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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세기와 더불어 19-4. 왕촌장과 왕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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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255회 작성일 15-1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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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촌장과 왕서장


1930년대 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준 중국의 벗들중에는 적기관복무자들인 두명의 왕씨도 있었다. 한 왕씨는 림강현 대황구에서 촌장노릇을 하였고 다른 한 왕씨는 림강현 가가영이라는곳에서 위만경찰분서의 분서장으로 있었는데 그고장 주민들은 그를 그저 왕서장이라고 불렀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을 말단행정에서 직접적으로 집행하던 두 왕씨가 어떻게 되여 조선인민혁명군과 련계를 맺게 되였고 나중에는 항일혁명의 동조자, 지지자로까지 되였는가. 그 두사람에 대한 공작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중일전쟁발발후 친히 포치하신 정치사업의 하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왕촌장과 왕서장을만나신것은 각각 한번뿐이였다. 그러나 수령님께서는 수십년세월이 흐르도록 그들을 잊지 않고계시였다.

나에게 왕촌장에 대한 말을 처음으로 해준 사람은 8련대 1중대 정치지도원 주재일이였습니다. 그가 림강현 대황구에 적구공작을 나갔다가 돌아와 대황구일대에서 조국광복회 조직을 확대하자면 왕촌장부터 쟁취해야겠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주동무에게 왕촌장의 래력을 이야기해준 사람은 전에 그가 화룡현 삼도구 우심산이라는곳에서 당지부서기로 활동할 때 입당시킨 조직원이였습니다. 그 조직원이 정체가 로출되여 화룡땅에 더 배겨있을수 없는 처지에 있었기때문에 당조직은 그를 림강현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림강현에는 그 조직원의 친척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직원은 대황구근처에 농막을 하나 얻어가지고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있었으나 림강현에 와서도 조직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주위에 믿을만한 사람들을 묶어세우고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당지부서기였던 중대정치지도원을 만나자 조직선을 다시 이어달라고 제기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1중대 정치지도원에게 대황구에 당장 가서 그 조직원을 다시 만나되 그가 보증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무어주고 조직선을 달아주라고 하였습니다. 중대정치지도원은 그 조직원을 다시 만나 사령부가 직접 동무의 사업을 보아주게 되니 마음놓고 조국광복회 조직을 늘여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여 대황구에 우리 조직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림강현에 가서 처음으로 내온 조국광복회 조직일것입니다.

나는 1중대 정치지도원에게 왕촌장을 쟁취할데 대한 과업도 겸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촌장은 우리의 물망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대황구의 지하조직을 통하여 그를 반년이상 깊이 료해해보았습니다.

왕촌장에 대한 우리의 공작이 열매를 맺은것은 1938년 봄이였습니다.

1938년 봄이면 우리가 마당거우에서 군정학습을 끝마치고 장백으로 진출할 때였습니다. 부대의 행군로정에 대황구가 포함되여있었기때문에 나는 림강에 가면 어떻게 하나 짬을 내여 왕촌장을 한번 만나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백으로 남하하는 과정에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대황구로부터 30리쯤 되는곳에 이르렀을 때는 식량마저 떨어져 행군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대원들도 몹시 피곤해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는 부대를 데리고 장백으로 나갈수 없었습니다. 대원들에게 먹을것을 주어야 행군도 하고 싸움도 하겠는데 식량이 한되박도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투를 해서 식량을 로획했으면 좋을텐데 대원들은 모두 지쳐서 싸움은커녕 몸도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였습니다. 내가 왕촌장에 대한 공작을 한매듭 지어야겠다고 생각한것은 그때였습니다. 왕촌장과의 사업만 잘하면 식량도 해결할수 있을것이고 우리의 활동에 좋은 환경도 마련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황구옆에는 소황구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지하조직들이 위험에 처해있었습니다. 소황구의 조직도 1중대 정치지도원이 우심산에서 당지부서기를 할 때 입당시켰다는 그 사람이 관계한것이였습니다. 그 조직이 일을 잘해서 소황구뿐아니라 다른 마을들에도 새끼를 많이 쳐가고있었는데 그만 적들에게 꼬리를 잡히였습니다. 적들은 부락에 달려들어 조직원들을 마구 살해하고 집들에 불을 질렀습니다.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총에 맞아죽고 총창에 찔려죽었습니다.

