아서 마라초를 연방 태우다가 오락회장에 있는 적위대장을 불러들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표정을 살펴보니 총동원령이라도 당장 내릴듯한 기상이였다.

나는 리웅걸의 팔소매를 잡고 웃으면서 그를 걸상에 끌어다 앉히였다. 《웅걸동무, 적위대원들에게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그러는게 아닙니까? 오락회가 절정에 이른것 같은데 흥이 다 깨질수 있으니 그냥 놀게 놔두시오. 그대신 한시간후에는 적위대원들을 모두 집에 보내여 새벽까지 푹 재웁시다.나도 오늘밤에는 우리 동무들을 일찍 재우겠습니다.》



《토벌대》의 기습계획을 알리는 긴급통보앞에서 우리가 인차 림전태세를 취하지 않고 군민의 오락회가 계속되도록 태연스럽게 방임해둔것은 사실 군사실천상의 견지에서 볼 때 상식에 어그러지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구당위원회에서 조직부장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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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구당위원회에서 조직부장직과 함께 군사문제까지 책임지고있는 리웅걸이 초조해하며 불안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본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하지만 나는 대원들이 오락회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들에게 적구에서 온 통보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려로에 지친 대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투정황이 일단 제시되고 명령이 하달되면 어떤 철심장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있었다.
(오늘밤만은 제발 수면시간을 침해하지 말자. 이 겨울에 그들이 잠인들 제대로 잤는가.)
이것이 그날밤 나를 사로잡은 생각이였다. 유격대를 령솔하는 지휘관으로서는 삼가해야 할 그런 인정이라고나 할가. 어쨌든 밤 11시까지는 모든 대원들이 숙소에 돌아가 잠에 골아떨어졌다.

우리의 길안내를 담당했던 전각루의 반일회원과 적구에서 온 련락원은 나의 처사가 미타해서인지 자정이 지난 다음에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리웅걸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치락거리였다.
나는 그에게 귀속말로 넌지시 물었다.
《아까 행군을 해오면서 보니까 요영구어귀의 앞뒤 고지들이 묘하게 생겼던데 싸움을 거기서 벌리면 어떻겠소? 그 앞으로 자동차길이 나있지?》
내가 이런 말을 꺼내자 리웅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북구 서산말입니까. 그곳이야말로 싸움을 해볼만한 금성탕지이지요.》
나와 리웅걸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간것은 새벽 4시경이였다.

얼마후 우리는 요영구의 관문이라고 할수 있는 대북구 서산으로 올라갔다. 적위대장과 전각루에서 온 반일회원도 우리와 동행하였다. 서산남쪽은 절벽이였는데 바로 그 밑으로 자동차길이 나있었다. 자동차길과 평행으로 뻗은 강을 소통구라고 불렀다. 서산고지에는 바위돌들이 많았다.
그 바위돌들은 유격대가 의지하여 싸울수 있는 훌륭한 천연방어축성물들이였다.
우리는 벼랑과 벼랑사이에 여러개의 돌무지를 쌓아놓은 다음 요영구적위대병력과 우리 부대 대원전원, 별동대의 일부 성원들을 모두 서산으로 불러올리였다. 그리고는 언땅을 파서 진지를 만들게 하고 전투명령을 하달하였다.

우리가 차지하고있는 이런곳을 선조들은 금성탕지라고 하였다. 방비가 철통같이 튼튼한 성지라는 뜻이다. 공격자에겐 불리한곳이지만 방어자에겐 얼마나 유리한 명당인가. 그러나 금성탕지도 좋지만 나는 동무들의 솜씨를 더 믿는다. 동무들, 참변의 노래만 부르지 말고 오늘은 우리 인민이 흘린 피의 대가를 몇백배로 받아내자! 피는 피로써!
나의 전투명령은 이런 선동연설로 끝났다.

그날 4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요영구골안으로 쳐들어오던 80여명의 일본군은 우리의 매복전술에 걸려들어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였다.
대홍구의 일본수비대는 다음날도 있는 무력을 총동원하여 요영구로 쳐들어왔으나 무리죽음을 내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간도지방의 유격구역에 와서 우리가 치른 첫 전투였다. 력사책에는 아마 요영구유격구방위전투라고 기록되여있을것이다.

다음날 저녁 요영구사람들은 대북구마을에서 전투승리를 기념하는 경축행사를 조직하였다. 이 행사가 지금도 내 인상에 남아있다.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한명씩 나가서 주먹을 휘두르며 축하연설을 하였는데 그 열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나도 물론 그날밤 격조높은 연설을 하였다.

