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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3-2. 상월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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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32회 작성일 15-03-15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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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 월 선 생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준 선생이 박소심이라면 고리끼의 《어머니》와 《홍루몽》을 소개해준 사람은 상월선생이였다. 상월선생은 육문중학교의 어문교원이였다.


상월선생이 육문중학교의 교원으로 부임되여온 얼마후였다. 베이징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새 어문교원이 학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어문시간을 기다리였다.

그러나 신임교원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한가닥의 불안도 없지 않았다. 교육청이 특무를 어문교원으로 배치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였다. 교육청이 파견하는 육문중학교 교원들가운데는 군벌당국에 매수된 불순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는 장학량이 장개석의 지령에 따라 만주땅에 국민당기발을 날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장개석의 특무조직들이 벌써 심양으로부터 길림에까지 손을 뻗치고있었다. 국민당의 졸개들이 아직 육문중학교를 완전히 자기네 수중에 장악하지 못하였지만 혁신사상이 강한 이 학교 교직원, 학생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군벌과 그 앞잡이들의 주시속에 있었다.

이런 때에 새 교원이 배치되여왔으므로 학생들은 신경을 잔뜩 도사리고 어문시간을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


상월선생은 단 한번의 강의로 학생들의 경계심을 해소시켜주고 우리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는 120회에 달하는 《홍루몽》의 방대한 줄거리를 한시간사이에 다 소화시키였다. 본질을 추리고 거기에 중요한 생활세부들을 끊임없이 섞어가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솜씨가 얼마나 세련되였는지 우리는 그 소설이 가지고있는 생리와 가부장적전통이 지배하는 한 귀족가문의 조락과정을 순간에 완전히 파악할수 있었다.

상월선생이 수업을 끝내고 교실에서 나가자 학생들은 육문중학교에 보배가 굴러들어왔다고 하면서 환성을 올리였다.


그런데 선생이 《홍루몽》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면서도 그 소설을 창작한 작가에 대해서는 적게 소개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운동장둘레를 산책하는 상월선생을 찾아가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생은 시간의 부족으로 하여 작가의 경력은 생략하고 지나갔는데 내가 그런 요구를 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조설근의 생애와 집안래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선생의 설명이 끝난 다음 나는 그자리에서 작가의 출신과 작품의 계급적성격간의 호상관계를 두고 몇가지 질문을 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선생은 자기의 개인적인 소신이라고 전제를 두면서 작가의 출신이 작품의 계급적성격에 영향을 주는것은 사실이지만 그 성격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은 출신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말하였다. 그 실례로 그는 바로 조설근을 들었다. 그가 강희제의 특별대우를 받는 귀족가문에서 태여나 부유한 환경속에서 자라났지만 붕괴기에 있는 봉건중국의 내막과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형상적으로 보여줄수 있은것은 세계관이 진보적이였기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날 상월선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성주학생이 오늘 나를 찾아온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의문되는것이 있거나 해명하고싶은것이 있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지체없이 교원의 방조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탐구하는데서 학생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때와 장소에 구애되지 말고 질문을 많이 제기하라. 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들을 좋아한다.》

질문을 많이 하라는 상월선생의 그 말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원래 나는 소학교시절부터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으로 알려져있었다. 육문중학교에 와서도 질문을 많이 하여 교원들을 성가시게 굴었다.


상월선생은 자기에게 《홍루몽》도 있고 조설근의 략력을 발취해놓은 자료집도 있으니 보고싶거든 아무때나 와서 가져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첫 손님으로 선생의 숙소를 방문할수 있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늘 학생이 선생의 집에 들락날락하는것은 장려할만 한 일이 못된다고 말씀하였다. 서당에서 《동몽선습》같은것을 배우며 성장한 구세대의 인물들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신식학문의 덕으로 개명을 했다는 어른들가운데도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생이 선생의 뒤생활을 자주 엿보게 되면 스승을 신비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선생은 언제나 학생이 스승을 밥도 먹지 않고 오줌도 누지 않는 신선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교권을 세울수 있다, 그러자면 병풍을 치고 살아야 한다는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였다.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서당공부를 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고 말씀하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순화서당에 김지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훈장이 있었다. 그 훈장은 술이라면 감투가 벗어진줄도 모르는 애주가였다. 그는 사흘이 멀다하게 접장(지금의 학급반장)을 하는 우리 아버지에게 술심부름을 시키였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고분고분 훈장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훈장이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도랑창에 쓰러진것을 보고난 다음부터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였다.