학살을 면한 몇몇 조직원들과 주민들만이 살길을 찾아 대황구로 밀려왔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왕촌장에게 달려있었습니다. 그때 왕촌장은 자위단장노릇도 겸하고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립장을 가지는가에 따라 소황구 조직성원들과 피난민들이 덕을 볼수도 있었고 화를 당할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리유로 하여 나는 왕촌장을 빨리 우리의 지지자, 협조자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더하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대황구에 왕촌장과의 사업을 할 공작원들을 파견하였습니다.

공작원들은 왕촌장을 꼭 쟁취하겠다고는 하면서도 그 사람이 자위단장감투를 쓰고있기때문에 공작이 암초에 부딪치지나 않겠는가 하는것을 우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공작이 성공하리라는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내가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것은 왕촌장이 량심인이라는 판단을 내렸기때문입니다. 왕촌장이 량심인이라는것은 어디에서 표현되였는가. 그는 촌장과 자위단장으로 된후 관할지역의 인민들을 한사람도 해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나는 매우 주요한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그 당시 개인의 보신과 영달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은 자위단장이나 촌장과 같은 벼슬자리를 따기만 하면 실적을 높이려고 애국자 한두명쯤 해치는것은 식은죽먹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촌장은 그 누구를 고발하지도 않았고 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소황구에서 온 피난민들과 유가족들도 아직까지는 다치지 않고 자기의 관할구역에서 살수 있도록 눈을 감아주고있다는것이였습니다. 그가 만일 나쁜 사람이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자기네 마을에 공산당마을에서 도망쳐온 빨갱이들이 있는데 잡아가라고 고자질하거나 직접 자위단원들을 시켜 피난민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상금을 타먹었을것입니다.

일본군경들이 학살하다가 놓쳐버린 사람들을 마을에 받아들이고 그들이 안착하여 살수 있도록 돌봐준다는것은 사실 어지간한 담력이나 결심을 가지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만일 그런 사실이 들장나는 날이면 촌장자신이 엄한 제재를 받을수 있었습니다. 왕촌장은 이런것까지도 다 각오하고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할수 있었습니다.

나는 대황구로 떠나가는 공작원들에게 왕촌장은 다소간 량심도 가지고있는 사람 같다, 대담하게 접근하여 우리 유격대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목적을 잘 해설해준다면 그를 반드시 우리 편으로 돌아서게 할수 있을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대황구에 내려간 공작원들은 농막주인의 도움으로 왕촌장을 만나 우리와의 합작을 제의하였습니다. 왕촌장은 그 제의에 기꺼이 찬성하였습니다. 그는 나와의 상면까지 요구하였습니다. 혁명군이 요구하는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결해주겠으니 김일성장군을 꼭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 지휘관들은 그 요구를 들어주자거니 들어주면 안된다거니 하면서 입씨름을 많이 하였습니다. 사령부에 대한 암해공작이 빈번해지면서 지휘관들이나 대원들이 모두 신경을 바싹 도사리고있던 때였습니다.

나는 밑에서 이런 론의가 벌어진다는것을 알고 지휘관들을 설복하여 왕촌장을 우리 밀영으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내가 자기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왕촌장은 비밀리에 마을인민들을 동원하여 식량과 신발을 비롯한 많은 후방물자들을 마련해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왔습니다. 만나고보니 서른네댓살 나보이는 미남자였는데 례절도 바르고 몸가짐도 점잖고 행동거지도 활달하여 첫인상부터 마음에 푹 들었습니다.