내가 요영구에서 오진우를 만난것이 아마 그해 겨울이던지 그 전해 가을일것이다. 그때 소북구마을 인민들은 오진우가 아동단지도원으로 활동하고있던 아동단학교에서 우리에 대한 환영회를 열었다.
오진우는 그 환영회때 내가 38식보총을 짚고 연설하던 광경이 제일 인상이 깊었다고 하면서 나와 처음으로 상봉하던 때를 종종 감회깊이 회상하군하였다. 그 당시 그의 나이가 15살인가 16살쯤 되였던것 같다.

그때 그는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찬 싸창을 자꾸 만져보았다. 총이 몹시 탐나는 모양이였다. 우리가 휴대하고있는 무기는 모두가 38식보총이 아니면 성능이 높은 최신식권총들이였다.
나는 오진우에게 유격대에 들고싶은가고 물었다.
그는 들고싶은데 나이가 어리다고 하면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였다.
우리는 다음해였던지 그 다음해인지 그를 왕청4중대에 받아들이고 북만원정에도 참가시키였다.

우리가 요영구에서 적들을 물리치고 유격구의 당사업과 군중단체들의 사업까지 료해하고나서 소왕청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있을 때 마침 그곳에서 중요한 군사문제를 두고 상론할 일이 있으니 마촌으로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별이 왔다.
우리는 인차 요영구를 떠났다.
우리가 소왕청에 도착하였을 때 나를 맞이한것은 왕윤성과 그밖의 다른 두 사람이였다. 왕윤성을 일명 마영이라고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본명보다도 그를 《왕다노대》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렀다. 《왕다노대》란 머리가 유별나게 크다는 뜻이다.

나는 《따거우재》를 비롯한 유격구간부들의 안내로 마촌북쪽 산기슭에 있는 리치백로인네 집에 숙소를 정하고 거기에서 동만당대표들을 만났다.
《따거우재》란 리용국의 별명인데 키꺽다리라는 뜻이다. 그 당시 그는 왕청현당에서 서기로 활동하고있었다. 마촌에 《류동객장소》라고 부르는 독신자들의 합숙이 있지만 수용인원이 많고 번잡하여 머무를곳이 못된다고하면서 소왕청사람들은 나를 한사코 리치백로인네 집에 있게 하였다. 리치백은 김중권의 장인되는분이였다. 그 로인의 부인을 서성녀라고 하였다.

리치백로인네 가정은 온 일가가 혁명을 하는 애국적인 가정이였다.
나는 이 집에서 다부산자를 입고 왕윤성일행과 담화를 하였다.
《왕청입성을 축하합니다!》
이것이 《왕다노대》의 첫 인사말이였다.
《다시 만나게 되여 반갑습니다!》
나도 그의 손을 틀어잡고 반갑게 답례하였다.
왕청과 같이 서름서름한 고장에 와서 왕윤성과 같은 구면의 혁명가를 만난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행운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내가 《왕다노대》를 맨 처음으로 만난것은 남만진출을 끝내고 안도에 돌아와 반일부대와의 사업에 부심하고있던 때였다. 그때 왕윤성은 진한장과 함께 맹탄장부대에서 구국군공작을 하고있었다.
북만일대에 있던 맹탄장부대가 안도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목적은 료녕일대의 당취오자위군과 련계를 가지고 그들과의 합작을 성사시키자는데 있었다. 구국군부대에서 오의성과의 사업을 하고있던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북만항일군의 련합을 통하여 만주전역에서 반일투쟁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오의성이 안도에 맹탄장부대를 보낸 다른 하나의 목적은 아편을 입수하여 군자금을 충당하자는데도 있었다. 안도일대는 아편과 인삼의 주요한 산출지였다. 당취오도 부하들을 파견하여 안도의 아편을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만주지방에서는 아편이 돈을 대신하는 위력한 등가물로 인정되고있었다.
《구국군이 돈화와 액목에서 김일성동지네 부대와 함께 성시를 칠수 있은것은 아편덕이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안도에서 아편을 대량 구입하여 나누어준것이 대원들의 사기를 올리는 계기로 되였거든요.》

리광의 집에서 반일병사위원회를 할 때 왕윤성은 롱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그때 벌써 이런 비밀을 서슴없이 터놓을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가 되였었다.
왕윤성은 안도에 체류하는 기간 우리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내가 호진민이나 주보중한테 보내는 련락도 그가 하였고 주보중이나 호진민이 나에게 보내는 련락도 그가 맡아주었다. 왕윤성은 구국군부대에서 선전간사의 간판을 가지고있었기때문에 사령부는 말할것도 없고 련대부나 대대부, 중대부 같은데를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었다. 그는 나와 구국군에 파견된 공산당원들사이에서 전달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사범학교계통출신의 인테리들이 대체로 그런것처럼 왕윤성도 허우대는 크지만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선량하였다. 그는 녕안에서 사범학교를 다닐 때 베이징, 남경, 천진과 같은 대도시들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동창생들의 영향을 받아 혁명활동을 시작한 사람이였다. 그가 직업적인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반성위의 영향도 컸다고 한다.