어느날 훈장은 되병 한개를 우리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며 또 술을 사달라고 부탁하였다. 서당문을 나선 아버지는 바위돌에 되병을 던져 박살내고 훈장한테 돌아가 범한테 쫓기다가 돌에 넘어져 술병을 깼다고 거짓보고를 하였다. 훈장은 그 소리를 듣고 어이가 없어 《허허, 백두산범이 만경대에까지 내려왔나. 형직이가 나한테 대포를 불지경이 되였으니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추접스럽게 보였을가. 너희들한테 술심부름을 시킨 내가 잘못이지.》하였다. 그후부터 훈장은 술을 끊었다.


훈장은 술과 결별하였지만 아버지의 머리에는 개울창에 쓰러져 술내를 풍기던 선생의 모습이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 병풍을 치고 살아야 교권을 유지할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지론은 이런 사연에 바탕을 두고있었다.

나는 상월선생이 병풍을 칠 사이도 없이 아직 그 누구에게도 개방해보이지 않았다는 선생의 생활종심에로 풍덩 뛰여들었다.


선생의 서가에는 수백권의 책이 꽂혀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보아온 서가들중에서도 가장 풍성하고 이채로운 서가였다. 상월선생은 책부자였다. 그 서가에는 영문으로 된 소설책들과 전기문학작품들도 많았다.

나는 그 서가앞에서 좀처럼 발길을 뗄수 없었다. 이 서가의 지식을 다 섭취하면 대학을 하나쯤 더 다닌것으로 되지 않을가, 상월선생이 육문중학교에 온것은 나를 위해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대로 뽑아보다가 선생에게 물었다.

《실례이지만 선생님, 이 서가를 갖추는데 몇해나 걸렸습니까?》

상월선생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서가앞에 다가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10년쯤 걸린것 같애.》

《이 책들을 다 읽는데는 얼마만큼한 시간이 걸릴것 같습니까?》

《부지런하면 삼년, 게으르면 백년.》

《선생님, 삼년을 기한으로 제가 이 책들을 다 읽는다면 저에게 서가를 개방해주시겠습니까?》

《개방하지. 그런데 조건부가 있소.》

《책만 빌려주신다면 어떤 조건부든지 다 접수하겠습니다.》

《다른게 아니구 성주가 장차 작가로 되여야 한다는 조건부야. 나는 오래전부터 프로레타리아혁명에 이바지할수 있는 작가후비를 한두명 키우려고 했는데 성주가 그 후비중의 한사람이 될수 없겠는가 하는거요.》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저를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전 문학과목을 특별히 사랑하고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몹시 동경하고있습니다. 나라가 독립된 후에는 혹시 문학의 길을 선택하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희들은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의 자식들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나라를 찾으려고 한평생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장차 독립투쟁에 몸을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최대의 리상이구 포부입니다.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 곧 저의 직업으로 될것입니다.》


상월선생은 서가에 기대여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방 끄덕이다가 내곁에 다가와 어깨우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장하오, 성주! 독립투쟁이 리상이라면 나는 그 리상을 조건부로 이 서가를 성주에게 통채로 개방하겠소.》

나는 그날 《홍루몽》을 빌려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상월선생이 나에게 두번째로 빌려준 책은 장광자의 소설 《압록강가에서》와 《소년방랑자》였다.

나는 이 두 소설을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리맹한과 운고라는 조선의 청춘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압록강가에서》는 특히 나에게 잊을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

그후에는 고리끼의 《어머니》를 빌려보았다.

우리는 이렇게 책과 문학을 통하여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였다.


상월선생은 내가 요구하는 책이면 무엇이든지 다 빌려주었다. 자기의 서가에 없는 책은 품을 내여 다른데 가서 구해다주었다. 선생은 책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나에게서 독후감을 꼭꼭 들어보군 하였다.