나는 왕촌장의 가정형편과 건강상태를 두고 얼마간 대화를 나눈 다음 그가 그동안 민족적량심을 잃지 않고 지성인답게 살아온데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고 앞으로도 촌장의 간판을 가지고 우리를 더 많이 도와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일본도 만주국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당신이 차지하고있는 촌장자리는 만주국이 준 벼슬이지만 당신은 그 벼슬을 일본이나 만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하고 인민을 위하고 혁명을 위해서 최대한으로 리용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인민들을 동원해가지고 혁명군을 잘 도와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왕촌장은 내가 자기를 믿어주는데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어주시니 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일생 잊지 않고 장군님말씀대로 싸워보겠습니다.》

그는 우리한테로 올 때에 술과 안주까지 가지고왔습니다. 아주 다심하고 사교성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천막안에서 빼주를 나누었습니다. 왕촌장은 술에 이상이 없다는것을 보여주느라고 자기가 먼저 한잔 마시고 그 다음 나에게 한잔 권하였습니다.

그는 취기가 오르자 그 누구에게도 말한적이 없는 사실이라고 하면서 자기네 가정사를 터놓았습니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딱 째인 이야기였는데 다 듣고나니 눈물겨운 사연이였습니다.

왕촌장의 아버지는 동녕현에서 나서자란 만주족이였습니다. 생활이 하도 가난해서 나이 40이 다되도록 장가도 못들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마음에 맞는 녀자를 만나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덧 그들의 가정에는 귀여운 아들애가 태여났습니다. 그 애가 바로 미래의 왕촌장이였습니다. 한해두해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에 아이는 용모가 의젓하고 총명한 남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살림살이가 하도 어렵다보니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해도 키울수 없었습니다.

왕촌장의 아버지는 늘 만주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은 없을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고장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아들애를 데리고 만주를 떠나고싶었습니다. 그러던차에 그는 강동으로 돈벌이를 가던중 로비를 마련하느라고 자기네 마을에 머무르고있던 조선청년들한테서 로씨야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네 세대 사람들가운데는 로씨야를 아라사나 강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왕촌장의 아버지는 조선청년들이 마을을 떠날 때 그들과 함께 로씨야에 갔습니다.

청년들은 돈벌이를 하려고 금전판을 돌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데 모여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그들을 중심으로 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조선인부락이 하나 새로 생겨났습니다.

왕촌장의 아버지는 중국사람이였지만 거기서 조선사람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민족은 달랐지만 그들은 친형제처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아이는 그 부락에서 학교를 다니다나니 조선풍습에도 익숙해지고 조선말도 곧잘 했습니다.

그후 로씨야에서는 신구당파바람이 되게 불었습니다. 신당이란 볼쉐비크당을 말하는것이고 구당이란 백파도당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왕촌장네 마을사람들도 신구당파바람에 숱한 곡절을 겪었다고 합니다. 볼쉐비크세력이 우세하여 반혁명세력을 내쫓으면 볼쉐비크세상이 되였다가도 백파가 득세하면 하루아침사이에 마을이 백파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점차 공산당지지세력과 백파지지세력으로 갈라지고 지어는 한집안에서도 맏이가 신당파라면 둘째, 셋째는 구당파로 갈라져 옥신각신하는 란장판이 벌어졌습니다.

싸움끝에 희생자까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도 구당파들의 걸이대에 찔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의지가지할데 없는 고아의 신세가 되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를 동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당을 지지하다가 죽은 사람의 자식이여서 구당의 눈에 날가봐 누구도 그를 돌보아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구당파는 신당파의 씨종자를 말리워야 한다고 하면서 어린아이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사태가 아주 위급해졌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이를 돌보아준 사람은 동녕현에서 돈벌이를 하기 위해 로씨야로 들어갔던 조선청년이였습니다. 추운 가을날 그 청년은 아이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동녕현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로상에서 그만 마적들한테 붙들리게 되였습니다. 마적들은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아두고 돈이나 물건을 얻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애가 혈혈단신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마적의 부두령이 불쌍한 아이를 죽여서 뭘하겠는가, 조선사람은 제갈데로 가게 하고 아이는 자기 방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여 마적들에게 로비를 털리우고 아이마저 떼운 조선청년은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가고 아이는 마적의 소굴에 남아 부두령의 보호를 받게 되였습니다. 부두령이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한것은 그를 욕심냈기때문이였습니다. 어느날 밤 그는 아이를 데리고 마적의 소굴을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도망쳐간곳이 다름아닌 림강땅이였습니다. 그는 대황구의 산속에 와서 밭과 집을 사고 부자질을 하면서 아이를 양자로 키웠습니다. 부두령이 부자가 될수 있은것은 그가 마적단을 뛰쳐나올 때 집단의 공금으로 간수하고있던 거액의 돈을 그냥 가지고왔기때문이였습니다.