《동만에서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한 지금 김일성동지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큽니다. 당사업, 유격대사업, 구국군과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동만혁명이 유능한 전략가들을 필요로 하고있는 때에 김일성동지가 왕청에 온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는 동만과 북만에서 벌어지고있는 여러가지 사변들에 대하여 비교적상세한 분석을 하였으며 동만당앞에 제기되고있는 당면문제들을 두고 나와 함께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을 하였다. 이날의 론의에서 절박한 문제로 상정된것은 각 유격구역들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는 중대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세우고 군사력량을 질량적으로 시급히 확대강화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후 동장영과도 구체적인 협의를 하였다.

이렇게 되여 왕청의 유격대 중대들은 대대부의 통일적인 지휘하에서 움직이게 되였다.
그후 동만의 다른 현들에서도 중대들을 총괄하는 대대들을 내오고 지휘관들을 새롭게 배치하는 개편과정을 거쳐 유격운동의 본격적인 활성기를 준비하였다.
우리의 왕청입성은 이처럼 인상적인 세부들과 사건들로 가득차있었다.
얼마 안있어 우리는 인차 왕청풍토에 익숙해질수 있었다. 활동무대와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항시적으로 느끼군하던 서먹서먹한 감정은 인차 새 고장에 대한 애착과 호기심으로 바뀌여졌다.

1933년 당시의 나는 사실상 혈혈단신이나 다름없는 몸이였다. 어머니의 상실은 우리 삼형제를 고아로 만들었고 그 삼형제의 보금자리였던 소사하 갈밭부락의 정든 집에 거미줄을 내리게 하였다. 나에게 남은것이란 남의 집에서 눈치밥을 먹고있는 두 동생과 가고싶어도 마음대로 갈수없는 고향집의 지붕밑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나라에 바치고 쓸쓸히 살아가고계시는 조부모님들뿐이였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무시로 떠오르는 그 고향에 대한 애잡짤한 향수뿐이였다. 조부모님들에게 바치고싶은 나의 효도는 고향집 토방에까지 가닿을수 없었고 동생들을 돌보아주고 쓰다듬어주고싶은 나의 욕망은 속절없는 걱정으로만 남아있을뿐이였다.

이제 내가 정을 기울일곳이란 유격구밖에 없었다. 유격구의 인민은 나의 조부모, 나의 부모, 나의 동생들을 대신하게 될 혈육이였다. 나는 서성녀어머니의 모습에서 곧 우리 어머니의 인덕과 사랑과 은정을 되찾았다.

적들의 항시적인 봉쇄와 거듭되는 《토벌》속에서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은 처음부터 중중첩첩한 시련의 고비들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싸움도 많이 하고 피도 많이 흘리고 고뇌도 많았던 잊지 못할 력사의 땅 왕청, 어떤 날은 한 유격구에서 희생자가 수십명씩 나기도 했고 어떤 날은 주민가옥들과 병실들이 수십채씩이나 불에 타버리기도 했다. 병원들은 부상자들과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어데서나 겪게 되는 식량의 결핍,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기근은 숱한 아사자를 내였다. 때로는 전염병 때문에 간도전역이 무리죽음의 선고를 받기도 하였다.

상점도 없고 시장도 없고 장사군도 없는 세계유일의 비상업지대, 여기서는 화페가 통용되지 않았고 가치법칙이 은을 내지 못하였다. 주민들의 옷과 신발은 군대의 전리품으로 충당하였다. 좌경의 전횡으로 유격구의 공기는 이따금씩 불안에 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근거지의 생활에서 주되는것이 아니였다. 유격구의 생활에서 주도적흐름을 이룬것은 비록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띤것이기는 하지만 적의 폭압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자유롭고 행복한 새 생활과 락천적인 정신상태였다. 곤난은 막심하였으나 군민의 기상은 백두의 메부리처럼 도도하였다. 일본과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는 이 절해고도와 같은 땅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문화와 도덕을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유격근거지를 사랑하였다.
근거지를 고수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영웅적미거는 동만땅에서 매일처럼 발현되였다.
싸움속에서 해가 뜨고 싸움속에서 날이 저무는 북간도오지,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속에서도 새 생활, 새 륜리의 고고지성이 우렁차게 울리는 유격근거지는 내가 사랑하는 집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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