우리는 고리끼의 작품 《원쑤들》과 로신의 소설 《축복》을 두고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는 과정에 나와 상월선생은 자연히 문학에 대한 견해를 자주 교환하였다. 우리의 담화에서 초점을 이룬것은 문학의 사명에 대한것이였다. 우리는 문학이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사회의 발전을 어떻게 추동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월선생은 문학이 인류를 지성에로 인도하는 등불이라고 하였다. 기계가 생산의 발전을 추동한다면 문학은 그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인격을 완성시켜준다고 선생은 늘 말하군 하였다.

상월선생은 로신과 그의 작품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하였다. 선생은 로신의 문우였고 로신이 지도한 문학소조의 한 성원이였다. 선생이 소조활동을 할 때 쓴 단편소설 《도끼등》은 로신한테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소설은 봉건유습을 반대하는 라산지방 인민들의 투쟁을 담고있었다. 상월선생의 딸 상효원의 말에 의하면 로신은 《도끼등》을 읽고 예리성이 부족한것이 흠이라고 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불만도 표시하였다고 한다.


상월선생은 초기의 창작에서 나타난 미숙성을 극복하고 1930년대에는 《예모》와 같이 사상예술적으로 세련된 작품을 창작하여 독자대중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 장편소설은 그 당시 운남성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련재되였다. 1980년대에 중국인민문학출판사에서는 《예모》를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상월선생은 《예모》, 《도끼등》 외에도 장편소설 《창》과 《개문제》를 창작하여 독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선생은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도 작가적사색을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다. 선생이 초기에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하려고 생각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나는 상월선생한테서 《진독수선집》까지 빌려다보았다. 진독수는 중국공산당창건자의 한사람이며 중국당의 실권을 장악하고있던 사람이였다.

상월선생은 처음에 그 책을 잘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자칫하면 진독수의 우경적투항주의로선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수도 있다는것이였다. 선생은 자기가 베이징대학을 다니기 전에 진독수가 그 대학에서 문학부장으로 활동하였는데 많은 교직원, 학생들이 그가 자기네 대학출신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있었다고 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한동안은 진독수를 숭배하였소. 그가 발간한 〈신청년〉잡지와 그의 초기론문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반해버렸더랬지. 그런데 지금은 진독수에 대한 나의 견해에도 변화가 생기였소.》


상월선생은 이렇게 고백하면서 5.4운동시기와 공산당창당초기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진독수의 인기가 여지없이 폭락된것은 그가 우경기회주의로선을 제창하였기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진독수의 기회주의적오유는 농민문제에 대한 립장과 태도에서 가장 우심하게 나타나고있었다. 쓰딸린은 벌써 1926년에 농민은 중국의 반제국주의전선에서 기본력량이며 로동계급의 가장 주요하고 믿음직한 동맹군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진독수는 농민을 경시하였다. 그는 농민이 토호출신들과 충돌하는것을 두려워하면서 농민이 행정을 간섭하는것과 농민의 적극적인 자위를 반대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농민투쟁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진독수의 오유는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구실밑에 농촌혁명을 반대하면서 부르죠아지가 혁명전선에서 떨어져나갈가봐 두려워한데 있다, 그의 투항주의적로선은 오히려 혁명에 대한 부르죠아지들의 배신을 조장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것이 진독수에 대한 상월선생의 견해였다.


선생이 정당하게 말한바와 같이 진독수의 글들에는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줄수 있는 투항주의적요소들이 있었다.

나는 《진독수선집》을 읽은 다음 상월선생과 함께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를 나누기 위한 장시간의 담화를 하였다. 그 담화과정에서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에서 농민문제가 차지하는 위치의 공통성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이겠는가, 농민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략에서 참고할 점은 무엇인가, 농민이 혁명의 주력군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하는것들이 이야기되였다.


나는 농사가 천하지대본인것처럼 농민을 천하지대군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상월선생은 그 말을 긍정하면서 농민을 경시하는것은 곧 농사를 경시하고 땅을 경시하는것으로 되기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리념을 가진 혁명을 하여도 실패를 면치 못하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진독수의 오유가 바로 이 리치를 망각한데 있다고 부언하였다.