아이의 양아버지로 된 부두령은 산동지방출신의 왕가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양아들에게도 왕가라는 성을 달아주었습니다. 권세를 쥐여야 잘살수 있다는것이 그의 인생관이였습니다. 부두령은 양아들을 권세가로 키우기 위해 공부도 시키고 나중에는 촌장자리에까지 내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왕촌장은 양아버지의 은혜도 아주 크지만 친아버지가 죽은 다음 자기를 보호해주고 만주에까지 데리고나온 조선사람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있고 재물도 있는데 신세를 갚을 길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저 그분의 은덕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조선사람들의 불행을 동정하고 가슴아파할뿐입니다. 소황구의 피난민들중 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은인에게 절을 하는셈치구 말입니다.》

왕촌장은 이 말을 할 때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그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은인에게 절을 하는 심정으로 조선사람들을 돌봐준다는 그의 말은 나를 몹시 감동시켰습니다.

《나는 당신이 조선사람들의 불행을 동정해주고 그들을 어려운 처지에서 구원해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합니다. 의리를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은 은인을 위해서뿐아니라 인민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할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자기를 만주국을 위한 촌장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촌장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왕촌장은 우리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거듭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왕촌장이 마을로 돌아갈 때 그에게 호위원 두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우리의 벗이 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살아있다면 만나고싶은데 행처도 모르고 생사여부도 모르니 안타깝습니다.

왕서장을 쟁취한 과정도 왕촌장을 쟁취한 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왕서장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7련대 정치위원인 김평이였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은 한때 최일현이네 중대를 데리고 장백, 림강현계에 가서 소부대공작을 지도하였습니다. 각지에 소부대들을 파견하고는 그를 장악지도하면서 자기도 지방공작을 하였습니다. 그가 파견한 소부대들가운데서 한 소조는 림강현 5도구와 3도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어느날 한 대원은 소조책임자를 찾아와 가가영의 위만경찰분서때문에 소조활동이 많은 지장을 받고있는데 어떻게 하라는가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는 분서를 한번 되게 들이치고싶었던 모양입니다. 림강이나 몽강, 무송지방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가영을 거쳐야 하는데 거기에 경찰분서라는것이 떡 틀고앉아있으니 문제는 문제였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은 그 대원을 만난 다음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7련대 정치위원에게 가가영의 위만경찰분서를 장악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치는것은 언제든지 할수 있는 일이지만 후환도 생기고 오히려 시끄러워질수 있으니 대담하게 접근하여 분서를 우리것으로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며칠후 7련대 정치위원은 가가영근처의 수림속에 있는 산전막에 자기가 연길현에서 구당서기로 활동할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 있는데 그를 중개자로 내세우면 분서장과 접촉할수 있을것 같다고 했습니다. 연길현일대에서 적위대소대장까지 한 사람이니 믿을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산전막주인이 《민생단》련루자로 몰려 죽을번했을 때 구당에 있던 조선사람들이 그를 적구로 빼돌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성을 김씨라고 했던것 같습니다.

산전막주인은 가가영에 와서 짐승사냥으로 목숨을 이어가고있었는데 경찰분서장이 사냥을 즐기다나니 자연히 그와 친구가 되였다는것입니다.