나는 이런 담화까지 하고나서 상월선생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동시에 상월선생도 내가 공청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선생의 감수성과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상월선생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지도하다가 국민당반동군벌에게 체포된 선생은 절강성륙군감옥에서 1년 남짓하게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후 그는 조선인군의의 도움으로 보석출옥한 후 사중무라는 이름으로 변성명을 하고 만주지방에 와서 초도남이란 사람의 소개를 받아 길림육문중학교에 입직하였다.


농민문제에 대한 견해를 교환한 다음부터 나는 상월선생과 함께 정치문제에 대한 론의를 자주 하였다. 그 당시 길림의 청년학생들속에서는 정치론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있었다. 중국도 대혁명시기이고 조선도 대중운동이 앙양되고있던 시기여서 론쟁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문제점들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조선청년들속에서 리준의 방법이 옳은가, 안중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화제에 올라 격렬한 론쟁을 불러일으키던 시기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많은 청년학생들은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절대적인 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나는 상월선생에게 안중근의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상월선생은 그때 안중근의 소행은 물론 애국적이다, 하지만 투쟁방법은 모험주의적이라고 말하였다. 선생의 그 대답은 나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나는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은 결코 큰 군벌의 앞잡이 한두명을 처단하는 테로적방법으로는 승리할수 없으며 반드시 인민대중을 교양하고 각성시켜 전민을 궐기시킬 때에만 목적을 달성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상월선생과 함께 일제의 조선침략력사와 조선에서의 식민지정책, 만주에 대한 일제의 침략기도와 군벌들의 동향, 반제반침략투쟁에서 조중인민의 단결과 협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도 의견을 나누었다.


그때 당시 육문중학교 학생들은 군비축소와 관련된 《국제련맹》의 태도를 두고 많은 론의를 하였다. 학생들가운데는 《국제련맹》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말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국제련맹》이 군비축소문제를 가지고 가짜흥정을 한다는 론문을 써냈다. 많은 학생들이 그 론문을 지지하였다. 상월선생도 그 글을 보고 나의 견해가 옳다고 말하였다.


상월선생은 길림에 온 후 공산당과의 조직선이 끊어진 상태에 있었지만 고리끼, 로신 등 진보적작가들의 작품을 가지고 그것을 해설하는 계몽식강의를 여러차례에 걸쳐 하였다. 언제인가는 비밀독서조성원들의 제의를 받고 학교도서실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자》는 제목으로 한주일동안 특별강의를 해주었다. 이 강의를 받은 학생들의 반영이 대단히 좋았다.

나는 그 반영을 수집하여 상월선생을 고무해주었다.


사상의 진보성과 후대교육에서의 높은 책임성, 동서고금의 문화와 력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있는 지식으로 하여 상월선생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군벌당국에 매수된 반동교원들은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상월선생의 교권을 허물어보려고 비렬하게 책동하였다. 상월선생의 비호와 지지를 받는 학생들도 그들이 모해하고 시샘하는 대상이 되였다.


풍가성을 가진 교원은 리광한교장에게 조선학생들을 퇴학시키라고 위협하였고 체육주임 마가는 조선학생들이 중국교원들을 적대시한다고 하면서 나를 반대하는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꾀하였다.

그때마다 상월선생은 나를 비호해나섰다.

영어교원도 새 사조를 지향하는 학생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그 교원은 사대주의사상이 골수에까지 꽉 들어찬 사람이였다. 그는 동양사람들을 깔보다 못해 서양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데 중국사람들은 소리를 몹시 낸다고 하면서 그것은 미개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국사람이면서도 서양인처럼 행세하였다.


그가 동양사람들의 후진성을 두고 야비한 말을 너무도 많이 하는것이 우리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식당당번을 서는 날 일부러 우동을 만들어놓고 식당에 교원들을 초대하였다. 뜨거운 우동을 먹다나니 그날 식사시간에는 온 식당안에 후르륵후르륵하는 소리가 가득찼다. 영어교원도 후르륵후르륵하는 소리를 내면서 우동을 먹었다. 선생이 입으로 불면서 힘들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식당이 떠나가게 웃었다. 영어교원은 학생들이 자기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우동을 만들었다는것을 간파하고 얼굴이 시뻘개서 식당에서 달아나버리였다. 그후부터 그는 동양사람들을 모독하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그 선생이 사대주의를 너무 하기때문에 육문중학교 학생들은 영어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상월선생에 대한 반동교원들의 압력은 1929년에 들어와서 더욱더 우심해졌다.

한번은 상월선생이 체육은 선수본위로 하는것보다 군중화할수록 좋다는 선전을 하였다. 그것은 학교운동장에 있는 롱구장을 선수들만 독점하는 현상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이였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불량선수들은 방과후 숙소에서 교사로 돌아오는 상월선생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무리로 달려들었다.


나는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발동시켜 불량선수들의 폭행을 미연에 저지시키고 그들을 되게 꾸짖어 쫓아버리였다.

《마체육주임이 졸개들을 잘 길러냈군. 벌거지만도 못한 녀석들.》

상월선생은 꽁무니를 빼는 불량선수들을 덤덤히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하였다.

《선생님, 너무 놀라실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계급투쟁의 한 형태가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이보다 더 첨예한 충돌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내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선생은 그 말을 수긍하였다.

《그래, 옳은 말이야. 우리는 지금 군벌과의 싸움을 하고있으니까.》

상월선생은 그후 교육청의 조치에 따라 부당하게 출학처분을 받은 학생들의 복교를 위해 투쟁하다가 철직되여 육문중학교를 떠나갔다.


장춘과 카륜지방에 가서 대중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고 학교에 돌아오니 권태석이 뛰여와서 상월선생이 남기고간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편지에는 나는 군벌과의 싸움에서 패자가 되여 떠나간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군벌을 이기게 될것이다, 조국과 민중의 참된 아들이 되여 한생을 살기로 결심한 성주의 리념을 위해 나는 어디 가서나 성주에게 다함없는 축복을 보낼것이다라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남긴 상월선생의 마지막대화였다.


그후 나는 상월선생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다만 선생이 1955년에 나에게 보내준 글 《나와 소년시절의 김일성원수와의 력사적관계》와 1980년에 보내준 《중국력사강요》를 받아보고 선생이 생존해있다는것을 짐작하였을뿐이다. 나는 그때 그 글을 보고 상월선생과 함께 조선정세와 만주정세, 일제의 침략정책과 조중인민의 공동투쟁을 론하던 육문중학교시절을 회고하면서 로스승에게 충심으로 되는 마음속감사를 드리였다.


나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우리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그들에게 상월선생의 안부를 묻군 하였다. 하지만 선생과의 상봉은 아쉽게도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나로서는 옛 제자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이 옳을것이다. 국경이란 참으로 이상야릇한것이다.

상월선생은 베이징에 있는 중국인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2년에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1989년에 중국과학원 력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있는 상월선생의 맏딸 상가란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고 1990년에는 셋째딸 상효원이 나를 만나보고 돌아갔다. 상효원은 중국인민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60년전에 헤여졌던 스승의 모습을 그 두 딸의 얼굴에서 찾았을 때 나는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민족이 다르다고 정까지도 달라지겠는가. 사람의 정은 피부와 언어와 신앙의 장벽을 모른다. 만일 육문중학교교정이 가까이에 있다면 나는 그 교정에 만발하는 정향나무꽃잎들을 한줌가득 뜯어주며《이것이 너희들의 아버지가 사랑하시던 꽃이다. 상월선생과 나는 이 꽃나무밑에서 자주 만났다.》하고 말해주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길림을 떠난 상월선생은 할빈, 상해, 베이징, 한구, 중경, 녕하, 연안 등지에서 당사업과 교육사업, 문화사업, 문필사업에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한때는 만주성당위원회에서 비서장으로도 사업하였다고 한다.

그는 생애의 말년까지 나를 잊지 않았으며 중국의 친근한 린방인 나의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국제주의적감정에 충실하였다.


상월선생의 유해는 지금 베이징의 팔보산렬사릉에 안장되여있다.

사람에게 한생을 두고 회고할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그사람은 분명 행복한 인간이다. 그러니 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의 청춘시절에 지울수 없는 자국을 새긴 상월선생이 그리워질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육문중학교 교정을 거닐어보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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