나는 7련대 정치위원에게 산전막주인을 아는 사람은 동무밖에 없으니 동무가 직접 그 사람을 통해 왕서장에게 접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왕촌장을 쟁취할 때와 경위가 비슷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조직성원이 경찰과 친교를 맺는것은 드문 일이지만 있을수 있는 일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친교를 맺게 되였는가 하는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내야 왕서장에게 접근할수 있는 직통길을 낼수 있었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은 산전막주인을 만나고 돌아와서 그가 비록 유격구를 떠난지는 오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새빨갛더라고 했습니다. 군복을 벗고 사복차림으로 나타난 이전날의 구당서기를 보자 혹시 변절해서 왜놈의 밀정이 된게 아닐가 하고 경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군복을 입고다니던 사람이 사복을 입고다니면 종종 그런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이 내가 보내서 왔다는 말을 한 다음에야 산전막주인은 그를 이전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적위대에 있을 때 《민생단》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적구로 나온데 대해 몹시 절통하게 생각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7련대 정치위원에게 나를 김일성장군한테로 데리고가달라, 김장군앞에서 내가 《민생단》이 아니였다는것을 말씀드리겠으니 당신도 옆에서 그것을 보증해달라, 김장군이 나를 신임하면 나는 인민혁명군에 입대하겠다고 했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은 그에게 김장군덕에 《민생단》문제는 다 해결되였으니 당신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혁명전선에 나서서 가슴을 쭉 펴고 쇠소리가 나게 일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산전막주인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였다고 합니다.

산전막주인이 왕서장과 친교를 맺은것은 한해전부터였습니다. 그의 사냥구역에 왕서장이 이따금씩 나타나 사냥을 하였습니다. 서장은 짐승을 한두마리밖에 잡지 못했지만 산전막주인은 늘 네댓마리씩 잡군했습니다.

어느날 왕서장은 그 비결을 알고싶어 산전막에 들리였습니다. 그는 주인의 해박한 사냥지식에 감탄한 나머지 당신은 보통사냥군 같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사상가나 인테리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산전막주인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진짜사냥군인가 가짜사냥군인가 하는것은 래일 사냥경기를 해서 시험쳐보는게 어떤가고 하였습니다. 왕서장은 그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산전막주인이 경기에서 이기자 왕서장은 술을 냈습니다. 산전막에서는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왕서장은 주인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하였습니다. 산전막주인은 내가 당신네 쟈잘리에 들어가면 당신의 형이 되여야 하겠는데 그건 좀 연구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분서장이라는 무거운 벼슬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자주 분서를 떠나 사냥까지 할수 있는 여가를 내는가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왕서장은 시간이 많아서 사냥터에 나오는것이 아니라 속이 타서 나온다, 저 왜놈들이 못된 종자들이다, 죽을 자리에는 만주경찰을 세우고 같은 별을 달고도 만주경찰한테는 걸핏하면 호령과 욕설질이다, 분통이 터져서 못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산전막주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7련대 정치위원은 그에게 가가영일대에서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꾸릴 임무를 주고 당면하게는 왕서장을 만날수 있게 교섭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산전막주인은 왕서장을 데리고 정치위원이 지정해준 접선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왕서장도 왕촌장처럼 술과 안주를 준비해가지고왔습니다. 술은 만주국관리들의 중요한 교제수단이였습니다.

왕서장은 왕촌장보다 몸도 우람지고 성격이 우락부락했지만 결심이 빠른 사람이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재는것이 별로 없고 대답도 명확했습니다.

7련대 정치위원은 왕서장과 첫인사를 할 때 자기가 김일성부대의 한 정치위원이라는것을 드러내놓고 밝히였습니다. 김사령의 령을 받고 공동항일을 의논하자고 당신을 불렀는데 당신은 우리와 손을 잡을 의향이 있는가고 직방치기로 물었습니다.

왕서장은 처음에 놀라서 눈살이 꼿꼿해졌으나 인차 몸가짐을 바로하고 아, 만나자마자 뭘 그러는가, 술이나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술이 몇잔 들어가게 되자 정치위원의 무릎을 탁 치면서 《유격대정치위원이 키는 작지만 마음에 드오. 칼찬 사람앞에서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신분을 소개하다니 참 놀랍소.》하고 감탄했습니다.

정치위원은 《김일성사령관의 부하들은 다 그렇소.》하고 말했습니다.

왕서장은 정치위원의 귀에 대고 김사령을 만나게 해달라, 김사령만 만나게 해주면 내 그분앞에서 결심을 말하겠다, 그러되 당신이 쟈잘리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당신을 완전히 신임할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날 담판을 통해 왕서장은 산전막주인도 정치위원과 같은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는 산전막주인이 쟈잘리에 들어 자기하고 한형제가 된 다음에도 공산당원이라는 말을 한번도 안했는데 쟈잘리의 비밀이 제일인줄 알았더니 공산주의자들의 비밀이 최고이구만 하고 탄복했습니다.

나는 7련대 정치위원에게 쟈잘리에 들었다고 하여 성이 바뀌는것도 아닌데 의형제를 맺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서장을 사령부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후 나는 가가영부근에서 왕서장을 만났습니다. 만나고보니 역시 왕촌장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나한테 올 때 선물이라고 하면서 산삼 세뿌리를 가져왔던 생각이 납니다.

왕서장은 공동항일을 하자는 나의 제의에 인차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그는 언행이 아주 활달했습니다. 나는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수없이 경찰이 된 사람이지 공산당을 반대하자고 경찰모자를 쓴 사람이 아니다, 일본사람들이 하는짓을 보면 총을 벗어던지고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난다, 김사령이 손을 잡고 공동항일을 하자고 하는데 반대가 없다, 김사령이 분서장벼슬을 버리지 말고 항일을 하라고 하니 령대로 하기는 하겠다, 그런데 내가 경찰복을 그냥 입고있으면 유격대원모두가 김사령처럼 나를 대해주겠는가, 량쪽 총알에 맞아죽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고있는바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왕서장에게 그건 념려말라, 당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게 되면 세상이 다 알아본다, 우리 혁명군은 비록 적기관에 가담한 사람들일지라도 항일을 하는 사람들은 해치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담보한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해줄 일이란 다른것이 아니다,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것이다, 방해하지 않으면 그것도 항일로 된다, 때때로 정보를 보내주고 산전막주인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잘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왕서장은 그후 우리를 잘 도와주었습니다. 산전막주인은 그의 우산밑에서 가가영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을 내왔습니다.

우리는 왕촌장과 왕서장의 도움으로 쓸모있는 정보를 많이 받았습니다. 대황구자위단은 우리 부대 동무들을 만나면 손수건을 흔들면서 환영까지 하였습니다.

왕촌장과 왕서장에 대한 공작과정은 인간을 개조하는데서 우리가 쌓은 또하나의 체험이였습니다.

세상만물은 무엇이든지 다 개조할수 있다는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하고 인간을 개조하는데서 제일 힘든것은 인간개조입니다. 그러나 품을 들이면 다 개조할수 있는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볼 때 아름다운것과 고상한것, 정의로운것을 지향합니다. 그러기때문에 사상교양을 잘하면 누구나 다 개조할수 있습니다. 인간개조라는것은 본질에 있어서 사상개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것은 간판이나 복장을 보고 사람의 사상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달리말하여 사람의 신분이나 직급을 보고 사상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물론 지주, 자본가들에게 착취계급의 사상이 있고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들에게 로동계급의 혁명사상이 있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홍종우와 같이 경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크고작건간에 량심이 있고 진보적인 사상이 있을수 있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진보적인 사상이란 다른것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인민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량심도 결국은 이런 사랑속에서 표현됩니다.

우리는 인간을 개조하는데서 간판뿐아니라 국적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량심을 가진 사람이고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면 중국사람들과도 서슴없이 손을 잡았고 중국인적기관복무자들까지도 대담하게 포섭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조선인적기관복무자들을 교양개조할수 있는 힘이 있고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곧 중국인적기관복무자들도 개조할수 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교양개조하는 원리는 국적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조선인경찰을 혁명의 편에 돌려세우면서 중국인 경찰이나 촌장이라고 하여 혁명의 편에 돌려세우지 못하겠습니까.

항일혁명당시 우리와 손을 잡은 중국의 벗들가운데는 위만군의 고위장교들과 중하층장교들도 있었습니다. 왕촌장이나 왕서장처럼 그들도 우리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조국통일을 눈앞에 두고있습니다. 남조선에는 우리와 리념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습니다. 지주, 자본가를 비롯한 착취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관리, 기업가, 상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통일이 되면 어차피 이 각이한 계층들과 한강토에서 살아야 합니다. 리념이 다르다고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제껴버리고 공산주의자들끼리만 살수야 없지 않습니까.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통일조국을 건설해나갈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그 공통분모를 애국, 애족, 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 애족, 애민의 사상을 가지고있는 사람들과는 얼마든지 한공기를 마시며 살아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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